소설리스트

리턴 서바이벌-147화 (147/176)

<147화>

* * *

2019. 9.

뉴질랜드. 오클랜드.

쨍그랑!-

건물 1층의 창문이 깨지고 한 여성이 안으로 진입했다. 안에서 담배를 물고 있던 서양인 사내들이 화들짝 놀라 손을 총기에 갖다 대기 직전 여인의 총구에서 사정없이 불이 뿜어져 나갔다.

바닥을 기어 다니던 사람이 부들거리며 총을 집으려 했지만, 어느새 나타난 검은 생명체가 놈의 손을 물어뜯었다. 새빨간 선혈이 튀어 오르고 사내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흑구, 그만.”

월!

한 마디 내뱉자 흑구라고 불린 사냥개는 사내의 손을 놓았지만, 그의 손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뒤였다. 그녀는 복도 쪽 출입문을 열고 다른 적들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사이 뒤이어 그녀의 조원들 세 명이 뒤늦게 들어왔다.

“세리야, 어후, 같이 좀 가자니까.”

세리는 정은, 지원, 에디를 향해 씩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서두르지 않으면 다른 방향의 속도를 못 맞춘다고. 다른 조 사람들이 얼마나 괴물인지 알잖아? 흑구야. 가자.”

그녀는 말을 꺼냄과 동시에 흑구의 이름을 불렀고, 흑구가 월월! 짖으며 생존자를 찾아 내달렸다. 세리의 몸이 순식간의 그 뒤를 쫓았다.

세 사람은 지치지도 않는 두 생물체의 모습에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세리는 단단한 철문 앞에 섰다. 오클랜드 서구의 한 기업 건물. 이곳에 온 이유는 서구 마지막 저항세력을 싹쓸이하고, 포획된 생존자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생존자들을 꼭 산 채로 구출해야 한다는 번거로운 미션을 받았지만,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세리가 철문에 귀를 갖다 댔다. 밖의 소란을 깨달았는지 안쪽에서 고성이 들렸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진다. 세리가 몸을 낮췄다.

덜컹, 문이 열리자마자 세리의 길쭉한 다리가 사내의 하단을 후려쳤고 사내가 휘청하는 사이 그의 손을 뒤로 꺾으며 권총을 턱밑으로 갖다 댔다.

“Hello?”

그녀는 빙긋 웃으며 붙잡힌 사내에게 인사했다.

“얘네가 서구의 마지막 생존자가 맞나.”

혼잣말이었다. 영어는 그녀의 전문이 아니었고, 그들은 알아듣지 못할 테니까. 붙잡힌 사내의 앞쪽에는 묶인 채 벌벌 떨고 있는 흰 가운의 생존자들이 있었다. 그중 동양인으로 보이는 한 생존자에게 말을 걸었다.

“거기, 아저씨. 한국말 할 줄 알아요? 아 유 코리언?”

지목당한 사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녀의 손에 붙잡혀 있던 사내가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You are the Navy Asian monkeys, aren't you? (네놈들이 그 해군 동양인 원숭이들이냐?)”

“다른 부분은 모르겠는데, 몽키 하나만큼은 정확하게 알겠네.”

세리는 다른 적이 없다는 걸 확신하고선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세리의 손에 잡혀 있던 사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읍읍!-

재갈 물린 사내들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발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세리는 땀을 삐질 흘리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 그러니까…… 아 유 오케이?”

“Are you a rescue party? or … are you ‘the Asian’? (구조대이신가요? 아니면… ‘그 동양인’이신가요?)”

세리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뭐라 뭐라 씨부렁거리는 것 같긴 한데,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역시, 스위퍼 오빠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구나. 세리는 그저 짧은 영어를 중얼거리며 환하게 웃어줄 뿐이었다.

* * *

서구의 저항세력들을 정리하고 생존자를 구출한 캠프 요한의 전투원들은 오클랜드 항구로 향했다. 항구에 도착하자 헬기가 날아와 그들을 태웠다.

헬기가 향한 곳은, 오클랜드 바로 지척에 있는 인공 섬이었다.

마치, 한국의 세빛둥둥섬을 연상시키는 듯한 바다 위의 인공섬.

요한 일행이 거점으로 잡은 장소였다.

인공섬에 도착한 생존자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공포에 몸을 떨었다.

그들의 기세는 폭력적이지는 않았으나 위압적이었다.

입구에 검문소처럼 비닐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소독을 위한 시설인 듯 보였다.

그들이 도착하자 한 사람이 다가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살집이 통통하게 오른 백인 남성이었다.

“For the man, go to the left room and the woman to the right. Go in and take off your clothes. After disinfection, get the new clothes that are supplied. (남자분은, 왼쪽 방으로, 여자분은 오른쪽 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들어가셔서 옷을 벗으시고 소독이 끝난 후에 지급되는 새 옷을 받으세요.)”

HW 사의 수석연구원, 잭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들은 명성이 자자한 동양인 해군들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해군 함정을 이끌고 오클랜드를 장악한 괴물 동양인들이라는 표현이 맞으리라.

처음에는 미군의 구조대인 줄 알았으나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침략자에 가까웠다.

어느 날 갑자기 혜성같이 등장해서는 좀비들을 소탕하기 시작했고, 이내 등장한 변종들까지 몇 번이고 쓰러트렸다.

그리고 조금 살 만한 지역이 되자, 이번에는 무장단체들을 협살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저항하면 무조건 죽이는 이들의 잔혹함은 오클랜드 전역의 생존자들에게 퍼져나갔다.

그 소식은 잭에게도 들렸었다.

결국, 생존하고 있던 여러 조직이 무너졌고 그들은 떡하니 오클랜드의 명물 인공섬에 자리를 잡고 생존자들을 솎아내기 시작했다.

특히나 해안가에서 군함으로 빌딩 하나를 날려버렸던 사건은, 근처 생존자들을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일화였다.

8개월.

침략자들이 오클랜드의 주인이 되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연구원들은 거의 끌려가다시피 어디론가 이동되어 졌고, 마침내 유리 창문 너머로 오클랜드 해변이 탁 보이는 한 다이닝룸으로 안내되었다.

그 시선의 끝에는 등 뒤로 햇살을 맞으며 식사를 하고 있는 동양인 해군단의 영 보스가 있었다.

잭은 침을 꿀꺽 삼키며 영 보스에게 다가갔다.

그의 옆에는 스위퍼(Sweeper)라고 불리는 전사 한 명과 마른 체구의 서기관 한 명이 서 있었다. 잭은 그 별명이 그들의 악명에 참 잘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생각했다.

“스위퍼, 통역 부탁해.”

“라져.”

요한이 말을 하자 스위퍼가 곧바로 통역했다.

“Who is the representative? (대표가 누구입니까?)”

요한이 묻고 스위퍼가 통역하자 동양계 인물로 보이는 한 사내가 손을 들었다. 요한은 사내를 향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I'm John (요한입니다.)”

잭은 엉겁결에 두 손으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I'm Jack Lee. (잭 리입니다.)”

“You look Asian, but you must be the New Zealander. I heard that you were the researcher who studied this situation. Is that right? (동양인으로 보이는데, 뉴질랜드인이신가 봅니다. 이 사태를 연구했던 연구소의 연구원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Yes, but I'm not from New Zealand. We're American. (예. 그러나 저는 뉴질랜드인이 아닙니다. 저희는 미국인입니다.)”

“…I'd like to hear the results of your research. (흠, 연구 결과를 듣고 싶습니다만.)”

연구 결과라는 표현에 잭이 당혹감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말을 머뭇거리자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Please speak freely.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To my shame, there was no achievement to call the results of the study. But there's one thing we're sure about. (연구 결과라고 할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부끄럽게도. 하지만 저희가 한 가지 확신한 것은 있습니다.)”

“Go ahead. (계속하시죠.)”

“We studied how human bodies become zombies through a group of experimental subjects undergoing zombie process and completing the course. …The most common hypothesis was the ‘virus’. (저희는 좀비화가 진행되고 있는 실험체, 좀비화가 완료된 실험체를 모두 확보해 인간의 신체가 좀비가 되는 과정을 연구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가설은 ‘바이러스’였지요.)”

바이러스가 좀비 사태의 원흉일 거라는 추측은 그의 말대로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But it wasn't.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

“No other biological symptoms were found besides congestion and fever. A live zombie or a dead zombie. The living and the dead. It was nothing more or less. (충혈, 발열 이외에 다른 생물학적 증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야깁니다. 살아있는 좀비든, 죽은 좀비든. 산 사람과 죽은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Zombies that ended their biometric activity were just like dead bodies. From brain activity to metabolism, everything was dead. (생체활동이 종료된 좀비는 시체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신진대사를 포함해서 뇌 활동까지 모든 것이 죽은 그대로였어요.)”

“So how could they move, react, attack people? (그럼 대체, 놈들은 어떻게 움직이고, 반응하고, 사람을 공격할 수 있었습니까?)”

“And What our lab has concluded is, this is not science. It's a miracle that there are zombies in itself. Unknown force makes the dead body move and prevent their corruption. Scientifically unexplainable, to put it more simply, It is an obvious curse. There's no other way to describe zombies. (우리 연구소가 내린 결론은, ‘이건 과학이 아니다.’였어요. 좀비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적인 일입니다. 미지의 힘이 시체를 움직이고 그것들의 부패를 막습니다. 과학적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굳이 표현하자면 저주. 그 말밖에는 표현할 수 있는 길이 없었어요.)”

요한의 옆에서 듣고 있던 재호의 안색이 흙빛이 됐다. 요한은 그를 힐끔 바라보고선 연구원들을 향해 질문을 이어나갔다.

변종을 연구한 적이 있는지, 샘플을 구해다 주면 연구해 볼 생각이 있는지 등등을 물어본 뒤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들의 합류를 승인했다.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연구원들은 캠프 요한으로 합류해서 연구를 이어나갈 것이었다.

여전히 재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모든 대화를 받아적었다.

“오빠!”

그때, 세리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지혜가, 진통이 시작됐어.”

요한과 사람들이 허겁지겁 분만실로 뛰어들어 갔다. 몸을 깨끗하게 소독하고 수술실 복장으로 갈아입은 요한은 분만실 안으로 들어갔다.

분만실 안에는 창백한 표정으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지혜가 있었다.

산통이 시작되었고 그들이 겪는 첫 출산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요한은 그녀의 손을 한번 꼭 잡아주고선 분만실 밖으로 나와 순산을 기다렸다.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계속해서 간헐적으로 들리는 비명은 기다리는 동료들의 귀를 후벼 파고 심장을 찢어놓았다.

“아악! 아아악!”

그녀의 비명을 온몸으로 받으며 동료들은 그저 힘내라는 기도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꼭 이겨내야 한다는 바람과 희망뿐.

요한은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근방의 모든 좀비와 변종들을 잡아 죽였고, 모든 생존자를 규합해 좀비 웨이브가 일어나지 않도록 죽이거나 떠나보냈다.

안전한 시설과 살균실까지. 모두 오늘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아아아악!-”

비명이 선연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분만실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출산을 보조하던 박재범 의사가 분만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아이는요?”

“아이는 건강해요. 요한 군.”

요한이 첫 번째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혜는요?”

“지혜도 무사합니다. 하지만 출혈이 생각보다 많았어요.”

“그렇습니까… 일단 아이는 몸을 깨끗하게 소독해 주시고, 지혜를 좀 만나봐도 괜찮나요.”

박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이 분만실 안으로 들어와 창백한 안색의 지혜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녀는 간신히 의식의 끈을 붙잡고 있는 듯, 힘겨운 안색이었다.

“오빠…….”

“어, 지혜야. 고생했다.”

“아이는요?”

“건강해.”

그제야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서 희미한 웃음기가 감돌았다.

“몸은 좀 어때?”

“감각이 없고, 아프고, 몸이 뜨거워요.”

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얼굴에 가득한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그러다, 그의 손짓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눈동자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빌어먹을 감염이 시작되고 있었다.

“몸이 너무 뜨거워요. 저, 감염되는 걸까요? 내 아이, 남겨두고 가면… 안 되는데.”

“아니. 감염 증상은 아니야. 충혈도 없고 다른 감염 증상도 없어. 박 선생께서는 출산 후유증이라고 하니까, 걱정하지 마. 오빠가 이 근처 변종들 싹 다 잡아 죽인 거 잊었어?”

“안 잊었어요. 고마워요.”

“고생해서 그래. 잠시 쉬었다가 일어나면 돼. 한숨 자.”

“알겠어요, 그럼…….”

지혜는 창백하지만,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그리고, 점점 숨결이 옅어지더니, 끝내 다시 깨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요한은 그녀의 숨이 끊어지고 심장이 멈춘 것을 확인한 후 천천히 그녀의 뇌를 찔렀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요한은 분만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살균실 앞에는 어미를 찾는 갓난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노아가 있었다.

아직도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노아. 아이의 후원자를 자청하고, 혹시라도 지혜가 출산 중 잘못된다면 본인이 이 아이를 책임지고 싶다 했던 그였다.

“지혜는 죽었어.”

“…유감이군.”

“약속대로, 네가 책임져라.”

“고마워.”

“아이의 이름은…”

‘아담. 손 아담으로 지을 거예요. 여자애면 하와. 아니다, 이브가 나으려나?’

‘엄마의 성을 가졌네.’

‘그럼요, 내 자식인데 내 성을 줘야죠.’

“아담. 손 아담.”

어린 생명을 바라보는 노아의 얼굴이 경건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요한은 의료캠프를 빠져나와 본인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탈력감이 온몸을 휩싸았지만, 공교롭게도 오랜 전우의 죽음을 목도한 순간, 또다시 생에 대한 의지가 불타올랐다.

여전히, 우리는 살아남는 중이라고.

눈앞에 통유리를 통해 펼쳐진 뉴질랜드 해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눈부시게 빛나는 명관이었다.

요한은 담배 한 대를 꼬나물었다. 매캐한 연기가 공간을 채워나갔다.

종말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고,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새벽을 삼켜도 태양은 오듯이,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고 있었다.

Side Story. Ending Credit.

그곳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의 일부였다. 마치 우주의 일부 같기도, 그저 검은 방 같기도 한 공간.

[타임아웃입니다.]

기계음처럼 괴이쩍은 목소리와 함께 뎅뎅 울리는 타종 소리가 공간을 두드렸다.

공간 안은 마치 카지노를 연상하듯 커다란 원형 테이블 주변으로 수많은 존재가 새카맣게 몰려 있었고 그들의 앞에는 VR 같은 입체 영상이 실시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안에는, 종말을 맞이한 지 3년째가 된 지구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딜러, 끝났으면 정산해줘.]

누군가의 요청에 딜러가 방긋 웃으며 허공에서 손을 몇 번 뒤집자 동그란 칩들이 사라졌다가 각자 주인을 찾아갔다.

몇몇 사람들은 환호하기도, 몇몇 사람들은 좌절하는 듯하기도 했다. 각자 제 눈앞에 홀로그램 같은 수정구가 둥둥 떠 있었다.

존재는 기이했다. 사람 모습을 하기도 아니면 괴물 같기도 한 모습들. 그들의 입에서는 하나같이 특이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아시아계가 떡상이네.]

[딜러, 최종 판정을.]

여기저기서 보채는 듯한 음성들이 들려오고 딜러는 손을 휘휘 적으며 눈앞의 화면들을 스르륵 넘기고선 읊조렸다.

[총원 1만 3천 1백 2십 3명입니다.]

그리고 사진들이 주르륵 나열되며 그 옆에 무슨 점수 같은 것들이 기록됐다.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여성 인격체가 한 사람의 사진 앞에서 홀로그램을 멈췄다.

그녀가 배팅했던 요한의 사진이었다. 18,647 패스(Path). 최고점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너무 어려웠어!]

누군가가 볼멘소리하자 딜러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지난 회차의 게임이 너무 쉬어서 배당률이 낮아진 걸 아쉬워 한 건 여러분이 아닌가요. 그래서 사도의 수도 더 많이 풀고 새로운 규정도 많이 추가하지 않았습니까.]

딜러의 움직임에 홀로그램 화면들이 휙휙 돌아갔다.

[오히려 지난 회차 우승자들의 특전이 너무 과했다는 이야기도 있는 걸요.]

[확실히 그건 좀.]

[게임이 안 됐지.]

[밸런스가 안 맞아.]

[그래서 앞으로 ‘면역’에 대한 특전은 없애는 게 좋겠다는 결론입니다. 게다가 이번 게임처럼 특정 경주인들에게 배팅과 권능들이 몰릴 땐 게임이 너무 쉬워지니까, 한 명의 경주인에 여러 참여자가 몰릴 땐 많은 양의 패스를 배팅하는 분께 우선권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딜러의 말에 스텔라의 옆에 있던 인격체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과거의 기억을 관장하는 존재와 찰나의 시간을 관장하는 존재가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이번에 둘 다 스텔라와 같은 경주인에게 배팅했던 존재들이었다.

[다음 게임에도 똑같은 인간에게 배팅할 생각이야? 스텔라.]

[…….]

그녀는 말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녀가 가진 모든 패스가 허공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올-인이었다. 절대로 자신의 배팅에 숟가락을 얹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결연한 각오가 엿보였다.

[안 뺏어가. 안 뺏는다고. 이번에도 한 사람에게 올인 배팅이라니. 너도 참 별종이다.]

스텔라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의 존재들이 혀를 내둘렀다. 벌써 8회차. 어쨌든 유희 거리인 만큼 다양한 경주인들에게 걸어보는 것이 재미인데, 그녀는 유독 한 사람에게 과할 정도의 집착을 보냈다.

[뭐, 아무렴 어때.]

[나는 이번에 버스 탔어.]

[나도.]

지구에서 하도 많은 게임을 해서인지 특유의 은어들까지 자유롭게 구사하는 꼴이 우스웠다.

신체의 힘을 관장하는 존재와 꿈을 관장하는 존재가 웅성거리듯 말했다.

그들은 각자 다른 경주인에게 배팅했지만, 경주인들끼리 그룹을 이룬 덕분에 모두 게임에서 승리한 존재들이었다.

물론, 흔히 말하는 경주인들끼리의 교통사고도 빈번했다.

대부분 스텔라의 경주인이 다른 경주인들을 박살 내면서 단방향의 결말을 맞이했지만.

그때 딜러의 타종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다음 게임 세팅합니다. 다들 배팅 준비하세요.]

여기저기서 촤르륵, 하면서 홀로그램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스텔라는 더 넘길 것도 없었다. 즐겨찾기처럼 허공을 한번 누르자 한 명의 얼굴이 들어왔다. 여태까지도, 지금도, 앞으로도 경주인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스텔라가 손짓하자 수정구 하나가 두둥실 떠올랐다. 이전 게임이 진행되었던 세계. 그녀는 마치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천천히 수정구를 감싸 쥔 뒤 옆에 있던 보석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4개의 같은 모양의 수정구가 있었다.

그 안에는 여덟 번의 게임에서 네 번을 승리한 KOR-1,912,042번 경주인. 요한의 다른 게임 결과물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 안에서 요한은 여전히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게임이 끝나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진적으로 감염의 속도도 더뎌지며, 시체는 썩기 시작하고 더 이상의 사도도 나타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종말의 종식.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특히나 스텔라는 2회차 게임의 결말을 좋아했다. 꿈을 관장하는 존재가 매번 배팅하는 경주인 리나와 우연히 만나 마지막까지 살아남고 결국 혼인하여 자녀까지 키우는, 전형적인 해피엔딩이었으니까. 물론, 동료들과 거대한 왕국을 건설해서 왕처럼 군림하는 지금의 엔딩도, 상당히 흡족했다.

[이번에는 룰을 조금 바꿔보려고 합니다.]

딜러의 말이 이어지자 스텔라가 탁, 보석함을 닫았다.

[제가 조금 더 개입해볼까 하는데요. 역시 사도와의 싸움보다는 경주인들끼리의 전투가 더 볼만하셨다는 의견이 많아서요.]

[오오!]

[순도 100%의 배틀로얄로 한번 가볼까 합니다. 룰은 B-147차원의 경주인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게 만드는 게임입니다. 만 명이 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이게 만드는 방식은 어떨까요?]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렷다. 폭력성을 관장하는 존재와 선정성을 관장하는 존재 등, 유난을 떠는 존재들도, 인상을 가볍게 찡그리는 존재도 있었다.

하지만 공통으로 그들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자, 그럼. 게임을 시작해 볼까요?]

딜러가 환하게 웃었다. 그의 손짓에 마술처럼 반짝거리는 가루들이 휘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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