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화 (1/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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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아이린 유리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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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남들에게 말하기에 꽤나 부끄러운 취미였다.

간혹 친구에게 로판 본다라는 얘기를 할 때면 뭐 그런 걸 보냐는 대답이 돌아왔고,

그렇다고 여자와 공감대를 형성하기엔, 내 주변에 여자가 없었다.

“음."

로맨스 판타지의 매력이란, 일반적인 판타지와는 달리 로맨스가 주가 된다는 점이었다.

보통 여자 주인공이 대부분인 소설이었고, 주인공들은 연애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오히려 생존과 부에 더 관심이 많은 특이한 여성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여자 주인공의 특이함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 남자 주인공들이 아니던가.

내가 로맨스 판타지에서 매력을 느끼는 점이란, 일반적인 남성향에서 느낄 수 없는 분위기였다.

여자 주인공이 어떤 가련한 과거를 지니고,

남들과는 다른 그 여자 주인공에 매력을 느껴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건 꽤나 지켜보기 즐거운 이야기 였으니까.

그리고 가장 큰 매력을 느끼는 점. 그건 바로 로맨스 판타지에 등장하는 악역이라 할 수 있었다.

예전처럼 단지 주인공이 싫어서, 단지 주인공이 미워서 싫어하는 것이 아닌.

어쩌면 이레귤러라 할 수 있는 주인공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고, 그 자리를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악역들이란 내게 큰 재미로 다가왔다.

지금 내 감정이 이리 격해진 것도 아마 그 탓이 아닐까.

[장미 가시의 그대]에 등장하는 악녀 아이린 유리스,

그녀가 결국 여자 주인공과 황태자에게 당해 죽는 장면을 읽으며 드는 생각이란그녀가 불쌍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린 나이부터 엄한 아버지에게 길러진 탓에 가슴 속에 상처만 입은 그녀,

그런 그녀에게 봄날이 오나 싶었지만. 갑작스레 등장한 주인공덕에 가문이 무너지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사교회에 등장한 버릇없는 영애를 훈계했다는 이유로 황태자의 눈에서 멀어지고,

황태자의 눈에서 멀어지자 자연스레 귀족들과의 관계도 끊어졌다.

그녀와 어릴 적 결혼을 약속했던 공작가의 장남도, 그녀와 절친했던 영애들도전부 사라졌다.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 한 번도 풀어내지 못했던 감정은 결국 이어지는 사건 끝에 터지고야 말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녀의 관계, 결국 잃을 것이 없던 그녀가 선택한 것은 주인공에게 맞서는 것이었고.

그것을 반역이라 해석한 황태자에 의해 목이 잘리는너무도 참혹한 운명을 그녀는 결국 맞이했다.

주인공의 입장에서야 악녀였지만, 책을 읽는 제3자인 내 입장에서 아이린은 악녀가 아니었다.

다만 누구보다도 애정을 바랐고, 그 누구보다도 사랑을 원했던 그런 가련한 여자가 아니던가.

“...슬프네.”

아무도 그녀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째선지 내게는 꽤나 슬프게 느껴졌다.

심지어 댓글창 마저도 사이다라며 그녀의 죽음을 축복하고 있지 않은가.

그 것이 꼭 지금의 내 처지인 것만 같아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문득 눈꺼풀이 무겁다 느껴져졸린 눈을 비비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아까 그 장면이 자꾸만 생각나 가슴이 답답했다.

그녀는 과연 죽을 수밖에 없던 걸까. 악역이란 죽으면 잊힌다.

설령 악역이 죽을 때 아무리 뉘우친다 한들, 결국 주인공을 띄워주기 위한 하나의 소모품일 뿐이었으니.

그러니 앞으로 그녀가 다시 등장하는 일은 없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괜스레 입맛이 쓰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친구 하나 없이 엄격한 교육 아래 자랐던 그녀가 아니라면 달랐을까.

그녀가 할 행동을 막아서고, 그녀에게 떨어질 관계를 다시 붙잡아줄 사람이 있었다면 달랐을까.

아이린 유리스.

잠이 드는 그 와중에도 맴도는 그 이름에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차피 소설이지 않은가. 이제 그만 잊어도 될 텐데.

“...후우.”

어째선지 머릿속 한 가운데 웅크려 잠을 괴롭히는 그 존재에, 그날 밤은 유난히도 어둠이 길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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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잠들었나. 치켜뜬 눈가로 들어오는 것은 환한 빛이었다.

반지하 방에 들어오는 빛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이나 밝은 빛.

한여름이었으니 햇빛이 밝은 것은 이해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밝은 것은 조금 너무하지 않은가.

이불로 얼굴을 가리려 당기자,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장에서 팔던 만 원짜리 거친 솜이불의 감촉대신 느껴지는 것은 단숨에 부드럽다는 것이 느껴지는, 꽤나 고급진 천의 감촉이었으니.

몸을 뉘이고 있는 침대 또한 예전과 다르다는 사실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론가 옮겨진 걸까.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일으키자, 눈높이 또한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다.

단순히 침대의 고저가 바뀌었기에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이건 마치, 몸이 뒤바뀐 것 같지 않은가.

졸음으로 몽롱했던 정신이 단박에 쨍하고 깨어났다.

그제야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전과는 달리 완전한 순백색을 띄고 있는 침대와 이불이었으니.

순간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시야가 어지러웠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몸을 일으켰음에도 단번에 낮아진 시야는 내 키가 작아졌음을 알려줬다.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한 올 뜯은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머리카락을 바라봤다.

금색이라니, 내 머리카락 색은 이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다행히도, 무수히 많은 소설을 읽은 경험 탓에 조금이나마 이 상황에 대한 가설을 세워볼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나 같은 사람을 납치할 리가 없었으니 그건 기각. 머리카락 색도, 키도 변해버린 이 상황은.

아마도 빙의가 아닐까.

우스운 생각일 수도 있었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 중에 떠올린 것이 고작해야 빙의라니.

그런 허무맹랑한 가설을 세웠다는 사실이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것 말곤 없었다.

다만 궁금한 점은, 내가 어떤 세상 속에 들어왔냐는 건데.

내 심경은 그야말로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악플을 달았다가 작가에게 밉보인 적도 없었고, 차에 치여 죽은 적도, 전개가 불만스러워 5700자를 적은 적도 없었다.

애초에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도 분간하기 힘들었으니까.

창문 새로 쨍하고 비추는 태양빛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이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곳에 쌓여있는 낡은 목검들.

쪼개지고, 부서지고, 그나마 성한 목검은 곳곳이 약간 부서져 있거나 흠집이 가득한 것이 아무래도 훈련을 꽤나 열심히 한 사람의 것인 것처럼 보였다.

“아마 이 몸의 주인 것이겠지.”

손에 빈틈없이 박혀있는 굳은살을 바라보던 내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평생 몸을 써본 적이라곤 체육대회때 계주 정도였는데. 검을 쓰는 사람 몸에 들어오다니.

혹여 내 머릿속에 남겨진 기억이 있을까 곰곰이 떠올려봤지만,

내가 원래 기억하던 것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 방을 둘러보며 알 수 있는 거라곤 딱 두 가지인 것 같았다.

아까 알아낸 검을 쓴다는 것을 제외하고,

이 몸의 주인 신분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과 아마도...내가 들어온 이 세상이, 잠들기 전 마지막에 읽었던 [장미 가시의 그대] 속 세상이라는 것.

눈을 잠깐 지긋이 감았다가, 이내 뜨며 다시 방문 앞에 그려진 문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이가 없어서도, 이 상황이 그저 웃겨서도 맞았지만.

내가 있는 이 장소를 깨달은 순간 떠오른 생각에 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

어떻게 내가 저 문양을 잊겠는가. 이 제국을 수호한다는 목적을 지닌 5대 공작가,

그 중 방패를 담당하여 가시 달린 방패를 문양으로 삼는 공작가인 유리스 공작가를. 내가 어떻게 모르겠는가.

아이린 유리스.

한낱 소설의 악녀일 뿐이었던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며 밤을 지새웠던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자 괜스레 눈가가 시큰해졌다.

“어쩌면.”

내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지금 시간대가 어떤지도 모르고, 아이린 유리스와 내가 어떻게 만나게 될 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녀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일 수도 있었다. 지금 내가 어떤 신분인지도 정확히 모르지 않는가.

단순히 귀족가의 검투 경기를 위해 키워지는 노예일 수도 있었으니, 섣부른 기대는 되려 화를 부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짝­

뺨을 양 손으로 치자 조금이나마 가슴이 진정되는 것 같아조용히 방문을 응시하며 숨을 골랐다.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수는 없을 터. 이제는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자,

벌컥­

예고 없이 열린 문에 순간 몸이 흠칫 굳었다.

낮아진 고개를 들자 보인 것은 꽤나 험상궂게 생긴 남자.

치렁치렁한 갑주를 걸친 그는 언뜻 봐도 실력있는 기사처럼 보였기에, 나는 군대에 있을 적 경험을 살려 척, 하고 그 자리에 자세를 잡았다.

잠시 서있는 나를 바라보던 남자는 이내 입을 열었다.

“거기 멍하니 서서 뭐하는 건가. 아가씨가 부르신다.”

“...넵!”

순간 아가씨라는 말에 멈칫했지만, 무언가를 더 물어볼 상황이 아니었기에 기사처럼 보이는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키 차이가 꽤 나지 않은가. 도대체 나는 몇 살의 몸이 된 거지?

그런 의문은 투명한 유리에 비춰진 모습에 이내 해결되었다.언뜻 봐도 15살, 아마 그 정도가 아닐까.

키는 작아진 눈높이에 비교해봤을 때 한 170은 되는 것 같았으니, 나이에 비해 오히려 큰 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이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자 잇따라 이어진 궁금증은 아가씨라는 말이었다. 아가씨가 나를 부른다, 라.

내 역할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직접 부를까.

최소한 노예는 아닌 것 같은 것이, 지나갈 때 간혹 마주치는 시녀들이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었으니까.

공작가의 저택인 만큼 시녀 또한 귀족이 대다수였다.

이렇게 바닥을 닦고 먼지를 터는 하찮은 일을 하고 있다한들, 그녀들은 남작가나 자작가의 자식들이었으니 아마 천한 신분은 아닌 것 같았다.

“평민은 아닌가 보네.”

아까 방에 있던 검들을 보자면, 기사후보생이 아닐까?

기사후보생이라, 나쁘지 않은 신분이었다.

기사만 되더라도 꽤 값진 대접을 받았으니까. 전쟁에 나갈 수도 있긴 했지만, 나 하나 살고자 한다면 살 수 있을 터였다.

“무얼 그리 생각하느냐, 어서 빨리 들어가도록.”

“아, 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그 아가씨가 있다는 거처에 도착했는지, 기사가 내게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유리스 공작가를 상징하는 방패 문양을 잠시 바라보다가, 숨을 토해내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이제 오는 건가요.”

문을 열고, 채 안이 다 보이기도 전에 고운 미성이 흘러들어왔다.

듣기만하더라도 마음이 편해지는 그 부드러운 음색에 감탄하기도 잠시, 시야에 들어온 한 여성의 모습에 내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긴장이라도 했나요. 그리 굳을 필요는 없는데.”

아니, 긴장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떠오른 이름에 경악했을 뿐.

하늘의 구름의 색을 따온 듯 새하얀 머리카락과, 그 구름 곁에 있을 청아한 하늘을 떠올리게 만드는 푸른 눈,

피에 적셔진 듯 붉은 선홍빛의 입술을 본 순간 떠올린 그 이름에 놀랐을 뿐이었다.

내 앞에 서있는 그 ‘아가씨’라는 사람이.

[장미 가시의 그대]에 나오는 악역이자 악녀, 그녀의 죽음에 내가 그토록 슬퍼했던 아이린 유리스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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