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2화 (2/181)

〈 2화 〉 아이린 유리스(2)

* * *

“이봐, 에반!”

“아.”

눈앞에서 펜을 잡고 있는, 나른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감정 없는 시선에 멍해있기도 잠시.

내게 쏟아지는 호통에 눈을 끔뻑이자 기사가 맘에 들지 않는 듯 사나운 눈빛을 내게 보냈다.

“...죄송합니다.”

여전히 무감한 시선을 보내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자, 기사가 헛기침을 내뱉더니 입을 열었다.

“앞으로 네가 모셔야 할 분이시다. 처음부터 이런 모습을 보여드리다니, 내 부끄럽기 짝이 없군!”

“됐어요. 어차피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 놀라서 그런 걸 수도 있죠.”

괜찮다며 손짓하는 그녀의 몸짓은 품위가 자연스레 흘렀다. 그녀의 나이는 아마 나와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직 앳된 기색이 분명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 동갑이라 보아도 이상하다 할 사람은 없을 터였다.

허나 마치 그런 행동을 타고난 것처럼 행동하는 그녀의 고아한 몸짓에 기사의 눈에 감탄이 일었다.

유리스의 차기 방패께 인사드립니다. 기사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그녀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그 전과 별 다를 바 없는, 여전히 무감하다고 할 수 있는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에 일순간 스쳐지나간 금을 나는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녀가 그런 호칭을 싫어하는 이유, 아마도 그녀의 아버지와 관련 있으리라.

입맛이 쓰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껏해야 지금의 이 몸과 동갑, 아직 어른이라기엔 한참 먼 앳된 소녀와도 다름없는 사람이 짓는 무감한 표정이란.

그녀의 처지를 진심으로 슬퍼했던 나로써는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계속되었던 엄격한 훈육, 그로 인해 으레 다른 아이처럼 칭얼거리지도.

무엇을 사달라 떼 한 번 써본 적 없던 그녀였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일 터.

늘 완벽이란 것을 연기하는 배우인 그녀의 얼굴은 다시 완전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 짙푸른 눈동자가 다시 빛을 찾았을 때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그래서, 그 쪽은 이름이 뭐죠?”

적막을 가르는 목소리가 내게 닿자, 나는 움찔거리며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름? 순간 대답 하지 못할 뻔 했지만, 아까 침대 한켠에 적혀있던 글귀를 떠올린 나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에반 프리드입니다.”

“에반, 그렇군요. 프리드 백작가의 자제였었나요.”

백작가의 자제였나. 하기야, 공작가의 장녀를 모실 이의 신분이지 않은가.

어중이떠중이 보다야 검증된 신분을 지닌 이가 훨씬 낫겠지.

아까 기사가 중얼거렸던 ‘앞으로 모실’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일단 나중에 생각하는 것이 좋을 거란 생각에 자세를 바로 잡았다.

한 편으론 내 출신지나 다름없는 프리드 백작가라는 곳에 관심이 기울었다.

[장미 가시의 그대]에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가문인 것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백작이지만 세력은 한미하지 않을까.

그래도 공작가의 기사후보생이었으니, 나름 실력은 괜찮은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생각을 마친 뒤 잠깐 흐렸던 동공을 또렷이 하자, 이내 푸른 눈동자와 다시금 눈이 마주쳤다.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세기에 한 번 나올 천재라고요.”

“천재라뇨.”

진심으로 처음 듣는 소리였기에 손을 젓자, 나를 응시하던 아이린의 입가가 살짝 움직였다.

수평을 이루던 입가가 위를 향해 그 꼬리를 살랑거리는 모습에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천재라,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지만 그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재능을 지닌 이, 남들이 하는 노력을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더라도 죽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남길만한 위업을 달성할 수 있는 이.

아마도 이 몸은, 그만한 재능을 지니고 있던 걸까.

순간 입 꼬리가 비틀어지려하는 것을 겨우 참아내며 고개를 숙이자, 아이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고저 없던 목소리에 희미한 감정이 뒤섞인 점이 퍽 놀라웠다.

“겸손하군요. 그 나이에 경지에 도달했음에도 오만하지 않은 점이 맘에 들어요.”

“다행입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무엇하느냐, 고개를 숙이지 않고."

허, 터져 나오려는 헛웃음을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

경지라, 비록 로맨스 판타지의 세계관이었기에 무력에 관한 정확한 기준이 나오지는 않았으나 작중에 등장하던 인물들로 그 수준을 가늠하는 것은 가능했다.

가령 황제는 검에서 지고의 경지, 즉 마스터에 도달했으며. 마법에서는 마탑주가 극한의 경지인 9서클에 도달하였다 했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세간에 떠들기를, ‘경지에 올랐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일정 수준 이상에 다다랐을 때나 붙일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아마 검을 쓰는 내 몸은 마스터의 바로 아래 단계.

익스퍼트라는 경지에 몸을 담은 것이겠지. 당황으로 물든 얼굴이 들킬까 일부러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아이린이 나를 부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검에서 천재라 불리는 이, 그런 사람에게 기사가 공작가의 자제를 소개시키며 앞으로 모실 사람이라 소개했다는 것은...

“오늘 이렇게 부른 이유는, 앞으로 제 호위를 맡길 생각이었기 때문이에요.”

사담은 필요 없는지, 곧바로 본론을 꺼내드는 그녀를 보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호위라, 아이린 유리스의 호위기사에 대해 기억해보려 했지만.이내 떠올릴 수 없는 기억이란 생각에 순간 눈이 가늘어졌다.

애초에 그녀는 악역, 그녀의 과거는 아주 짤막하게만 등장했을 뿐이었으니.

그녀가 악녀이며, 어떤 권력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했을 때 잠깐 몇 문단 나온 것이 전부였다.

아이린 유리스의 보모, 시녀, 기사, 가족. 그 모든 것들을 나는 알고 있지 못했다.

그녀는 주인공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다뤄지지 않았다.

폐로 들어오는 숨이 차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빛이 그리 쨍쨍할 만큼이나 더운 날씨였는데도.

가슴 속에 자리 잡은 영문 모를 답답함에 겨우 숨을 토해냈을 때,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물론 당장 호위를 맡으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옆에 있는 크리스 경이 도움을 줄 거니까요.그렇게 경험을 쌓다가, 몇 달 정도 지나면 정식으로 호위가 될 거에요.”

“그렇지만 내가 일선에 나서는 일은 아주 긴박한 상황이 아니면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네 스스로 해결해야 될 것이며, 너의 판단이 곧 소가주님의 목숨을 가를 터이니.”

조심하도록.

폐부를 짓누르는 것만 같은 말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거웠다. 이토록 갑작스럽게 다가온 책임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린 유리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 않았던가.

알고 싶다는 묘한 호기심이 내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처지를 동정하며 흘렸던 잠깐의 눈물, 만약에 그 눈물이 내게 이 위치에 다다르도록 만든 것이라면.

“목숨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전, 아주 잠깐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힘주어 숙인 고개는 무거웠고, 내게 입을 연 그녀의 말은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잘 부탁드려요.”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고개를 숙인 내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

방 밖으로 나가라는 말에 잠시 나가있자, 저 멀리서 한 시녀가 다가와 내게 길쭉한 천 꾸러미를 내밀었다.

진중한 분위기에 그 천 꾸러미를 두 손으로 받아들자, 시녀가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검입니다. 호위 기사이기에 공작님이 친히 하사하는 것이니, 그 감사를 철혈에 바치시기를.”

“알겠습니다.”

철혈은 유리스 공작가의 정신. 제국의 적이 되는 모든것으로부터 수호해야하는 방패였기에, 그 피마저 철과 같아야 한다는 선조의 유언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내 철혈이 너를 거부한다.

주인공을 처음 보았을 때, 아이린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모든 비극의 시작, 주인공에게는 신분을 뒤바꿀 기회의 시작이었지만 말이다.

만약 그녀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처형대에서 비참하게 목을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입에 감도는 쓴맛을 없애고자 입맛을 다시자, 뒤에 있던 문이 벌컥하고 열렸다.

“가죠, 에반.”

“...네.”

순간 눈이 크게 뜨였다가, 이내 원래대로 돌아오며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남들이 입는 드레스와는 달리 장식도 적은 수수한 남색의 드레스였건만, 아이린이 입자 무수히 많은 보석을 새겨 넣은 듯 화려하게 빛이 나는 듯 했다.

옷걸이가 중요하다더니, 진짜였나 보네.

천 꾸러미를 풀러 나온 검을 허리춤에 걸자, 나를 바라보던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잘 어울리네요.”

“감사합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린은, 이내 걸음을 옮기며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단순한 외출이에요. 운이 정말 나쁘지 않은 이상, 특별한 일도 없을 거고요. 그러니까, 실수는 없길 바라요.”

“네.”

간결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척­

그녀의 외출을 확인한 경비대장이 절도 있는 자세로 고개를 숙이자, 그런 것이 익숙한 듯 아이린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발걸음.

공작저라는 것이 단지 허울 뿐은 아니었는지, 저택을 나서자 수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가 보였다.

중세의 거리를 보는 것이 신기한 탓에 시선을 돌릴 뻔 했지만, 이내 내가 호위라는 것을 자각하곤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아까 검을 쥔 순간 깨달았지만, 아무래도 나는 검을 능숙히 다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검 자루를 쥐며 느껴지는 약간의 공명, 몸의 세포 하나하나와 반응하는 그 느낌에 일순간 전율이 이는 그 감각이란.

하지만 그와 별개로, 앞으로의 내 처지에 대해서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이대로 호위 노릇을 하면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건지.

하지만 그마저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이 까마득한 터라, 무엇 하나 섣불리 결정할 수가 없었다.

일단은 호위에 집중해야겠지.

허리춤에 들린 검을 툭툭 건드리며 생각했다.

아직까지 원래 세계로의 귀환을 도울 단서는 하나도 몰랐고, 갑작스레 이런 몸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당분간은 적응하는 것에 시간을 써야하지 않을까.

“......”

그러다가 문득, 아이린이 멈춰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도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은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눈을 돌리자, 그 곳에 보인 것은 수많은 영애들의 모습이었다.

“어머, 이건 분명히­”

“이번에 수도에서 온 디자이너 르브가 만든 브로치죠. 정말 보기만 해도 고급스럽네요.”

“이건 파니아가 만든 사파이어 목걸이에요. 이럴 수가!”

가게에 모여 소란스럽게 떠들며, 진열되어 있는 악세사리에 눈을 빛내는 여인들.

꼭 아이린과 동갑처럼 보이는 영애들의 모습을 그녀는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은 저 영애들과 완전히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붐벼 소란스럽기 그지 없는 거리에 오직 그녀만이 적막했다.

“...가죠.”

스윽, 별 감흥 없다는듯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발걸음을 옮기자 나또한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아까 그 영애들을 바라보던 눈빛이 못내 시선에 걸려서, 어쩐지 발걸음이 질질 끌리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일렁이지 않는 눈동자에 잠시나마 비친 것은, 분명히 동경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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