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드의 마술사 -->
그는 한참동안 그 편지를 끔벅거리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를 번갈아보았다.
“나한테 주는 거야?”
“네.”
그가 꽃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 어, 이거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
“물론, 제가 쓴 건 아니고요.”
“아.”
“내 친구가 당신 팬이에요.”
“너도 내 팬클럽에 환영인데.”
“아뇨. 저는 사양.”
“그래? 그럼 팬클럽 회장시켜줄게.”
“선심이라도 쓰듯 말하지 마요. 어차피 있어봤자 최대가 회원 수 두 명일 텐데.”
“야, 나 인기 많아.”
“맞아요. 그럴 거 같긴 하다.”
그러자 그가 옆에서 낮게 웃었다. 그리고 헝클어졌을 내 머리카락을 한 쪽 어깨에 곱게 넘겨주었다. 내가 또 와인잔을 잡으려 하자 그의 큰 손이 내 손목을 쥐었다.
뭐야, 진짜.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 내 없는 엄마처럼 굴려고 하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뻘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서는 한다는 말이,
“여기, 너무 시끄럽다. 나갈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는 유성우가 쏟아질 것 만 같은 아름다운 밤에, 정원을 같이 걷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대화 화제는, 그의 자켓을 덮느냐 마느냐였다.
아, 물론 당신이 내 번진 화장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면 괜찮다. 나는 그를 기다리게 한 뒤, 화장실에서 대충 수습을 했고, 그는 딱히 내 얼굴에 대해서 신경 쓰고 있지 않는 듯 했다.
“악 됐어요!”
그리고 저 하이톤 목소리가 내 거였다.
“너 떨고 있잖아.”
“그리고 이번에는 당신 애인이라고 소문 쫙 나서 고통 받게요?”
“이번에는?”
내가 그를 바라보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하자면 길어요.”
“뭐, 어쨌든 고집부리지 말고 좀 뭐라도 걸쳐.”
그때 어깨에서 따뜻한 온기가 나를 덮는 게 느껴졌다. 그의 재킷이었다. 나는 부루퉁한 입으로 팔짱을 껴 내 애꿎은 팔만 가만 문질렀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의 재킷을 걸치고 싶지 않은 이유에는 공작이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지금 그를 만나게 되면 조금 상황이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천하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나쁜년이 되는 것이었다. 넌 엔조이였다며 차놓고 바로 그날 당일에 또 잘생긴 남자 하나 꼬셔서 그의 앞에 딱. 아, 그건 좀 싫은…….
취기에 자꾸만 걸음이 꼬였다.
그리고, 세상에. 왜 꼭 ‘설마’ 는 나를 괴롭게 하는지.
“지금 그 여자 데리고 어딜 가는 거지?”
빠른 걸음으로 온 공작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그의 파트너로 보이는 레이디가 있었다.
맙소사.
“웨스트체셔의 군주를 뵙습니다.”
잭 제커시스가 한쪽 팔을 굽혀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 인사를 받는 공작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처음 보는 싸늘함에 나는 시선을 둘 곳을 몰랐다. 하지만 그는 나를 아예 다른 사람 보듯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분노는 오롯이 잭에게로 향했다.
“내가 물었지 않은가. 이 여자 데리고 어디 가냐고.”
물음이 꽤나 위압적이었다. 그리고 그럴 법도 했다. 그는 이 나라에서 몇 없는 공작이었고(세 명 정도 된다) 그 중 왕세자와 비슷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인사였다. 그러니 그는 그가 아는 얼굴 외에는 존대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왕, 왕세자, 왕비. 어쨌던 왕가 사람들.
그와 반면, 잭 제커시스는 이 나라에 큰 사업을 벌이고 있는 작위 없는 외국인이기만 했다. 권력이 돈을 이기시는 시대였다. 잭이 군대를 만들어서 필요한 귀족들에게 빌려주는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 병사들은 화이트 가문의 정예병들을 이기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상황에서 완벽한 우위에 있는 것은, 그였다.
제롬 화이트.
“제 친구예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는 그 뒤로 잭의 팔을 거칠게 놓아준 뒤로 뒤돌았다. 제롬은 제 파트너인 여자와 그대로 뒤돌아서 내게 멀어졌다.
순간이었는데도, 그의 존재가 내게 남긴 타격은 꽤나 컸다. 나는 그가 간 뒤로 잭과 함께 분수에 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잭은 어설프게 내 등을 토닥였고,
“괜찮아?”
“네.”
나는 그냥 내 구두코만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행복하고, 기뻐야 할 건국제였는데 이게 뭐람. 울 기운도 없었고, 더 소모할 감정도 없었다. 그럼에도 옆에 사람은 필요했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
“…….”
“좋아해?”
그가 그렇게 말하고서는 나를 가만 바라보았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일순 진지해졌다. 나는 한동안 입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그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이 순간의 내가, 내 자신을 얼마나 초라하게 생각했는지 모를 것이다.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은 비참했지만, 감정의 노예가 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바닥이다. 그리고 지금, 그게 나였다. 어설프게 현실과 얽매여, 뭐 이렇게.
그렇다 해서 그럼 공작과 사랑의 도피를 하고 싶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러니까, 든 사람 자리는 몰라도 난 사람 자리는 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특유의 공허함, 미안함, 죄책감이 섞여 거기에 사랑이라는 사카린 한 방울이 가미된 것이 이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이 뜨거운 사랑의 도피와 어울리리라고 믿지 않았고.
“그럼 왜 그렇게 슬퍼 보이는데?”
“나 슬퍼 보여요?”
“내가 눈썰미가 조금 좋잖냐.”
“그럼 웃게 해줘요.”
나는 그리고 힘없이 미소 지었다. 그는 한참동안 무언갈 생각하는 듯 했다.
“너, 그런데 이번 파티에서 바빠야 되지 않아?”
“흠. 아니요. 아……. 맞다!”
그리고 나는 떠올렸다. 나는 아마도 이 파티에서 어떻게라도 나와 결혼할 사람을 찾아야 했다. 앨런 릭포드를 대신할, 내 지위에 맞는 좋은 남편이 되어줄 사람.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녜요?”
“음?”
“그러니까, 유명하잖아요. 잭 제커시스는 목적 없이는 아무 파티나 참여하지 않는다고.”
“아, 내 용건은 이미 끝냈어.”
“좋으시겠네요.”
“응, 좋아.”
그리고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나는 한숨을 쉬었고. 그냥 그, 아무 이유 없이 속에서 복받히는 종류의 한숨이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 치열하게 살지 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너, 있잖아. 진짜 멀리서 보는 네가 어떤 줄 알아?”
“모르겠는데요.”
“잘 들어봐. 어쩌면 멀리서 보는 너에 대해서 배우는 것도, 네게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6년 인생 선배께서 조언을…….”
“그거 좀 꼰대 같은 거 아녜요?”
“잘생긴 꼰대.”
그리고 그가 내 모자를 다시 푹 눌러버려서 시야가 또 가려졌다.
“눈 감아봐.”
“으익. 그런 거 시키지 마요.”
“좋아. 그럼 눈 뜨고. 네가 제일 행복한 모습을 그려봐.”
밤은 깊어갔고, 우리 둘 다 술에 취해 있었고, 그러니 새벽이었다. 우리 둘은 그래서, 합법적으로 새벽감성에 취해 서정적인 대화를 나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하늘에 있는 수많은 별들을 헤일 듯, 별 하나, 하나를 이어 별자리처럼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을 그려나갔다. 나는,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나는…….
카밀이 결혼을 했다. 에드거 그린힐의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그리고, 나. 로징턴의 주인은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를…….
솔직히 내 모습이 상상이 되질 않았다.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럴 줄 알았어.”
“그 사람 좋아하면, 그렇다고 가서 말해.”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네가 바라기만 해도 전쟁이라도 일으켜서 네 머리에 관을 씌워 줄걸?”
“……그 사람이 왜요?”
“네가 좋으니까?”
“좋다는 감정이 이해의 관계를 넘어설 정도로 그렇게 강한 감정이었나요?”
“여자에 미쳐서 나라 말아먹은 왕이랑 가문 몰락시킨 지도자가 몇인데. 이성이 옳다 해도 그걸 압도하는 게 감정이야. 이성이 천칭이라 해도 그 천칭을 부수고 세우는 게 감정이지.”
“그럼 좋다는 감정이……. 시간을 넘어서, 영원이 바뀌지 않는 그런 감정이었나요? 제가 늙어도? 더이상 젊고 아름답지 않게 되어도?”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망했다. 그는 나를 위로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한번 얼어붙은 감정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항상 이랬다.
남이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다가와도 내 마음대로 사람을 재단하고, 밀어내고…….
그래, 나는 이런 사람이야.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가시에 꽂혀서, 몸을 웅크리고, 그렇게 고슴도치가 되어버린 망할 계집애라고.
그러니까 제발…….
나는 그렇게 울기 시작했다. 또. 어휴, 진짜 민폐도, 참.
“당신의 뜻은 알겠지만, 행복을 위해 모험을 할 수 있는 사람도 풍족하고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모험이란, 당신이 그렇게 잘 아는 도박 같은 거겠죠. 높은 확률로 쪽박, 낮은 확률로 대박 같은 거. 당신은 그냥 운 좋은 사람 중 하나였을 뿐이에요.”
나는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감히 저를 평가하려 하지 마세요.”
그리고 내가 뒤돌았을 때, 눈물이 흘러나왔다. 항상 꼭 이런식이다. 이런 식.
이렇게 내 주변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밀어내고, 항상 혼자가 되었지. 그래서 외롭다, 미친 듯이 외로운데, 아픈 건 더 싫다.
그때 그가 천천히 내게 걸어와, 멈춰서.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그리고 내 등을 서투르게 토닥이며, 내 머리 위에 제 턱을 얹고. 그냥 아무 말 없이 꼭, 한참동안 끌어안아 주었다.
“너, 정말 많이 힘들었구나.”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나는 그래서 그의 품에서 한참동안 안겨 울었다. 내 자신을 놓고, 그대로 그냥 마음을 내려놓고 울었다.
“야, 마음껏 울어. 그 말도 있잖아. 눈물은 슬픔을 씻어내려 내리는 마음속의 비라고.”
“뭐야, 유치해요. 시집도 외우고 다녀요?”
“사람은 보이는 대로가 아니니까. 나도 책 자주 읽어.”
훌쩍거리며 울었다.
“있잖아요, 멍청한 낯선 아저씨.”
“나 아직 젊어.”
“나보다 6살은 더 많으면서.”
“넌 어린 거고, 난 젊은 거란다.”
나는 피식 웃었다. 울다가 웃으니 기운이 다 빠져서, 원.
“당신도 그렇고,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예요. 그냥 보잘것없는 자작가 영애한테.”
“좋아하니까?”
내가 화들짝 놀라 그를 보자 그가 낮게 미소지어보였다.
“말도 안 돼. 왜요?”
“글쎄, 넌 예쁘니까?”
“파티장에 깔린 게 예쁜 여자인데? 당장 내 동생만 해도…….”
“네 동생 예쁜 거 맞는데, 솔직히 네가 더 내 취향이야.”
“미친…….”
“너도 예쁘고 좋은 사람이야. 네가 사람들이 만든 그, ‘로징턴의 가시’ 라는 프레임에 너무 갇혀 사는 거뿐이지.”
나는 가만 생각에 잠겼다. 그랬구나, 어쩌면 나는…….
“사람들이 너한테 뭐라고 평가하던 간에, 그건 그 사람 마음대로야. 그러라고 해. 그런데 있냐, 그냥 그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던, 거기에 마음아파하고 그 평판을 닮아가려 하지 마. 넌 너야. 네 인생의 열쇠를 쥔 사람은 너고.”
그는 나에게 그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대신 그 자신에게 그 말을 건네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냥 그대로 아무 말 없이 다시 분수에 앉아 그의 옆 자리를 지켰다.
“나한테, 이런 얘기 해주는 이유가 뭐예요?”
“너는 나를 닮아서. 너도 이 나이쯤 되면 20살 버전 너한테 곱게 말 전해달라고.”
“고마워요.”
나는 피식 웃었다.
그는 정말로 나를 웃게 해 주었다. 내가 부탁한대로. 그는 제 마차로, 나를 내 집까지 안전하게 에스코트 해 주었고. 새벽이었지만 나는 한참을 내 침대에서 뜬 눈으로 있어야 했다.
그는 나만의 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어쩌면 나는 카밀리아의 결혼이라던가, 내 삶이라던가, 내 불행을 변명으로 지금의 행복을 미루고 있지 않았을까?
……누굴 위해서?
미래의 나를 위해서? 가문을 위해서? 카밀을 위해서...?
카밀의 결혼은 아름다울 것이다. 그리고 카밀은 행복한 사람이 되겠지. 그 다음에, 그래서 ‘카밀의 행복’ 이라는 변명거리가 사라지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나는 그렇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숨만 터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