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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20화 (20/108)

<-- 카드의 마술사 -->

화려하던 무도회가 끝났다. 그리고 일상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대로 흘러갔다.

무도회가 끝나면 나는 이렇게 특유의 공허감에 휩싸인다. 그 화려한 밤을, 새로운 사람들에 둘러싸여 함께 보내다가도 이렇게 다시 일상에 거짓말처럼 다시 돌아와 있으니 말이다.

“술 좀 그만 드세요.”

주치의가 일흔 여덟 번째로 내게 하는 말이었다.

“차라리 죽을래요, 그러면.”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책상에 아무 말 없이 위통약 다섯 병을 올려놓는다.

“실버 스물다섯 개죠?”

“……이제 외우시는군요.”

“헤헷, 기본이죠.”

“제발 술 좀 그만 드세요.”

잔소리는 많지만 좋은 의사이다.

“다음에 또 봐요!”

손까지 등 뒤로 흔들어주었다. 의사는 그만 마시라는 말을 하는 것도 질렸는지 가만 한숨만 푹 쉬어댔다.

하.

나는 의사가 떠난 뒤 내 방으로 향했다. 정말, 무도회가 끝나고 어디보자……. 대략 14일정도 지난날이었다.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그래, 없었다.

아, 그리고 당신에게 좋은 소식을 들려주자면 카밀리아가 건국제 무도회날 밤 에드거 그린힐에게 청혼을 받았다는 일이다. 원래 사교계 관습 상 언니가 먼저 결혼하고, 그 다음 동생이 결혼하는 게 맞지만 뭐 그런 것 따져 무엇 하겠는가.

내가 결혼할 때까지 카밀리아가 기다리다가는 결혼도 못하고 노처녀로 늙어죽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뜨겁게 불타오를 때 딱 결혼하니 내 기분이 얼마나 좋겠냐마는. 카밀리아는 무도회 다음 날 아침부터 내 침대로 달려와 좋은 소식을 전했다. 그러는 그녀의 표정이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카밀리아는 온통 결혼 준비로 바빴다. 프로포즈를 받고 행복해하는 풋풋한 금발의 예쁜 새 신부. 카밀리아는 마치 행복한 미래만이 앞에 놓인 동화 속의,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의 주인공 같았다.

“언니, 언니, 언니, 언니! 빨리 와서 이 카탈로그좀 봐줘.”

나는 카밀리아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방엔 그린힐 영식이 보낸 선물꾸러미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그리고 그녀의 미소에는 내가 줄 수 없는 그런 행복이 담겨 있었다. 카밀은 제 책상으로 나를 데려갔다.

“이 드레스는 어때? 그리고, 이건? 언니. 언니?”

카밀은 그 예쁜 푸른색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언니 울어?”

“아니, 안 울어.”

“오, 언니. 기뻐해줘서 고마워.”

기쁨과, 동시에 공허감이었다. 카밀이, 내가 사랑하던 카밀이 이제 나를 떠나 제 삶을 살아가는가 하고. 그녀가 믿을만한,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 안겨 이제 새로운 가정을 꾸미고 좋은 삶을 살아가겠지. 로즈블룸을, 그리고 나를 떠나서.

내 인생의, 20년의 큰 숙제 하나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 같았다.

“언니.”

“응?”

내가 뒤돌았다.

“그, 그러니까…….”

카밀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분과 처음 연애할 땐 정말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는데. 내 생각엔 그냥 누구에게나 행복한 동화 속 결말이 있는 것 같아. 그,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언니도 언니 사랑에 믿음을, 가졌으면 해서.”

카밀은 내 눈치를 살피며 제 치맛자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주제넘을지도 모르겠지만, 언니가 공작 전하와…….”

“그래.”

내 차가운 목소리에 카밀이 놀란 사슴처럼 동그랗게 눈을 떴다.

“고마워 카밀.”

나는 빠른 걸음으로 열린 문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남자가 여인의 마음을 얻는 방법은, 선물이지.”

내 문 앞에 영원히 볼 일 없을 줄 알았던,

내 친구가 장바구니에 담은 남자가 있었다.

큰 꾸러미와 함께.

“안 사요.”

“섭하게 그러기냐?”

“잘 가세요.”

“야, 잠깐만!”

나는 문을 닫다 말고 뚱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닫을게요.”

“선물도 같이 왔는데?”

“저 보석이나, 드레스, 리본 안 좋아해요.”

문을 닫으려던 때였다.

“바, 발렌타인! 30년산! 열병!”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문턱을 잡아챘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제서야 그를 들였다.

“로즈블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잭 제커시스 경.”

그가 멍하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대형견마냥 순박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나는 박스 꾸러미부터 열어 병들을 찬찬히 조심스레 살펴보다가 그 너머에 있는 그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쩍 굳어 다음에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게 그답다.

“마음에 들어?”

나는 대답 대신 엄지를 척 들어 그에게 보였다. 시선은 위스키가 들어있는 고급 목재 상자에 고정한 채로.

“근데 당신 바뻐야 되는 거 아니예요?”

“바빠.”

“아?”

“그렇다고 여유까지 없는 건 아니라서.”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는 읽어 봤어요?”

“아, 응. 답장도 보냈어.”

“오, 좋은 소식 기대해도 돼요?”

“너무한 거 아니야? 난 네가 좋은데.”

“제가 당신 마음 거절할거면 이것도 돌려줘야 되나요?”

“아니, 그건 너 먹어.”

그렇게 내 오후는 기분 좋은 스타트를 끊었다.

시간은 흘러가고, 일상은 일상이었다면 바뀐 것은 하나. 그저 내 일상에서 그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제롬 화이트 공작. 내가 자주 가던 장소에 그가 더 이상 없었다.

우연이라고 믿었던 마주침이, 모두 신기루처럼 사라져 평소에 그를 볼 수 있었던 장소에는 그가 없었다. 그 사람의 잔상이 창문 밖으로 넘어 들어오는 햇빛에 녹아들어 사라진다. 그 수많고 많은 연, 달, 일, 그리고 시간, 중 이 모래시계가 흘러나가는 때, 지금.

내 인생에 당신이 없었다.

그 무도회가 끝난 지, 십사일이 지났다. 시간은 빨리 지나갔고, 나는 그 시간 속에서 일상에 빌붙어서 웃으려고도, 숨쉬려고도 해 보았는데 그때마다, 좋은 일을 겪으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당신이 있는 이 순간은 얼마나 찬란하게 빛이 있을까.

당신이 옆에 있어 이 순간에 완벽히 녹아들어 안도하는 나는 무슨 빛의 웃음을 웃을까.

슬플 때는, 그냥 당신 생각이 났다. 그러니까, 내 기사가 되어 주겠다고 했던 당신의 모습이 내 머릿속 스케치북에 그려졌다. 노을이 타고 있었고, 당신은 내게 당신이 가진 최고를 주겠다고 했다. 이 세상에 수많고 많은 낙엽 잎처럼 많을 사람, 그리고 그 사람중에서,

나를 찾아 준 사람. 그래,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었는데.

나를 찾아 특별하다고 말해준 사람.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나에겐 처음이었는데…….

그냥 그 사람이 나한테 해준 말, 특별하게 여기는 눈빛, 분위기.

난 아직도 잠을 자면 꿈을 꾼다. 그 사람과의 내 마지막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가, 정말 그 스스로의 프라이드에 취해도 될 듯 한 그 인간이,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제발 부탁한다고 했다. 그랬는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일상에서 사라지는 순간. 가끔 가던 길에, 그를 우연히 보았던 곳에 그가 없었다. 내가 가는 무도회에, 난간은 내 자리였고 당신은 사교계의 중심에 서 있었는데.

그 자리에 당신이 없고…….

소란스러운 이 무도회에서, 아래층에서 내게 와인을 들어 보이며 미소짓던 그 사람. 선명하다가 이 현실 속에 흐려져 없어지고, 그리고 아래에 보이는 건 공허한 군중밖에 없을 때.

나도 사랑이라는 게 이런 거일 줄 몰랐다. 정말로. 그냥 기계 돌아가듯, 정해진 공식이 있을 줄 알았고, 정량이라는 게 있을 줄 알았고, 아니면 이 세상의 차가운 논리처럼 납득할 수 있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겪어보니까 아니었다.

정말 아니더라고. 그냥 개연성이건, 차가운 논리건, 그런 거 다 관계없이.

마치 감기나, 플루나, 그런 것처럼. 인과가 없이 그냥 어느 새, 막, 그냥. 그 사람이 내 삶에서 차지하는 무게가 어느 새 정말로, 정말로 커져 있는 거지.

당신을 만났던 곳은 그대로, 사람도 그대로인데, 당신이 그곳에 없다는 이유로 많은 게 달라지는구나, 그 사람은 아마도 내 일생일대의 기회일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을 텐데.

나를 특별하다 말하고, 그런 사람처럼 느끼게 해주는 사람 하나.

당신과 함께 보냈던 시간, 그 시간들을 되돌이켜보며, 사람들 속에서 웃고 있는 나는 지금도. 내가 그 때로 되돌아 갈 수 있다면 그렇다면 조금 더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그 때는 왜 내가 당신을 그렇게 나쁘게 대했을까? 후회, 그래 후회하는데…….

당신은 이렇게 아프지도 않겠지. 지금.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 멋진 사람들, 최고인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서 웃고 있을 거야.

스포트라이트, 당연히 당신의 것이라고 당신이 여길만한 그 자리에서, 최정상에 높이 올라 환하게 웃고 있겠지. 그리고 당신은, 나처럼 아프지도 않을 테고, 그저…….

이기적인가 봐. 그래서, 나는. 당신이 나처럼 아팠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있으니.

이곳은 무도회, 나는 더 이상 발코니에 서 있지도 않고. 피아노를 친다. 사람들이 환호한다. 그때, 생각하길, 당신이 이 피아노 옆에 기대어 있었더라면.

나는 항상 그랬듯, 이 순간의 행복함에 완벽하게 녹아내릴 수 있었을까.

후회하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

당신은 당신만의 세상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고 행복하고, 그래, 내가 아닌 좋은 아내도 만나겠고, 당신을 웃게 해줄 많은 사람들이 당신 옆에 서 있겠지.

그래서 나는 내 선택이 옳은 것이었다고 믿으려고 한다.

처음에는 나를 위해서였지만, 이게 당신에게도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겠나, 하고.

가끔 행복은 나한테 사치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래서 그냥 그런 거일지도. 좋은 일이 나한테 일어나는 걸 못 견디겠는 지도 모르겠지. 이 행복이 지금뿐인 것 같으니까, 언제라도 빼앗기는게 당연하다고 느끼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마치 날카로운 절벽 끝에 서 있어 금방이라도 절망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져내려버릴 것만 같아서.

당신을 닮은 사람이 있을까?

당신이 나를 볼 때, 유난히 반짝이던 그 눈을 닮은 사람이 있을까, 당신이 나를 볼 때 부끄럽게 휘어지는 입술이라던가, 그 완벽한 미소를 닮은 사람이 있을까.

당신의 체향을 닮은 사람이 있을까, 당신처럼 나를 행복하게 할 사람이 있을까, 당신처럼 완벽하게 나만을 좋아해줄 사람이 있을까, 당신처럼 나를 슬프게 할 사람이 있을까…….

이 닮은 사람들의 특징을 합쳐놓으면 그게 당신일까.

아니겠지.

그래, 세상이 맞아. 내가 품을 연정이 너무 과분한 것이었을지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그래서 악착같이 빠지지 말아야지, 속지 말아야지, 이 순간에 속지 말아야지…….

그런데 왜 당신은 그렇게 완벽하면서 잭 제커시스가 가진 눈치 하나만큼은 없었을까?

“세실리아.”

나는 스스로의 편견에 빠져버린 그런 불쌍한 여자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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