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드의 마술사 -->
“세실.”
“네!”
“듣고 있니?”
아, 맞다. (나는 속으로 좀 웃었다.) 루이지애나 고모의 말을 내가 못 들을 정도로 나는 이 상황 속에서 너무 벗어나 있었다. 실례였을 텐데. 루이지애나 고모는 내게 없던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준 사람이었다. 그녀와 있는 순간을 1초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네!”
“네네게 좋은 혼처가 들어왔구나.”
“아…….”
“이제 너도 가야지 않겠니, 네 동생 카밀리아가 곧 결혼하려면.”
“네.”
나는 그리고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 현실.
원래 내가 속하던, 나의.
“일리노이스 백작가. 정치적인 입지는 낮지만,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게다.”
“아…….”
평소같았으면 와, 좋은데요! 하면서 박수를 쳤겠다. 하지만 그냥 나는 마음 속 한 구석에 석연찮은 생각으로 그냥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나이는 서른일곱이고, 최대한 빨리 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네? 저는 그러니까 천천히…….”
“아직 카밀리아가 네게 말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네? 뭘요?”
나는 그대로 굳었다. 루이지애나 고모의 표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너도 그린힐 백작부인이 둘 사이를 반대한 것은 알고 있을게다. 그린힐 백작께서는 이에 대해서 아무 목소리도 내고 있지 않고 계시고 말이다.”
“…….”
“그린힐 백작부인께서 결국 다이애나 영애의 설득에 넘어가, 어마어마한 지참금을 내놓는다면 둘의 결혼을 찬성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지참금을…….”
“저와의 결혼을 조건으로 일리노이스 백작께서 제시한 모양이네요.”
루이지애나 고모는 그래도 멈춰서 내 표정을 살폈다. 나는…….
“세실. 만약 네가 그러고 싶지 않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단다. 나는 그저 그런 방법이 있다고 네게 말해주는…….”
“생각해 볼게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태껏 내 인생 전체가 카밀리아를 위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 나머지 가능성조차 그녀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니. 순간 마음이 무거웠다.
평소 같았으면 한다고 했을 수도 있고, 용기 있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나는……. 나는……. 나는 이 순간에조차 망설이고 있었다.
공작이 내 일상에 끼어들기 전이었다면 내 대답은 달랐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불현듯 깨달기를, 당신이 이렇게 나를 바꿔놓았구나.
그랬구나. 당신은, 나도 내가 행복할 미래를 받을 만 하다고,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구나. 그저, 아무것도 아니었을, 작은 먼지 같은 그런 단순한 한마디, 그리고 사람 존재가.
내 생각을 이렇게 바꿔놓는구나.
나는 집에 오는 마차에서, 드디어 홀로 되는 시간 속에서 비참하게 울었다. 어깨를 흔들며, 그냥. 조용하게.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집에 돌아오니 슬프게 웃고 있는 카밀이 있었다.
“언니.”
카밀은 그 다음에 웃으며.
“나, 결혼. 안하기로 했어. 역시.”
“어?”
“어머니의 뜻 하나 꺾지 못할 그런 마마보이는 싫어!”
애써 쾌활하게 말했다.
정말 내가 나빴던 건, 나는 그 순간에 카밀을 끌어안고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는 거였고. 카밀은 미안할 것 없다며 말했는데, 나는 생각하길.
거봐. 행복도 부유한 사람이나 누리는 거라고. 나한테는 이렇게, 사치일 뿐이라고.
우리는 점심을 먹었고, 책에 빠져있다, 저녁을 먹었고, 그렇게 어둠은 드리웠다. 나는 의자에 앉아 가만 화장대 거울 속 나를 바라보며 가만 생각에 잠겼다.
평범한 어둠, 평범한 밤. 항상 똑같았다. 다를 바 없는 내 하루였으며, 내가 속한 내 일상이었다. 천국에 있다가, 다시 현실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지니 이리 고달프다.
나는 몸을 돌려 화장대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문 틈 사이로 웃으며 떼를 지어 움직이는 하녀들이 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고, 그저 나도 고모부의 추천으로 운 좋게 어느 자작가 하녀가 되었다면 저렇게 그저 행복하기만 할 수 있었을까.
나는 눈을 감고 그저 우울 속에 잠겼다. 그러자 평소에는 들리지 않았던 그들의 목소리가 더욱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암만 그래도 정말 어떻게 그럴 수 있니?’
‘그러게. 우리 레이디한테 그렇게 간도 쓸개도 빼 줄 것 같이 굴더니만.’
‘이래서 희망만 심어주는 남자들이 문제라니까. 딱한 세실리아 아가씨.’
‘야아, 조용히 해. 레이디께서 들을라.’
나는 눈을 번쩍 뜨고는 문가로 달려갔다. 문을 활짝 열자, 내 어머니뻘이었을 세 하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게, 무슨 얘기지?”
세 하녀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아, 아닙니다. 레이디. 저희는 그냥…….”
“쓰, 쓸데없는 주책이었습니다요. 레이디.”
“예, 에밀리가 맞습니다. 주책이었습니다.”
나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하녀들의 표정에는 망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고해라.”
하녀들이 눈치를 살폈다.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난처한 얼굴로 눈만 끔벅였다.
“당장!”
그러자 하녀 중 한명이 둘 앞을 막아서고 나섰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는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레이디. 저, 저희는 그저 공작 전하와 레이디가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마침 공작 전하께서 약혼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그만…….”
순간 머리에 무언가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나는 그 상태로 사고가 정지되어 눈만 몇 번이고 깜박였다.
하녀들은 제가 죄라도 지은 듯 고개를 푹 숙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멍했다. 예상했던 일이 일어났다. 그가 약혼했다. 내가 아닌 여자와.
“돌아가 봐.”
어떠한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힘없이 내 방에 걸어들어갔다. 거짓이어야 했다. 마냥 그 사람이 내게 보여준 미소와 똑같은 것을, 다른 여자한테도 보여줄 것을 생각하니 가만 슬퍼졌다. 그 말투, 눈빛, 매너, 애정 모두. 이제 다른 여자의 것이 된다.
화가 났다. 감정이 극에 달하니,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멍했다. 색의 끝에는 흰 빛이 있듯, 감정의 끝에는 공허함뿐이었다. 나는 그대로 한참동안 멍하게 침대에 누워 가만히 천장만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래, 그 사람이 내 옆에 조금만 더 있어 주기를 바라는 건 내 이기심이겠지. 밀어내도, 결국 돌아올 것이라고 바란 것은 내 이기심이겠지. 그가 그를 사랑할 수 없는 내 처지를 어느 정도라도 이해해 주길 바라는 것은 내 이기심이겠지.
다 내 이기심이었다. 그래, 잘 된거다. 잘 된거라고.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언젠간 괜찮아 질 것이다.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것이다.
저택은 고요했고, 나는 아무 이유 없이 응접실로 향했다. 그와 마지막으로 시간을 보낸 곳. 나는 응접실에 앉아 홀로 차를 마셨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때 고요한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았다. 바보같이, 아닐 게 분명할텐데. 나는 다시 찻잔을 바라보았다. 단정한 하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롬 화이트 공작 전하십니다.”
순간 얼어붙었다. 숨이 가빠졌다.
“들어오라고 하렴.”
나는 떨리는 손을 책상보 아래로 감추었다. 거짓말처럼, 그가 내게 걸어왔다.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고, 그 다음에는 그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반갑습니다.”
그였다. 속으로만 불러보고, 꿈으로만 그렸던 그 사람. 나는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애써 태연한 척 웃으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오랜만이네요.”
“당신의 친구 아그니스가 제게 당신 소식을 전하더군요.”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책상에 올려놓았다. 수표였다.
“당신 동생 지참금입니다. 이번 건 사양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참 오랜만이었다. 이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게. 그리고 기껏 한 대화가, 내 동생의 지참금에 대한 것이었다니. 난 준 것도 없는데, 마냥 고마워서.
나는 울고 싶었지만, 애써 눈물을 참았다. 하지만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그대로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울지 마십시오. 좋은 날이 올 텐데 울어 뭐하겠습니까.”
그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겨우 숨을 쉬고 있었다.
“제 단순한 호의입니다. 친구로서, 제 선물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마치 친구로서.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 간격. 마음 사이의 간격이 느껴지기 충분했다.
그의 수표를 받는 것을 내 자존심은 허락하지 않았지만, 나는 절박했다. 단순히 나의 자존심으로 카밀리아의 미래를 꺾고 싶지 않았다.
이게 단순한 호의가 아닐지라도, 내 앞길을 막는 덫이더래도 상관없었다.
“다른 마음은 아닙니다. 당신이 조금 더 행복한 선택을 했으면 합니다. 원하지 않는 결혼이 아니라,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제게는 의미없을 부이겠지만, 당신을 위해서는 크게 유용하게 쓰이리라고 믿습니다.”
그는 웃었다. 특유의, 그 깨끗한 웃음을.
“저는 항상 합리적인 투자를 해 왔고, 이 투자로 얻을 수 있는 효용은. 제가 여태껏 해왔던 것 중 가장 최고인 듯싶습니다만. 이만 늦은 시간에 실례했습니다.”
나는 끄덕였다. 그는 뒤돌아 나갔다.
“저, 로드 화이트.”
그를 불렀다. 그가 뒤돌았다.
“약혼 축하해요.”
그가 싱긋 웃어 보이고 나갔다. 그런 그의 손에는 빛나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점이 되어, 문밖을 나가고. 사라졌을 때.
‘사랑해요.’
당신이 듣지 못할, 그런.
그런 말을 했다.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