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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32화 (32/108)

<-- 새파란 달과, 춤추는 밤 -->

그리고 나는 웃었다. 그냥, 지금 내가 놓인 상황. 지나간 일들. 흘린 눈물. 다 잊어버리고 그저, 웃었다. 그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눈이 마주치자 환한 미소를 되돌려주었다. 그래, 저 사람은 언제고 그럴 것이다. 내가 편안히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주겠지.

선한 사람이다. 그래서 사랑이 없어져도 정으로 나를 보살필 것이었다. 좋은 남편이 되어주겠지. 그렇지 못하게 되도 위자료는 더럽게 많이 챙겨줄 사람이다. 착하니까.

하지만 역시, 나는 그런 그의 착함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에 빠진 다음부터, 그랬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정말 말이나, 금화로 형용할 수 없는 특별하고 소중한 감정이다.

내가 공작을 좋아하고 있는 감정이 특별하면,

그가 나를 좋아하고 있는 감정 역시 귀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사랑을 이용할 수 없었다. 그게 내가 그에게 돌려줄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이었다.

그가 멋쩍게 제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고,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미안하다고 했다.

“나,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알고 있어.”

그의 얼굴에 드리운 환한 미소가 지는 석양처럼 슬픔으로 바뀌었다. 낮이 밤으로 바뀌는 것처럼,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항상……. 언제나 좋아할 거야.”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악단의 느린 음악이 장내에 천천히 부서졌다. 나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 까치발을 서서, 그의 볼에 입을 살짝 맞췄다.

“미안해요.”

그리고 뒤돌아섰다.

아무래도 집에 가고 싶었다.

그때였다.

“딱 한 번만.”

나는 뒤돌았다.

“그럼, 춤. 딱 한 번만. 그럼 다시는 귀찮게 하지 않을게. 좋은 친구로 남을게.”

고민했다. 그래, 한번쯤이라면 나쁘지 않지.

“그래요. 그러면 춤 한 번만.”

게다가 거절하기엔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다음에는 우리 서로 좋은 친구로 만나는 거예요.”

“좋아.”

그가 제 꽃을 떨리는 손으로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천천히 향기를 맡았다. 그리고 줄기를 꺾어 내 가슴 브로치에 끼워 고정했다.

“레이디, 가시겠습니까?”

그가 애써 해맑게 에스코트를 권했다.

“영광이에요. 제커시스 경.”

나는 그의 손에 내 것을 올려놓았다. 파티가 무르익어 갈 무렵이었다.

작은 피아노의 소리, 그리고 마주보는 연인들. 나는 무도회장에 그와 마주보고 서 있었다. 그의 뜨거운 시선은 나를 향했고, 나는 어쩔 도리 없이 시선을 피했다.

그가 깨질 듯 조심스레 내 허리에 제 손을 올렸고,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밤은 무르익고 있었고, 그 뒤로 장난스러운 피아노의 비트가 떨어졌다. 나는 웃어보였고, 그는 따라 작게 미소지었다. 나는 그대로 그의 가슴에 내 머리를 기댔다.

그의 따뜻한 심장박동 소리가 들렸다.

때로는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사랑이라는 것, 추상적이다,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우리의 주위에 있다. 화산이 폭발할 때 아이를 감싸고 죽은 어머니의 조각상, 연인을 위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새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 밤이 무르익으면 집에 돌아와 아내를 찾는 남편,

수많은 예술가들이 사랑의 형태를 수없이 많은 작품으로 표현하려 했지만.

그것은 모두 다른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그 중 사랑이 아닌 것은 없었다.

음악이 밤의 분위기를 감싼다. 부드러운 바이올린 연주가 더해진다. 그는 그대로 내 머리에 제 턱을 살짝 기대고, 그리고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나는 그의 사랑을 감히 볼 수는 없었지만, 어린 나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박동소리, 나를 바라보는 눈빛, 그리고 말투. 이 사람은 정말로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만약…….

“만약, 있잖아.”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널 먼저 찾아낸 게 공작 전하가 아니라, 나였으면.”

“…….”

“조금, 달랐을까?”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다. 그는 나를 바라본다. 눈빛에 슬픔이 서려 있다.

“그 사람 얘기는 하지 마요.”

나는 작게 웃으며.

“글쎄. 대기표 뽑았으니까, 다음 생에는 아마도.”

나름 위로하려고 한 말이었다.

“나 그럼, 다음 생에도 카지노 거부가 되어 있을까?”

“네?”

“너한테 걸맞는 사람이 되고 싶단 말이야. 그런데 이번에야 그래, 네 말대로 운 좋아서 사업이 대박났지만 말이야. 그럼 다음 생엔? 내가 무슨, 가난한 학자였으면 날 봐주지도 않는 거 아니야? 아, 그럼 곤란한데.”

나는 웃었다. 그는 내 웃음을 제 눈에 담더니 똑같이, 어렴풋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학자 뒷바라지하는 아내는 어때요?”

“고생 안 시킬거야. 그러면, 다른 사람 만나. 다음 다음 생을 노릴게.”

“너무 먼 얘기 아니에요?”

“기다리는 게 익숙해서.”

그가 슬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그때 피아노 소리가 구슬프게 늘어졌다.

“이 곡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어.”

미안했다. 정말, 나는 돌려줄 것이 없어서.

“미안해요.”

“아냐.”

그리고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있잖아.”

“네.”

“공작 그 사람 좋아하면, 그래도 고백해.”

“왜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요?”

“오늘 밤 내내 너, 그 사람만 보고 있었잖아.”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내가 입을 조금 삐죽였다. 그때 음악이 점점 느려졌다.

파트너들은 춤의 감흥에 젖어 떨어지지 않는 손을 아쉽게 내려놓고,

“그 사람 약혼했어요. 정말 민폐도 상 민폐가 어딨어, 그러면.”

“아.”

“점점 그 사람을 잊는 데, 익숙해질 거예요. 게다가 괜찮은 남자를 만나서, 로징턴을 가꾸고…….”

“나는 널 위해서 내가 가진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어. 나는 안 돼?”

“네.”

그리고 정적이 있었다.

“왜?”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당신을 좋아할 수 없으니까.”

“…….”

“감정은 공평해야 돼요. 한 쪽으로만 기울어진 관계는 이기적인 거야. 게다가, 이건 현실이에요. 당신도 정신 좀 차려요. 그리고, 나는 당신이 나중에 훗날. 한 사람 때문에 당신이 가진 모든 걸 포기했다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요. 무언가를 포기하게 하는 관계는 옳은 게 아니에요. 나쁜 거에요. 그러니까, 이제.”

나는 꽃을 핀에서 빼 그에게 돌려주었다.

“안녕히 계세요.”

그대로 무도회장을 나왔다. 가는 길에 와인이 있길래 집어 들고 갔다. 걸었다. 정원이던, 어디던. 밤하늘은 파랗고, 깔끔한 초승달이 떠 있었다.

예쁜 꽃이 피어있는 정원, 사람은 없었다. 모두 파티를 즐기고 있을 무렵이었다. 나는 생각 없이 계속 걸었다. 집에 가고 싶지는 않았고 그냥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세상에,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많은 책들에서 그렇듯 말이야. 과거로 돌아가서 그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고, 차라리 모두를 다. 모르고.

그냥 앨런을 대신할 참한 남편감을 만나 무난한 삶을 살아갔다면.

지금 모든 것이 다 백지였다.

카밀리아의 결혼, 가고 싶지 않은 왕세자비의 티 파티, 인생에서 실물로 영접할 줄 몰랐던 마르사 로렌스, 아니. 왜 이 세상에서 나는, 살아가며 왜.

많은 것을 책임져야 할까. 선택해야 할까. 부족하고, 멍청한 선택으로 항상 엇갈릴까. 그냥 행복하면 안 될까? 아니면, 차라리 불행하지라도 않았으면. 무난한 인생을 살았으면.

그래, 바란 게 많았던 건 아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그냥 등 따숩고 배 부르면 그만이었는데, 지금은.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내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울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나는 약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피해 온 몸을 가시로 위장해도,

고슴도치처럼. 그 안에 든 것은 말랑말랑하고 연약했다.

그때,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제발, 신이시여. 왜 나는 정말. 이렇게 혼자 있을 수가 없는지. 조금이라도 쉴 수가 없는지. 숨이 막혔다.

발걸음이 내 앞에서 멈추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

“잭 제커시스가 이곳에 당신이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끝까지, 진짜.

“찾았습니다. 갑자기 당신이 무도회장에서 사라져서.”

“그게…중요하나요?”

제롬 화이트 공작은 가만 나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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