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파란 달과, 춤추는 밤 -->
“예?”
“아니에요. 실례 많았어요.”
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뭐람, 정말. 고개를 저으며 일어나 그에게서 등을 돌려 걸어갔다. 한숨이 푹 나왔다. 진짜 잭 제커시스 이 사람, 끝까지 저만 착한 사람 하고.
이러니까 나만 나쁜 여자 되는 거 같잖아. 그때,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그대로 멈춰섰다.
“당신이 당신 집에서 했던 말, 아직도 유효합니까?”
다리부터 얼음이 되는 것만 같았다.
“…….”
그리고 생각도 얼어붙었다.
망했다. 또 저질러버린 것이었다.
그를 떼어 놓을 것이었으면 아주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하게 굴었어야 하는데 내가 내 감정에 매몰되어 또 이렇게 그를 내 옆으로 데려왔다.
그는 나를 사랑했기에, 이런 빈틈을 놓치지 않는다.
저번이 마지막으로 묻는 거라면서, 또 다시 이렇게 찾아와 호소한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을 또 다시 내 삶에 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처음부터 그 사람을 밀어내면 안 되었던 거였다.
그래.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애초에 깔끔하게 내 감정을 숨겼어야 하는데, 이 사람에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이렇게 불완전하고 어리숙한 사람인 나 때문에.
상처를 줘야 했다.
나는 돌아섰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개숙여 꾸벅 인사했다.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네요. 행복한 약혼되세요.”
그는 이번만큼은 내 말에 슬픔을 드러내거나, 실망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저,
“…….”
나를 관찰하듯 오묘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멋쩍어서 괜히,
“그런데, 사람들이 다 궁금해 하던데. 그 약혼녀가 누구에요?”
했다. 그러자 시간이 멈췄다.
그는 싸늘한 달밤을 배경으로, 무엇보다도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제가 새벽을 밝히는 해라도 되겠다는 듯. 나는 그 미소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가 내게 천천히 저벅저벅, 걸어왔다. 나는 도망갈 수가 없었다.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는 숨을 헉 들이켰다.
“조금 나중에, 말하려고 했습니다만.”
그가 조그마한 직육면체 반지케이스를 열었다. 그리고 분명, 비어있어야 할 케이스에는 그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닮은 작은 반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나는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무릎을 꿇었다.
“결혼해 주십시오, 레이디.”
말이 안 나왔다.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거, 다 거짓말이었어요?”
이 혼돈 속에서 겨우내 쏟아져나온 말이었다.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약혼이 가짜였다. 문득 그가 나에게 그의 약혼 반지를 보여준 날이 기억났다. 내가 그의 약혼 소식을 하녀들에게 전해 듣게 된 그 날.
‘약혼 축하해요.’
쓸쓸한 얼굴로 그의 약혼을 축하하는 나를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우리의 행복한 미래를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내 감정을 더 자극하면 내가 결국 내 마음을 인정할 거라고. 결국 그 다음에는 해피 엔딩이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 때, 내 처지와 감정에 대한 배려는 있었는지.
그는 내가 꾹꾹 눌러왔던 내 감정의 바다를 자극해 해일을 만들었고, 그 해일은 내 이성을 잠식했다. 거기에 나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그래, 그리고서는 지금 그는 여기서 내게 반지를 내밀고 있다.
어서 우리 함께 행복해지자고.
나는 그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모른다. 나를 좋아하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모른다.
그럴 만도 하다. 그는 공작이니까. 공작이어서, 애초에 사랑과 현실을 두고 현실을 택한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 우리는 이렇게 다르다.
“약혼했다는 거. 애초에, 나는. 아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내 의사도 묻지 않은 채, 내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내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는 지독히도 잘 들어맞았다.
그때, 실처럼 남아있는 기억이 떠올랐다.
다이애나.
‘미안해.’
그녀의 말이었다. 내가 계속 곱씹고, 곱씹던 말.
애초에 이 무도회에 가자고 했던 것도 그녀였다. 자꾸만 나를 두고 자리를 비워, 편지를 보내던 것도 그녀였다. 나는 손이 떨렸다. 설마, 설마 해서.
“제발, 우연히 여기에 왔다고 말해주세요.”
“말했잖습니까, 잭 제커시스가…….”
“다이애나!”
“…….”
“그 애도 당신 계획의 일부였어요?”
“예?”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요…….”
기만당했다.
내게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이 나 하나 갖자고 내 세상을 거짓으로 물들였다. 내 의사와 입장은 무시한 채로. 게다가 그는 내가 믿었던 내 친구까지 이용했다. 나는 이제 누구를 믿어야 좋을까?
나는 어찌할 도리를 모른다. 그대로 얼어붙는다. 나는 가만 내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반지.
“더 이상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내 눈물이 천천히 떨어진다. 내 앞에 싸늘한 얼굴로 서 있는 그 사람은 내가 알던 그가 아닌것 같았다. 그래서 더 슬펐다.
“제게, 화나셨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 서있는 내 자신이 마냥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정신이 멍했다. 그는 그런 나를 침착하게 바라본다. 우리는 왜 이렇게, 엇갈려야 하는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럼에도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어서 더 슬프다. 그리고 화가 났다. 그동안 내가 그로 인해 상처받고, 조마조마하고, 울었던 시간이 다 무의미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여태껏 그의 거짓말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숨통을 조이고 나를 미치게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래서 뭐.
순간 감성을 가르고 차가운 이성이 끼어들었다. 그 이유만으로 내가 그를 떠날 수 있을까. 그는 나를 놓지 않을 것이고, 나는 그를 여전히 사랑했다.
그래, 그가 설령 거짓말을 했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거였다. 그의 악덕이 나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는 변명이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 사랑은 내게 그랬다. 설령 당신이 사람을 죽이더라도, 당신이 무슨 짓을 더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이렇게 평생 용서하겠지. 나는 생각하는 걸 그만두었다. 가슴이 쓰렸다.
“왜…….”
나를 현실으로 데려온 것은 그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왜…울고 계십니까.”
나는 감정에 매몰되어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울고 있었다. 어렸을 때, 루이지애나 고모는 항상 내가 생각이 많다고 했다. 생각이 많으면 그 상황에서 무엇이 이득인지를 잘 보지 못한다고, 마치 한 치의 빛도 용납되지 않는 굴을 파고 있는 두더지와 같다고.
그래서 한 가문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는 좋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내가 루이지애나 고모처럼 현명했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그 사람이 나를 보고 있다. 그가 결혼하자고 말한다.
“제가,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네? 울지 마십시오. 저는, 아니, 제가…….”
그는 안절부절 못한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린다.
“제게 실망하셨습니까?”
나를 보는 눈빛이 간절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때로, 우리는 감정이라는 것을 쫓아,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나비를 쫓다가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한 소녀처럼, 엉켜버려 어디가 시작인지 모르는 털실처럼.
그렇게 감정이라는 것은 마음속에 고여, 썩기도 하고. 사람을 무너트리기도 하고, 숨조차 쉬지도 못하게 극단으로 몰기도 한다. 그리고 이때, 사람은 생각한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더라?
우리는 모른다. 그냥 다만 지금을 살아갈 뿐이었다.
“다이애나 그린힐 양께 도움을 받은 것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
“제가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라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약혼도……. 하.”
그는 제 머리를 거칠게 털어내듯 정리했다.
“미안합니다.”
확실히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하지만 이 일그러진 천칭과 같은 관계를 우리는 놓지 못한다. 그리고 서로에게서 뒷걸음쳐 도망쳐봤자, 지금을 피하려고 해봤자, 우리는 서로를 놓지 못한다. 그렇게 그를 밀어내자는 플랜 A가 실패했다.
그래서 그를 밀어내는 대신, 그의 옆에 그저 서기로 했다. 다만 영원만큼은 믿지 않기로 결심했다. 지극히 즐기며 사랑에 한 다리를, 안전에 온 몸을 걸치고 있다 그가 변심할 새면 사랑에 걸친 다리를 빼내는 것이다. 간단했다.
“항상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 때, 그가 고해하듯 털어놓았다.
“제게 모든 일은 그랬습니다. 태어나서 생존을 배웠고, 그 다음으로는 이기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늘 해오던 방식대로 제게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을 썼습니다. 당신의 친구였죠. 제가 당신에게 그러면 안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절박했습니다.”
“공작 전하께선, 왜…….”
소설 속 여주인공 같은, 사랑만 할 줄 아는 천사를 만나 행복해지지 못했을까?
애초에 내가 당신의 사랑을 믿고 당신을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당신을 극단으로 몰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이런 소모적인 일을 벌이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그러면 나한테 이렇게 제 악덕에 대해서도 사과할 일도 없었을 텐데.
이 부분에서는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나는 그의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이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아프게 될 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나를 지금 잡아두려는 그의 손아귀에 스스로 내 자신을 가둔다.
나는 그에게 애써 밝게 미소지었다.
“됐어요. 그냥 못들은 걸로 하세요. 그냥 가요.”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어디로 말입니까?”
“어디든.”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제야 그가 환하게 웃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채로 그냥 내가 울음을 그치니까 웃는다.
“제, 제가 좋은 튤립 정원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요트를 탈 수 있는 데도 있고…….”
기뻐한다.
순수하게 소년처럼.
하지만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그 순진함 뒤에 숨겨진 냉혹한 군주.
당신은 인간을 잘 모르면서도 잘 알았다. 그랬기에 모두의 위에 군림했다. 당신은 인간의 욕망을 이용해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일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당신은 마음을 꿰뚫는 군주로서의 기본적 자질이 지독하게 뛰어났고,
그래서 비로소 당신이 나를 떠날 때에서야 내가 당신을 바라볼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신은 사람을 자극할 줄 안다. 그리고 스스로의 가짜 배려가 낳은 감동으로 내 사랑을 얻을 것을 안다. 그래서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이용했을 뿐이다.
이때, 나와 그의 극단이 부딪혀 파멸이 있었다.
그럼 돌을 던진 이는 누구인가? 죄인은 누구인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살기 위해 각자의 방식대로 비틀려 넝쿨처럼 얽혀버렸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부터, 정말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당신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이 마음을 인정받고, 보상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지금 이 때 내 최선은 그저 이 사람의 사랑이, 최대한 오래. 오래 지속되기만을 바라며. 많이 기대하지는 않는 것 밖에 없겠지.
그래, 더 좋아해줘요. 사랑해줘요. 아껴주세요. 그게 당신이 나한테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예요.
그냥, 그렇다구요.
“반지 고마워요.”
사실 내가 심각한 관용을 베푸는 듯 말하지만, 난 오히려 손해볼 것이 없는 사람이다. 지금을 즐기자. 카르페 디엠. 차기 레이디 화이트가 되는 것을 실컷 즐기고, 그가 주는 사랑을 마음껏 받아 마시고, 다만 영원만을 믿지만을 말자. 그래, 그러자.
나만 조심한다면 결국 이렇게도 쉬운 일일 것을.
“결혼……. 해 주시는 겁니까?”
“지금은 약혼으로 하죠. 결혼은 너무 갑작스러워요.”
그가 갑자기 나를 끌어안는다.
“꺅!”
허리를 잡고 빙글 돌려 다시 끌어안는다. 볼에, 이마에, 코에 조심스레 입을 맞춘다. 깔끔한 그의 체향에, 단정한 섬유 향기가 섞여 난다.
“감사합니다. 정말, 기쁩니다.”
으스러질 듯, 꼭 껴안는다. 그의 심장박동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파티는 즐길 거에요. 아직 한창이라서.”
“예, 그럼 조금 더 있다가 가도록 하죠.”
내가 그의 손을 잡아 깍지를 낀다. 그는 아무 말은 하지 않으면서도, 작은 미소는 입술에 걸고 있다. 좋아 죽겠다는 게 말은 안 해도 보인다. 맞잡은 손 사이로 두 개의 반지가 느껴진다. 하나는 그의 것, 하나는 나의 것. 파티가 한창이었다. 빛무리가 가까워진다.
영원을 가정하지 않아서, 이 사랑은 지금 영원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아이러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