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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새벽에서 아침까지
From dawn, till morning
무도회는 그렇게 다시 내가 서있는 현실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나는 화려한 빛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내 옆에는 그렇게 바라마지 않던 내 사람, 제롬이 서있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항상 제 약혼녀, 세실리아를 여러분께 소개시켜 드릴 날을 기다려왔었는데 영광입니다. 율러를 보살피는 모든 신께서 이 날을 축복하시고…….”
나는 화려하게 웃어보인다. 붉은 입술을 쭉 찢어 미소지어보인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와인을 쭉 들이킨다.
그때 고개를 들어보니 눈이 마주쳤다. 잭이 난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가 뒤돈다. 아마도 그가 바라는 나의 모습은 이런 것이었을까, 제롬 옆에서 어설프게 웃고 있는 나.
제롬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 넷은 나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필리아스 소니도르, 리아나 융커, 엘리자베스 코너, 리암 파커. 이름만 대면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만한 율러의 거물급 인사였다. 제롬과 동류라고 간주될 만한 사람들이자, 1류, 이 왕국의 주역들.
이곳에 서 있는 내가 가만 어색하다. 그의 세계는 어쩌면 내가 아는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이질적인 팔레트에, 섞이지 못하는 물감 하나.
그의 손이 내 허리를 감싼다. 엘리자베스 코너가 묻는다.
“어떻게 저런 멋진 남자를 사로잡으신 거예요? 나도 좀 알고 싶은데.”
“전 한 게 없죠. 우리 공작 전하께서…….”
“제롬.”
그가 나를 바라본다.
“이제 이름으로 불러 주십시오, 제롬.”
“그래요. 제롬이 발코니에서 와인에 취해있던 제게 먼저 다가왔어요. 그이가.”
“세상에.”
“그리고 뭐, 마법처럼 우리는 뭐, 그렇게……. 전 한 게 없었죠. 정말.”
말 그대로 언제나 내 뒤를 쫓는 것은 그 사람이었고, 그 사람에게서 도망치던 건 나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사랑은 어쩌면 영원할지도 몰랐지만, 지위, 부, 명성이 너무나도 다른 우리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을 언젠가는 한번쯤 불신하게 된다.
사랑이 영원하다는 게 정말 맞는 걸까? 정말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이 영원할까?
그 사랑이라는 끈이 끊어졌을 때를 항상 걱정하며 내일을 준비하는 게 나라서. 그리고 그 끈이 끊어졌을 때,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그가 아니라, 벼랑 끝에 서 있는 나라서.
그리고 그 걱정 속에서 불어난 불신이 나를 집어삼키고, 항상 우위에 있는 그가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을 때. 이해하지 못하고 마냥 그 줄을 끌어당기기만 할 때.
사랑은 엇갈려 파멸에 접어든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인가요?”
필리아스 소니도르가 물었다.
“저는 절대, 절대 공작께서 결혼할 줄 몰랐습니다. 워낙 여자에 관심이 없으신데다가,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혈한이라…….”
“그 이야기는 그만 합시다, 필리아스.”
“그래요, 그래요 전하. 우리 모두 행복한 커플들에게 건배합시다.”
짠! 소리와 함께 사람들은 각제 들고 있던 와인을 들이켰다.
“전 항상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세실리아가 예스라고 말하기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교회 종을 울리라고 할 겁니다.”
“어머, 로맨틱해라.”
리아나가 거들었다. 나는 그저 웃어보였다.
“정말 사람들은 다 제 짝이 있다는 말이 맞나봐요. 공작 전하께서 결혼하시니. 다행이네요. 제롬 공작 전하를 닮은 후계라면 분명 웨스트 체셔의 훌륭한 군주가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세실리아의 아이들이라면 분명 사랑스러울 겁니다.”
욱. 그 다음에는 마시던 와인이 사레가 들러 그대로 한동안 콜록거리며 기침을 해 댔다.
“세상에, 세실리아. 괜찮나요?”
“네, 저는……. 괜찮아요.”
“집에 가서 쉽시다. 세실리아.”
제롬이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누구 집이요?”
“누구…집이라니요? 세실리아. 당연히 우리 집 아니겠습니까.”
“‘우리’ 집이라니요, 아직 약혼이잖아요. 당신 집이겠죠. 실례하겠습니다.”
“세실리아!”
그가 나를 쫓아온다. 나는 재빨리 후문으로 향했다.
끝없는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걷고 또 걸었다. 그러자 문이 드디어 가까워졌다. 바깥 공기를 쐬면 기분이 조금 더 나아질 것만 같았다.
손에 끼워진 붉은 반지가 보였다. 나는 순간 자리에 멈춰서 망설였다. 이걸 빼야 할까, 어쩔까. 지금이라도 그냥 그 이한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도 다르고, 당신은 내 세계를 이해할 수 없을 테니 다른 길을 걷자고 할까. 생각에 잠겼다.
“세실리아.”
목소리가 들려 뒤를 바라보았다. 잭이였다. 급하게 뛰어온 모양인지, 머리에 땀이 맺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주저한다.
“세실리아.”
그 다음에는 제롬이 도착했다. 그가 경계어린 눈빛으로 잭을 바라보며, 나를 제 뒤에 두었다. 두 남자가 서로를 차가운 눈빛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내 약혼녀와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으니 이만 가 보도록.”
“세실리아, 난…….”
“그래요. 잭. 어서 가 봐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요, 전하.”
제롬과 뒤돌았을 때, 내 발걸음을 붙잡은 것은 잭의 목소리였다.
“못 보냅니다, 세실리아.”
“뭐?”
제롬이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보기 드문 그의 화난 얼굴이었다.
“죄송하지만, 전하. 제가 전하께 세실리아의 행방을 고한 것은, 온전히 그랬을 때 세실리아가 행복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군. 이만 떠나지.”
“세실리아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었다.
“세실리아, 사람들은 실수를 할 수 있어. 그 사람 옆에서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네 옆에 있을게. 난 널 웃게 할 자신이 있어.”
나는 한동안 그대로 굳어 서 있었다. 그대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세실리아는 내 약혼녀다.”
나는 제롬을 돌아보았다. 그가 내게 보여준 적 없는 한없이 싸늘한 얼굴과, 경계하는 눈빛으로 잭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한 적의이자, 살의까지 느껴졌다.
“율러에서 사업할 거였으면, 내 약혼녀에게서 떨어지는 편이 좋을 텐데.”
“상관없습니다.”
“뭐?”
“제 사업을 무너트리셔도, 괜찮습니다. 그 정도는 감수하겠습니다.”
“지금 누가…….”
나는 잭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빛을 머금어 반짝이고 있었고, 표정은 굳은 의지로 가득차 있었다.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내 컴포트 존을 벗어나지 않는 소시민이고, 그는 항상 도전하며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제 모든 걸 걸고 싸우는 승부사였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람의 애정을 거절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빨리 나를 잊을 수 있도록. 그리고 나를 향한 그의 고마운 애정이 그에게 독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도 나의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요, 잭. 그런데 잘못 보셨어요.”
내가 제롬 앞을 막아섰다.
“전 그냥 조금 피곤할 뿐이에요. 저를 좋아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저는 제롬을 좋아하고 있어요. 오늘 그와 약혼했고, 어쩌면 결혼도 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괜히 오해 사는 일 없게 다시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세실리아…….”
“걱정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만.”
그리고 나는 뒤돌았다. 그때, 손목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내가 뒤돌았다.
“가지 마…….”
눈물방울 하나가, 그의 볼을 가르고 떨어져 내려갔다.
“그 사람한테 가지 마.”
“…….”
감정이라는 건 참 이상하다.
이렇게 우리의 이성을 뒤흔들고, 삶을 뒤흔들며,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인생의 기로를 뿌리채 바꿔놓는다.
우리가 가진 것을 기꺼이 불태우면서라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까워지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