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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집에 원수를 들였다
Enemy in my house
어렸을 때, 동생과 젠가를 한 적이 있었다.
젠가. 단순한 놀이다.
우선 일정한 크기의 나무 블록을 바닥부터 쌓아 올려 하나의 탑을 만든다. 그리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탑이 무너지지 않게끔 나무블록을 안전하게 빼내는 놀이이다.
나는 조용히 젠가 탑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처음에는 중간에 있는 블록을 빼기 시작했다.
탑은 거뜬하다.
블록이 하나, 하나 더 빠져나가 젠가 탑에 구멍이 송송 나기 시작한다.
탑이 휘청인다.
이제는 위태롭다. 나와 동생 카밀리아는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블록 하나라도 잘못 뽑아내면 탑이 무너질 것 같다. 나는 젠가 탑을 유심히 바라본다. 탑이 위태로워보인다.
나는 조심스럽게 젠가 탑에서 나무블록 하나를 빼내었다.
그리고 꽝!
탑이 무너졌다.
마지막 나무 블록 하나가 탑을 무너트렸다 보기 힘들다. 나무블록이 하나, 하나 빠져나가며 탑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결국 하나의 촉매로 탑이 무너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상념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
나는 익숙한 나무문을 두드렸다. 답은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제롬은 침대에 힘없이 누워 있었다.
나는 입을 틀어막는다. 마음이 아프다. 제롬의 어머니가 세상을 뜬 뒤로 한 달 가까이 지났지만, 제롬은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 아직도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무기력했다.
오스카의 말에 의하면 제롬은 그의 아버지가 죽었던 그 날에도 이성을 잃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형, 요나단을 성에서 쫓아낸 날에도 소름끼칠 정도로 침착했다고 한다.
그런데 제롬은 그 날.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변했다. 처음에는 슬픔이었고, 그 다음에는 분노, 그 다음에는 무기력함이 그를 감쌌다. 나는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슬픔을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물론, 나 또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지만 나의 아픔이 제롬의 것과 같을 리가 없었다. 나는 그래서 침묵했다. 그게 가장 최선의 약일 줄 알고.
레이디 화이트가 내게 걸어준 목걸이는 내가 가지지 않았다. 돌아가신 레이디 화이트의 목에 걸어드리지도 않았다. 바다에 던졌다. 그러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나는 조심스레 제롬의 옆으로 걸어갔다. 제롬이 눈을 떠 나를 바라본다. 나는 제롬의 뺨을 조심스레 쓴다. 그리고 제롬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일어나 계셨네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녀들은 왜 들이지 않으시는 건가요. 방이 지저분해졌어.”
나는 그의 옆에 눕는다. 그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내 뺨을 쓴다.
“방에 와인병 굴러다니잖아요. 나중에 벌레 꼬여요, 치워야지.”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뭐. 청소는 제가 하면 되죠.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합니다.”
“제롬.”
나는 팔을 벌려 그를 껴안는다. 그의 머리가 내 가슴에 닿는다. 나는 그의 넓은 등을 쓰다듬는다. 그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온다.
“항상 행복하기만 한 사람이 어딨어요.”
나는 조심스레 웃어보인다.
“힘들 때 옆에 있어주니까, 가족이죠. 그쵸?”
“그렇습니다.”
“괜찮아질 거예요.”
나는 그의 등을 천천히 쓴다.
“물론 제가 감히 그렇게 말할 순 없겠지만 말이에요. 제롬이 얼마나 아플지 저는 상상할 수가 없어요. 그래도 제가 이렇게 옆에 있다는 건 알려 주려고요.”
“고맙습니다.”
나는 말없이 그의 체온을 느낀다. 그도 그러했다.
오후에는 아그니스가 오랜만에 웨스트 체셔에 찾아왔다. 그녀가 응접실에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체통도 잊어먹고 응접실 문을 소리나게 열었다. 숨을 헐떡이며 멀리 놓여있을 티테이블을 바라보자, 그곳에 아그니스가 있었다.
정말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아그니스가 그곳에 있었다.
“시시!”
아그니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녀에게로 달려가 안겼고, 우리는 한참동안 서로를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 가족이 주는 안락함. 그 감정을 단어로 감히 표현하지 못했다.
오, 아그니스. 나의 신실한 사촌이자, 벗. 언젠가 루이지애나 고모가 ‘가족은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네가 가진 최고이다.’ 라는 말을 한 기억이 났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그 말을 들었을 때가, 나와 아그니스가 못난이 인형을 두고 서로 싸울 때였나. 그 소녀 시절이 이렇게 지나 지금이 있었다. 시간이 어쩔 땐, 참 무서웠다.
“보고 싶었어.”
“나도.”
미소지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소중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를 껴안은 팔을 천천히 풀고 아그니스의 얼굴을 조심히 살폈다. 나와 그녀의 시선이 만난다.
“이제, 레이디 화이트라고 불러야 되나?”
그녀가 장난스레 물었지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세실리아.”
“좋아.”
“아니면, 평소대로 시시. 세실리.”
“알았어.”
우리는 그리고 한동안 웃었다. 티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았다.
“사는 건 어때?”
아그니스가, 마치 오늘 날씨는 어때. 묻는 사람처럼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좋아.”
“나도 그래. 좋아. 딱 그거야.”
“로징턴 경영은 잘 되어가?”
“맞아. 좋아. 후세를 봐야 한다는 가신들이 없어서 얼마나 상큼한지 몰라. 유일하게 나를 괴롭히는 건, 결혼하라는 엄마의 잔소린데 그건 참을 만 해.”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어떡해. 정말, 아그니스. 미안해. 이건 다 내 잘못이야.”
“괜찮아, 괜찮아. 기사로서의 삶도 좋아. 그런데 여행하는 건, 그것도 특히 여자가 여행하는 건 고된 일이잖아. 그래서 네 도움을 빌려서 왕궁시녀라도 되어 볼까, 생각했는데 그건 힘들겠더라고. 권모술수는 내 적성이 아니라서. 난 무식하게 칼 휘두르는 거 이런 게 좋아.”
아그니스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그때, 하늘에서 영지가 떨어져 내리니 참 좋은 일이지. 오빠 밑에서 얹혀사는 것도 고문일 텐데, 오. 세실리. 새 레이디 카터 되실 분은 얼마나 잔소리가 많은지.”
“프리츠의 약혼녀?”
“그래! 그 여자랑, 그 여자한테 질질 끌려다니면서 한마디 못하는 오빠 때문에 신경쇠약에라도 걸릴 것 같았는데. 그때 하늘에서 영지가 떨어져 내리니 환상적이었지.”
나는 아그니스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하는 말은 아마 진심이 아닐 것이었다. 아그니스는 기사로서의 삶을 동경해왔다. 그녀는 지금 영지에 얽매여 있는 것일 테다.
“아그니스.”
나는 나지막히 그녀를 보낸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
“아, 물론 그랬지. 사례는 테네시 제과의 머랭 쿠키 세트로…….”
“아그니스.”
아그니스의 장난기 어린 눈빛이 사그라든다. 그녀가 고개를 숙여 제 손을 바라본다. 그녀의 스무살 인생 평생을 검을 잡아왔던 손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이제 떠나도 좋아. 로즈블룸은……. 내가 알아서 할게.”
한동안 침묵이 맴돌았다. 아그니스가 미소지어보였다.
“고마워, 세실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작별인사겠네.”
“지금……. 떠나게? 벌써? 너무 급작스러운데.”
“너도 이제 행복한 동화 속 결말을 맞았고, 다이애나도 제 선택을 했어. 그리고 새로운 삶과, 그 가능성 앞에 놓여 매일 훌륭한 선택을 이어가겠지. 그리고 나는.”
그녀의 금빛 눈이 확신에 차 있었다.
“지금부터라도 내 선택을 해나가려 해.”
나는 침묵했다. 그녀는 마치 바람과도 같았다. 붙잡아 둘 수 없는 무언가. 아그니스 카터. 아름다운 외모와, 찬란한 금빛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녀는 절대 레이디가 아니었다. 수많은 훌륭한 신사들이 구혼했지만 그녀는 거절하고 제 길을 걸어갔다.
그녀가 언젠가, 달밤에 나와 같이 흔들그네를 타며 검은 그녀의 운명이라고 했다. 나는 그것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아그니스가 미소지어보인다.
다이애나처럼, 누군가는 제 어릴 적 꿈에서 깨어나 정해진 길을 착실히 걷기도 한다. 아그니스처럼, 안정과 안락이 보장된 길을 버리고는 험한 가시밭길을 개척하려 하는 사람 또한 있다. 그리고 나처럼. 어려운 삶이라는 터널을 걷고 걷다 보면.
운명을 만나는 사람 또한 있다. 그랬기에. 우리는 이런 끝없는 길을 걸어나가는 우리 스스로의 인생이라는 이야기의 개척자이기에. 고난이 있어도, 역경이 있어도.
더 나은 내일이 있을 이 삶이 소중해지고야 말아지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감는다.
그 때, 기억나는 것이 있어 눈을 뜬다.
“아그니스, 저번에 우리 했었던 약속 기억나?”
“응? 어떤 거?”
“축제 가자고 했던 거. 오늘이 축제 마지막 날 아니야?”
“맞다!”
그녀가 부러 박수를 짝 쳤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네. 완전히 잊고 있었어.”
“물의 언어술사 찾는 축제……. 화려하단 이야기만 듣고 가본 적은 없었는데. 오늘 꼭 가보고 싶다. 지금 잠시 나갔다 오자.”
“그래, 좋아! 가자!”
우리는 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제롬이 걱정되었지만, 아그니스와 함께 공유할 마지막 즐거운 기억을 놓칠 수 없어 축제에 가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
물의 언어술사를 찾는 축제.
제도에서 열리는 성대한 축제는 저택에서 너무 먼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웨스트 체셔 내에서 열리는 축제에 참가했다. 축제의 규모는 많이 크진 않았지만 충분히 화려했다.
우리는 값싼 옷에 망토를 눌러쓰고 있었고, 시장의 그 인파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벌써 해는 뉘엿뉘엿 지평선을 넘고 있었지만, 사실 그 때부터가 축제의 시작이었다.
친숙하고 낡은 좌판들이 펼쳐져있었고, 그 위로 화려하게 제 빛을 발하는 등불들이 예쁘게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입을 헤 벌린 채 예쁜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세실리아!”
아그니스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저기, 저기 봐봐!”
그녀의 손가락 끝에는 노을 아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었다.
“춤 추고 싶지 않아?”
물론 흥미로워 보였지만, 제롬이 슬픔에 빠져 있는데 다른 남자랑 웃으며 춤을 추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그니스. 너는 가서 춰. 나는 조금 둘러볼게.”
“괜찮겠어? 공작 전하께서 나한테 신신당부하셨잖아, 너를 지키라고. 그게 추가로 기사들을 데려가지 않는 조건으로 붙은 거였지. 나는 그게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세실리.”
“괜찮아. 무슨 일이 일어나면 내가 다 책임질게.”
“책임이라는 건, 절대 가벼운 단어가 아냐. 세실리.”
그녀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절대 쉽게 말해서는 안 돼.”
“좋아, 그러면. 그래도 난 춤은 추고 싶지 않아.”
“그럼 나도야. 가자.”
그녀가 미소지어보였다. 우리는 여러 좌판을 둘러보았다. 아그니스는 점을 보고 있었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을 때였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거기 예쁜 아가씨.”
상인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나를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요?”
“그래요, 거기 예쁜 아가씨가 당신 빼고 누구 더 있어?”
“어머, 친절하셔라.”
“이리 와서 구경 좀 하고 가.”
“그럴까요?”
나는 타로 카드에 빠져있는 아그니스를 돌아보다 그 상인의 좌판으로 가까이 갔다. 어차피 타로를 봐주는 좌판에서 바로 두 칸 떨어진 곳이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
그의 좌판 위에 올려져 있던 것들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졌다. 그것들은 놀랍게도 모두 낡은 골동품들이었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철장미 브로치를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브로치 중간에 박힌 붉은 보석이라던가, 홀릴 듯한 보석의 속삭임에 나는 순간 넋을 놓았다. 낡은 철제 브로치가 유난히 신비해보였다.
“이거 제가…….”
순간 가로막혔다. 그 브로치를 집어 드는 손길이 있었다.
“내가 사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는 사내였다. 후드 바깥으로 드러난 금빛 고수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저런 골든블론드는 흔하지 않은데…….’
감상에 젖어있을 때 나는 흠칫 놀랐다. 후드 뒤의 사내가, 얼핏. 웃는 것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