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98화 (98/108)

<-- 집에 원수를 들였다 -->

“세실리아!”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아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옆을 돌아보았다. 아그니스가 불안으로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우리 같이 다녀야 한다고 했잖아!”

“미안해 아그니스, 나는 그냥…….”

“제발, 세실리아. 너를 잃어버린 줄 알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내가 아그니스에게 다시 사과하려 할 때,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름다운 아가씨를 뵙는군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까 브로치를 사려고 했던 그 골든블론드의 사내였다. 그가 아그니스에게 호의적으로 미소지어보였다. 아그니스는 그를 마주보았다.

“……내 사촌이 정말 예쁘긴 하죠.”

“아뇨.”

그가 아그니스의 손을 받아 입을 맞추었다.

“저는 당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입에 걸고 있는 미소는 아주 자신만만했다. 그와는 달리 아그니스의 표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검에 능하신 모양입니다. 레이디의 손이 아니군요.”

“제가 레이디나 기사일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죠?”

“아름다운 용모에서.”

사내가 매혹적으로 미소지었다.

“고결함이 느껴졌습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아그니스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외모에 대한 칭찬이었다. 반대로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은 그녀의 기사로서의 긍지를 찬양하는 말이었다.

사내가 그녀를 공략하려 했다면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다른 여자 알아보세요.”

아그니스의 거절은 그녀의 칼처럼 날카로웠다. 아그니스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가자, 시시.”

“어……. 응.”

나는 그녀에게 거의 끌려나가듯 자리를 떠야 했다. 하지만 사내는 끈질겼다. 빠른 걸음걸이로 우리에게 다가와 보폭을 맞췄다. 아그니스가 걸음을 멈췄다.

“전 이곳에 오래 있지도 않을 거고, 남자에 관심도 없어요!”

나는 조심스레 그 사내의 눈치를 살폈다. 용모를 보아하니 고위 귀족인 것 같아 보였는데, 자칫 무례해 보일 수 있는 아그니스의 언행이 그녀에게 해가 될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상황을 중재하기로 결심했다.

“……무, 무례를 용서하세요. 음. 낯선 신사님. 그러니까 제 친구는.”

“아, 그러고 보니 제 소개가 늦었군요.”

사내가 태연하게 미소지어보였다. 아그니스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이름은 아이작입니다. 아이작 밸런타인입니다.”

나는 상념에 잠겼다. 밸런타인 가에 아이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이 있었던가? 율리아와 네임북을 뒤적거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잘 모르고 있는 거겠지, 뭐. 나는 의심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 신사에게 호의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 반가워요. 저는 세실리아이고 이 친구는…….”

“아그니스 카터입니다. 기사이지요.”

아그니스가 말을 가로챘다. 그리고서는 곱게 미소지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여자가 남자에게 악수를 청하는 상황은 많지 않았으니까.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그니스의 악수를 받았다.

“윽.”

신음하며 미세하게 일그러진 그의 표정과는 달리, 아그니스는 고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럼.”

아그니스가 손을 놓아주자, 사내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붉어진 제 손을 감추었다.

“안녕히.”

아그니스가 예를 표했다. 하지만 사내, 그러니까 아이작이 바삐 끼어들었다.

“저는 재미있는 곳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동행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죄송하지만, 로드와 데이트를 즐기기엔 저도 일이 있어서요. 거절하겠습니다.”

그 일이라는 게 나를 의미하는 거였다. 나는 두 사람을 불안하게 번갈아보다, 저 귀족 나으리를 이렇게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비위가 상한 도련님은 분명 아그니스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었다. 장난으로 개미를 태워 버리듯, 그녀에게 끔찍한 일들을 저지를 수도 있겠지.

저 귀족 나으리를 행복한 기분으로 집에 돌려보내야 했다. 지금 이 상황에 작별한다면 아마 상황이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갈 것만 같았다.

“아그니스. 우리는 이 축제에 처음이니까, 저 멋진 신사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안 그래요, 밸런타인 경?”

“후회하지 않으시게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와, 봐봐. 아그니스. 이렇게 잘생긴 신사분이 동행해주신다는데 너무 든든하다.”

아그니스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좋아요.”

나는 거의 환호할 뻔 했다. 사내가 피식 웃어보였다.

“함께 가시지요.”

그리고서는 아그니스에게 제 팔을 내밀었다. 아그니스의 눈빛에 고뇌가 어렸지만, 아그니스는 나를 힐끔 보고는 그의 에스코트에 응했다. 내가 워낙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어서였을까. 아그니스는 거의 체념한 얼굴로 신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제 친구도 동행한다는 조건에요.”

“물론입니다.”

“두 분의 오붓한 시간을 제가 방해하는 건 아닐지 모르겠네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아그니스가 나를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나는 입을 닫았다. 아이작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두 숙녀분과 함께하는 것은 제 영광입니다.”

“좋아요. 어서 재밌는 것들 보러 가요.”

밤이 점점 어두워지고, 축제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제롬을 데리고 왔으면 더블데이트였으려나. 나는 상념에 잠겼다.

사람 한명이 늘었지만, 여정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똑같이 좌판을 둘러보았고, 아름다운 밤하늘에 똑같이 감탄했고, 멀리서 들려오는 감미로운 음악소리에 심취했다.

“세상에, 빵 굽는 냄새가 이렇게 좋을지 몰랐네요.”

거리를 거닐다, 내가 등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웨스트 체셔는 밀을 이용한 음식이 특히 많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밀 뿐만 아니더라도, 부드러운 귀리빵은 많은 평민들의 배를 불려 주었죠. 그렇다 해서 평민에게만 귀속된 음식은 아닙니다, 빵이. 그 훌륭한 식감에 빵을 사랑했던 귀족들이 많으니까요.”

“아이작 경은 정말 아는 것이 많으시네요.”

내 말에 그가 낮게 웃었다.

“아마 웨스트 체셔에 대해 모르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제 친구가 이런 훌륭한 에스코트와 함께하고 있다니, 행복하네요.”

나는 그에게 웃어보이고서는 빵을 팔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제빵사가 즉석에서 빵을 굽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서 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기다려야 되겠네.”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내 시선이 멀리서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저는 줄을 서서 기다리려고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두 분은 뭐…춤이라도 추고 있으시겠어요?”

그러고 보니 아까 아그니스가 춤을 추고 싶다고 했었나. 나는 동의를 구하는 표정으로 아그니스를 바라보았다. 아그니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사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아그니스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아이작이 빨랐다.

“그럴 수 있다면 영광이겠습니다.”

아이작이 여유있는 미소를 지어보인다. 아그니스는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그니스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얼굴에서 어둠을 지워내고선 짓궂게 미소지었다.

“잘생긴 신사분과 춤 출 수 있는 기회를 왜 마다하겠어요?”

그리고서는 호전적인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가요.”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내가 감히 예측하건데, 아그니스는 춤을 추러 간 것이 아니라 사내의 발을 밟으러 간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알 바는 아니지! 나는 생각을 털어냈다.

빵을 사기 위해 기다리는 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 * *

아, 축제의 밤이란.

나는 촉촉한 귀리 빵덩어리를 뜯어먹으며 사람들이 춤추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그니스는 아이작과 함께 춤추고 있었는데, 음악이 그랬는지, 분위기가 그랬는지. 아그니스는 아까와는 달리 한결 경계를 낮춘 표정으로 춤에 심취해 있었다. 아그니스가 아이작의 발을 자주 밟고 있었다는 것만 제외하고는 모든 게 완벽했다.

아이작은 그녀를 보고 드문드문 미소지었다. 그리고 아그니스 또한, 믿지 못하겠지만 그랬다. 화려한 불빛 아래서 사내의 눈이 빛났다. 그는 정말로 사랑에 빠진 사람 같아 보였다.

‘정말 기름과 물 같다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함께 있으니까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저, 저…….”

순박한 청년 같아 보였다. 귀족은 아니고, 흙내음 물씬 나는 동네 청년. 붉어진 얼굴을 한 그의 뒤로 사내들 몇이 킥킥대며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제가. 제가.”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청년이 말을 끝마치기를 기다렸다.

“춤추러 가지 않으시겠, 물론 싫으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저는 그러니까.”

나는 그와, 그의 뒤에 있는 사내들 무리를 번갈아보았다.

“제가 승낙해야 내기에서 이기실 수 있는 건가요?”

“아, 아닙니다.”

청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을 내저었다.

“첫. 첫눈에 반했습니다. 그러니까…….”

“죄송해요.”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말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에게 미소지어보였다.

“결혼했거든요.”

그가 그제야 내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 눈을 휘둥그래 떴다.

“레, 레, 레이디.”

그리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땅에 엎드렸다.

“죽여주십시오, 레이디! 제가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죽여주십…….”

“괜찮아요.”

내가 웃으며 그를 일으켰다. 먹던 빵을 조금 뜯어 그에게 나누어주었다.

“좋은 사람 만나실 거예요.”

사내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던 찰나에, 아그니스와 아이작이 돌아왔다.

“즐거운 시간 보내셨나 보네요.”

“아이작 밸런타인 경이 조금 더 훌륭한 댄서였다면 조금 다를 지도 몰랐죠.”

아그니스가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아이작을 보았다. 아이작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아아, 제가 포크 댄스에는 소질이 없습니다만.”

“이런 축제 많이 다녀 보셨다면서요?”

“춤은 잘 추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아그니스가 웃어보였다.

“그럼 무도회에서는요?”

“환상적인 댄서이겠지요. 포크 댄스에만 면역이 없을 뿐입니다.”

“자만하시는군요, 아이작 밸런타인 경.”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아이작이 매혹적인 미소를 입에 걸고 아그니스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2주 뒤에 무도회가 열리지 않습니까.”

“그 땐 전 이 땅에 없을 예정이에요.”

아그니스는 완강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 완벽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응수했다.

“그렇군요.”

“네. 정말 유감스럽게도 그래요.”

“후회하실 지도 모를 텐데 말입니다.”

그가 낮게 웃었다. 아그니스는 이상한 기류를 눈치채고는 미간을 좁혔다.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어요, 아이작 경?”

“아닙니다.”

아이작이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충분히 어두워졌습니다. 이제 두 레이디께서는 집으로 향해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맞아요.”

나는 애써 태연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아그니스를 돌아보았다. 아그니스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지 표정이 어두웠다. 나는 다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이제 작별이군요, 아이작 경. 그럼 안녕히.”

나는 예를 차리고 뒤돌아섰다. 하지만 곧 그에게 가로막혔다.

“어디로 향하십니까.”

긴 그림자가 나와 아그니스를 덮는다.

“공작가로요.”

태연히 응수했다. 공작가로 향할 예정이니 더 이상 귀찮게 굴지 말라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아아, 잘 되었습니다.”

그가 황홀하게 미소지었다.

“저도, 마침. 그 곳에 볼 일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늦었습니다. 아이작 경. 용무가 있으시다면 나중에 찾아오는 게 좋겠지요.”

“아뇨.”

깔끔한 답변이었다. 진한 푸른 눈동자에는 질척한 감정이 눌러붙어 동요 없이 타오른다.

“공작이 저를 반기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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