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102화 (102/108)

<-- 집에 원수를 들였다 -->

“제롬.”

나는 제롬에게로 걸어갔다. 제롬은 떨고 있었다. 그가 떤다는 게 내 상식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제롬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얬다.

그의 입술은 창백했고 그의 시선은 공허했다. 요나단. 요나단이 그랬다. 내가 제롬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요나단은 그를 무너트렸다.

“정신 차려요, 제롬! 나, 여기 있잖아요. 여길 봐요…….”

그의 눈에 초점이 잡히지 않는다. 나는 어찌할 도리를 모른다.

“요나단이 한 말, 다 신경쓰지 마세요. 네?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아닙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그가 옳습니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제롬은 한자 한자 짓씹듯 내뱉는다.

“저는 괴물입니다.”

“제롬!”

내가 그와 시선을 맞추려 하자 그는 내 것을 피한다.

“정신 차려요. 이럴수록 더 강해져야 돼요. 그 악마의 말을 믿으면…….”

“모르시겠습니까?”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으로. 나한테.

“요나단의 말이 맞습니다. 제가 악마입니다.”

그의 얼굴에서 우러나는 끝없는 자기혐오. 그리고 비관. 냉소. 제롬은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든 걸까. 나는 탄식했다.

그 전쟁이 그를 이렇게 만든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말끔한 미소와 단정한 태도. 한없이도 굳건할 것만 같던 나의 방패. 그런 그가 잔상이 되어 내 앞에 흐릿하게 그려졌다, 바람이 되어 사라진다.

그는 한없이도 강한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그를 보고 있자니 그는 내 신이 아니라, 구원자가 아니라. 그저 한낱 인간과도 같아 보였다.

전쟁이 그를 무너트린 걸까, 그의 어머니의 죽음이 그를 무너트린걸까, 그의 형제의 날카로운 비수가 그를 무너트린 걸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쳤다. 내 낙원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완벽하다 믿었던 내 낙원이 하나하나 무너져 조각이 되어 바닥에 뒹군다.

요나단이 부쉈다. 내 굳건한 낙원을. 요나단이 그랬다. 요나단, 요나단, 요나단…….

그래. 내 인생이 가장 완벽할 때, 세상에서 가장 완벽할 때. 제롬의 어머니가 죽었다. 그녀의 미소는 평화를 그림으로 그려낸 듯 편안했다. 제롬은 망가졌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요나단이. 그 흔들리는 탑에서 마지막 젠가를 빼냈다. 그리고 탑은 무너졌다.

나는 텅 빈 복도를 내달렸다. 이건 악몽이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

“마님!”

어떻게 당신이 그래?

“제발, 제발 진정하세요! 제발!”

내 낙원을 그렇게 무너트릴 수 있어?

쾅.

나는 요나단의 방문을 열었다. 떨리는 내 손은 큰 검을 쥐고 있었다. 아까 복도에 있는 갑옷에서 빼내온 것이었다. 나는 씩씩대며 요나단의 빈 방을 살폈다.

비툴게 걸려있는 액자, 굴러다니는 와인병,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그리고 요나단은 없었다. 그는 가고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아마 울기도 한 것 같았다. 내가 듣는 내 울음소리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붉은 카펫 위로 내 손이 박힌다. 손이 떨린다.

가장 화나는 것은 내 모든 것이 이렇게 쉽게 망가졌는데,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신이 흐릿해진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한 건.’

요나단이 내게 했던 말들이 내게 와, 선명하게 뇌리에 각인되듯 박힌다.

‘널 망가트리는 게 먼저였기 때문이야.’

그가 미소지었었지.

‘난 내 동생의 손으로 직접 너를 없애게 할 거고. 그 다음에는 내 동생이 불행으로, 그리고 흘러넘치는 힘으로 이 나라에 파멸을 가져오는 걸 지켜볼거야.’

그 잔상을 뒤로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 *

일주일이 지났다.

아주 정말 좋은 오후였다. 나는 웃으며 찻잔을 들어올려 차를 마셨다. 내 미소는 평안했지만, 손은 속절없이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제롬을 바라본다, 제롬은 그의 책상 앞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웃고 있지만 표정의 색은 없다.

나는 차를 마신다. 평소 일상적으로 해 왔던 동작이라는 듯, 따뜻한 차를 입 안으로 밀어넣는다. 혀가 재빨리 차를 받아들인다. 쓰다, 뜨뜻하다, 깔끔하다.

머릿속이 멍했다. 나는 다시 차를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쓰다, 뜨뜻하다, 깔끔하다. 나는 차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만 찻잔을 내려놓으려다가 손이 조금 미끌렸다.

짤그랑. 내 찻잔이 컵받침대 위로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제롬이 놀란 듯 움찔한다. 하지만 그의 얼굴의 표정은 지워진지 오래. 나는 곧 평형을 찾은 차의 수면을 바라본다.

컵 속 작은 노란 호수. 연기도 난다. 그리고 그걸 들여다보는 내가 있다. 웃고 있다. 그런데 색채는 없다. 색채가 너무 없어서 노란 호수가 그 투명을 잠식해버릴 것만 같다.

“오늘 날씨가 정말 좋네요.”

답장은 돌아오지 않는다. 깃펜 움직이는 소리만 가득했다.

“그렇지 않나요, 제롬.”

“그렇습니다.”

예약이라도 해 놓은 듯 한 답변이 돌아온다.

“이런 날씨라면 꽃들도 좋아할 거예요.”

“예.”

얼마나 평범하고 정상적이며, 부부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인가. 하지만 겉보기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하지 않는가. 나는 조용히 차를 마신다. 좋은 차의 향기가 밀려든다.

그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 쪽을 바라본다.

“들어와요.”

하녀 한 명이 들어온다. 그녀가 편지를 내민다.

“편지가 왔습니다, 레이디.”

“음.”

나는 편지를 받아든다. 하녀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문 뒤로 사라진다.

“제롬, 편지가 왔어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편지 내용이 궁금하지 않나요?”

“전형적인 오후에 레이디에게 올 법한 편지이지 않겠습니까.”

나는 부러 까르륵 소리를 내며 웃었다.

“역시 제롬, 당신은 훌륭한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군요. 열어보겠어요.”

그리고 첫 번째 편지를 보는 순간, 내 괜찮던 세상이 멈췄다.

두 번째 편지는 판도라의 상자 바닥에 눌러붙어 있던 ‘희망’ 이었다. 아그니스였다.

* * *

응접실에서, 나와 아그니스는 마주보고 있었다. 나는 굳이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았고, 아그니스는 내 표정을 살피느라 바빴다. 그녀의 눈빛이 굉장한 염려를 담고 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 세실리.”

아그니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가 떨리는 내 손을 잡아주고는 말했다.

“너에겐 내가 필요해. 난 아무데도 안 갈거야. 여기서 네 옆에 있을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그니스한테 나랑 로징턴은 신경쓰지 말라고, 가라고 해야 하는데. 지금 내게 남은 건 아그니스뿐이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 얼마나 비참한지.

나는 이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 세상에서 나를 지워야 했다. 아그니스가 떨리는 눈빛에 나를 담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아마 이곳에서 가장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사람은 아그니스뿐일 것이다. 나와 제롬은 진즉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그니스는 조심스레 내 표정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물론 기사가 되어 훌륭한 주군을 섬기러 세상을 여행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래, 아그니스.”

나는 황홀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보였다.

“잘 생각했어. 난 네가 필요해.”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쥐었다.

“너는 내가 가진, 마지막 희망이야. 가족이잖아. 응?”

내 마지막 희망이야.

가족이잖아.

곱씹었다.

얼마나 날카롭고 대단한 못일까. 아그니스의 옷자락을 율러 왕국이라는 판자에 박아놓을 대단한 못. 그래, 내가 하고 있는 짓은 매우 잔인한 일이었다.

아그니스에게는 고문과도 같은 일. 나는 동정심이라는 못으로 그녀를 억지로 잡아두려 하고 있었다. 아그니스의 표정이 수그러든다. 그녀는 애써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그래. 이럴수록 서로를 도와야지. 가족이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짐짓 씁쓸하다. 나는 그 말이 문장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을 알지만 이기적으로 무시한다. 차를 마신다.

“오늘 오후에 편지를 받았어.”

내 말에 아그니스가 나를 본다.

“화이트 공작가의 가신들이 보낸 편지였고, 화이트 공작가의 직계과 방계 후손들이 내게 보낸 편지였어. 그들이 수도에 도착했다고 해. 나를 기다리고 있대.”

“도대체 왜?”

“재판.”

내가 쓰게 웃어보였다.

“나보고 재판에 모습을 드러내래.”

“재판은 왜 하는데?”

“그들은 내가 제롬의 어머니를 죽였다고 생각하나봐.”

“세상에, 세실리!”

아그니스가 놀란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다.

“너, 정말 그러진 않았지? 설마. 설마.”

그녀의 아름다운 금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안 했어.”

나는 쓸쓸하게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자꾸 세상이 내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자꾸 나더러 제롬의 어머니를 죽였냐고 물으니까. 가끔씩은 내가 정말 그러지 않았나, 생각도 들어.”

“세실리아 화이트!”

아그니스가 쾅 티테이블을 내리쳤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너 나한테 확실히 말해. 네가 했어, 안 했어.”

“나도 몰라.”

나는 두 손에 머리를 묻었다.

“가끔씩 꿈을 꿔. 사람들이 나더러 마녀라고 해. 아니, 근데 그게 현실인가? 헷갈려.”

“정신 차려, 세실리아. 강해져야 돼.”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그만!”

아그니스가 일어나, 내 어깨를 잡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방금 나한테 너는 레이디 화이트를 죽이지 않았다 했어.”

“그래, 그랬지.”

“그럼 그걸 기억해야 돼. 네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그녀의 눈빛이 완강했다. 나는 침묵했다. 그리고 쓸쓸히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내 남편도 나를 이제 믿지 않는 것 같아.”

손이 떨렸다.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재판이 곧 다가와요.’

내가 제롬에게 말했었다. 제롬은 그저 멍한 얼굴로 깃펜을 끄적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제롬, 말 좀 해봐요.’

‘무슨 말이라도 하셨습니까?’

‘재판이요. 요나단 화이트가…….’

제롬의 낮빛이 변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는 다시 고개를 숙여 깃펜을 끄적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뒤돌았다.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공허하게 내 결혼반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맞은 편에 앉은 아그니스를 바라보았다.

“나,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재판도 무서워. 예언이 무서워. 그래, 신탁. 그게 현실이 되고 있는 거야. 물의 언어술사가, 물의 언어술사는 율러 왕국에 곧…….”

그때 얼음처럼 차가운 아그니스의 목소리가 밀려들었다.

“카밀리아를 생각해.”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떨렸다.

“그 아이는 어쩌고. 네가 잘못되면 분명 끙끙 앓을 아이라고.”

“그래서 노력했어. 속은 썩어 문드러져도 겉은 사람 구실하려 노력했어.”

“그건 사는 게 아니라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세실리. 난 그걸 말하는 게 아니었어.”

“사는 게 아니라…….”

사는게 아니라,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그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뜨였다. 생각의 폭포가 나에게로 밀려들어온다. 아그니스, 요나단, 왕세자비, 제롬. 그리고 지금. 나는 공허하게 아그니스 뒤에 떠도는 먼지같은 것들을 바라본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아그니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네 말이 맞아.”

나는 한숨을 내쉰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아그니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이제 네 갈 길을 가. 나도 그래야 되겠어. 우선 샬롯에게 편지를 써야 하고, 아, 샬롯이 꼭 도와준다고 해야 할 텐데. 그리고 또 로즈블룸. 그래 로즈블룸에 있는 검도…….”

“그게, 무슨 말이야?”

아그니스가 미간을 좁히며 나를 바라본다. 나는 웃어보인다. 순간 모든 고민이 증발하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해결책이 떠오르자 일순 행복해졌다. 내가 모르던 쾌락이 내 이성을 점철하고, 적시고 뭉개는 것 같았다. 결론이 나자 아그니스를 굳이 잡아두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이건 나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일. 나는 아그니스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훌륭한 기사가 되길 바라.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겠어. 바로 그 미친 치를 이 세상에서 박멸하는 일이고 내 남편을 긴긴 잠에서 깨우는 일이지. 그러니까 잘 가.”

“누구?”

“아. 축제에서 만났던 그 미친놈.”

“그게 무슨 소리야?”

아그니스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아니야, 아그니스. 몰라도 괜찮아.”

“세실리아. 지금 무슨 일 있지.”

그녀가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

“말해봐, 빨리.”

나는 멈칫한다. 그녀에게 이 일을 말할 수 있을까.

“어서.”

“그, 그게. 축제가 끝난 밤이었는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털어놓기 시작한다. 아그니스는 경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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