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아메리칸 드림 =========================
#97-2
특히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작업 중인 문서가 날아가면 그 충격은 상당이 오래갔다.
“사실 안드로이드 알파는 ID 그룹의 정식 개발 계획에 맞춰 만들어진 제품은 아니었습니다. ID 오피스를 안정적으로 돌릴 도스 호환 시스템에 리본 인터페이스를 올렸던 것이 알파였지요. 그러다가 PC 사용자분들의 지지 덕에 여러 차례의 버전업 패치를 할 수 있었고, 파이널 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MS로부터 날아온 전화 때문이었다. 대놓고 DOS 4.0과의 호환성 문제가 있을 거라고 협박을 하니 홧김에 만들어진 게 안드로이드 알파였다. 물론 유재원도 제대로 된 그래픽 인터페이스 운영체제를 만들 계획은 있었지만, MS의 도발이 없었더라면 그 시일은 지금보다 더 늦춰졌을 거다.
“파이널 패치로 안정성과 보안성을 최대로 올렸지만, 불안정함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유재원은 비장한 표정이 되었다.
“원인은 모두가 아시다시피 도스의 근본적인 한계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중대한 결심을 했습니다. 도스를 버리자!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께 보여드릴 것은 0부터 다시 시작한 완벽하게 새로운 운영체제입니다.”
유재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수가 쏟아졌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PC를 사랑하고, PC와 관련된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도스의 한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도스를 버려야 한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대한 응용 프로그램과의 호환성을 버려야 한다는 부담감에 누구도 할 수 없었다.
유재원은 다르다.
마이크로소프트를 집어 먹었으니, 도스를 살리고 죽이는 건 이제 유재원의 선택에 달렸다. 이러한 이유로 안드로이드 1.0 프리뷰 버전이 나오기 전까지 설왕설래가 참 많았다. 차기 안드로이드에서는 코어를 완전히 뜯어고칠 거라는 사람들과 도스 체계를 계속 이어나갈 거라는 사람들로 나뉠 정도였다.
프리뷰 버전이 나오고, 대중에게 유출된 다음부터는 도스를 이어갈 거라는 사람들이 싹 사라졌다.
스크린이 삭 바뀌면서 안드로이드 1.0의 부팅화면이 나타났다. 알파의 깡통 로봇이 매끈한 21세기 로봇으로 달라져서 등장하는 화면이었다.
부팅이 끝나고 초록빛 포도밭과 함께 뭉게구름이 떠다니는 바탕화면이 나타났다.
“유닉스와 같은 완벽한 안정감, PC의 모든 자원을 사용자에게 집중하는 성능, 그리고 다양한 응용 프로그램까지. 안드로이드 1.0은 여러분이 경험해본 적 없는 새로운 PC의 세계로 인도해줄 겁니다.”
유재원의 맨트와 함께 스크린에 뜬 화면도 역동적으로 바뀌었다. 안정감을 말할 때는 한 달 동안 계속 켜져 있던 PC의 모습이 비쳤고, 성능을 이야기할 때는 여러 개의 IDW 문서를 동시에 띄워 놓는 그림이 나왔다.
응용 프로그램에 대해 말할 때는 ID 테크놀로지와 ID 소프트웨어 제품들, 그리고 일렉트로닉아츠를 비롯한 ID 그룹과 협력하고 있는 프로그램 개발사들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쏟아졌다.
“한국에는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직접 컴퓨터를 이용해 안드로이드 1.0의 모든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레밍턴 사장님!”
이번에도 유재원이 레밍턴 사장을 불렀다.
그러자 레밍턴 사장이 컴덱스에서 에그 PC를 카트에 담아다 온 것처럼, 이번에도 똑같은 모습으로 무대 위에 나타났다.
호텔에서 룸서비스나 음식 서빙에서 사용하는 것 같은 화려한 카트에 뭔가 커다란 게 올려져 있었고, 하얀색 벨벳에 덮여 가려진 상태였다.
메이드 복장까지 했으면 참 재미있는 그림이 그려졌을 텐데, 레밍턴 사장은 극구 사양했다. 전처럼 펑퍼짐한 정장 차림으로 카트를 끌고 온 레밍턴 사장은 유재원과 짧게 악수를 하곤 무대 뒤로 퇴장했다.
“아참,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진 안드로이드 1.0을 위해서 삼보 트라이젬에서 새로운 에그 PC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유재원은 하얀 벨벳을 확 걷어 올렸다. 동시에 미리 세팅한 조명이 카트에 집중되면서 새로운 에그 PC가 행사장에 완전히 공개되었다.
오오!
행사장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에그 PC의 디자인을 계승했다는 건 확실히 느껴졌다. 동시에 고급스러운 알루미늄합금의 케이스에 폴리카보네이트로 살짝 톤이 들어간 모습은 세련됐다는 단어가 그렇게나 잘 어울릴 수가 없다.
“새로운 에그 PC, 뉴 에그를 소개합니다. 뉴 에그는 지금부터 ID 플래그쉽 스토어와 트라이젬 대리점에서 주문하실 수 있습니다. 당연히 뉴 에그의 운영체제는 안드로이드 1.0이 설치되어 있지요. 그러면 설치부터 활용까지 제가 직접 뉴 에그를 사용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유재원은 본격적인 시범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올라온 뉴 에그의 운영체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MS-DOS 4.0이 설치된 상태죠. 안타깝게도 우리 ID 그룹은 도스 체제를 이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즉, 4.0에 대한 지원은 올해로 끝나기 때문에 사용자분들은 안드로이드 1.0으로 이전하길 추천합니다.”
비운의 망작 MS-DOS 4.0을 대놓고 저격하는 유재원이다. 이제는 뭐라고 할 사람도 없으니 상관없다. 게다가 게이츠 회장의 조바심 때문에 도스 4.0은 불완전한 기능이 많아서 호의를 보이는 사람보다 비토가 더 많은 운영체제였다.
“안드로이드 1.0은 3.5인치 디스켓 12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기능을 하드 디스크에 설치할 경우 26메가바이트를 차지합니다.”
DOS 4.0이 3.5인치 디스켓 한 장짜리인 것을 고려하면, 안드로이드 1.0의 용량이 엄청나게 크다. 고해상도 그래픽 리소스와 고음질 사운드 리소스도 가득 들어 있고, 여러 가지 번들 프로그램이 다 들어가 있어서 용량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하드디스크가 부족한 사용자가 분명히 있을 거다. 이를 위해서 유재원은 번들 프로그램이나 사운드 리소스와 같이 필수적이지 않은 요소들을 제외할 수 있는 옵션을 넣었다. 오로지 핵심 파일만 설치한다면 10메가바이트 정도로 충분하다.
“디스켓 버전만 있는 건 아닙니다.”
유재원은 반짝이는 콤팩트디스크, 일명 CD를 들어 보였다. CD는 아직도 음악 감상용 매체였지만, 데이터를 담는 기술은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 뉴 에그의 옵션 중에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CD-ROM으로 교체할 수 있는 옵션도 있다.
“설치를 빠르게 하도록 이 자리에서는 CD를 이용해 인스톨하겠습니다.”
설명을 마친 유재원은 시디를 넣고 인스톨 작업을 시작했다.
CD롬으로 가서 INSTALL이라는 파일을 실행하자 짤막한 텍스트 메시지가 뜨더니 리부트를 하라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안드로이드 1.0은 INSTALL 파일을 제외하고는 완벽한 유닉스 체제로 만들어진 운영체제였다. 도스 프로그램이 안드로이드 1.0에서는 바로 실행할 수 없는 것처럼, 안드로이드의 설치 파일도 도스에선 실행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부트 시스템을 바꾼 상태에서 리부팅을 한 다음 설치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여기서 빛을 발휘하는 게 일찍이 만들어 놓은 부트로더였다.
설치 중 갑자기 컴퓨터가 꺼지더라도 원래의 도스, 혹은 안드로이드 알파로 돌아갈 수 있다. 안드로이드 1.0이 완벽한 유닉스 형태로 새롭게 설계될 수 있었던 것도 멀티 부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꼭 하고 싶은 게임이 있는데, 제작사가 망해서 안드로이드 1.0 패치가 없다더라도, 부트로더를 통해 도스나 알파로 부트해서 실행하면 그만이다.
재부팅이 이뤄지면서 바로 달라진 모습이 나왔다. 글자만 가득했던 도스 화면에서 거의 모든 것이 그래픽으로 이뤄진 화면이 나왔다. 설치용 프로그램이 로드된 것이다.
여기에서 풀옵션을 선택한 유재원은 곧바로 설치하기 버튼을 눌렀다.
모든 설치가 완료된 시간은 겨우 5분 남짓한 시간이었다.
CD-ROM의 읽기 속도도 빨랐고, 디스켓을 갈아 끼울 필요도 없어서 설치가 빨랐다. 다만 컴퓨터를 구성하고 있는 하드웨어를 읽고 이에 맞는 드라이버를 찾는 과정이 약간 시간이 걸렸다.
재미있는 건 행사장의 반응이다. 진행률을 보여주는 퍼센트가 올라갈 때마다 웃음과 감탄이 나왔다. ID 테크놀로지는 안드로이드 알파 때부터 진행률을 나타내는 걸 막대 그래프 하나로 때우진 않았다.
이번에도 안드로이드 로봇이 열연을 선보였다.
디스켓 더미에 몸을 파묻고 열심히 데이터를 뒤적이던 안드로이드 로봇은 진행률이 10의 단위에 이를 때마다 재미있는 모션을 보여주었다. 디스켓 더미에서 멋진 로봇 팔을 찾아내더니 본래 자신의 낡은 팔을 떼 내고 새롭게 찾아낸 팔을 달았다. 마찬가지로 진행률이 계속 오를 때마다 자신의 부품을 갈아 치웠다.
심지어 연기가 품품 뿜어지던 본인의 낡은 엔진을 빼내고, 강렬한 빛을 뿜어내는 미래형 엔진을 끼워 넣는 모습까지 나왔다.
인스톨이 모두 끝났을 때, 안드로이드 알파 때의 깡통 로봇은 21세기형 매끈한 형태의 안드로이드로 다시 태어났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가 업그레이드되는 걸 간단한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했다. 움직임을 표현하는 리소스는 그다지 고해상도는 아니었다. CD-ROM 시대라면 화질에 엄청난 투자를 했을 터인데, 디스켓 사용자가 많은 지금은 200킬로바이트 정도로 최적화를 시켰다.
100%에 도달하며 다시 태어난 안드로이드는 10초 후 리부트를 시작한다는 메시지를 띄웠다.
“이제, 리부트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단언하건대, 안드로이드 1.0을 설치하신 사용자분들은 하드웨어를 교체한다거나, 갑작스러운 정전 따위의 일이 아니라면 리부팅을 할 일이 절대 없으실 겁니다. 설사 실행 중인 프로그램이 에러가 나더라도, 그건 응용 프로그램의 문제로만 끝날 것이고, 안드로이드 1.0의 시스템인 조금의 타격도 입히지 못할 겁니다.”
안드로이드 1.0의 안정감에 강력한 자신감을 보이는 유재원이다.
어쩔 수 없이 리부팅을 해야 할 시퀸스는 정말 최소한으로 만들었다. 이를 위해서 세운 철칙 하나가 바로 ‘사용자를 믿지 않는다’였다. 시스템 가동에 필수적인 핵심 파일은 사용자가 절대 건드릴 수 없다.
전문가 수준의 사용자들에겐 답답하겠지만, 유재원은 초보자들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운영체제로 설계했다. 그렇지만 필요한 프로그램이 있으면 직접 만드는 수준의 전문가가 아니면 큰 불편함을 느껴진 않을 거다.
리부트는 금세 이뤄졌다.
운영체제가 로딩되는 화면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무대에서 유재원이 사용하는 뉴 에그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최적화된 컴퓨터라도 그런 것이지만, 같은 스펙이라면 안드로이드 1.0이 알파보다 더 빨리 구동된다.
로딩이 끝나면 곧장 바탕화면이 나와야 하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두웅 하는 효과음과 함께 수평으로 파란색의 그러데이션이 지면서 하얀색으로 수많은 언어의 문자들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영어와 한글은 기본이고 유럽에서 사용하는 로마자, 아랍 문자까지 떨어졌다. 심지어 일본어와 중국의 한자까지도 있었다.
처음엔 중구난방 아무런 규칙 없이 떨어지던 문자의 자소들이 점차 의미를 갖춰나갔다.
-안녕하세요!
그것은 바로 인사말이었다. 처음엔 당연히 한글로 나왔고, 다음엔 영어인 헬로가 알파벳으로 표기되었다. 프랑스의 봉주르도 나왔다. 경쾌한 음악과 함께 수많은 나라의 인사말이 그 나라의 문자로 표시되었다.
행사장의 사람들은 또 애니메이션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지금 떨어지는 문자들은 모두 안드로이드 1.0에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곧이어 화면에 세계 지도가 펼쳐졌고 그 아래로는 나라를 선택하는 목록이 나타났다. 그러면서 안드로이드 1.0의 기본 언어를 선택하라는 문구도 떴다. 문구는 역시 영어였다. 이번에도 유재원은 한국을 선택했다. 그러자 영어로 되어 있던 문장은 물론 모든 메시지도 한글로 바뀌었다.
유재원은 한국어는 물론 프랑스어, 아랍어, 일본어까지 바꿔서 문자 세트가 바뀌는 걸 보여주었다.
응?
반응이 좀 시원찮다?
행사장 사람들은 문자 세트를 바꿀 때마다 오오 하며 신기한 걸 보는 듯한 반응을 냈지만, 폭발력이 넘치진 않았다. 심지어 소리의 크기도 점점 작아졌다.
언어 입력기와 다국어지원은 회심의 한 방이었는데, 이런 반응이라니 실망이다. 하지만 유재원은 곧 평정심을 회복했다.
생각해보니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미국인이었다.
컴퓨터가 자신들의 언어를 지원하지 않아서 곤란해져 본 적이 없는 양반들이다. 컴퓨터에서 자국어를 사용하는 데 애를 먹는 중동이나 일본, 중국은 분명 엄청난 반응이 올 거라고 확신한다.
더욱이 아직 보여주지 않은 비장의 무기는 몇 개나 더 있다.
쇼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 완전 감사합니다~!!!
새로운 한 주의 시작입니다.
올림픽도 한창 진행 중이고, 목요일부터는 설날 명절도 있네요~!!
제가 연재를 잠깐 쉬는 명절이 딱 두 개인데, 설날과 추석입니다. 설날과 추석은 집이 북적부적해저서 글을 쓰기가 힘들거든요.
대신 평일에 빨간 날이 있어도 쉬지 않고 연재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니 독자 님의 넓은 아량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