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168화 (168/1,007)

[168] 아메리칸 드림 =========================

#98-1

국가를 고르는 화면에서 미국을 선택하고 다음을 누르자 사용 등록번호를 입력하라고 나왔다. 16자리나 되는 알파벳과 숫자를 조합해 만들어진 번호를 넣어야 한다. 이미 번호를 외우고 있던 유재원은 막힘없이 넘어갔다.

이번엔 아이디와 암호를 설정하는 화면이 나타났다.

“완벽한 보안을 위해서라면 아이디와 영문과 숫자, 특수문자를 조합한 12자리 이상의 불규칙한 암호를 설정하시는 게 좋습니다. 물론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잘 보장된 환경이라면 무시하고 넘길 수도 있습니다.”

유재원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그런 환경이라도 암호를 설정하길 권합니다. 사람의 일이란 어찌 될지 모르니까요. 대신 복잡한 걸 싫어하시는 분께는 PIN을 권합니다. 숫자 4개로 안드로이드 1.0의 강력한 보안 정책을 서비스받을 수 있습니다.”

암호 입력란 옆에 PIN 사용하기를 누르니 다이얼패드가 그래픽 인터페이스로 떠올랐다.

PIN 4자리 숫자로 암호를 쓰는 건 아니다. 원래 입력한 암호를 PIN으로 불러와서 대신 입력해주는 방식이었다. 원래의 암호는 보안영역이라는 특수하게 설정된 공간에 저장되는데, PIN이 보안영역에서 암호를 불러오는 단축키와 같은 것이었다.

유재원은 본인과 실리콘밸리 개발팀이 열심히 만든 보안 시스템을 많은 사람이 사용해주길 바랐다. 해커나 바이러스에 털린 다음 ID 그룹 QA 센터로 항의하는 사람들이 줄어들 것 아니겠는가.

물론 암호를 설정하던, 설정하지 않던 그 책임은 모두 사용자에게 있다는 약관이 뜬다. 지금처럼 말이다.

약관에 동의하는 것으로 사용자 설정이 끝났다는 화면이 나타났다. 보험사 약관처럼 깨알 같은 크기의 문서는 아니었다. 글자도 큼직큼직하고 눈에 잘 들어오는 형태로 만들었다. 대신 글자도 큰 대신, 분량도 많아졌다.

그렇지만 불공정한 약관은 절대 아니라고 자신한다.

유재원이 엘런 스미스 법무팀장에게 회사와 소비자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고, 그 책임도 거의 동등하게 지울 수 있게 설정하라고 지시했다. 마이크로소프트처럼 악의 제국 소리는 듣기 싫었으니, 최대한 공정한 약관을 만들었다.

확인에 체크하고 마침을 누르자 화면이 바뀌었다.

-설정이 모두 끝났습니다.

-새로운 안드로이드 1.0을 시작합니다.

장엄한 음악과 함께 짤막한 타이포그래피 작품이 재생되었고, 곧 안드로이드 1.0의 바탕화면과 리본인터페이스가 나타났다.

알파도 혁신적이었지만, 안드로이드 1.0은 완전히 비주얼부터가 달랐다.

24비트 1,600만 개의 색상이 지원되어서 화려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 게다가 해상도도 높아서 바탕화면의 푸른 초원 디테일은 인쇄된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바탕화면에 띄워진 아이콘들도 다시 디자인되었다.

크기도 커졌고, 사용되는 색상도 많아지면서 훨씬 더 직관적으로 변했다.

“보여드릴 게 너무 많은데,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군요. 그래서 대표적인 프로그램 몇 가지로 안드로이드 1.0의 새로운 성능을 맛보기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유재원은 시작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게임이라는 항목으로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안드로이드 알파의 콘셉트는 세계 최초의 게이밍 운영체제였습니다. 게임만큼이나 컴퓨터의 모든 자원을 소모하는 응용 프로그램도 없지요. 그래픽과 사운드 그리고 복잡한 연산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만큼, 운영체제 차원에서 안정적인 지원이 필수입니다. 게임이 잘 돌아간다는 건, 다른 응용 프로그램도 잘 돌아간다는 것이지요. 안드로이드 1.0 역시 알파의 정신을 계승했습니다. 안드로이드 1.0의 게이밍 퍼포먼스는 여러분이 상상하던 그 이상일 겁니다.”

유재원의 멘트와 함께 수많은 게임이 스크린에 떠올랐다.

ID 소프트웨어 대표작은 물론이고, 일렉트로닉아츠에서 열심히 유통하는 메이저 게임들은 이미 안드로이드 1.0을 지원하는 패치가 배포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완벽한 3D의 세계를 지원하는 글라이드 X2가 있습니다.”

게임의 타이틀 화면이 우르르 몰려나온 뒤에 글라이드 로고가 나타났다. 버전은 X2!

3D로 할지 아니면 2.0으로 할지 유재원과 존 카멕, 그리고 제임스 어거스틴 사이에 많은 논의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3D 라이브러리에 무얼 넣을지 논의했던 시간보다 이름을 정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3D 라이브러리에 포함할 함수를 만들 때 이견은 전혀 없었다. 유재원을 비롯한 두 사람 모두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라서 획기적인 방법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21세기에 이르러 최적화된 그래픽 처리용 함수를 많이 알고 있는 유재원이지만, 존과 제임스가 만든 것도 쓸만했다. 오히려 유재원이 만든 건 이 시대의 하드웨어 지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이라, 결과물은 좋은데 성능은 최악이었다.

하여튼, 많은 토의 끝에 선정된 것이 글라이드 X2였다. 최초의 버전 X에 3D 그래픽용 라이브러리와 고음질 환경을 지원하는 사운드를 보강했다.

“안드로이드 1.0에는 다섯 가지의 기본 번들 게임이 있습니다. 지뢰 찾기, 솔라리스, 사천성, 체스 그리고 버추얼 복서.”

앞에 나온 게임은 보드 게임의 스테디셀러였다.

지뢰 찾기의 경우 마이크로소프트가 차기 윈도우 운영체제에 넣으려던 걸 발견해서 그대로 안드로이드 1.0으로 포팅한 것이었다. 솔라리스는 전통적인 카드놀이였고, 사천성은 마작 패를 흩트려놓고 짝을 맞추는 게임이다.

게임성은 이미 검증된 것들이었다. 게다가 24비트 컬러로 만들어서 화려했다. 여기에 네트워크 게임 모드를 넣어서 안드로이드 1.0 사용자끼리 대전을 할 수도 있다.

유재원이 조작하는 마우스 커서는 지뢰 찾기를 지나 사천성을 넘어 버추얼 복서에 다다랐다. 당연히 유재원의 선택은 버추얼 복서였다.

제목 그대로 권투 게임이다.

그렇기에 전체화면에 나타난 그래픽도 복서가 나타나 새도우 복싱을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대신 복서의 형태는 이제까지 나왔던 그래픽과는 완전히 달랐다. 페인터와 같은 2D 이미지 파일로 만들어져 평면적인 움직임을 묘사한 게 아니라, 폴리곤이라는 3D의 최소 단위를 통해 만들어진 복서였기 때문이다.

폴리곤의 특성 때문에 복서의 모습은 각이 딱딱 진 형태였다. 그렇지만 이제껏 쉽게 볼 수 없었던 비주얼이었기에 관객의 눈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게다가 3D의 장점인 자유로운 카메라 워크를 통해 복서의 모습을 여러모로 보여주었다. 펀치가 나갈 때마다 붕붕 하는 소리도 압박 적으로 들렸다.

행사장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폴리곤으로만 이뤄진 캐릭터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투박하긴 해도 복서가 보여주는 움직임은 이제까지의 컴퓨터 그래픽과는 완전히 달랐다.

버추얼 복서는 우연히 만들어졌다.

유재원과 존 카멕 그리고 제임스 어거스틴은 열심히 만든 글라이드 X2의 성능 시범을 게임 개발자들에게 보여줄 필요를 느꼈다.

그런데 현존하는 최고 성능의 컴퓨터로 초당 1만5천 개 수준의 폴리곤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유려한 모델링을 하는 건 어려웠다. 대자연을 폴리곤으로 만드는 건 무리이더라도 사각형 빌딩이 가득한 대도시를 배경으로 만드는 것도 힘들었다.

결국, 나온 게 복싱이었다. 복서 하나를 300개 정도의 폴리곤으로 만드는 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지금 스크린에서 한창 새도우 복싱 중인 권투선수였다. 모티브는 전설적인 복서 무하마드 알리였는데, 모션캡처를 한 건 아니라서 딱 보고 한눈에 알아보긴 힘들었다.

그렇게 복서를 만들고 보니 또 다른 복서 하나를 더 넣어서 아예 권투 시합하는 게임으로 만들어보면 어떠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실제로 해보니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방향키와 Q, W, A, S 키를 이용해 상중하 가드와 복싱의 잽, 스트레이트, 훅, 어퍼컷이라는 펀치가 구현되어 있다.

타이밍을 잘 보고 있다가 가드를 누르거나 4가지 펀치 중 하나를 누르면 된다. 비주얼은 격투 게임인데, 실상은 가위바위보 게임 같은 것이었다.

유재원은 간단히 vs COM이란 항목을 선택해 컴퓨터와 시합을 시작했다. 선수를 고르는 것도 없고, 요란한 아나운서도 없었다. 그저 땡 하는 종소리와 함께 시합을 시작하는 것뿐이다.

난이도는 어렵게 설정되었다.

한 판만 싸우면 끝이라서, 게임이 쉬우면 쉽게 질리기 때문이다. 컴퓨터 캐릭터의 현란한 펀치가 소나기처럼 쏟아졌고, 그럴 때마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시원하게 났다.

스테미너 수치가 있어서 가드를 계속하고 있어도 펀치가 누적되면 풀리기도 한다. 당연히 스테미너는 펀치에도 더 크게 적용되기 때문에 컴퓨터 캐릭터가 스테미너가 떨어지는 틈을 노려서 반격했다.

그렇게 공격과 수비를 몇 번 주고받았을까.

-KO!

컴퓨터 캐릭터의 체력 막대를 먼저 떨어뜨린 유재원의 승리였다.

캐릭터를 조작하느라 멘트도 잠깐 끊어졌지만, 행사장의 반응은 한층 더 높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폴리곤 덩어리로 이뤄진 권투 선수가 대결하는 게임을 접하는 건 처음이었던 탓이다.

유재원은 그 모습에 비로소 만족했다.

열심히 준비한 비장의 무기기 중 언어 입력기는 시시한 반응이었지만, 3D는 역시나 열화와 같은 반응이다.

이러한 열기를 이어서 안드로이드의 여러 가지 멀티미디어 기능도 선보였다. 오디오 CD의 재생이나 미디 작업 환경, 그래픽 작업은 물론이고 ID 오피스를 이용한 사무용 작업까지도 모두 완벽하게 수행하는 모습을 선보였다.

압권은 멀티테스킹이다.

안드로이드 알파에서 맛만 살짝 보여주었던 멀티테스킹은 안드로이드 1.0에 이르러 완성된 형태가 나타났다.

이뿐만이 아니라 작업 관리자라는 새로운 시스템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통해서 컴퓨터의 작동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불필요한 프로그램을 제거하는 기능까지 보여주니 행사장은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였다.

“안드로이드 1.0도 개인 사용자에겐 애드웨어의 형식으로 무료 제공될 겁니다.”

화룡점정은 무료 선언이었다.

일부 컴퓨터 잡지에서는 안드로이드 알파는 무료였지만, 1.0은 유료화가 될 거로 예측한 사람이 많았다. 특히 유재원이 마이크로소프트를 인수하면서 강력한 탐욕을 보였으니, 이번에 흑심을 드러낼 수도 있다고 악담을 하는 칼럼까지도 있었다.

물론 독자들의 동감은 얻어내진 못했다.

ID 그룹의 대중 이미지는 언론이 상상하던 것 이상이었다. 안드로이드 알파를 무료로 푼 것도 대단했고, 유료로 나온 프로그램도 다른 경쟁사에 비하면 엄청나게 저렴했다. 그러면서 완성도는 높았으니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당연했다.

특히 ID 그룹의 이름값을 높인 건 둠이었다. 인터넷을 통한 공용 네트워크 플레이를 공짜로 즐길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안드로이드 1.0도 개인은 애드웨어 형식의 무료를 쓰는 건 유재원에게 있어 당연한 일이었다. 어차피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판매 수익은 그다지 큰 비중이 아니었다. 점유율을 끌어 올려서 완벽한 독점을 이뤄낸 후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대부분의 매출은 대규모 컴퓨터 제조 업체와 기업, 그리고 광고 판매 수익으로 나온다.

그러니 개인 사용자 무료는 문제 될 건 없다. 다만 무료 배포 방식에 작은 난관이 있다.

대용량이라는 점이다. 안드로이드 알파는 2HD 디스켓 두 장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안드로이드 1.0은 10장이 넘어간다.

디스켓 가격만 해도 한국 돈으로 1만5천 원은 나간다.

그렇기에 유재원이 선택한 건 배포판의 수량을 한정하는 것이었다. 일단 공짜로 뿌리는 패키지는 100만 장만 찍을 작정이다. 이 배포판을 받기 위해서는 개인정보 카드를 작성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100만 장은 금방 소진될 거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비도 당연히 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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