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15 어뷰징 대란 =========================================================================
#301 어뷰징 대란(8)
광화문의 모습은 유재원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생각해 보니 광화문에 광장이 조성된 건 2008년쯤이었고, 지금은 차들이 싱싱 달리는 도로만 있었다.
광화문 광장이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건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였다. 거리 응원이라는 문화가 처음 생겨났고, 이후 광장의 의미가 재조명되면서 광장 조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광화문 광장에서는 21세기를 관통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나쁜 점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긍정적인 요소가 훨씬 많았다.
그렇기에 오늘의 일제강점기 피해자를 위한 모금 피날레 행사는 21세기 광화문에 있었던 행사들보단 규모면에선 작아도 의미는 확실했다.
-총 모금액 120억9천301만9800원!
귀에 쏙쏙 꽂히는 전달력 좋은 아나운서가 대형 전광판에 뜬 금액을 크게 읽었다. 그러자 무대 앞쪽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크게 터트렸다.
겨울인데도 이번 행사를 위해 찾아와 준 사람들은 수백 명이나 되어서 객석이 꽉 차 보였다. 하늘도 오늘 행사를 도와주는 것처럼 날이 풀려서 바람이 불지 않았다. 영하의 기온이긴 한데, 바람이 없어 체감 온도는 그렇게 춥지 않았다. 게다가 초대 가수로 온 가수들의 열창으로 한창 분위기가 달궈진 덕에 오히려 이마에 땀이 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행사는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마지막 모금 참가자인 유재원 회장님을 앞으로 모시겠습니다.
이어진 아나운서의 말에 무대 뒤에서 대기 중이던 유재원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원래 이번 모금행사는 딱 한 달만 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국민들의 참여 열기가 너무도 뜨거워 나머지 기간이 한 달 정도 더 연장되어 오늘에서야 끝나게 된 것이다.
덕분에 약 121억 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이 모였다. 혹은 거의 121억 원에 가까운 엄청난 금액이 모였다.
21세기에 큰 사건이 터져 국민 모금 운동이 있었을 때는 100억 정도는 쉽게 넘었었다. 그런데 그건 나라의 경제력이 크게 발전되고, 시민 참여가 활성화된 덕에 이뤄진 일이었다. 인식도 부족하고, 아직 어려운 사람이 많은 94년도에 100억을 넘었다는 건 분명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물론 기업들의 낸 성금도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한다.
참여한 기업들의 면면을 보면 미래 그룹과 TG, 부산그룹, 유경그룹은 물론이고 세진컴퓨터까지도 있었다. 심지어 일성 그룹도 이번 일에 대해선 외면하지 못하고 돈을 냈다.
재계 순위 중에 일본과 매우 긴밀한 관계인 로토 그룹을 제외하고 성금 모금에 참여 했다. 물론 기업들이 낸 성금의 크기는 재계 순위와 일치하진 않았다. 액수로만 따지면 부산 그룹이 제일 컸고, 다음이 유경그룹이었다. 3등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세진전자랜드였다.
넷 다 모두 유재원과 매우 긴밀한 관계의 그룹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산그룹은 유재원의 인인이라 할 수 있는 박상권이 이끄는 기업집단이었다. 주력은 맥주였지만, 지금은 곡물 분야와 중공업 분야로 사업 범위를 무섭게 확장 중이었다.
유경그룹도 마찬가지다.
유재원이 자기가 먹고 싶어 만들었던 치킨 레시피를 정식으로 유경 치킨으로 시작한 게 그룹의 시작이었다. 지금은 한국 어디를 가도 유경 치킨 프랜차이즈가 있을 만큼 성황이다. 달콤한 양념치킨과 짭짤한 간장치킨으로 한국을 평정했다.
이제는 치킨 하면 KFC의 크리스피치킨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유경치킨을 떠올리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렇게 전국 유통망을 확립한 유경치킨은 이를 활용한 택배, 물류 사업도 정착시켰다. 최근엔 사료 산업까지 확장하셨다고 하는데, 생닭 가공 후 나오는 털이나 뼈를 가공해서 양식장용 사료로 만든다고 했다.
TG도 마찬가지였다.
TG의 이용권 사장은 위의 두 분에 비해 살짝 밀리기는 하는데, 사업적인 면을 보면 ID 그룹과 가장 밀접했다. 에그 시리즈나 쉘북은 말할 것도 없고, 이동통신 사업의 경우 아예 동업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세진전자랜드는 유재원과 그다지 관련은 없다. 그저 전생의 추억으로 투자를 좀 해줬던 것뿐이었는데, 국민 PC사업과 시기가 맞물리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보여주는 중이었다. 유재원의 조언대로 건물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는 직영점을 마구 늘리진 않았지만, 전국의 대도시에는 1층 전체를 사용하는 대리점을 두고 공격적인 영업 중이었다.
중저가 국민 PC 중에서 제일 좋은 가성비를 자랑했고, 유재원의 투자를 유치했다는 걸 광고로 활용하면서 세진전자랜드의 국민 PC는 저가형 시장을 완전 장악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세진의 악명을 자아냈던 군대식 문화가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성수 사장은 유재원과의 인연이 제일 늦었지만, 가장 열성적인 신봉자가 되었다. 유재원이 하는 것은 뭐든 따라하려고 했다. 덕분에 세진 전자랜드에도 ID 그룹의 기업문화를 그대로 베껴서 적용했다.
세진전자랜드도 따지고 보면 전통적인 유통업인데, 실리콘밸리의 IT벤처 기업 문화를 그대로 적용하는 건 어려운 일임에도 어찌어찌 적용을 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 모험은 성공적이었다.
ID 그룹의 대표적인 정책이라고 한다면, 핵심 인재에 대한 파격적인 보상과 동시에 기업이 성장해 맺은 과실을 임직원들과 공유하는 것이었다.
핵심인재에 대해선 특별 관리를 하면서도, 대다수 평범한 능력을 보이는 직원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서, 회사 전체적인 능률을 극대화 하는 방식이었다.
세진전자랜드도 이에 따라 판매를 많이 한 사원, 친절한 고객 응대로 칭찬을 받은 사원, 효율적인 재고 관리 방법을 제시한 사원 등에게 파격적인 보너스를 주었다. 나머지 평범한 직원들에게도 기업이 성장한 만큼 보너스를 주니 특출한 능력이 없더라도 다들 열심히 일했다.
이러한 선순환 덕에 이성수 사장은 유재원의 방식을 따르기 위해 더더욱 노력했다. 만약 유재원을 신봉하는 사이비 종교 단체가 있다면, 이성수는 제일 열성적인 신도가 되었을 만큼, 열심이었다.
우와아!
유재원이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젊은 남자 아나운서는 뛰어난 언변으로 분위기를 달궜는지, 객석에서 함성이 크게 터졌다.
심지어 유재원에게 질문이 들어오기까지 했다.
-회장님, 국민의 성원이 이만큼이나 모였습니다. 거기엔 분명 회장님의 발언도 크게 한몫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혹시 조금이나마 후회하시진 않습니까?
예정에 없던 돌발 질문이지만, 유재원에겐 문제없었다.
“숫자를 보고는 깜짝 놀라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후회의 감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숫자라서 기뻤습니다. 그만큼 일제강점기 피해자 분들에 대해 같이 슬퍼해주시고, 이제껏 침묵하고 심지어 은폐하려는 일본에 대해 함께 분노해주시는 분들이 많다는 이야기이니까요.”
마이크를 받은 유재원은 말이 술술 나왔다.
그것은 이 문제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단지 이익 혹은 분위기에 편승해서 돌발적으로 참가했다면,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먼저 막혔을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피해자 분들의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이제야 우리가 주목했다는 겁니다. 그건 침묵의 카르텔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피해자 분들의 말을 전해야 할 언론이 침묵했고, 그분들을 대신해야 할 정치권은 오히려 그런 목소리가 불편해서 침묵하셨겠지요. 그러면 언론과 정치인은 왜 가만히 있었을까요? 친일과 매국의 행적을 반성하지 않은 분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힘 있는 자리에 남아 있기 때문이죠.”
질문을 던진 아나운서는 뜨악 하는 표정이 되었다.
유재원이 이렇게나 직설적인 대답을 할 줄은 몰랐다. 수백 명의 참석자는 물론 수많은 매스컴에서도 취재를 나왔다. KBS에서는 특별히 생방송까지 하는 중이었다.
언론과 정치인 심지어 기득권까지 대놓고 저격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유재원의 말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파면되신 판사님들이 고맙습니다. 그분들이야 평소 하셨던 대로 하신 덕에 일제강점기 피해자 분들의 사연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러한 성과도 낼 수 있었습니다. 아마 과거의 일로 재조명 받은 분들은 이번 일로 깜짝 놀라셨을 겁니다.”
-아……. 네, 그렇군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위에서 무슨 사인을 받았는지, 아나운서는 유재원의 말을 끊으려했다. 유재원도 하고 싶은 말은 거의 다 해서 후련한 마음으로 다음 식순을 진행했다.
모금액과 똑같은 액수가 쓰인 커다란 종이판을 일제강점기 피해자 모임 대표에게 넘겨주는 일이었다.
실제로 유재원이 종이판을 넘겨주는 순간, 최강욱에 의해 종이판에 쓰인 금액이 모금용 계좌에 입금이 되었다.
덕분에 전광판의 숫자는 곧바로 바뀌었다. 120억이 순식간에 240억 원대로 뻥튀기 되었다.
“마지막으로 제가 제안 드리고픈 게 있습니다.”
-네네, 짧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재원의 말에 아나운서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거절은 못했다.
평일 낮방송이지만, 화제성으로는 이미 최고를 찍고 있는 중이었다. 유재원의 발언이 미칠 파급력은 계산할 수 없지만, 어차피 방송은 성공했으니 현장 PD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한편으로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 공개된 자리에서 속 시원히 말할 수 있는 유재원이 너무 부럽기도 했다.
아직 한국은 보수적인 나라였다. 그리고 유재원의 말마따나 나라를 팔아먹은 작자들은 강력한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자신의 주관을 서슴없이 말하고도 뒤탈은 하나도 없을 건 대통령 정도, 아니면 잃을 게 하나도 없는 사람들만 가능했다.
“일제강점기의 피해자 분들의 호소에도 우리가 빨리 반응할 수 없었던 건, 이분들의 일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묻으려는 사람들로 인해 제2의 마태식 판사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잊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 보다가, 기림비와 동상을 생각했습니다.”
21세기에 묻혀가던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의 존재감을 되살린 게 바로 소녀상이었다.
시야에서 사라지면 잊히는 게 현실이지만, 매일 지나는 길에 동상이라도 하나 서 있으면 잊히지 않게 된다. 게다가 동상이 하나 설 때마다 일본에서 경기에 가까운 반응을 나타날 테니 잊을 수가 없다.
마치 코끼리를 상상하지 마라는 말을 하는 것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시작은 이곳 광화문 거리가 좋을 거 같습니다. 제안자인 제가 먼저 솔선수범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조만간 서울시와 협의해 광화문 땅에 한두 평 정도의 땅을 사서 기림비와 동상을 세울 수 있게 조치하겠습니다.”
땅값 비싸기로 소문난 곳이 서울이지만, 유재원에겐 큰 부담은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유재원이 일제강점기 피해자를 위해 앞장서면 일본 정부로부터 미운털이 콕 박힐 것은 자명했다.
유재원은 일본 정부가 자신을 미워하더라도 상관없다.
한국을 수탈한 일제에 원죄가 있고, 이제까지 은폐와 왜곡을 일삼은 일본 정부가 잘못한 것이지 유재원은 하늘 아래 떳떳했다.
일본에서 비즈니스에 막대한 방해가 있더라도 괜찮다.
유재원의 일본 비즈니스 중에 제일 큰 건 금융 부분이었는데, 이미 일본은 자본시장을 개방한 상태였다. ID 인베스트먼트의 직접 투자를 막는다고 쳐도 골드만삭스니 JP모건 등의 창구를 이용하면 그만이다. 일본이라도 거기까지 막는 건 불가능했다.
손해가 되는 건 금융부분을 제외한 소프트웨어 일 것이다. 그런데 ID 그룹의 제품을 불매한다고 해도 그다지 피해는 없을 거라고 자부할 수 있다.
게임이야 일본은 세계의 트렌드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중이라서 애초에 매출이 잘 나오지도 않았다. 오죽하면 갈라파고스 현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반면 기업이나 학교에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나 ID 오피스를 쓰지 않을 수도 없다.
독점이라는 게 이래서 무섭다.
행사를 잘 마친 유재원은 홀가분하게 내려왔다. 이전에 소녀상 모금이 한창일 때, 엉뚱한 일에 빠져 참가하지 못했었는데, 이번엔 일이 잘 풀린 덕에 제일 먼저 나서게 되었다.
마음의 짐 하나가 살짝 덜어지는 느낌이 참 좋았다.
한국에서의 일정은 계속되었다.
이번에 최대한 한국에서 볼 일을 모두 치른 후에, 미국에 돌아가면 신제품 개발에 전념할 생각이라서 웬만한 일은 모두 스케줄에 넣었다.
당연히 청와대로 가서 김 대통령과의 면담도 빠질 수가 없었다. 유재원이 따로 요청한 것은 아니었다.
청와대의 김 대통령이 먼저 유재원에게 만나 볼 수 있겠느냐는 연락을 해왔고, 유재원도 바로 수락했다. 마태식 외 7명의 판사를 날려버린 탄핵에서 김 대통령의 역할도 제법 지대했다고 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1심에서 배상 판결이 난 것보다, 지금의 흐름이 훨씬 나았다. 탄핵이 없이 그냥 대법원까지 이어졌다면, 어떻게 해볼 겨를도 없이 되돌릴 수 없는 판결이 떨어졌을 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젠 그렇게 제 입맛대로 법을 다뤘던 판사들이 탄핵됐으니 장난을 치고 싶어도 칠 수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탄핵의 효과는 바로 나타나는 중이었다.
마태식 외 7명의 판사들은 사법거래의 죄목으로 일제강점기 피해자 모임과 국회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검찰청에선 곧바로 사건을 대검찰청 중앙수사 1부에 배당했고, 신속한 수사를 시작했다. 시작은 압수수색이었고, 압수수색의 시작은 마태식의 법원행정처 사무실이었다.
평소의 법원이었다면 영장 청구에 대해 질질 시간을 끌다가 새벽이 다 되어서야 기각을 때렸을 거다. 이유야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었고, 그렇게 조금 체면이 좀 상하는 것으로 법원 심장부를 향하는 검사의 수사력을 미연에 차단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압수수색 영장은 신속히 나왔다.
검찰도 영장이 떨어지자마자 직접 검사가 수사관을 대동하고 법원행정처로 가서 마태식의 사무실을 탈탈 털어 나왔다.
법관들 사이에 성실히 일만 했던 자신들이 일부 법권의 일탈로 인해 싸잡아 매도당하고 있다면서 성토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대놓고 그런 말을 떠드는 판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누가 봐도 이번 사건은 판사들의 잘못이었고, 눈앞에서 언론과 국회가 일치단결해 문제의 판사들에게 부여된 법조인 자격을 박탈시키는 것을 보고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만 남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로 봐서는 최대한 빨리 인용될 분위기였다. 만에 하나 파기 환송된다면 국회와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었고, 87년처럼 법원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올 태세였다. 게다가 탄핵은 신속하게 진행되었음에도 절차적으로도 아무런 하자가 없었으니 인용은 당연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강점기 피해자에 대한 배상 소송은 대법원까지 가더라도 소수의 입맛에 맞는 판결이 나올 일은 없었다.
여하튼 대검찰청 중수부가 칼을 뽑았고, 대법원은 제 몸보신에도 바빴다. 탄핵된 판사들을 보호해주려고 앞에 나서는 이들은 한 명도 없으니 이들의 앞날은 불 보듯 뻔하다.
그렇다고 아예 이번 사건에 대해 반발하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원고 측인 일본 정부와 대표 전범기업인 미쯔비씨는 연일 난리였다.
일본의 극우 성향 정치인은 망발을 일삼았고, 반일 감정으로 인해 정상 영업이 어렵다며 한국 시장에서 철수할 수 있다는 엄포까지 놓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일본 정부도 한국에 대한 투자를 재고하겠다고 했다.
다행히 이런 소리에 귀담아 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경제성장이 지상 과제였을 땐, 외국자본이 빠져나간다고 엄살을 떨었을 텐데 ID 그룹으로 인해서 그런 말은 거의 사라졌다. 일본 기업이 싹 빠져나가더라도 94년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8, 9%를 훌쩍 넘을 거라는 이야기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거의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그런 사람들이 좀 남았다는 이야기다. 세상 바뀐 줄 모르는 언론사와 소수의 구태 정치인들은 조금 남아 있긴 했다.
유재원은 이런 개소리를 가뿐히 무시했다.
청와대로 가는 차안.
“김 대통령께서 무슨 말을 하실 거 같아요?”
유재원은 최강욱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답을 알려달라는 건 아니었고, 그냥 멍하니 가기엔 심심했기 때문이다. 쉘북을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제는 좀 질렸다. 초기형 LCD라서 색감과 잔상문제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이동 중엔 인터넷은커녕 통신이 되지 않다. CPU와 VGA, 하드디스크의 전력 소모율도 커서 배터리도 순식간에 떨어진다.
이런 단점을 해소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열심히 진행 중이긴 한데, 언제 빛을 볼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래도 상대가 청와대인 만큼, 정보 보고가 잘 되고 있어 따로 수집된 정보는 없습니다. 다만 미루어 짐작하자면 판사 탄핵의 후속 대책의 논의나 5월의 정상회담 이야기, 그것도 아니면 FTA에 대한 조언을 구할 것 같습니다.”
유재원은 심심해서 물어봤지만, 최강욱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종합해 최선의 답을 주었다.
판사 탄핵은 김 대통령도 한 팔 거들었으니 가능한 이야기였다. 남북정상회담은 잘 모르는 사람에겐 생뚱맞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정상회담을 도출한 전명헌의 방북을 유재원이 설계했다는 건 여의도에선 유명한 이야기였다.
특히 소떼 방북은 유재원의 아이디어라고 알려지면서 경영이건, 정치이건 차원이 다르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른 건 몰라도 소떼 아이디어는 전명헌의 것이라서 그런 칭찬은 부끄럽긴 했는데, 김 대통령이 북한 사안을 유재원에게 물어보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겠죠?”
유재원도 최강욱의 예측에 동의했다.
그런데 청와대에 도착해 김 대통령과 만나서 뚜껑을 열어보니 유재원과 최강욱의 예측은 크게 빗나갔다.
“유 회장, OECD 가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김 대통령이 꺼낸 주제는 판사 사건도 아니고, 북한의 일도 아닌 OECD 가입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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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앞에서 어그로를 잔뜩 끌어다 놓는 주인공이네요.
주인공이 터질지 일본이 터질지는 앞으로 드러나겠지요~! 그런데 그전에 한국이 좀 위험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