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495화 (495/1,007)

25권 4화

-애비다. 이 영상을 보고 있을 때면, 내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겠지.

전명헌의 목소리에 삼형제의 눈 시울이 바로 붉어졌다.

평범한 집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 는 거대한 유산을 놓고서 기 싸움 을 하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다른 재벌 집안과 다르게 가족 간의 정 이 좀 끈끈한 것이 미래 그룹의 전 씨 집안의 특징이었다.

그렇지만 울컥하는 것도 잠깐이 었다.

-전에도 이야기했다시피 나는 자식 하나에 그룹 전체를 몰아줄 생 각은 없다.

유재원에게서 단도직입이 무엇인 지 확실하게 배운 전명헌답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면서 나란히 앉은 형제들의 긴장감이 폭증했다. 일단 미래 그룹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상속되는 건 아니라는 말에 전재근 과 전재준이 안도했고, 전재구는 실망감을 속으로 삭여야 했다.

-그럼 시작하마. 집중해서 들어 라. 그리고 이의는 절대 받지 않겠 다.

-우리 재구에겐 미래 건설과 중 공업을 맡기마.

전재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유 산 분배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삼형제가 각자 다른 반응 을 보이건 말건, 화면 속의 전명헌 은 폭풍처럼 이야기를 쏟아냈다. 삼형제는 눈과 귀를 크게 뜨고서 영상이 끝날 때까지 꼼작도 할 수 가 없었다.

본격적인 분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30분이나 되었다.

1999년 대한민국에서 재계 서열 1위에 빛나는 미래 그룹이었다. 단 순히 언론에서 산정하는 것이 아니 라 공정 거래 위원회가 매년 발표 하는 서열이 있고, 이는 곳 대통령 과 재계 총수들의 간담회 때의 의 전에도 반영되는 공신력 있는 순위 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재계 서열에 서 ID 그룹은 빠져 있는데, 이는 ID 그룹의 특성 때문이었다. 미국 에 직접 등록된 법인의 규모가 한 국보다 월등히 많았기 때문이다.

하여튼, 미래 그룹은 엄청나게

거대한 기업이었지만, 전명헌은 자 그마한 자회사 하나까지도 언급하 면서 세세하게 나눠줬기에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이때 언 급된 자회사 중에는 삼형제도 몰랐 던 이름들이 속속 쏟아졌다. 그만 큼 방대한 기업 집단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 삼형제에게 분 할 상속이 되면서 재계 순위에도 변동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하나 로 합쳐져 있는 일성 그룹이 재계 1위로 다시 등극할 것이고, 분할될 미래 그룹은 2?10위 사이에 포진 할 것이다.

일단 가장 큰 덩치를 자랑하는

건 차남 전재구가 맡게 될 미래 건 설 그룹이다.

전재구가 원래 맡고 있던 미래 건설에 중공업 관련 계열사들이 모 두 주어졌고, 미래 전자와 관련 계 열사들도 전재구의 몫이 되었다. 미래 그룹 전체로 보았을 때 44% 에 해당하는 몫으로 전명헌이 확실 히 밀어주었다는 게 딱 느껴질 정 도였다.

전재근은 원래 가지고 있던 자동 차 그룹에 미래 그룹 전체의 유통 망을 담당한 미래 유통과 금융 부 분인 미래 증권과 미래 보험이 주 어졌다.

화면속 전명헌이 '재근이의 몫은 여기까지다.'라고 했을 때, 전재근 은 불만을 숨길 수 없었다. 적어도 미래 전자 정도는 가져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형님인 전재구에게 가면서 전재근이 받은 몫이 확 줄어버렸던 탓이다.

그렇지만 아직 실망은 일렀다.

특히 막내인 전재준이 받은 것에 비하면 전재근은 그래도 나았다.

-재준이에겐 백화점 그룹을 주 마.

눈 밖에 나버린 전재준에겐 백화 점이 끝이었다.

물론 백화점 역시 백화점 사업체 하나만 있는 건 아니었다. 미래 백 화점 그룹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만큼 10개가 넘는 자회사들이 있 다. 케이블 텔레비전의 좋은 채널 을 선점한 미래 홈쇼핑도 있고, 미 래 미디어라는 케이블TV 사업체도 있다. 정수기 렌탈 사업을 하는 업 체나, 인테리어 업체도 있다.

하지만 두 형님에 비하면 이러한 사업체는 그야말로 소소한 규모였 다.

화면 속 전명헌은 전재준이 실망 할 것을 뻔히 예상했다는 듯, 마지 막으로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아, 재준이에겐 내 지역구를 물 려주마.

그렇지만 전재준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국회의원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기업보다는 못했으니 말이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 면 전명헌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을 물려받은 거라고 볼 수도 있지만, 통일국민당에는 또 다른 대주주인 유재원이 있었다.

통일국민당 의원 중에 유재원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 자력으로 국회 의원이 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 였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껄끄러운 상태였다. 아니, 이제는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있었기에 전재준의 정치 적인 유산은 진짜 울산의 지역구 하나가 전부라고 보는 게 더 정확 했다.

전재준은 혹시나 아직 나오지 못 한 내용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i웍스 노트북 화면에 집중했다. 하 지만 전명헌의 유언은 그걸로 끝이 었다.

"뭡니까? 이게 전부입니까?"

당황한 건 두 형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뭔가 더 기대했던 모양인데, 이 대로 끝나버리자 크게 놀란 모양이 김광일에겐 그 모습이 퍽이나 웃 겼다. 백화점 그룹도 연매출이 수 천억 원에 이르는 거대한 기업이었 다. 게다가 전명헌의 지역구라는 건 그야말로 확실한 텃밭이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유산을 받 은 것이다. 그런데도 부족하다고만 하는 전재준이라면 대체 얼마나 가 져가야 만족하다는 말이 나올지 모 르겠다. 김광일의 실망감이 점점 커질 때, 전재구가 한마디 말을 보 탰다.

"아산은? 아산에 대해서는 말씀 이 없는 겁니까?"

"아, 아산! 아산도 있었지."

전재구의 말에 전재준도 그제야 전명헌의 유언에서 아산이 없었다 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산은 미래그룹서 최근에 만들 어진 주식회사였다. 설립 목적은 금강산 관광 산업과 북한 지하자원 개발을 전담하기 위해서다.

금강산 관광이야 덩치는 좀 작아 도, 남북 경헙 사업으로써 갖는 상 징성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게다가 북한 지하자원 개발은 큰돈 이 나오는 이권이 걸린 사업이었다. 게다가 김일성은 유언으로 북한 개발에 미래 그룹을 최우선적으로 하 라는 유훈까지 내린 상태였다. 그 래서 낙점된 게 아산이었다.

그런데 동영상 유언을 다 들었지 만, 아산에 대한 언급은 없었던 탓 이다.

"그것은 내게 말씀을 내리신 것 이 있네."

다행히 김광일이 아산에 대한 것 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삼형제를 실망시켰다.

"아산의 지분은 각각 30% 공평 하게 나누라고 하셨네."

그러면서 따로 가져온 서류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전명헌의 사인 이 선명한 서류에는 아산의 지분 분배 비율이 명시되어 있었다.

"응? 그럼 나머지 10%는?"

셈이 빠른 전재준이 끝까지 캐물 었다.

"그것은 어르신께서 창업 멤버들 에게 나누어주셨네."

김광일은 직원들이라 말했지만, 삼형제에겐 가신집단으로 통치되는 사람들이었다.

눈앞에 있는 김광일을 비롯해, 미래 그룹의 사장단을 하고 있는 이들은 오래전부터 전명헌을 모신창업 세대였다.

"그럼 우리 자랑스러운 조카님에 겐 한 푼도 없는 겁니까?"

그러자 이번엔 전재구가 이상하 다는 듯 다시 물었다.

유재원이 전명헌과 할아버지 하 는 사이였다면, 삼형제와는 조카라 고 불렀다. 예전엔 약간 낮춰보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진짜 친조카보다 더한 존재감을 발휘했 다.

"ID 그룹 유재원 회장께는 따로 뭔가를 보냈다는 건 알고 있습니 다."

변호사의 말에 삼형제는 그 뭔가 가 매우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신지요?"

그러는 사이 전명헌의 유산 상속 에 대해 모두 발표한 변호사가 삼 형제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유재 원에게 무엇이 전해졌는지 궁금하 긴 해도, 지금 당장은 본인들의 유 산 정리가 먼저였다.

결과만 보면 전재구가 제일 좋았 다. 하지만 삼형제가 품고 있는 야 심을 채울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 다.

"그러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전명헌의 변호사는 딱 봐도 문제 가 나올 게 뻔히 보였기에,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했다. 이는 김광일 도 마찬가지였다. 삼형제의 아귀다 툼까지는 보고 싶지 않아서 일어나 려고 했다.

"실장님, 급한 일이 있습니까? 괜찮다면 좀 있다 가시지요?"

따라서 일어나려는데, 전재준이 잡았다. 다른 두 형제도 할 말이 있는 모양새였다. 덕분에 변호사만 꾸뻑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섰고, 김광일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음, 무슨 일인가?"

다시 자리가 세팅되자 김광일이 먼저 물었다. 나이로나 경력으로나 김광일은 이들 삼형제에게 충분히 반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삼 형제 역시 반말에는 크게 신경 쓰 지 않았다. 대신 본론으로 바로 들 어갔다.

"실장님, 빼먹은 거 하나 더 있 지 않습니까? 비자금 든 금고 말입 니다."

역시나 전재준은 금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동영상 유언을 끝까지 봐도 금고가 나오지 않자, 이상하다고 생각 하고서는 곧장 김광일에게 따져 묻 고 있었다.

"금고라니?"

전재준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반면 전재구나 전재근은 이 자리에서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처럼 얼굴에 물음표가 떴다.

실제 비자금 금고의 존재를 전명 헌은 전재준에게만 알렸다. 전재준 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존재 자체를 자식들에겐 일절 말하지 않 고 있었던 물건이었는데, 전재준이 금고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부득 이한 일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전명헌과 함께 했던 정치계 입문이었다.

정치를 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 공적인 비용도 있지만, 물밑에서 써야 하는 돈도 있다. 거기에는 비 자금을 사용하는 게 적격이었다. 전재준이 금고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전명헌과 함께 정치에 입문하 면서였다. 전명헌이 살아 있던 동 안에는 금고에 임의로 접근하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김광일에게 모였 다.

"금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삼형제의 압박에도 김광일은 여 유를 잃지 않았고, 시선을 돌리지 도 않았다.

"아버지의 최측근인 김 비서실장 님이 모른다면 누가 알겠습니까?"

전재준은 끝까지 금고에 대한 미 련을 놓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조폐공사 에서 막 출고된 돈 덩이처럼 팔레 트에 현금 뭉치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모습은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에게서 나오는 돈이라면 직 접 주셔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라는 걸 여기 계신 분 중에 모르는 사람 있는가?"

김광일의 말에 삼형제는 답이 궁 색 해졌다.

미래 그룹의 역사는 전명헌과 그 자식들이 일군 것이라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니다. 그만큼 전명헌과 함께 일을 했고, 전명헌의 일처리 방식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김광일의 말을 부정할 수 가 없었다.

김광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재준이 금고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건 예상 밖이긴 했지만, 그렇 다고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전명헌이 비자금 금고에 대 해서 자식들에 일절 언급이 없었다 는 것으로, 비자금은 유재원에게만 허락된 것임을 다시 확인했다.

김광일의 모르쇠에 삼형제의 눈 빛이 거칠어졌지만, 밑질 건 하나 도 없던 김광일이었기에 집에서 나 갈 때까지도 당당했다.

다음 날.

김광일을 만나고 온 다음 날부터 유재원은 다시 서울의 펜트하우스 에 머물기 시작했다.

펜트하우스라고 하면 비밀스러운 거주 혹은 휴식 공간처럼 느껴지지 만, 유재원에겐 일터 바로 옆에 놓 인 숙소와 같은 곳이었다. 펜트하 우스는 ID 그룹의 본사인 글로벌헤 드쿼터 빌딩에 있었고, 조금만 내 려가면 바로 그룹 전체의 업무를 관장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유재원은 전명헌이 쓰러지고 나 서부터는 제대로 업무를 볼 수 없 었다. 컴퓨터를 켜고 ID톡과 업무 처리 시스템에 접속하니 이메일이 나 보고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읽지 않은 메일이 8,325개, 읽지 않은 메시지가 981개였다.

과거의 유재원도 오랜만에 메일 함을 열면 읽지 않은 메일이 이만 큼 쌓여 있긴 했다. 그런데 그땐 스팸 메일이나 스팸 문자가 수천 통 왔던 것이지, 광고를 빼면 숫자 는 확 줄어든다. 하지만 지금 유재 원이 보는 건 광고는 하나도 없고, 모두 회사의 업무를 위해 발송된 진짜 업무용 이메일이었다.

"좀 많이 쉬었구나."

메일함에 쌓인 숫자를 보면서 유재원은 살짝 자책했다.

진짜 긴급한 안건이라면 김대석 을 통해 유재원의 결재나 확인을 받았기에, 업무가 마비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룹 내 조직들이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지금 유재원은 30%도 몰랐다.

현장과 최고 경영자 사이에 괴리 가 크게 생긴 것이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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