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권 5화
"절대 안 될 일이지."
유재원은 곧장 메일함을 열고 최 근 날아온 이메일부터 해치우기 시 작했다. ID 그룹은 마스터플랜에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유재원의 수 족이 되어야 할 조직이었다. 제 몸 의 손과 발처럼 거대한 기업을 움 직이려면 현장 조직과의 동시성을 절대 잃지 않아야 한다. 그렇기에 이메일을 보는 유재원은 집중력를 한층 끌어 올렸다.
그러자 마법과 같은 일이 벌어졌 다.
오랜만에 집중력를 끌어 올린 유재원의 업무 처리 속도가 무시무시 해졌다. 모니터에 뭔가 뜬 것 같다 싶더니 슥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 럴 때마다 읽지 않은 메일의 숫자 는 훅훅 떨어져 나갔다.
단순 보고는 1분 컷이었고, 예산 이 많이 들어갔던 프로젝트의 중간 보고나 결과 보고 같은 것도 3?5 분이면 끝이었다.
이미 한 번 시행착오를 거친 일 이었기에, 각종 프로젝트들이 잘 가고 있는지, 이대로 진행하면 뭐 가 잘못될지 딱 보였다. 결재 서류 에 사인을 하거나, 피드백을 내려주는 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메일함의 이메일이 거의 바닥을 보일 무렵 유재원은 ID 그룹의 현 재 상태를 이미지화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날렵했던 랩터 같았던 조 직이 점차 티라노사우루스처럼 거 대하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의사 결정 속도나, 소비자의 요구에 대 한 피드백이 과거처럼 빠르게 나오 는 조직은 이제 거의 힘들어졌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나쁜 것도 아니지만."
예전엔 즉각적인 반응으로 소비 자들의 선택을 빠르게 이끌었다.
게임 제작을 예로 들자면 직접 플레이해볼 수 있는 베타 버전 공 개는 전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만들어지는 게임들은 상당한 진척 을 보였음에도 비공개를 고수했다. 특히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라는 블 리자드 엔터테인먼트와 오리진 시 스템즈의 초거대 합작 프로젝트는 티저 영상만 몇 개 공개하고는 철 저히 숨기는 중이었다.
자신감이었다.
출시하면 어마어마한 인기가 당연히 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덕분에 어마어마한 인적 자원과 예 산을 투입해 제작 중이지만, 아직 도 비공개를 고수했다.
예전이라면 최소 비공개 베타 테 스트는 했다. 그래서 피드백을 받 아 열심히 적용하고 있을 텐데, 지 금은 오로지 개발에만 을인 증이었 다.
피드백을 받아 수정하는 것도 좋 지만, 전력으로 달리는 걸 선택했 다.
유재원의 취향 역시나 랩터보다 는 티라노사우르스였다.
끊임없이 피드백을 받고 빠르게 적용하는 것도 좋지만, 압도적인 스케일과 기술로 무장된 제대로 된 한 방을 만들어 후발주자들이 따라 잡을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유재원은 더 선호했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나 ID 오피 스의 차기 버전 개발도 블리자드와 비슷했다.
자잘한 피드백의 경우엔 월간 혹 은 분기별 패치로 해결하고, 미래 를 대비할 신기술을 대거 채용해 새천년을 대비할 차기작을 만드는 중이었다.
이러한 전략의 가장 큰 맹점은 헛다리를 짚었을 때다. 어마어마한 자본과 시간을 투입해 만든 거대 프로젝트가 시장 예측에 실패해 소 비자의 외면을 받으면 회사 자체가 망할 수도 있을 만큼의 타격이었다. 하지만 블리자드나 안드로이드 사, ID 오피스 개발팀 모두 이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 다.
"내가 있으니깐."
유재원은 절대 자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감까지 버리지 도 않았다.
티라노사우루스처럼 거대해진 조 직이 뒤도 안 돌아보고 맹렬히 달 리면서 사냥할 수 있는 가장 큰 원 동력은 유재원 본인 그 자체였다.
ID 그룹이란 조직도 유재원의 기 대 이상으로 탄탄했다. 유재원이 거의 두 달 가까이 업무에 집중하 지 못했지만, 회사는 탈나는 것 없 이 잘 굴러가고 있었다.
레밍턴과 최강욱이 진행한 1998 년 결산에서 보면 안드로이드 사부 터 ID 테크놀로지까지 ID 그룹의 주요 계열사들은 10?15%의 매출 신장을 이뤄냈다.
가정용 컴퓨터 업계의 성장이 좀 멈추긴 했지만, 인터넷 분야가 크 게 확대되면서 고가의 엔터프라이 즈 버전이나 워크스테이션 버전이 많이 팔렸다. 또한, 각국의 정부나 연구소로부터 수주한 클라우드 컴 퓨팅 시스템이 늘어난 것도 매출 신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매출을 만들 어준 곳은 다름 아닌 CIA였다.
"빅 브라더라도 만들 샘인가보 네'?"
예전 유나바머 사건 때, 클라우 드 컴퓨팅 시스템에 올린 메타 데이터 검색기에 큰 감명을 받았던 CIA는 1만대 규모의 시스템을 발 주했었다. 1998년에 접수된 주문은 무려 30만 대 규모였다.
유재원이 빅브라더를 언급한 건, CPU 30만 개를 엮어서 만든 클라 우드 컴퓨팅 시스템에 올릴 프로그 램이 이미지 검색기였기 때문이다.
길거리의 CCTV나 인터넷에 떠 도는 영상과 사진들 속에서 정보를 추출하기 위해 예전엔 사람이 일일 이 검색을 해야 했다. 이미지 검색 기, 정확하게는 이미지 검색 알고 리즘을 통해서 비슷한 이미지를 컴퓨터가 찾아준다는 걸 확인했다.
정확성은 당연히 사람이 월등하 지만, 검색 범위와 속도에서는 비 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컴퓨터의 압승이 었다.
유재원은 빅브라더에 대한 가치 판단은 보류했다. 도구가 문제가 아니라 쓰는 사람의 문제라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대 신 CIA의 계획에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아이템을 찾았다.
"음, 인터넷 CCTV가 딱이지."
현재의 CCTV는 대부분 아날로
그 방식으로 컴퓨터와 연결하는 게 매우 번거로웠다. 인터넷 CCTV라 면 간단하게 서버와 연결하고서 실 시간으로 이미지 검색기를 돌릴 수 도 있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하이테크 연 구소의 연구 과제 중 하나인 CCD, CMOS가 떠올랐다.
ID 하이테크 연구소는 드론 개발 로 유명했지만, 이밖에도 수행 중 인 연구는 많았다. 핵 관련 기술도 있었고, 로켓 추진제 관련도 있었 다. 심지어 인터넷 보안까지도 연 구했다. 그렇게 개발된 기술을 ID 그룹에 제공하면서 실적도 상당히 많이 쌓았다.
이러한 하이테크 연구소는 영상, 음성의 디지털 압축에 관한 연구 파트도 있었다. 유재원이 안드로이 드 운영체제에 기본 탑재한 코덱에 서 출범했다. 최초 버전은 유재원 혼자서 뚝딱 만들어냈다. 이후 사 후 관리를 하이테크 연구소에 맡겼 고, 안드레이 소장은 팀을 꾸렸다.
이후 인재들이 보강되었고, 성과 도 내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데, 최근 받아본 보고서에 따르면 CCD의 노이즈 개선에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유재원은 곧장 소형화된 CCTV 와 인터넷을 결합해보라는 아이디 어를 개발팀에 보냈다.
"제대로 된 물건만 나오면 미국 은 물론이고 전 세계 CCTV 시장 을 집어삼키는 건 일도 아니지."
기존의 CCTV와 인터넷 CCTV 의 편의성과 활용성 차이는 그야말 로 하늘과 땅이었다. 여기에 이미 지 검색 알고리즘까지 더해지면, CCTV로 촬영된 화면을 컴퓨터가 해석하고 상황에 따라 근무자에게 신호를 자동으로 보내게 할 수도있다. 보안성이 한층 더 높아지는 것이다.
유재원은 곧장 문서 작업을 시작 했다.
인터넷 CCTV에 대한 개요와 간 단한 디자인 스케치까지 담긴 문서 였다. 연구 과제를 열심히 수행하 고 있던 하이테크 연구소에는 특명 이 떨어지면 큰 부담일 깃이다. 하 지만 연구소는 원래 이렇게 쓰려고 만든 조직이었기에, 유재원은 발송 버튼을 누르는 데 거리낌이 하나도 없었다.
띵!
유재원이 서재에서 한창 업무에 집중하는데, 알림 소리가 났다.
메일함에 새 메일이 들어왔을 때 울리는 알람이었다.. 뭔가 봤더니 황재홍 사장이 보낸 보고서였다. 중요라는 태그가 붙어 있었기에, 유재원은 검토하던 문서를 놓고 황 재홍 사장이 보낸 이메일을 열어 보았다.
"마이크로크래딧 관련 보고구나."
ID 인베스트먼트 한국 사장이었 던 황재홍은 작년에 유재원으로부 터 매우 중요한 임무를 받았다. IMF에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서민들을 위한 소액 대출에 포커스를 맞춘 ID 마이크로크래닛이라는 금 융 회사를 출범하는 일이었다.
무려 100억 달러를 출주해 만드 는 사업이지만 영리를 위한다기보 다는 사회적 안전망 확충이라는 비 영리적인 가치에 초점을 맞춘 사업 이었다. 여기에 덤으로 한국 사회 를 파고드는 일본의 고금리 대부 업체를 원천에서 차단하는 목적도 있었다.
빠르게 이메일을 읽은 유재원에 게 딱 두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용량이 큰 첨부 파일도 있어서 제대로 검토해보면 상당히 시간 이 걸릴 일이었지만, 복잡한 일은 아니었다.
-전국 서비스를 위한 모든 조직 정비가 끝났습니다!
-마지막으로 금리만 결정하시면 됩니다.
마이크로크래딧의 전국 영업점부 터 거기에서 근무할 직원들의 교육 까지도 모두 끝냈다는 보고와, 대 출 업무의 핵심인 금리를 정해달라 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참고하라고 한국 은행 금리부터, 시중 은행들 의 금리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도표도 첨부해줬다.
또한, 황재홍이 일단 만들어본 대출 상품에 대한 보고도 있었다.
유재원이 지시한 대로 살인적인 대부 업체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저렴했다. 일부 상품은 대형 은행 보다 더 저렴한 금리를 자랑했다.
그것은 부양 가족이 있는 사람이 라는 조건이 달린 대출 상품이었다. 황재홍은 소액 대출이고, 금리까지 저렴하다 보니 상환율이 높지 않을 것을 걱정했다.
그 결과 부양 가족 특별 상품이라는 것을 고안했다. 먹여 살릴 가 족이 있는 사람이라면 급할 때 큰 도움이 되는 마이크로크래닛과의 거래를 계속하기 위해 상환에도 충 실할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또한, 빌렸다가 제때 갚는 신용 이 많이 쌓인 사람에게 우대 금리 를 적용하는 방안도 만들었다.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네."
황재홍의 보고서에 유재원은 아 주 만족했다.
유재원의 지시사항을 그대로 수 용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한 발더 나아간 것이 특히 마음에 들었 다. 마음 같아선 바로 진행하라고 하고 싶지만, 혹시나 모를 문제가 나올 수도 있어 금융전문가의 의견 도 들어봐야 했기에 저장만 해놓았 다.
똑똑!
마이크로크래딧 건을 확인한 유 재원은 다시 묵은 이메일을 보려는 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김대석이었다.
"회장님, 다음 스케줄을 위해 이 동하실 시간입니다."
이동할 시간이라는 말에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3시였다.
"아, 그럼 바로 가죠."
유재원도 며칠 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던 스케줄이었기에 컴퓨터를 닫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 케줄이란 바로 며칠 전 조용하게 인수 작업을 마친 LSM 엔터테인먼 트의 실무진 그리고 소속 연예인들 과의 미팅, 그리고 시상식 때문이 었다.
유재원은 LSM 엔터테인먼트로 가는 짜투리 시간도 아까웠기에, 멍하니 있지 않고 세상이 돌아가는것을 살폈다.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김대석에게 브리핑을 듣 는 것, 나머지 하나는 i웍스 노트북 으로 넥스트컴 뉴스 페이지에 접속 해 인기 기사들을 몰아보는 것이었 다. 김대석의 브리핑은 일반인은 쉽게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한나라당과 민주한국당이 다시 합당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방법은 대선후보 단일화인데, 단일화 방법에 대해선 아직 논의 중입니다."
"진짜요? 견원지간이나 다름이 없는데, 권력 앞에선 원수라도 상 관없다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유재원의 물음처럼 얼마 전까지 만 해도 두 정당 사이는 그야말로 원수와 같았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