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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26화 (26/300)

#   26-희망을 위한 찬가 - 변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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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신을 일으켜 앉은 은결은 병실 창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봤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조용했다. 높고 낮은 건물이 가깝고 멀게 배치되어 있었고, 죽은 생물의 혈관 같은 칙칙한 색조의 인도 블록과 아스팔트 도로 위로는 사람과 차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은결은 그 망설임 없이 바쁜 걸음과 굴러가는 바퀴의 목표를 읽어낼 수가 없었다.

언제나와 똑같은 세상의 풍경이었다.

시선을 돌려, 은결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깨끗하고, 정돈된 손이다. 은결은 손을 쥐었다 펼쳐봤다. 몸은 자신의 의지를 충실히 따라 움직였다. 다시, 은결은 손바닥을 쥐었다 펼쳤다. 그는 한 동안 그 동작을 반복하며,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자신의 손을 두 눈에 고요하게 담았다. 살아있다, 라는 것이 느껴졌다.

“...잘도 살아났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말을 흘렸다. 정신을 잃기 전에 대해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득한 빛과 끔찍할 정도의 고통이다. 틀림없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눈을 뜨고 보니 부드러운 연두색 색조로 칠해진 병실 천정을 볼 수 있었다. 서울의 한길 종합 병원이었다.

처음에 은결은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것이 심하게 당혹스러워 했다. 튈까, 하고도 생각했다. 다행히 ‘튀자’로 마음이 굳어지기 전에 의사 한 명이 진경과 더불어 병실에 들어왔다. 의사가 말하길 은결은 감전으로 몸의 속과 겉, 곳곳에 화상을 입었지만 치명적인 것은 없는 덕분에 한 이주 정도 치료하면 퇴원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의사가 나간 뒤, 진경이 간략하게 그 이후의 일에 대한 설명을 하고, 이 병실은 자신이 마련한 것으로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고 은결에게 설명했다. 고맙게도 개인 병실이었다. 그 과정에서 은결은 진경이 한길 주식회사 오너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주식회사 한길은 국내 최대의 제약 회사다. 은결은 그 외에도 달리 알고 싶은 게 많았지만 진경은 다른 것에 대해 물을 시간을 주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바쁜 모양이었다.

‘어째 싸가지가 없더라니.’

당시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은결은 진경에 대한 자신의 진솔한(편견에 가득 찬) 감상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첫인상에서 대부분 결정되는 법인데, 그 첫 만남이 워낙 아름다웠으니 그리 쉽게 인상이 바뀔 리가 없다. 이어, 진경의 동생이라는 세연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그 아가씨도 부르주아네.’

그녀를 떠올리자니, 조금 놀라웠다. 세연은 그녀와 몇 시간 정도 함께 했었지만 그런 기색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어디서든 주변의 눈길을 끌만한 미인이라는 점을 제하면, 그녀는 굉장히 소탈하고 평범한 모습을 보여줬다. 더구나 성격도 오빠와는 달리 착하고 고운 아가씨였다. 과장 없이, 은결은 DNA검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을 정도다.

그녀가 걱정됐다. 카미를 맨손으로 잡을 당시 세연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릇으로서의 그녀는 카미의 힘을 받아들이기 위해 전격에 완전한 내성을 가진 몸이었을 테지만, 해체 중이었음으로 어쩌면 어느 정도 다쳤을 수도 있다.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심란했다.

‘걱정해봐야 소용없나... 오빠니, 그 사람이 알아서 잘 했겠지.’

그보다, 카미는 어떻게 됐을까? 진경은 카미의 영체가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은결은 자신의 손아귀에서 메마른 낙엽처럼 부서진 카미의 감촉과, 바다의 해류를 자신의 몸으로 흐르게 한 것 같은 막대한 기의 도도한 흐름을 기억한다. 역시 신의 본질을 해체하는 진을 수행하던 기를 그대로 카미에게로 흘려보냈으니 그쪽도 무사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정말로 끝난 걸까? 카미는 신성을 지닌 존재다. 없애는 것이 그리 녹록하다면 귀찮게 몇 천년이나 봉인하고 관리한다고 전전긍긍할리가 없다. 병실에 앉아 고민해봐야 답이 나올리 없는 의문들이었다. 곧, 은결은 한숨을 쉬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고용하게 울렸다. 소독약 냄새가 약하게 느껴지는 병원 시트와 베게가 낯설게 느껴졌다. 냄새뿐만이 아니었다. 공간이, 이윽고, 시간 그 자체가 극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주변의 모든 것이 자신을 밀어내기 위해 협동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초조했다.

은결은 시계를 올려다봤다. 오후 5시다. 지금쯤 학교에서는 수업이 끝마칠 시간이다.

미래는 뭘 하고 있을까? 오늘 아침에 내가 깨워주지 않아서 지각한 건 아닐까? 아침은 먹었을까? 오늘 저녁식사는 어떻게 될까? 할아버지가 만드는 걸까? 아직 안 빨고 쌓아둔 빨래는 어쩔까? 쓰레기 버리는 날짜는 알고 있을까?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전에 물기 짜내는 것 잊은 건 아닐까? ---

생각에 생각이, 고민에 고민이 이어졌다.

“이게 뭐야...”

문득, 은결은 좌절했다. 너무나도 고2 다운 자신의 걱정에 스스로의 청춘에 대한 회의에 빠졌기 때문이다. 아아, 그대가 심연을 바라볼 때, 심연 또한 그대를 바라보나니- 지금 은결이 딱 그 꼴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미래일까? 은결은 다시 시계를 바라봤다. 5시를 조금 지나 있었다. 미래가 오기에는 빠른 시간이다. 그러면, 아버지나 할아버지? 그럴지도 모른다. 하여간, 곧 알게 될 것이다. “들어오세요.” 은결이 답했다. 문이 열렸고, 한 소녀가 들어왔다.

“저, 저기-”

활달한 사복과 어울리지 않은 조심스런 모습이었다. 몸을 이루는 선의 흐름이 아름답다. 세연이다. 그녀는 한 손에 과일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병문을 온 모양이다. 은결은 깜짝 놀라며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아, 그- 안녕하세요.”

“이번 일에 대해 감사드리려고...”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들고 있던 과일 바구니를 근처 탁상 위에 놓고는 침대 근처 의자에 다소곳하니 앉았다. 은결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야 해야 할 일을 했을 분인데 감사는 무슨 감사겠습니까. 저 외에도 많은 분들의 노력 덕분인걸요.”

“그분들에게는 먼저 인사드리고 왔어요.”

세연이 웃으며 답했다. 어딘지 득의만만한 표정이다. 하기야, 정보관리를 확실히 할 수 있다면 진경이 굳이 부상자를 분산입원 시킬 이유가 없다. 지난 전투에 부상당한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모여 있을 것이다. 은결은 그녀의 표정에 대해 한방 먹은 표정으로 되돌려 줘야 하는 것인지 속으로 생각해 보며 말했다.

“그,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니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실은, 조금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예?”

세연이 얼굴을 조금 붉혔다. 그녀의 반응에 은결은 심한 뻘쭘함을 느꼈다. 그러고보면 그녀야 눈 감았다 떠보니 상황종료였을 것이다. 자세한 전투의 진행. 그러니까 반라의 그녀의 몸 위에 손을 댄 채 기를 운행시키고 있던 자신이 맨손으로 벼락을 잡은 덕분에 그녀도 함께 감전 당했었다는 종류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 리가--

은결의 얼굴도 괜히 붉어졌다. 아니, 괜히는 아니다. 건강한 청년다운 반응이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세연은 이상스럽다는 듯 잠깐 은결을 쳐다보고는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뭐 찾으세요?”

“저, 칼이 어디있나하고...”

세연은 수줍게 답했다. 과일을 사왔으니, 깎아주려는 모양이다. 칼이라면 텔레비전이 놓여진 장식장 아래 서랍에 있다고 기억한다. 은결이 몸을 일으켜 서랍에서 칼을 꺼냈다. 세연이 당황하며 칼을 받으려고 했지만 은결은 넘겨주지 않았다.

“아니요. 제가 할께요.”

“저, 환자분한테...”

“괜찮아요. 익숙하거든요.”

그리고 은결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과일 바구니에서 사과를 꺼내 깎기 시작했다.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세연의 표정이 경탄에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은결은 그녀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얇은 두께로, 부드럽게 사과를 깎았다. 사과 껍질은 끊어지지 않고 끝까지 벗겨졌다. 과장 좀 보태서 잘 하면 줄넘기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공자님 앞에서 문자 쓰는 꼴이 될 뻔 했다. 은결은 능숙하게 사과를 쪼개 자신이 하나를 쥐고 나머지를 세연에게로 넘겼다.

“드세요.”

“예.”

두 손으로 은결이 넘긴 사과를 받아 세연은 작게 깨물었다. 그녀의 손목이 드러났다. 거기 메여져 있던 팔찌 두 종류가 내려가며 착칼, 하는 소리를 냈다. 은결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아직 하고 계시는군요.”

“에, 예. 말씀하신대로 이거 하고 난 다음에는 몸이 좋아진 것 같아요.”

세연은 다른 손으로 팔찌를 감싸듯이 문지르며 말했다. 은결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다행입니다. 그런데, 어제도 이 팔찌는 계속 하고 계셨나요?”

은결이 아는 한 설사 카미라도 이중의 영적 자장을 돌파하는 일은 쉽지 않다. 더구나 이중자장에 보호되는 세연을 카미가 특별히 주목했을 리도 없다. 논리적으로, 알아야 주목할텐데 알 도리가 없으니 주목 할 리도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푸른 이빨은 그녀의 체질을 간파하고 자신의 그릇으로 선택했다. 그녀의 체질이 갑자기 변한 것도 대단히 이상한 일이지만, 대체 어떻게 카미는 그녀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았을까? 만일 그녀가 당일 팔찌를 하지 않았다면 설명할 수 있다.

“예.”

그러나 세연의 대답은 단촐했다.

“그렇습니까...”

의문은 다시 미궁으로 빠졌다. 어딘지 모르게 진지한 은결의 물음에 세연이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물었다.

“왜 그러시죠?”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은결은 얼버무렸다. 자신에게 어떤 대책이 잇는 것도 아닌 한, 괜히 그녀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세연이 무언가 말하려 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오빠!” 하는 밝은 목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병실로 들어섰다. 교복 차림의 아름다운 소녀였다. 세연과 자웅을 결 할만하다. 미래였다.

“엑?!”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이상스런 소리를 내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은결과 세연도 마찬가지다.

*음, 액댐은 올해 초에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글과는 무관합니다만, 이거 처참하군요.(;;;) 극복 못할 거야 없지만, 그래도... 크윽(;;;) 아, 돈도 없는데.

*모야모야님께서 꼽사리로 추천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추천하는지 모르겠다는 분이 계셨는데, 딱히 추천 버튼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연재한담란이나 감상란 등지에 추천 글을 써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챕터 초반에 지적했듯이, 일반적인 신 개념과 신도에 있어서의 카미 개념은 상치되는 것으로 사용하기 곤란한 면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신으로 등극시키곤 하는 일본 신도에 있어서의 카미를 다른 종류의 신과 병행해 사용하긴 무리가 있겠지요. 또 카미의 어원 자체가 좀 미묘합니다. 중국의... 까먹었는데, 뭔가에서 어원이 있다고도 하고, 한국의 곰, 고마, 혹은 검에서 왔다고도 합니다.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알지 못합니다만 이런 부분을 볼 때 절대적인 영적존재라는 관념에서 나타난 말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니 그냥 '신'으로 번역해 사용하긴 어려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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