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27화 (27/300)

#   27-희망을 위한 찬가 - 변화(2)

#

“...그러니까 두부는 너무 크게 하면 맛이 잘 베지 않고 잘게 하면 씹는 맛이 없으니, 두부 한 모는 12등분 정도로 자르는 게 좋아. 할아버지하고 아버지는 얼큰한 걸 좋아하는 취향이니 고추는 좀 매운 걸로 쓰는 게 좋고, 냉장고에 보면 멸치가 있을 테니, 세 마리 정도 넣어서 함께 끓이도록 해. 표고버섯도 같이 끓이면 좋아. 그리고...”

은결은 차분하게 된장찌개 끓이는 법을 강의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 미래는 수첩에 열심히 은결이 말하는 내용을 간략화해 적어 넣었다. 전국 0.3%답게(?) 요점만 적고 있기에 은결의 말을 따라가는데 무리가 없었다. 곧 은결의 설명이 끝났다. 미래도 수첩을 덮고는 득의만만한 표정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웬 요리법이야?”

은결이 물었다.

“그게, 어제 정식을 사먹었는데, 별로 맛이 없던걸. 오빠가 해 주는 게 훨씬 맛있었어. 그래서 내가 해볼까, 하고.”

미래의 말에 은결은 뿌듯함을 느꼈다. 뭐든 그렇지만, 요리도 먹는 사람이 맛있게 먹으면 가장 기분 좋은 법이다. 하지만 장자 천도편에서 성인의 말을 적은 책을 성인의 찌꺼기라 칭하듯, 무릇 행위의 핵심은 미묘한 중도에 있는 법인데, 그는 언어로서 전달되기 어렵다. 다시 말해, 겨우 글이나 몇 자 끄적여 따라한다고 아무나 할 수 있다면 이 세상 요리사는 전멸했다. 하물며 미래는 요리하고 인연이 멀지 않던가.

“그렇지만 미래 너 라면도 끓이기 어려워하잖아. 갑자기 된장찌개 같은 거 도전해서, 괜찮겠어?”

하지만 직접적으로 지적하기는 미안하고, 은결은 미래에게 우회해서 말했다.

“괜찮아. 아빠랑 할아버지가 놀라는 얼굴도 보고 싶고-”

미래의 말에 은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자신도 미래가 요리랍시고 대령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애가 안하던 짓을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특히 요리라면 그 맛에 보장이 없을 것이니, 어찌 긴장되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이 정도는 교양 있는 숙녀의 기본 소양 아니겠어?”

“으음, 그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발언인데?”

“뭐 어때. 교양 있는 남성의 기본소양이기도 한걸.”

미래는 에헴 하고, 당당히 가슴을 폈다. 봉긋한 가슴이 강조됐다. ‘좀 작지?’ 은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먹이고 입히고(?) 키워온 양육자로서, 좀 책임이 느껴졌다. 미래가 볼을 부풀렸다.

“지금, 속으로 미래 흉봤지!”

소녀의 직감은 예리하다. 은결의 간이 철렁하고 떨어졌다. 그는 서둘러 두 손을 휘휘 강하게 저으며 변명했다.

“아, 아냐! 우리 미래가 어디 흉볼 데가 있어서! 착하지, 예쁘지, 완벽하잖아!”

“당연하지!”

은결이 추켜세워 주자 미래는 다시 가슴을 당당하게 펼치며 콧대를 세웠다. 동생의 모습을 정겹게 바라보던 은결은 세연이 가져왔던 과일 바구니에서 바나나 송이를 꺼내 꺾어 미래에게 하나를 내밀며 물었다.

“하나 먹을래?”

“됐어!”

되돌아온 미래의 대답이 단호하고, 신경질적이었다. 은결은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내밀었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마, 맛있는데.”

“흥.”

괜히 신경질이다. 은결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기 동생이지만, 역시 여자는 남성으로서는 이해불가능의 범주에 있는 다른 종이다 싶었다. 진화심리학이라면 어떻게 이 사태를 설명할까? 저런 변화막측한 감정변화 역시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발생한 걸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내가 여기 들어왔을 때 있던 여자, 그 사람 누구야?”

“아, 세연 양?”

“헤- 세연이라고 해?”

“응. 이 병원 오너 딸이래.”

은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미래의 표정이 긴장으로 굳었다.

“오너 딸이 왜 내가 들어오니까 죄지은 것 마냥 얼른 떠나는 거야?”

‘죄지은 것 마냥...’ 은결은 속으로 미래의 묘사를 되풀이 해 봤다. 그가 기억하는 세연의 마지막 모습은 좀 창피해 하는 기색은 있었어도, 죄지은 것 마냥 이라고 까지 이야기될 부분은 없었다. 역시 사물은 보는 자의 선험적 범주를 통해 재구성되는 모양이다. 새삼 칸트의 통찰력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느껴졌다. 시간이 나면 그의 비판 3부작이나 다시 읽어봐야 하겠다.

“그거, 오너 딸이라는 것 하고 별 상관없는 의문 아닐까?”

은결이 지적했다.

“오너면 이 병원이 자기 집 같은 거란 말이잖아.”

미래가 당당하게 답했다. ‘그런 억지가!’라고 은결은 지적하지 않았다. 억지라는 건 본인도 알고 있을 거다. 무슨 이윤지는 모르겠지만 미래의 세연에 대한 인상이 꽤 안 좋은 모양이다. 은결은 험, 하고 숨결을 고르고 말했다.

“...하여간 너는 모르는 사람이니 계속 있기 불편했겠지.”

수긍하는 듯, 더 이상 미래는 은결의 말에 뭐라 뒤를 잇지 않았다. 그러나 미래는 곧 조심스런 목소리로 또 은결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세연이란 여자 혹시, 지난번에 우리 집에 전화했던 그 사람?”

“응.”

이번에도 은결은 별 생각 없이 답했다. 미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음을 이었다.

“그렇구나. 그런데 그 사람이 괜히 왜 오빠 병실에 찾아왔데? 아니, 그 전에 오빠랑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오빠 같은 가난뱅이하고 그런 부잣집 아가씨하고 알고 지낸다는 건 웃기지 않아?”

차분하게 시작되던 미래의 말은 ‘웃기지 않아?’에 이르러 많이 강조되었다. 자신의 씀씀이가 좀 검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가난뱅이라고 까지 지칭될 필요는 없다고 여기던 은결이기에, 그 강조는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굳이 웃기다고 할 것 까지야...”

“웃겨!”

미래의 대답은 이전처럼 단호했다. 은결은 자라처럼 목을 수그리며 뒤로 물러섰다.

“아, 알았어. 별건 아니고, 전에 만개산에 갔을 대 조금 일이 있어서...”

“아, 나 놔두고 혼자 놀러 갔던 그 때 말이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나 놔두고’가 많이 강조되어 있었다. 얘가 말로 사람을 말려죽일 모양이다. 은결은 서둘러 답했다.

“여, 염좌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걸 도와줬던 것뿐이야. 해도 저물어 가고, 더 늦으면 위험하겠다 싶었거든. 그래서 오늘도 내가 있단걸 알게 돼서 찾아왔을 뿐이야.”

“흐-응.”

미래가 두 눈을 가늘고 예리하게 뜨고서는 은결을 한동안 훑어봤다. 은결은 취조실에 형사랑 둘만 앉으면 이런 기분이 될까 싶은 생각을 하며, 무슨 잘못을 했는지 곰곰이 따져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무죄다. 하늘을 우러러 보면 좀 미숙한 부분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백주대로를 걸어 부끄러움이 없는 몸임은 틀림없다.

“뭐, 괜찮겠지.”

겨우 납득한 듯 미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은결은 길게 가슴을 쓸었다.

“그런데 몸은 괜찮아? 아빠는 어제 집에 오다가 오빠가 사고로 끊어진 전깃줄에 부딪혀서 감전 당했다고 하던데.”

참 빨리도 물어본다. 은결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미래의 표정은 진실해 보였다. 타이밍이 좀 늦긴 했어도 걱정하는 마음에 거짓은 없다는 말이다.

“안 괜찮으면 너랑 이러고 있겠냐.”

“하긴. 오빠한테 튼튼한거 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지.”

미래는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심술궂은 미소를 보였다. “이게!” 은결은 정겹게 응수했다. “꺄아.” 미래는 의자에서 폴짝 뛰듯이 일어났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몸조리 잘해. 이주 뒤에는 다시 자전거 태워줘야지.”

“그래. 너도 곧 시험인데 공부 열심히 하고.”

“흥, 오빠한테 그런 말 들을 이윤 없네요! 또 올께!”

그리고 미래는 왔던 때처럼 활달하게 병실을 나섰다. 미래의 존재감이 큰 덕분인지, 그녀가 나가고 난 뒤의 병실은 한결 적적했다. 다시, 이곳의 시간과 공간이 함께하여 자신을 밀어내고자 하는 것처럼, 초조함이 느껴졌다.

마음을 달래며 은결은 병실 창문을 바라봤다. 서서히 황혼이 세상을 채색하고 있었다. 붉게 젖어가는 하늘 아래 너른 구름의 움직임은 유장했다. 은결은 그 움직임을 두 눈동자에 가득히 담았다.

그리고 은결은, 자신이 저 구름을 닮은 여유를 누렸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저 구름을 닮은 적적한 시간과 더불어 선명하게 알았다. 그는 그 구름을 닮은 느릿한 목소리로, 상념의 한 조각을 조용하게 입 밖으로 흘렸다.

“...미래한테 책 가져다 달라고 하는 걸 잊었구나.”

이러한 한적함은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니 어서 집으로 전화를 한통 해야겠다고, 은결은 생각했다.

*많은 분들의 추천을 받았습니다. 욕심입니다만, 언제나 요즘 같으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카닉, 우비거러, sanji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여름을 맞이해 방문하는 불행 앞에 그저 OTL외에 아무 대책이 없었는데, 좌절 말고 노력하겠습니다. 흑흑. 사실 제가 요즘 희망을 위한 찬가를 불러야 할 판국이라서.(-_-);;;

*제목이 정말 평판이 안 좋군요.(...) 출판 하게 되면 바꿔야 하겠습니다. 게시판 연재에서도 좋은 시기에 바꾸는 걸 고려해 봐야 하겠고... 하지만 역시 아까우니, 부제 정도로는 남겨두고 싶네요.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