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희망을 위한 찬가 - 암영(暗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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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이 머지않은 달은, 까마득한 도시의 빛에 충만한 밤하늘 가운데 희뿌옇게 빛나고 있었다. 은결은 그런 밤하늘의 한 곳에 역장을 펼친 채 앉아서 쉬고 있었다. 그의 발아래에서, 도시는 무수한 빛의 모임일 뿐, 콘크리트의 조형물이 아니었다.
“요즘은 왠지 평화롭구나...”
가볍게 기지개를 펴며 은결이 지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난번 카미와 싸운 이후로, 은결은 도천시에서 이렇다 할 사념체와 조우한 적이 없었다. 도천시가 그렇게 번잡한 곳이 아닌지라 사념체와 조우하는 일 자체가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울이 바로 코 앞인데, 일주일 이상 조우하지 않는 것은 기록적인 일이었다. 일주일이면 서울에서 발생한 사념체가 채 처리되지 않고 도천시로 건너오기에도 확률적으로 충분한 시간이다.
“계속 요즘처럼 평화로우면 좋을텐데.”
은결은 툴툴거리며 주머니에서 접어둔 A4용지를 꺼냈다. 이번 주 수행의 사설이었다. 그런데 지난화와 편집이 달랐다. 맨 위에, 사설이라 적혀 있지 않고, 아주 ‘수행 코너’라고 따로 제목이 마련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사설이 아니라는데 착안한 편집인 것 같았다. 사보지만 연재란을 따로 하나 맡은 것이다. 어쩌면 이 역시 주말에 진경을 만나러 수행이 갔던 이유였던 지도 몰랐다. 대우가 무척 좋았다.
‘흠,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건 안 드는거지.’
은결은 괜히 투덜거리며 글을 읽었다.
-한국 민주주의를 말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4.19 학생혁명과 6.29 공동선언이다. 이 두 사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봄으로서, 우리는 한국 민주주의의 성립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먼저 공통점을 살피면 이러하다. 이 두 기념비적인 사건에서 중심세력은 학생이었다. 중산층 지식인 집단이 배후에서 지지했다. 시위의 중심 의제는 독재 타도였고, 계급과 자유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정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시위의 양상은 비폭력 학생시위였고, 그를 통해 정권을 붕괴시킴으로서 당시 권위주의 정권의 취약성을 동시에 드러내보였다.
또한 정권붕괴 이후, 정치행위에서 학생과 노동자와 같은 중심세력이 소외됨으로서 운동과 제도권이 분리되어 나갔으며, 운동의 이슈 가운데 보수 계층이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것만 정책으로 전환시켰고, 이를 위해 보수 계층은 반공 헤게모니를 휘두른 것 까지도 같다.
그렇지만 두 사건은 결국 엄연한 차이를 가진다. 그리고 그 차이가 4.19가 다음해 박정희의 쿠데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간 것과 달리, 6.29 공동 선언은 일정부분의 후퇴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한국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성립시킬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힘으로서 작동했다.
그것은 정권 붕괴 이후, 보수 계층에서 혁명 세력에 대해 체제 위협이라는 반공 헤게모니를 휘둘러 그들의 주도권을 빼앗고, 사회적 이슈를 계급으로 옮겨가지 못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특히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령, 4.19 학생혁명의 경우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이후 운동의 이슈가 남북문제와 계급으로 옮아가려 했을 때, 운동 자체가 그 지지를 잃어버리는 사태로 이어졌다. 그러나 6.29 선언의 경우는 그와는 달라 학생 계층을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중산 계층이 지지 했고, 이어 7~8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짐으로서 결국 보수 계층 역시 일정부분 양보하지 않을 수 없는 성취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두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는 운동에 대한 시민들의 광범위한 지지가 있었는가, 아닌가 하는 측면이다.
때문에 이상의 대조를 통해, 우리는 흡사한 과정을 거친 두 사건이 결국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은, 그 운동이 얼마나 시민의 이해를 반영할 수 있었으며, 공감을 얻어내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에 기반 함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운동의 이념과 시민사회의 열망의 일치에 있어 두 사건이 보여주는 차이는, 4.19 당시 한국 사회는 산업화를 거치지 않았고, 87년 당시는 충분한 산업화를, 그것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성공적인 산업화를 거쳤다는 점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왜냐하면 산업화의 성공적인 수행은 그 사회의 중산계층을 두텁게 하고, 많은 수의 노동자와 농민과 같은 타자 계층을 만들어 내게 되는데, 이때 중산 계층은 일정 수준의 교육을 거치게 됨으로서 그들이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능력을 가지게 되고, 노동자 계층은 중산 계층과의 대비를 통해 상대적 박탈감을 안게 됨으로서 민주화 운동의 지지 세력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60년 4.19 학생혁명 당시에는 이러한 종류의 지지 세력이 한국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87년에는 그간의 경제발달로 인해 이러한 중산 계층과 노동자 계층이 사회 각지에 광범위하게 포진해 있었으며, 당시 그들의 세력과 이념적 불만 역시 한 절정에 다달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독재 정권의 의도치 않은 성공에 일정 부분 기대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박정희 독재 정권의 경제적 성취가 가능했던 배경이 어떤 것이었는지, 다음 글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지난 화에 이어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통사적 분석에 주력한 글이었다. 아마 다음 화에도 글의 성격은 별반 차이가 없을 듯 했다.
“...타자(他者), 라.”
은결이 중얼거렸다. 집에서 가끔 화제에 오르면 까고, 까고, 또 까고, 위로 까고, 아래로 까고, 옆으로 까고, 하여간 까기 바쁘던 박정희를 수행이 무려 ‘인정’한다고 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는 ‘산업화의 성공적인 수행은 그 사회의 중산계층을 두텁게 하고, 많은 수의 노동자와 농민과 같은 타자 계층을 만들어 내게 되는데’ 라는 문장이 계속 은결의 눈에 밟혔다. 마뜩치 않았다. 산업화로 인해 발생한 타자 세력이, 그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위한 강력한 추진력으로서 작동했다는 것이,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순하게 볼 때, 타자의 불만이라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었다. 현대사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을 갖춘 은결은 여러 통계지표를 통해 수행이 ‘타자’라 지칭한 이들이 실제에 있어 4.19 당시에 비해 비약적인 실제적 소득 상승을 이루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4. 19당시에는 침묵했던 이들이, 6.29 때에는 타자가 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불만을 품어, 민주주의를 위한 거대한 지지 세력으로서 작동했다고 한다. 결국, 중산 계층이라는 커다란 외부를 통해, 노동자 계층은 겨우 타자인 자신을 알았다는 말이다. 은결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과거 경험했던 격리탱크의 씁쓰레한 체험을 기억나게 했다.
겨우 자기 자신을 유지, 인식하는 것조차, 외부에 기대지 않고서는 만족스레 할 수가 없어, 전신으로 범주를, 차이를, 타자(他者)를 요구하는 자신에 대한 체험은, 은결의 세계관으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한 저열함의 표상이었다. 그렇기에, 중산층이라는 타자를 통해, 중심에서 배제된 타자로서의 자신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 노동자라는 타자에 대한 그 논설은, 아무래도 좋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은결의 감상과는 무관하게, 그것은 세상의 원리였다.
“쯥.”
상념의 뒷맛이 좋지 않았음인지, 얼굴을 약하게 찌푸리며 혀를 찬 은결은 역장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펼쳤던 종이를 접어 다시 주머니 안에 넣고는 역장에 발을 박찼다. 그의 동체가 허공을 길게 날았다. 은결은 집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도천시를 한 바퀴 더 돌아볼 생각이었다.
도천시의 가장 높은 건물의 옥상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밤의 어둠에 동화된 그들의 모습은 실루엣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명확하지 않았다. 왼쪽 서 있는 그림자가 말했다.
“어때?”
유창한 영어였다.
“시시하군. 저런 녀석이라면 내가 나설 것도 없다.”
왼쪽의 그림자는 어깨를 떨며 오른쪽 그림자에게 말했다.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지. 하지만 그는 ‘전설’의 아들이야.”
시큰둥하던 오른쪽 그림자가 움찔 경직했다.
“‘전설’이라면 그 8년 전에 마스터의 행사를 완벽하게 파괴한, 그-?”
“그래. 얼마 전 겨우 위치가 확인됐지.”
왼쪽 그림자가 득의만만하게 답했다. 그러자 오른쪽 그림자는 이내 긴장을 풀고, 다시 냉소적인 어조로 말했다.
“-더욱 실망이군. ‘전설’의 아들이 푸른 피(blue blood)는커녕 붉은 피조차 아니라니.”
영어에서, 푸른 피는 귀족이나 명문가의 사람, 대부호등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그는 은결의 능력에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킥, 정말이지 너 답군. 하지만 그런 네 녀석을 위해 한 가지 더 이야기해 주지.”
“뭘?”
“박쥐 새끼들이 어떻게 전설을 찾아냈는지 알아?”
“알게 뭐야. 어떤 새끼 납치, 고문이라도 했겠지.”
왼쪽 그림자는 쯧쯧 혀를 차며, 오른쪽 그림자에게 말했다.
“그렇게 찾을 수 있었다면 옛날 옛적에 찾았겠지. 사실은 며칠 전에 있었던 강대한 에너지 반응 덕분에 찾아낸 거야. 돌아다닐 필요도 없었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에너지였으니까.”
“여기 ‘전설’이 있다면 그런 건 놀랍지 않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비난의 기색이 가득한 대답이었다. 왼쪽 그림자는 낄낄대며 그 말을 받았다.
“그렇지. 하지만 그건 전설이 한 일이 아냐. 저 꼬마가 한 일이야. 단순한 에너지 총량만 따지면 전설조차 한참 넘어서는 힘이었지. 도무지 무슨 수를 썼나 싶을만큼. 마스터는 아는 것 같던데, 역시 얘기는 안 해주더라.”
“...!!!”
시큰둥하던 오른쪽 그림자의 기백이 단번에 바뀌었다. 주변의 공기가 달아오르고, 날아서며, 찢어질듯 긴장했다. 공간 자체가 뒤바뀌는 것 같은, 압도적인 기백이다.
“어때, 흥이 동해?”
“아아, 벌써부터 만월이 그리운데.”
오른쪽 그림자가 이죽댔다. 어둠 가운데서, 크게 벌린 입 안에로 약한 빛이 들어서며 그의 선명한 이를 드러냈다. 벌써부터 흥분한 듯, 그의 검은 실루엣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모양새를 보고 왼쪽 그림자가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 죽이지마.”
“마스터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지.”
오른쪽 그림자가 양 손을 맞잡아 쓸며, 아쉬움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밤하늘을 올려봤다.
만월이 머지않다.
*비료, 칸, 천유마, 흘러흘러 님께 추천을 받았습니다. 많은 추천을 받으니 무척 기쁩니다. 헤헷.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여러분의 기대를 가능하면 좋은 쪽으로 배신하는 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만 하렘은 어떻게 될지 약속할 수 없습니다. (...) 그런데 칸님의 추천은 지난번 마셜님처럼 덜덜덜 하던데, 특히 ‘읽지 않을 수 없다’라는 소제목의 해석 방식이 놀라웠습니다. 저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에서 좀 더 특화된, 기호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입장에서 사용한 제목이었습니다만, 그쯤 되면 사실 저의 입장이나 의도와 그것이 일치하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여깁니다. 그러고 보니 칸님은 굉장한 인기 작가이시던데, 앞으로도 좋은 글 쓰시길 기원합니다.
*일본어는 일본어 쓰기보다 한글로 해석하는 게 더 피곤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쿠로사카의 대사는 기본적으로 일어표현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때때로 한글번역 대사가 어색한 경우가 있죠. 이걸 가지고 어떤 장치를 마련해 볼까 하기도 했지만, 능력에 부치는 일이다 싶어 철폐했습니다. 그 기획이 폐기된 이상 계속 시도 하는 건 상당히 황폐한 짓이겠지요. 그래서 이번 챕터부터는 그냥 한글을 사용해 표현할 생각입니다. 좀 아쉽긴 해도 앞으로 다른 외국어 등장할 때 형평성 문제도 있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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