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282화 (282/300)

#   283-희망을 위한 찬가 - 희망을 위한 찬가(32)

#

“(유리에, 일전에 내가 ‘괜찮다’고 했을 때 화를 냈었잖아?)”

쿠로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괜찮다’고 했던 말은 거짓말이 아냐. 하지만 네 말도 옳았어. 나는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에 내가 느꼈던 것을 네게 다 이야기 했던 것도 아냐. 나는 괜찮았지만, 그게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사실은, 굉장히 아팠으니까.)”

거기서 은결은 잠깐 말을 끊고 고개를 숙인다. 그는 솟구치려는 것을 참듯이 눈을 깊게 감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다. 양 손은 기도 하듯 모여, 침묵을 위한 말뚝처럼 정지해 있다. 결국 그가 고개를 들며 멈춰 섰던 정면은 다시 흐른다.

“(-사실 민성은 말야, 맨 처음 여기 와서 사귀었던 친구야. 나는 학기 초에 굉장히 뚜렷하게 적의의 대상이 되어 있었거든. 주변에서는 나를 당연하다는 듯이 비웃곤 했어. 그리고 어느 날인가 학교에 가니 내 책상은 낙서와 쓰레기투성이가 되어 있었지. 연례까지는 아니라도 드문드문 겪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놀라지는 않았어. 어차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함으로서만 인격적 주체라고 하는 현상이 이루어진다면, 그런 것은 충분히 논리적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은결은 유리에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 웃음은 부드러웠지만, 유리에는 웃음 짓는 은결이 이 이야기 가운데서 잃은 것이 어떤 것인지 안다. 거기서 은결의 웃음은 공허가 된다.

“(그에 대한 내 반응은 언제나 일정했지. 그들을 불러내고, 싸워서, 이긴 다음 침묵시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행동하는 거야. 그러면 대게 나는 없는 사람 취급을 받으면서 안정되게 지낼 수 있었거든. 그리고 그때에도 똑같이 했었어. 그런데 불러낸 장소에 가 보니까 도와주겠다며 와 있던 아이가 있었지.)”

“(-그게, 민성?)”

가슴을 스치는 차가운 날을 느끼며 쿠로사카는 묻는다. 은결은 고개를 끄덕인다.

“(응. 그래. 그 아이가 민성이었어. 나를 그렇게 대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굉장히... 기뻤어. 8년 만이었어. 그렇게 기꺼이 다가오는 사람을 만난 것은. 그래서 나는 민성과 같이 ‘친구’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친구’가 되고 싶다고 여기게 되었어. 고릴라라던가, 늑대라던가, 여우를 만난 것도 그때부터였지.)”

“(......)”

그리움에 따스하게 녹아가는 은결의 입술 끝을 보면서 쿠로사카는 민성이 했던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는 자신에 대해 꽤 착하다고 자부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렇게 자부할 수 있는 자신이, 은결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게 되는 비열함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고도 했다. 그는 그래서 은결과 이제 아는 척 하지 않기로 한다고 한다. 거기에는, 그가 자신에게 보인 호의가, 자신이 은결에게 품는 호의에 의해 거절당해야 했다는 것도, 틀림없이 포함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날이 스친 자리에서 뻘건 피가 배어나오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날 정말로 아팠어. 못 견딜 것 처럼 아팠어. 지금 돌이켜 봐도,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 모를 만큼 아팠어. 나는 그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나를 이야기 해 주고 싶었어. 그 솔직한 모습 위에서, 나는 그들을 ‘친구’라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부르고 싶었어. 너와, 그것이 가능했던 것처럼 말야. 그래도 그게 가능할 거라고는 한 번도 기대해 본 적이 없었어-)”

‘불가능한 일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불가능이라는 사태에 대해 은결은 자신이 되돌렸던 대답을 기억한다. 불가능합니까. 그러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버지, 저는 당신을 부정합니다. 위대한 당신도 세계 속의 당신이기에.

“(-그렇잖아. 만일 그런 게 가능했다면, 아버지가 우리가 정말로 싸워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라고 이야기 할 리가 없었을 테니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 어떻게, 그게 ‘괜찮’을 수 있었던 걸까?)”

“(...은결.)”

은결은 고개를 들고 천정을 본다. 하지만 그는 본다기 보다 견뎌내고 있다. 되새겨진 생각과 장면들이 많은 것들을 자극했고, 그것들은 모두 왈칵 쏟아지는 눈물로 변하려고 한다. 그러나 은결은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는 그 상태로 어깨를 크게 움직이며 심호흡을 한다. 스- 들이키고, 후- 내뱉고. 반복해서 두 번. 그리고 고개를 내린다. 빨갛게 물든 얼굴은 그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얼마나 흥분했던가를 나타내지만, 그래도 그의 눈은 눈물을 머금지 않는다.

“(괜찮았다고 말했던건 거짓말이 아냐. 하지만, 이렇게, 이렇게 많이 아프고서야 괜찮았던 거야. 그러니까, 유리에, 고마워.)”

“(뭐가, 고맙다는 거야?)”

쿠로사카는 자신의 말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낀다. 고맙다는 말은 결코 자신을 위한 것이 되어선 안 됨을 알기 때문이다. 혐오감이 자신을 둘러싸서 놓아주지 않는다. 은결은 이어서 어딘가 쑥스럽게 이야기한다.

“(아마 네 덕분에, 겨우 ‘괜찮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내가 얼마나 아팠던 것인지, 어떤 것들을 잃었던 것인지, 그런 것들을 알아주었으면, 해. 나는 네 덕분에 겨우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던 것 같고, 또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으니까 말야...)

“----”

쿠로사카는 가슴이 죄임을 느낀다. 얼마 전이라면 그의 이 이야기에 얼마나 기뻐했을까. 얼마나 가슴이 기쁘게 두근두근 뛰었을까. 묵묵한 침묵이거나, 지어진 표정으로 닫혀있던 것들을 애타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비록 상처 입더라도 그 가운데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로 여겨졌을까.

그렇지만 이제는 아니다. 쿠로사카는 은결의 수줍은 이야기들 가운데 드러난 표현에 마음에 맺힌 채 떨어지지 못하는 것만을 뚜렷하게 느낀다. ‘겨우やっと’ 그는 ‘겨우’라고 했다. 역시, 라는 차가운 결론이 마음을 흘렀다.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은결에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견딜만한’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그때 은결은 정말로 위험하고 불행해 질 것이라고.

'견딜만한' 그러나 그녀는 그 이상 나갈 자신이 없다. 은결이 이야기한 ‘겨우’가 자신의 한계라고 느껴졌다. 자신의 길을 따라주었기에, 은결은 나락으로 처박혔다. 그의 걸음을 어디로 인도해야 옳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거기서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그가 ‘겨우’ 견디도록 해주는 것 정도일 뿐인 것 같다. 그렇다면- 그녀는 치솟으려는 것들을 억지로 견뎌낸다. 자신이 틀렸고, 그의 아버지가 옳았다. 쿠로사카는 자신을 저들에게 맡김으로서 얻은 추진력으로 힘들여 맑은 웃음을 만들어 내어 은결에게 이야기한다.

“(그래.)”

조금만 더, 하고 그녀는 자신에게 속삭여 준다. 마지막으로 은결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자그마한 기념 같은 것이다.

유원지에서 나왔을 때, 세계는 서서히 석양빛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쿠로사카는 은결에게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초청했다. 은결은 약간 쑥스러웠지만 그녀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이 쿠로사카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저녁노을은 이미 깊었다. 그들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살풍경한 곳이었다. 찰칵, 하고 불을 켠 다음, 쿠로사카는 은결에게 말했다.

“(방안에 들어가 있어. 마지막으로, 식사 대접 정도 해 주고 싶었어.)”

은결은 그녀가 말하는 ‘마지막’이 이상하게 깊다고 느꼈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지우고 성큼 나섰다. “(아, 그러면 나도-)” 하지만 쿠로사카는 거절했다.

“(안 돼. 그렇게 하면 대접하는 보람이 없잖아. 네게 자랑도 하고 싶은데 말야.)”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쿠로사카의 뜻이 그러하다면 방해할 수는 없었다. 은결은 웃으며 물러났다. 그가 방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쿠로사카는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허전한 공간과 동시에 드러났다. 그녀는 냉장고 속을 뒤지고 사둔 것들을 하나하나 싱크대 위에 꺼내어 올려놓았다. 등을 떠미는 모?웃음이 사라진 공간에서, 웃음을 보여줄 대상조차 잃고, 유리에의 표정과 동작은 이제 고통을 참듯 침울하다.

그녀는 그곳에서 기계적으로 정밀하게 동작을 지속했다. 준비된 재료들을 다듬고, 정해진 시간, 정해진 수순에 맞춰, 적절한 때를 감지하며 조미료를 첨가하고, 준비한 재료를 넣으며 음식이 완성되기를 기다린다. 이내 재료가 들어간 냄비는 뜨거운 김을 토해내기 시작했고, 그 김에는 그윽하고 그리운 내음이 묻어 있었다. 만들고 있는 것은 ‘닭죽’이었다. 쿠로사카는 희미하게 웃었다. 은결이, 자신에게 해 주었던 최초의 음식이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한국에 와서 먹어본 가운데 가장 맛있던 음식은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이었고, 이제는 자신이 그를 위해 만들어 주고 있다.

“......”

꼭 한 번쯤, 해 주고 싶었던 일이다. 그는 언젠가 피그말리온에 대해 이야기 하며 자신의 가사일이란 피그말리온의 창작과 닮아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었다. 거기에는 소외가 없다고. 이것이 그가 말한 그런 행위인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이것을 먹고, ‘맛있다’고 진정으로 이야기 해 준다면 무척 기쁠 거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비록 그 뒤에 남은 것이 헤어짐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거기서 지금 음식을 끓이고 있는 가스불의 온도만큼 자신의 마음도 뜨거운 것 같다고 쿠로사카는 느낀다.

“(더운걸...)”

쿠로사카는 무심하게 중얼거리며 베란다 쪽으로 걸었다. 석양은 이미 깊어서 세계는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다. 아름답다, 이전에 슬픔을 자극하는 장면이다. 쿠로사카는 한 동안 말없이 하늘을 바라봤다. 그녀는 피하는 것 처럼 시선을 돌렸다. 놀이터가 보였다.

“(아-)”

저절로 말이 흘러넘친다. 놀이터에는 많은 아이들이 한 명의 아이를 둘러싸고 괴롭히고 있었다.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아이는 그녀도 알고 있는 아이였다. 면식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아는 한 소년이 괴롭히는 것을 보았기에 부득이하게 알게 되었던 혼혈아였다. 그리고 그 괴롭힘 당하는 아이 앞에 다른 한 소년이 서서 괴롭히고 있는 아이들과 매섭게 대치하고 있었다.

“(......!)”

자신도 잘 알던 그 소년이었다. 왕따였기에 도와주었고, 왕따를 시키기에 그러지 말라고 충고했던 그 아이였다. 괴롭힘을 당했지만, 또한 기꺼이 괴롭힐 수 있음으로 누구나 주인이거나 노예일 거라던 말을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던 아이가, 이제는 한때 자신이 괴롭혔던 아이를 위해 대신 나서 주고 있다. 쿠로사카는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감격인지, 감동인지, 조소인지, 부끄러움인지 잘 모르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 울음이 곧장 해방처럼 기꺼운 웃음이 된 것을 생각하면 결코, 자신의 영혼을 휘감는 것 처럼 큰 이 감정이 나쁜 것은 아님이 확실했다.

“(바보 같애...)”

계속, 눈물을 훔치며, 쿠로사카는 중얼거린다. 아침에 그러했듯이. 하지만 자신을 향해 ‘바보’라고 이야기 하는 이유는 이제 다르다. 아침의 그것이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향한 표현이라면, 지금은 것은 자신의 무지와 무능조차 받아들일 수 없던 상상력의 부재에 대한 질책이다. 소년을 향해 상상하라 해 놓고서, 작은 소년이 저렇게 큰 걸음을 내딛을 동안,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다. 심지어 가시가 무서워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그가 드디어 내밀어 온 손 조차 거절하고자 했다. 좀 아프면 어때서!

이제 아래에서, 괴롭히던 아이들은 질린 것 처럼 멀어졌고, 과거에 괴롭히던 소년은, 괴롭힘 당하던 소년을 향해 쑥스럽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처음 놀이터에 소년을 등장 시킬 때부터 여기까지 올 걸 계획하고 등장시켰습니다. 억압받고, 억압하고, 화해한다. 깨끗한 구도죠. 이로서 계획한 대로 다 사용했습니다. 만족. 이렇게 못한 캐릭터도 있습니다. 세연이 그러했죠. 세연이 부잣집 아가씨라는 것은 매우 명백하게 이 아가씨를 통해 ‘계급(class)’의 문제를 거론하기 위한 장치였는데, 주인공이 ‘돈’이라는 문제에 사적으로 집착할 이유가 거의 없었던 지라 충실히 써먹기 힘들었습니다. 혼자서 전 세계와 전쟁해도 질 리 없는 캐릭터가 주머니에 돈이 많다던가 적다던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일 수 없으니 말입니다. 萌요소로나 쓸걸 그랬나.(...) 다른 부분들은 잘 처리해 줬으니 괜찮습니다.

*아저씨님의 질문은 겨울바른 군의 대답이 옳습니다. 한가지 더 추가하면 그노시스트는 도천시에 함정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수행의 진이 대단하고 특수한 것은 이 특성 때문입니다.) 함정이 있다고 해도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 아담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런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러브 코메디 초반에나 중반에 써먹을만한 진행을 기대하시는 분들이 꽤 되더군요. 하지만 엔딩 지점에 와서 일을 더 꼬이게 만들 이벤트 따윌 써먹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하하.

*성원!!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