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4 히든 클래스는 과연 =========================================================================
4.
신입사원 이주랑이란다. 윤석은 처음에 뛸 듯이 기뻤다. 부려먹을 놈(?) 하나가 생겼다. 막내 생활 4년. 정차장 밑에서 얼마나 서러웠던가. 이제 말도 안되는 막내짓에서 탈피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실제로 윤석은 며칠 동안 지긋지긋했던 막내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이주랑이 얼마나 싹싹하고 성실한지 그녀가 온 뒤로 사무실의 분위기 자체가 많이 밝아졌다. 원래 천성이 그런건지, 아니면 비위 맞추는데에 익숙한 건지는 몰라도 커피 타오라는 심부름, 설거지하라는 심부름, 심지어 담배를 사오라는 사적인 심부름도 눈살 한번 안찌푸리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다 해냈다. 그러면서도,
" 차장님. 그런 농담 하시면 정말 미워할 거에요. 엄연히 성희롱이란 말이에요. "
하고 할 말은 꼬박꼬박 잘했다. 그 모습 조차도 밉지 않고 귀여웠는지 정차장은 그래 미안하다, 하고 사과까지 했을 정도였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김윤석은 이주랑이 조금 부담스러워졌다.
일을 잘해도 너무 잘한다. 기본 업무 능력도 탁월하고 사교성도 뛰어나고 어느새 사무실 분위기 메이커가 되어버렸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나서서하는 그녀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소를 띄게 만드는 기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김윤석은 내심 그녀에게서 부담을 느꼈다. 부하직원이 너무 잘나도 문제라는, 별 거지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 윤석은 그게 왜 그런 건지 좀 알 것 같았다.
사무실의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고, 윤석 스스로도 그녀를 좋아했는데 좋아하는 것과 부담스러운건 약간 별개의 감정이었다.
" 오빠. 좀 표정 좋아지나 싶더니 왜 이렇게 또 주눅 들어 다니냐? "
" 수희야. "
" 왜? "
" 지난 번에 박카스 잘 먹었다. "
" 그거 엄마가 주라 그랬다니까? "
" 야. "
" 왜? "
" 너 게임 하냐? "
" 아, 아니! "
윤석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선 걸어가 수희의 머리를 한대 쥐어 박았다.
" 아 왜 때려! "
" 너 하는 거 다 알거든. 어디서 구라질이야. "
" 아씨... 엄마 아니. 아빠한텐 절대 말하지마. 나 죽어. "
" 너 어디 길장이라며? 잘 나간다며? "
" 어디서 들었어? "
" 어디서 들었나 그게 중요하냐. 아 걱정마. 아빠한텐 절대 말 안할거니까. 너 근데 길원이 너보다 훨씬 세고 그러면 어떠냐? "
" 좀 눈치 보이지. "
처음엔 게임을 안 한다고 부정했던 김수희는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봇물처럼 얘기를 쏟아냈다. 사실은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던 모양이다.
"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좀 신경쓰이긴 하더라. 매너도 되게 좋고 스킬 활용도 엄청 잘해. 실력 짱이야. 근데 그래서 좀 눈치 보이긴 하더라. 길장인 나보다 세니까. "
" 그렇지? "
수희는 고개를 잠깐 갸웃하다가,
" 그냥 눈치 조금 보이는 거 말고는 뭐 별로 없는데? "
하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게임은 게임이다. 그녀는 그리 크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듯 했다. 그리고 어차피 길드의 대소사를 정할 때는 어차피 길드원들 전체의 눈치를 봐야 한다.
" 그러냐. "
" 오빠. 오빠도 게임 하잖아. 요즘 열심히 하는 것 같던데 뭐해? 뭐해? 법사야? 아님 설마 무캐야? "
" 아 피곤해. 나가봐. "
" 뭐야! 오빠 할 말만 하고! "
여태까지 종알종알 시끄럽게 떠들어댔던 건 바로 너였다만, 하고 윤석은 수희를 밖으로 쫓아내버렸다. 닫힌 문을 향해 말했다.
" 왜 현캐는 묻지도 않냐? 그건 그냥 쓰레기라 물을 가치도 없다는 거냐? "
그리고선 씨익 웃었다. 지금은 쓰레기다. 건 오퍼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완전한 쓰레기 캐릭터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TV에선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유토피아의 히든 캐릭터를 플레이해서 10억원을 모은 20대 중반의 이모씨. 이모씨의 말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또다른 직장이자 꿈의.......
' 언젠가는 반드시 나도 저렇게 된다! '
지난 며칠간.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건 오퍼는 보이는 것 만큼 쓰레기는 아니었다.
" 한다면 한다!! "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문이 벌컥 열렸다. 수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까불지 말고 밥이나 먹어. "
" 뭐? "
" 까불지 말고 밥이나 먹어. "
" 너 오빠한테 지금 무슨 말버릇이냐? "
" 내가 한 말 아니고 아빠가 한 말이다 뭐. 아빠가 전해달랬어. "
수희는 혀를 낼름 내밀고는 도망치듯 식탁으로 가버렸다.
기집애가, 까불고 있어. 피식 웃으면서 식탁에 앉은 윤석이 말했다. 건너편엔 아버지가 앉아 있다.
" 수희 너. 요즘 게임 좀 하는 거 같더라? "
수희가 움찔했다. 아버지의 숟가락이 멈칫했고 수희의 표정이 핼쓱하게 질렸다. 아버지가 말했다.
" 수희. 너 게임 같은 거 하니? "
" 아니! "
윤석은 된장찌개를 덜어먹으면서 피식피식 웃었다.
" 그래? 그럼 내가 잘 못 들었나보다. "
" 응. 절~대로 그럴 걸? 절~대 절~대 절~대로 잘 못 들었을 걸? "
" 밥이나 먹어. 밥풀 튀잖아. "
" 아, 알았어. "
수희는 윤석에게 대들지 못했다. 아무리 전 세계적인 붐을 일으키고 있고, 게임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현상으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는 유토피아라지만 아버지인 세권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수희는 속으로만 이를 갈았다. 윤석이 말했다.
" 오늘따라 밥이 무척 맛있네. 엄마 솜씨가 더 늘었나봐. "
* * *
건 오퍼. 설명대로 총알을 만드는 직업이다. 그래서 윤석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총알만 죽자고 만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 걸. 레벨이 올랐다. 거기에 희망을 얻어 죽자고 레벨을 올렸다. 이게 그렇게 지루한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총알 만들고 쉬고 총알 만들고 쉬고 총알 만들고 쉬고 총알 만들고 쉬고 총알 만들고 쉬고 총알 만들고 쉬고 총알 만들고 쉬고. 이 것의 무한 반복이다. 재미도 없고 지루하다.
' 총잡이도 이 악물고 키웠는데 이건 히든이라고. '
레벨은 계속해서 올랐다. 레벨업 속도는 사냥을 하는 것에 비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그냥 평범한 편. 쿨타임 2초라는 것이 생각보다 거슬렸다. 쿨타임이 1초만 됐어도 한시간에 3600발이 생기는데 2초면 1800발 밖에 안생긴다. (다른 모든 요소를 제외하고 쉴새없이 총알만 만든다고 가정했을 때에 그렇다는 얘기다.)
' 내가 한다면 한다. 진짜. '
건 오퍼로 전직 후, 레벨 10이 되었을 때 새로운 스킬을 하나 얻었다. 필요 인트를 채운 덕분에 생긴 패시브 스킬이다.
[ 마나 절대량 증가 ]
마나의 절대량이 20000 증가한다.
' 아...이건...'
역시 '건 오퍼'는 유토피아 시스템이 자체적인 필요로 인해 만들어 놓은 클래스임에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말도 안되는 스킬이 생길 리 만무하다. 바로 배틀 필드를 사용할 수 없는 일종의 장치라고나 할까. 건 오퍼는 누가봐도 쓰레기 캐릭터였고 이 캐릭을 10레벨까지 키우는 건 고역이었다. 일단 재미가 너무 없었다.
' 분명히 뭔가 있다 이건. '
김윤석은 느꼈다. 완전히 쓰레기 캐릭터인데 이런 안전장치까지 해놨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캐릭터를 얻었을 때 노가다를 뛰느니 삭제해버리고 판캐나 무캐를 키울거다. 때문에 이런식으로 제약을 걸어놓은 듯 했다.
뭔가 있긴 있다. 그는 눈물을 머금고 게임에 투자를 감행했다. 투자라고 쓰고 '현질'이라 읽는다. 금액은 무려 10만원. 아직 학자금도 다 갚지 못했고 -금리가 낮아서 천천히 갚고 있다- 차 할부금도 남아있는 그는 한 달 월급 200만원 가량 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어쩌면 약간 평균 이하의- 대리였고 10만원을 투자하는 것엔 상당한 고민이 따랐다.
다른 장비에 투자하면 모를까, 마나 물약을 사기 위해 10만원을 투자해서 더 아까웠다. 장비는 남지만, 물약은 사용하면 안 남으니까.
그래도 '현질'을 한 덕분에 레벨업 속도는 수십배나 빨라졌다.
노멀탄의 생성은 쿨타임이 2초다.
레벨이 15가 되었을 때, 마비탄생성이라는 스킬이 생겼다. 그 것역시 쿨타임이 2초다. 그로인해 레벨업이 더욱더 빨라졌다. 노멀탄과 마비탄을 번갈아가면서 만들면 2초의 쿨타임이 거의 무색해졌으니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건오퍼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했다. 건 오퍼는 직접 전투클래스는 아니었다. 스킬을 사용해서 레벨이 올라가는 것으로, 그건 이미 확실했다.
[ 노멀탄이 생성되었습니다. ]
[ 마비탄이 생성되었습니다. ]
[ 노멀탄이 생성되었습니다. ]
[ 마비탄이 생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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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벨이 올랐습니다. ]
새로운 알림음도 하나 들려왔다.
[ 클래스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짐에 따라 마력탄생성이 가능해졌습니다. ]
새로운 알림음들이 들려오고, 윤석은 건 오퍼가 쓰레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 (희망만 품었다. 여전히 쓰레기클래스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