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일은 전국이 대체로 맑겠습니다 >
“잭, 오늘 레이스 5위 안에만 들어오면 이번 시즌 F1 월드 드라이브 챔피언이 되는데요. 경기 전 기분이 어떤가요?”
잭 킴 워커.
명문 F1팀,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드라이버로 유년시절 고카트부터 레이싱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 남자.
영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레이싱 천재로 2020시즌 마지막 GP(그랑프리)를 앞두고 기자회견장에 섰다.
“오늘 경기가 제 커리어에 중요한 만큼 긴장되는 건 사실입니다. 다른 레이스 때와 마찬가지로 늘 하던 대로 성실히 준비할 겁니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잭.
공격적이고 급진적인 레이싱 스타일과는 반대로 매 컨퍼런스 차분한 모습이었다.
“오늘 경기 결과에 따라 F1 최연소 월드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됩니다. 마티스 감독님, 이런 놀라운 업적 달성을 눈앞에 둔 잭의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붉은색 페라리 팀 유니폼을 입은 중년 남성. 갈색 콧수염 아래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포뮬러 원은 팀 스포츠입니다. 드라이버를 포함해 감독, 미카닉, 엔지니어, 연구 개발팀까지. 한 경기를 위해 400명이 넘는 인원이 함께 땀을 흘립니다. 이런 팀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뭔 줄 아십니까?”
마티스 감독의 물음에 회견장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건 바로 소통입니다. 잭은 뛰어난 팀 메이킹 능력과 함께 자신에 대한 피드백에 굉장히 신경 쓰는 선수입니다. 잭 같은 드라이버가 팀에 있으면 크루들의 사기는 저절로 치솟게 되죠. 이런 선수가 성공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랑스러운 얼굴로 잭을 바라보는 마티스 감독. 회견장 안 많은 이가 흐뭇한 미소와 함께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잭,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주실 수 있나요?”
페라리를 포함한 다른 상위권 팀들도 참석한 컨퍼런스. 기자들의 질문이 오직 잭에게 집중됐다.
계속되는 질문 세례에 곤란한 표정을 짓는 잭. 마지막이라는 말에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이틀 전 실버스톤 서킷(브리티시 그랑프리가 열리는 F1 트랙)에 도착해 트랙을 탐사했습니다. 트랙을 걷다 문득 처음 포뮬러 카를 타던 날, 저 자신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어떤 말이었죠?”
“무슨 일이 있어도 세계 최고의 F1 드라이버가 되겠다고 다짐했어요. 이제 눈앞에 제 꿈을 이룰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마지막 그랑프리, 포뮬러카의 엔진이 뜨거워질수록 저는 더 냉철하게 레이스하겠습니다.”
***
“엔진이 뜨거워질수록, 푸흡. 그 뒤에 뭐라고 했지? 하하.”
롭이 영국식 발음을 굴려가며 배꼽을 부여잡았다.
페라리 팀 하우스. 메인 홀에 놓인 가죽 소파에 앉은 잭이 롭을 노려봤다.
“그게 그렇게 웃겨? 아니 최연소 월드 챔피언이 코앞인데, 그 정도 코멘트는 해줘야지.”
“맞아, 맞아 진짜 멋있었어. 푸흡. 크크큭.”
소파에서 일어난 잭이 롭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아악!”
“그만해라.”
롭은 잭이 처음 포뮬러 카를 탈 때부터 함께 해온 전담 레이스 엔지니어다. 평소 장난기가 많은 롭. 잭이 그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그나저나 이번 실버스톤에 36만 명이나 올 거라는데? 역대 최다 관중 기록이 될 거래.”
“와, 36만 명?”
F1은 지상에서 가장 큰 스포츠 가운데 하나다. 한 경기 TV 동시 시청자 수는 무려 6억 명. 서울 상암 경기장이 6만 6천 명 정도 수용 가능하니까. 36만이면 어마어마한 숫자가 분명하다.
특히나 이번 경기엔 대중의 관심이 최고조에 달했다. 최연소 F1 월드 챔피언이 탄생하기 직전이니까.
“스티븐 아저씨가 그러는데, 너 다음 올림픽에 오륜기도 들게 해준다는데?”
“오륜기? 그거 괜찮은데?”
“아니지, 내일 리타이어(중도 탈락)하면 끝이야. 당연히 월드 챔피언 돼야 가능한 거라고.”
빅 이벤트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F1은 국가적 행사로 그 위상이 대단한데, 이 바닥에서 성공하면 국가 기념식 때 대통령에게 기사 작위를 받기도 한다.
“잭, 잠깐 나와 봐.”
잡담을 주고받던 두 사람. 팀 하우스 바깥으로 롭이 잭을 데리고 나왔다.
“뭐야, 갑자기.”
“이번에 챔피언 되면 네 연봉이 얼마나 오를지 궁금하지 않아? 네가 팀에 오고부터 페라리가 상승세를 탔잖아.”
“맞아, 내가 페라리를 살렸지.”
롭의 말이 사실이었다. 2010년 초반부터 메르세데스에게 선두를 빼앗긴 페라리. 잭의 활약으로 우승 트로피를 몇 차례 들어올렸다.
내일도 잭이 활약하면 팀의 시즌 3연속 우승이 확정되는 상황.
“게다가 이번 시즌 챔피언까지 달성하면. 마크 정도는 되지 않겠어?”
“마크?”
“마크가 챔피언 됐을 때, 그 다음 시즌 연봉이 얼마였는지 알아?”
“얼마였는데?”
“5000만 달러.”
원화로 600억,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프로 스포츠 선수로 저 연봉을 뛰어넘는 사람은 메 형제, 메시나 메이웨더 정도 밖에 없다.
“넌 아마 더 받을지도 모르겠다. 최연소 챔피언을 데리고 있는 것도 팀에겐 큰 영광일 테니까.”
전체 스폰서쉽의 규모만큼이나 선수들 연봉도 어마어마했다. 가히 지상 최대의 스포츠라 불릴 만하다.
“어? 저기 데이비드다.”
“오우, 옆에 여자 진짜 핫한데?”
메르세데스의 레이서 데이비드 이튼이 보였다. 그의 옆을 걷는 한 여성. 플래시 세례를 받자, 몸매가 다 드러나는 원피스 사이로 새하얀 피부가 번쩍 빛이 났다.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이래.”
“그래? 쟤는 여자가 매일 바뀌는 거 같아.”
돈 뿐만이 아니다. F1 스타들에겐 슈퍼모델부터 영화배우까지. 세계 내로라하는 미인들이 선수들을 따라다닌다.
“그나저나 시즌 마지막이 실버스톤 트랙이네?”
“응, 좀 까다롭긴 한데. 3연속 커브 시작점에서 진입 속도만 잘 늦추고 들어가면... 5위 안에 드는 건 무리 없을 거 같아.”
모든 서킷에서 같은 포인트를 주지만, 레이서마다 특히 잘하고 싶은 서킷이 있다. 아마도 그건 최초의 F1 그랑프리가 열렸던 이곳, 실버스톤이다.
“5위 안에만 들 생각이야?”
“아니, 당연히 퍼스트지.”
게다가 챔피언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경기. 잭의 의지가 더욱 불타올랐다.
***
“2020시즌 마지막 그랑프리. 바로 이곳 실버스톤에서 시작합니다!”
“오늘 36만 명의 관중들이 이곳을 찾으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역대 최다 관중입니다. 아마도 새로운 챔피언의 탄생을 기대하고 오신 팬분들이 많겠죠?”
헬멧을 들고 게러지 안에서 대기 중인 잭이 카메라에 잡혔다.
관중의 함성에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드는 잭.
“와아아아아”
“마침 잭 선수가 화면에 나오네요. 잭이 부족한 게 있나요? 천재적인 레이싱 능력에 잘생긴 얼굴. 게다가 저런 확실한 팬서비스까지. 완벽하네요!”
관중석은 페라리 팀을 응원하는 붉은 깃발로 가득했다. 함성과 함께 잭의 가슴 한구석에선 무언가가 다시 불타올랐다.
‘무조건 선두로 들어온다.’
고카트를 타던 시절부터 주체할 수 없던 속도에 대한 욕망. 그 욕망을 푸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건 바로 레이싱 카에 오르는 것.
“모든 포뮬러가 그리드(출발 위치)에 섰습니다. 긴장되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잭은 스티어링 휠을 움켜쥐고, 신호를 기다렸다. 벌써 등줄기에선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빨간 신호가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부우우우웅.
위이이잉.
“시작됐습니다! 쏟아져 나오는 레이싱 카들. 일제히 1번 코너를 향해 달려갑니다!”
“와아아아아!”
레이스에서 가장 크러쉬(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순간은 언제일까?
모든 레이서가 마음을 졸이는 구간, 바로 스타트 랩의 1번 코너다.
“경기 시작부터 레드불의 게리와 맥라렌의 윌터가 부딪혀 트랙 밖으로 날아갑니다. 오, 이런 뒤따라오던 오스너. 윌터를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모두가 무리하지 않고 주의하는 구간이지만, 크러쉬가 일어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사고가 빈번하다.
-잭, 뒤에 게리와 윌터가 리타이어했어. 무리하지 말고 P2(현재 순위, 2)유지해.
“오케이.”
경기 전과 달리 무전으로 듣는 롭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잭의 페라리가 다음 코너에 진입했다.
부우우우우웅.
위이이잉.
연속해서 코너 4개를 무탈하게 돌아나온 잭이 5코너를 빠져나와 기어를 올렸다.
3단, 4단, 5단, 6단.
7단!
잭의 페라리가 강렬한 엔진음을 뿜으며, 순식간에 300km/h를 돌파했다.
“선두는 메르세데스의 케빈, 그 뒤로 페라리의 잭, 이어서 레드불의 쥴리앙이 따라붙습니다.”
“출발 순서 그대로 선두권 3명 나란히 5코너를 빠져나와 직선 주로를 돌파합니다.”
군용비행장을 베이스로 삼았던 실버스톤은 벨런스 형 서킷. 제법 빠른 속도를 요구하는 고속 서킷이지만, 높이 변화가 크지 않아 변수가 적다.
이대로 레이스가 이어진다면 잭이 상위권에 머무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잭, 우린 진득하게 기다린다. 선두가 실수하면 그때 치고 나가자.
“오케이.”
남은 50랩에서 선두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라인을 타기란 불가능하다. 잭은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이대로 실수만 하지 않으면 돼.’
끝까지 집중력을 놓치지 않고, 페이스를 유지하는 주행이 잭의 최강점. 그저 차에 문제가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며 9번 코너를 빠져나왔다.
부우우우웅.
쥴리앙의 노란 포뮬러 카가 잭의 백미러에 들어왔다.
‘여길 들어오겠다고?’
줄리앙의 공격적인 모습에 살짝 당황한 잭. 10코너를 돌며 본능적으로 아웃코스 라인을 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쥴리앙이 다시 잭 바로 뒤에 붙었다.
“쥴리앙이 심상치 않은데요.”
둥글고 긴 10번 코너에 가까워지는 두 선수. 쥴리앙의 차가 코너 안쪽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 쥴리앙! 또 다시 인코스로 오버테이크(추월)를 시도합니다.”
쥴리앙이 코너 안쪽을 차지하자, 바깥쪽으로 밀려난 잭의 페라리.
그리고 그때,
쿵.
무게중심이 오른쪽으로 급격하게 쏠리며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 갑작스럽게 잭의 시야에 들어온 노샘프턴의 푸른 하늘.
그리고 다시 한번,
쿵.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사방에서 삐-소리가 들렸다.
파바바바팍!
엄청난 충격과 함께 잭의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오우, 대형사고입니다! 엄청난 속도로 회전한 포뮬러! 공중에 떠오른 잭의 포뮬러가 다시 땅 아래로..”
***
잭이 눈을 떴다. 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몸이 부르르 떨리고 정신은 혼란스러웠다.
‘크러쉬가 크게 났었는데? 꿈인가?’
상황 파악을 위해 몸을 일으켜 세운 잭.
맞은 편 창가에서 어린 꼬마의 얼굴이 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과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TV 소리.
“내일은 전국이 대체로 맑겠습니다. 내일 아침 기온은 서울 23도, 대구 24도, 대전 25도를 보이겠고...”
‘서울? 대구? 대전? 이게 무슨 개소리야?!’
< 내일은 전국이 대체로 맑겠습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