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측 커브에선 왼쪽으로, 좌측 커브에선 오른쪽으로 >
모든 경주용 자동차에서 엔진만큼 중요한 부품은 뭘까? 포뮬러 카가 피트(수리 또는 정비를 위한 공간)에 들어가자마자 교체하는 그것, 바로 타이어다.
경주용 슬릭 타이어에는 홈이 없다. 겉으로 봐도 아주 매끄럽다. 열에 의해 표면이 녹으면 타이어가 바닥에 쩍 달라붙는다. 그러면 마찰력은 극대화되고, 빠른 속도를 낸다.
달아오른 타이어는 급커브에서도 잘 미끄러지지 않는다. 높아진 제동 한계치로 강력한 그립력을 갖기 때문.
레이싱 카트를 좌우로 롤링하는 건 바로 타이어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서준하는 3바퀴 안에 새로운 트랙도 읽고, 타이어도 데워야했다. 서준하의 카트가 분주한 이유였다.
끼익.
부우우우웅.
끼익.
서준하에겐 오랜만의 레이스였다. 상대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상관없었다. 어느 레이스건 혼자 타는 것보다 순위를 다투는 레이스가 훨씬 재밌었다.
“병훈 씨가 롤링을 해야 한다고 알려줬어요?”
“아니요, 조작법 정도 알려줬죠. 타이어는 3바퀴 돌면 대충 뜨거워질 테니까, 롤링은 생각도 안했죠.”
“그래요? 마치 어떻게 레이스를 준비해야 하는 건지 다 알고 있는 것 같아.”
이병철의 대답에 주현우가 신기하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트랙의 메인 스탠드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스탠드 옆 게러지에선 트루맨 팀원이 모여 경기 준비에 나서고 있었다.
“코치님, 저 카트 뭐예요? 지금 저희 연습 시간인데.”
“감독님이 너희랑 같이 타라고 했다는데?”
“아, 또 일반인이야... 저번처럼 시작 하자마자 스핀하는 거 아니에요? 우씨.”
“걱정 마, 오늘부터 일반인은 제일 뒤에서 출발시킬 거고, 멈추면 트랙 매니저가 바로 데리고 나올 거다.”
트루맨 레이서들이 적잖이 기분 나쁜 기색을 드러내자, 정현석 드라이빙 코치가 선수들을 달랬다.
잠실 카트장은 선수팀 연습과 함께 일반인에게도 개방된 트랙이다. 충분치 않은 재정 탓에 선수 팀 연습 시간에도 일반인 카트와 함께 레이스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으휴, 길막만 하지 마라.”
“맞아, 그런 븅신들 때문에 랩타임(트랙을 한 바퀴 돌 때 걸리는 시간) 망가진다고.”
잠김 방지 브레이크 시스템, ABS가 없는 카트는 코너에서 뒷바퀴가 잠겨 스핀하기 일수다. 때문에 카트 운전에 익숙치 않은 대부분이 얼마 못 타고 카트를 세워 선수들의 레이스를 방해했다. 투루맨 선수들에게 서준하는 피해야 하는 폭탄처럼 보였다.
“스핀할 거 같진 않은데.”
트루맨의 주니어 레이서 최영준이 직선주로를 돌파하는 서준하의 카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몸도 쓸 줄 알고.”
최영준은 예리한 관찰력을 가진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그의 눈엔 커브를 돌 때 카트에 몸을 좌우로 흔드는 서준하가 보였다.
“우측 커브에선 왼쪽으로, 좌측 커브에선 오른쪽으로.”
서준하는 단순히 카트를 즐기러 온 일반인 같아 보이지 않았다. 롤링이나 무빙처럼 선수에게서나 볼 수 있는 카트 스킬을 구사했다.
두두두두둥.
서준하의 카트가 속도를 줄이며 스타트 지점에서 멈췄다. 이내 장철과 장윤호가 그 옆으로 달려왔다.
“준하야, 어때? 탈 만하니?”
서준하가 카트 밖으로 몸을 빼자 옆구리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특히나 3G에 달하는 횡가속도 덕분에 갈비뼈가 부서질 듯 아팠다.
하지만 두 사람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 서준하.
“힘들지? 이제 그만 탈래?”
장철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준하를 바라봤다. 그런 장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준하 양손을 활짝 펴 가위표를 그렸다.
“이대로 그냥 가면 아쉽잖아요.”
“아쉬워?”
“아저씨는 하루 종일 우리 땜에 카트도 못 타셨는데.”
“으응, 그건 괜찮아. 오늘 너 때문에 정말 재밌었어.”
“아직 재밌는 게 더 남았는데요?”
“응?”
“이따 더 재밌는 걸 보여드릴게요.”
카트에서 내린 준하의 표정은 아주 밝았다. 무표정으로 진지하게 카트를 타던 모습과는 정반대. 심지어 장철을 신경 쓰는 배려까지.
“네 진짜 실력을 보여주겠다?”
윤호마냥 어린애인줄 알았던 준하. 하지만 오늘 장철은 준하가 달라보였다. 성숙하면서도 강한 아이. 장철은 자신이 그만 타자고 말을 꺼낸 걸 후회했다.
“오늘 이곳에 데려와 주신 아저씨께 드리는 선물이랄까?”
서준하가 엄지손을 치켜세우고는 ‘큭’소리를 내며 자신의 목을 그었다.
“하하하. 그게 뭐하는 거야? 아무튼, 조심히 타.”
모터스포츠 광팬이 가장 좋아할 만한 선물은 뭘까?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던 F1 레이서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팬들이 정말로 어떤 레이스를 원하는지를.
“꼬마야 너도 레이스 할 거지?”
정현석 코치가 서준하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의 뒤로 트루맨 선수들의 레이싱 카트 4대가 그리드에 들어서고 있었다.
***
부우우우웅.
휑.
“와, 빠르다.”
“이야, 쪼그만 애들이 잘 타네”
선수팀 레이스엔 구경꾼이 제법 모인다. 강렬한 엔진음에 이끌려 많은 인파가 트랙 주변을 둘러쌌다.
흔히 볼 수 없는 스피디한 질주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쏟아졌다.
“다음 랩이면 끝에 한 명은 처질 것 같죠?”
트랙 레이스의 승패는 ‘코너에서 얼마만큼 머무는 시간을 줄였는가’에 달렸다. 너무 일찍 코너로 방향을 틀면 각도가 맞지 않는다. 코너에도 타이밍이란 게 있다.
“아마, 그럴 거 같네요.”
이병훈과 주현우의 눈에 트루맨 막내, 김성찬의 그런 미숙한 코너링이 보였다. 가장 마지막에서 출발한 서준하의 카트가 5바퀴째에 4위에 올라섰다.
“와, 한 명 제쳤다!”
“오, 준하 4위!”
직선주로가 많은 잠실 트랙에서 오버테이크(추월)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시작에서 앞설수록 레이스에선 훨씬 유리한 법. 하지만 실력 있는 레이서에겐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레저 타던 꼬맹이 제법인데요? 아직 리타이어도 안하고 잘 달리는 걸 보면.
“아, 성찬이 저 자식은 기본이 안 돼 있어, 기본이.”
“아직 어려서... 코너링 이해도가 떨어지는 거 같아요.”
“코너링에 이해할 게 뭐가 있어? 3개월 탔으면 대충 어떻게 돌아야 하는지 감이 안와?”
김성찬은 카트 경험이 부족한 막내였다. 평소 같았으면 김 감독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장면. 일반인에게 뒤처지는 막내 때문에 김강현 감독의 속이 타들어갔다.
덜커덕.
부우우웅.
끼익.
덜커덕.
'노면이 완전 개판이구나.'
레이싱 트랙 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특히나 직선 코스가 끝나는 지점에선 차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코너의 높낮이가 다른 탓에 서준하는 큰 충격을 받았다.
[lap: 16/30]
[01. 최영준]
[02. 강경원]
[03. 김영곤]
[04. 서준하]
[05. 김성찬]
레이스는 어느 덧 16랩.
3,4위 경쟁이 치열한 덕분에 트루맨 주니어부 주장 강경원과 최영준이 무탈히 선두를 달렸다.
서준하의 관심은 오로지 이 레이스에서 1위를 하는 것. 선두에 서려면 우선 앞차, 김영곤의 카트부터 제쳐야 했다.
‘어쭈, 뒤에 꼬맹이. 여지껏 운 좋게 잘 버텼나본데. 네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보자고.’
김영곤은 서준하를 의식하며 서준하가 치고 나갈 공간을 주지 않았다.
‘온다, 2번 코너. 저기가 제일 좋겠다!’
직선주로가 끝나고 이어지는 2번 코너. 서준하는 의식적으로 시선을 멀리 해 다가올 코스를 미리 파악했다. 코너는 급하지 않았다.
부우우웅.
빠르게 치솟는 rpm. 서준하의 카트가 무서운 속도로 직선주로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2번 코너에 진입하는 서준하의 카트.
‘뭐야?! 저 카트.’
가까이서 들리는 또 다른 카트의 엔진음. 코너를 도는 김영곤의 바깥으로 카트 한 대가 바싹 붙었다.
‘저 속도로 코너링을 한 거야?’
아웃라인 오버테이크를 시도하는 서준하에겐 믿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앞차보다 빠른 속도. 서준하가 미소를 지었다.
‘카트는 같아도 운전자 실력까지 똑같을 순 없는 법이잖아?’
서준하의 카트가 바깥쪽 코너를 돌며 조금씩 김영곤의 앞으로 나아갔다.
“와아아아.”
처음으로 등장한 추월 장면에 크게 놀란 관중이 함성을 내질렀다.
“하하, 보셨어요?”
“에? 저 속도로 코너를 돈다구?!”
“저렇게 돌면 카트 튕겨 나갈까봐 엄청 무서울 텐데.”
지구에선 누구에게나 중력이 작용한다. 카트를 타면 그 중력을 옆에서 받게 되는데, 속도가 빠를수록 코너를 돌 때 가해지는 힘이 어마어마해진다. 그 힘에 겁먹은 레이서는 코너 앞에서 무조건 속도를 줄이게 된다.
“게다가 저 속도면 횡G가 장난 아니에요.”
“그러니까요. 와, 저 정도면 자기 몸에 네 배나 되는 힘을 받았을 걸요?”
코너를 돌았다는 건 결국 그 힘을 견뎌냈는 것이다. 자칫하면 차가 중심을 잃고 스핀하는 상황에서 대담하지 못하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아웃라인 오버테이크. 이런 사실을 잘 아는 레이싱 관계자들이 점점 서준하의 레이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부우우웅.
휑.
선두권을 맹추격하는 서준하의 카트.
‘오늘 처음 탄다며?’
어린 주니어 팀이라도 선수는 선수다. 처음 카트를 타는 11살짜리 꼬맹이가 절대 끼어들 수 있는 레이스 상대가 아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무엇보다 놀라운 건 카트에 탄 서준하의 움직임이었다. 트랙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정현석의 팔을 두드리는 김 감독. 믿을 수 없었다.
“쟤, 진짜 처음 타는 거 맞대?”
“아, 모르겠어요. 저도 쟤가 레저 탈 때는 레저니까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 이건....”
화를 못 참고 흥분하는 김강현 감독.
“코너를 돌 때 잘 봐.”
오토바이를 운전해 본 사람은 안다. 아니 승용차를 운전해도 그렇다. 코너를 만나면 운전자는 자연스럽게 코너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게 된다.
“어?”
하지만 카트는 그 반대다. 이를 잘 아는 서준하는 모든 코너에서 반대 방향으로 몸을 기울여 속도를 높였다.
“어떻게... 몸도 쓸 줄 아네요...?”
“야야, 이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카트가 코너를 돌 때 안쪽 바퀴가 바깥쪽보다 회전수가 적어진다. 안쪽 바퀴가 들려 자동적으로 속도가 줄게 되는 것. 이때 몸을 바깥쪽으로 기울이게 되면 제동력을 억제해 속도가 덜 줄게 된다.
허나 이는 숙련된 레이서들만이 아는 사실. 코치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빠 방금 봤어요?”
장철은 믿기 힘들었다. 금방 타고 나올 줄만 알았던 준하가 선수 2명을 제치고 3위에 올랐다.
“진짜 잘 타는데?”
그리고 스타트 지점으로 들어오는 서준하의 카트. 서준하가 스타트 지점을 빠져나가는 짧은 순간 동안 장철을 바라봤다.
“어? 준하야.”
장철이 서준하를 발견한 그 순간,
“큭.”
서준하가 한 손을 들어 엄지를 치켜세운 뒤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너무나 강렬했던 서준하의 손동작.
‘이게 끝이 아니라고...?’
장철은 엄청난 기대감에 휩싸인 채 서준하의 뒤를 바라봤다.
‘아직 보여줄 게 더 남았다는 거야?!’
서준하의 카트가 선두를 뒤쫓아 빠르게 직선주로를 치고 나갔다.
< 우측 커브에선 왼쪽으로, 좌측 커브에선 오른쪽으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