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이스를 하게 해준다는 말이죠? >
레저용 카트의 최고속은 약 50km/h. 그다지 빠르진 않은데? 하며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다. 승용차 운전자가 고속도로에선 100km/h쯤은 가볍게 밟으니까.
하지만 카트의 체감속도는 50이 아니다. 레이서가 느끼는 체감 속도는 계기판에 표시된 속도에 무려 3배.
레이서의 눈높이가 낮고, 작은 조작에도 카트가 큰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속도감은 급이 다르다.
부우우웅.
레저용 카트 한 대가 요란한 엔진음을 내며 잠실 트랙 위를 달리고 있다.
“저기, 저 카트 레저용 맞죠?”
장철이 놀란 눈으로 윤호를 가르치던 직원을 향해 물었다.
“아마... 도요?”
서준하의 레드 카트가 순식간에 직선 주로를 돌파했다.
“레저용이 저렇게 빠른가요?”
“아니요, 레저로는 저 속도 못 내요. 저건 애들 타라고 만든 거라.”
준하의 레드 카트는 다른 레저 카트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부우우웅.
휑.
장철이 서 있는 바로 앞 코너를 서준하의 레드 카트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근데 어떻게 저렇게 빠른 거죠? 준하, 쟤 레저 타고 나갔는데?”
장철도 처음에는 오작동인 줄 알았다. 기본 조작법 설명도 듣지 않은 아이가 무턱대고 트랙으로 나갔으니, 큰일이다 싶었다.
그런데 이제 걱정은커녕 녀석의 레이스가 흥미롭게 보이기 시작했고, 준하의 카트가 빠른 이유가 궁금해졌다.
“제가 보기엔, 저 녀석 브레이크를 거의 안 쓰고 있어요.”
카트장 직원이 선글라스를 벗어 서준하의 카트를 유심히 관찰했다.
“브레이크를 안 쓴다구요?”
장철은 레저용 카트들이 주행하는 트랙을 자세히 살폈다. 완만한 코너가 많았지만, 장철의 눈엔 브레이킹이 필요해 보이는 코너도 보였다. 특히나 눈에 내리막이 있은 뒤 곧바로 이어지는 다섯 번째 코너.
“저기 5번 코너에선 브레이크를 무조건 밟아야 할 거 같은데요?”
아무리 레저용 카트라도 내리막을 타고 온 직후라면 카트가 최고속으로 코너와 마주하게 된다.
브레이킹을 쓰지 않은 카트가 트랙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장면이 장철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름이 준하라고 했죠? 준하가 타는 라인을 한 번 보세요. 핵심은 준하가 이 트랙을 전부 다 사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네?”
장철은 직원의 말대로 준하의 카트가 그리는 라인을 살펴봤다. 준하의 카트는 코너의 진입 직전과 탈출 직후, 트랙의 가장 끝 부분(연석)까지 이용해 모든 코너를 빠져나갔다.
“거의 라인의 정점(apex)인데요?”
“라인의 정점이요?”
“카트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상적으로 라인을 타네요. 지금 저 트랙에선 저렇게 타는 게 가장 베스트에요.”
장철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작고 투박한 준하의 카트가 마치 유연한 포뮬러 카처럼 매끄럽게 트랙 위를 달려나갔다.
“진짜 처음 맞아요?”
직원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장철은 난감해했다. 물론 지금 장철도 준하의 말을 믿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어우 엉덩이...’
카트는 서스펜션이 없기 때문에 가속을 할 때마다 차체의 진동이 그대로 전달된다. 게다가 서준하의 새로운 몸뚱아리는 이런 노면이 처음.
‘후... 이거 풀스로틀(최대 가속) 맞아? 너무 느리잖아.’
카트에 오른 지 몇 분도 채 되지도 않았다. 서준하는 이제 그만 레저에서 벗어나 레이싱 카트를 타고 싶었다.
우우웅.
서준하가 마지막 코너를 돌며 카트의 속도를 늦췄다. 줄어든 속도로 피트 근처에 가까워진 준하의 레드 카트. 장철과 카트장 직원이 준하의 눈에 들어왔다.
카트에서 내린 준하가 엉덩이를 부여잡았다. 준하의 옆으로 카트장 직원이 다가왔다.
“와, 잘 타네 꼬마야. 너 레이싱 카트도 타볼래?”
직원의 말에 서준하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야야, 주 팀장. 지금 3번 코너 도는 빨간 카트 봤어?”
커다란 창문으로 잠실 카트장 트랙이 훤히 보이는 사무실 안.
유소년 카트팀 트루맨의 총감독 김강현이 줄담배를 피우며 창밖을 유심히 바라봤다.
“켁켁, 감독님. 창문 좀 열게요. 어우, 담배 연기 좀 봐.”
유소년 카트팀 케노의 드라이빙 팀장 주현우가 사무실의 창문을 열었다. 트루맨 팀의 훈련도 구경할 겸 안부 인사차 김 감독을 찾았다.
“빨리 봐 봐. 지금 지나간다!”
무언가에 집중할 때면 연신 담배를 피워대는 김 감독. 주현우를 재촉했다.
“오, 잘타네. 그런데 레저 트랙에 웬 레이싱 카트죠?”
레저 전용 트랙 위 유난히 빠른 카트 한 대. 주현우의 눈에도 레드 카트는 부드럽고 빨랐다.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어. 근데 옆에 스티커 색깔 봐바.”
카트 옆면 섀시에 붙은 하얀색 스티커는 레저용 카트임을 나타낸다. 두 사람이 주목한 레드 카트에도 하얀색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응? 하얀색. 레저네요.”
주현우가 의자를 끌어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에헤이, 끝난 거야?”
이내 레드 카트가 속도를 줄이며 피트로 들어가자 주현우가 아쉽다는 듯 탁상을 내리쳤다.
철컥.
“어, 주 팀장님 오셨네요?”
사무실로 카트장 직원 이병훈이 들어왔다. 주현우에게 간단한 인사만 건넨 이병훈이 곧바로 김 감독 앞으로 향했다.
“감독님도 보셨어요?”
“레저 트랙 말하는 거지?”
“네, 빨간색 카트요.”
김 감독이 저런 주행 장면을 놓쳤을 리 없다. 김 감독도 마치 이병훈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카트를 많이 타본 거 같은데, 왜 레저를 준 거야?”
“아니에요. 오늘 처음이래요.”
“뭐?”
“네?”
이병훈의 말에 살짝 놀란듯한 두 사람. 특히나 모든 주행을 지켜본 김 감독의 눈엔 운전자가 카트 경험자로 보였다.
“이제 레이싱 카트를 타보겠다는데요?”
“오, 그래요? 잘됐네, 그러면 트루맨 애들이랑 같이 타면 재밌겠다.”
마침 잠실에서는 트루맨 팀 주니어부의 연습주행이 있을 예정이었다.
“같이 레이스 한 번 하시죠, 감독님.”
이병훈과 주현우는 서준하가 그들과 함께 레이싱 카트를 타는 걸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여럿이 겨루는 레이스는 솔로 주행보다 훨씬 재밌는 구경거리.
“으음. 잠깐만. 병훈아 쟤 몇 살이라고?”
“12살이었나? 초등학생이래요.”
12살이면 트루맨 팀 주니어부 막내 김성찬보다 어렸다. 김 감독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리네? 흠, 오늘은 그만 돌아가라고 해. 괜히 태웠다가 우리 애들 연습에 방해될 거 같아. 다음에 하자, 응?”
김 감독의 말에 두 사람의 기운이 쭉 빠졌다. 특히 새로운 볼거리에 기대감이 컸던 주현우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오늘 레이싱 마지막 타임이에요. 손님이 태워달라는데 해줘야죠.”
타임 테이블 표를 확인한 이병훈이 재빠르게 치고 나왔다.
가장 가까이서 서준하의 실력을 본 이병훈. 그도 서준하의 실력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했다.
“그럼, 10분 줄게. 혼자 타고 나오라고 해,”
사실 김 감독은 조금 걱정됐다. 이제껏 저렇게 모든 코너를 완벽하게 돌파는 레저 카트는 본 적이 없었다.
혹여나 다른 카트팀 팀장 주현우 앞에서 자신의 팀이 창피를 당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에헤이, 그러면 재미없죠. 주니어에 영준이 아직있죠? 걔랑 같이 타면 그림 좀 나올 거 같은데.”
“그래요, 감독님. 혼자 몇 바퀴 태워보고, 불안하면 제가 데리고 나올게요.”
이병훈이 기대에 찬 얼굴로 김 감독을 쳐다봤다. 김 감독은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들이마셨다.
“후... 어쩔 수 없지. 해봐 그럼. 대신 중간에 멈춰서 울고 불고 난리폈단 가만 안둬.”
***
레이싱 카트는 엔진부터 다르다. 레저 카트의 엔진이 4행정이라 가속이 느린 반면, 레이싱 엔진은 2행정으로 가속에 특화됐다.
디젤 차량처럼 악셀을 꾹 밟아야 나가는 차가 레저라면, 레이싱은 가솔린 차와 같다. 악셀을 톡톡 건드려도 무섭게 뻗어 나간다.
처음 레이싱 카트를 타면 제대로 못 밟는다. 갑자기 카트가 뻗어 나가 운전자가 겁을 먹기 때문. 특히나 직선 주로에선 숨쉬기조차 힘들다.
100마력 안팎의 엔진이 만드는 가속력에 온몸이 젖혀지는 일이 다반사다. 그 최고속은 무려 150km/h달한다.
타이어도 F1과 같이 슬릭타이어(자동차 경주 전용 타이어)를 쓴다. 속도가 빠른 대신 굉장히 미끄럽다. 무턱대고 과감한 코너링을 생각했다간 온몸이 멍투성이가 된다.
“코스에 들어갈 땐 한 손을 들어서 신호하는 거야. 자 이렇게.”
이병훈이 자신의 왼손을 들어보였다. 서준하가 이병훈의 동작을 따라했다.
“그리고 처음 들어가서 익숙해질 때까지는 트랙의 오른쪽 끝으로만 달려야 해. 알겠지?”
서준하는 이병훈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진 걸 느꼈다. 처음 형식적이었던 모습과 반대로, 지금은 자신에게 어딘가 더 힘을 줘서 말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자신에게 큰 기대를 하는 사람처럼.
“준하야, 아까 그 카트랑 이건 좀 달라. 많이 무서울 수도 있어. 괜찮겠어?”
장철이 걱정되는 눈빛으로 서준하를 바라봤다. 장철도 경험해 봐서 안다. 레이싱 카트로 달리기 시작하면 엄청난 횡 가속도에 당황할 수밖에 없다.
“네, 괜찮아요.”
피트의 걱정스런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서준하는 너무 설렜다. 비록 레이싱 카트일지라도, 이제야 어느 정도 제대로된 카트를 탄다고 생각했으니까.
“연습으로 3바퀴 돌고, 저기 앞에 보이는 그리드(스타트 위치)에 멈추면 돼.”
이병훈이 손을 뻗어 트랙 위에 하얀색으로 칠해진 스타트 라인을 가리켰다.
“3바퀴만 돌아요?”
아무리 일반인 주행이라고 해도 3바퀴만 타라는 건 너무했다. 아쉬운 표정으로 이병훈을 바라보는 서준하.
“트루맨이라고 유소년 카트팀이 나올 거야. 만약에 네가 잘타면 걔네랑 같이 타게 해줄게.”
‘트루맨 주니어부? 그리고 같이 타게 해준다는 건...아마도 그거?’
서준하는 다시 기대감에 찬 표정으로 이병철을 바라봤다.
“레이스를 하게 해준다는 말이죠?”
“응, 레이스 맞아. 어떻게 잘 아네?”
이병철에 말에 서준하는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얘는 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좋아하네? 레이스가 뭔지 알기나 하는 건가.’
그런 서준하의 미소를 본 이병철은 준하가 신기했다.
“자 그러면 이제 헬멧 쓰고, 아저씨가 뒤에서 밀면 3초 후에 악셀을 밟으렴.”
이병철이 관리자용 카트에 올라타 준하의 카트를 밀었다. 카트의 속도가 점점 오르기 시작했다.
부우우웅 휑.
빠르게 속력을 올리는 서준하. 피트에 모인 사람들이 시선이 그의 카트로 향했다.
그리고 잠실 레이싱 카트장에 울려퍼지는 타이어 마찰음.
끼익.
부우우웅.
끼익.
“아빠, 준하 차가 막 흔들려요. 저거 어디 고장 났나 봐!”
놀란 얼굴의 장윤호가 장철의 팔을 흔들었다.
“어?!”
준하의 카트를 보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장철. 놀라게 된 포인트는 윤호와 달랐다.
“윤호야, 저건 지금 준하가 일부러 카트를 롤링(rolling)하고 있는 거야.”
“일부러어?!”
좌우로 롤링을 마친 서준하의 카트가 첫 코너에 접어들었다.
< 레이스를 하게 해준다는 말이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