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 28일 수정) 이제부터 여러분이 탔던 카트는 전부 머릿속에서 지우시길 바랍니다. >
“스메들리 포뮬러 아카데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강당에 모인 포뮬러 입문 코스의 참가자들. 아카데미의 교장 윌리엄 스메들리가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했다.
“포뮬러 입문 코스부터 선수권 진출까지, 오늘부터 일주일동안 여러분은 다양한 교육과 함께 테스트를 받게 될 것입니다.”
흰색 콧수염이 인상적인 윌리엄이 비장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내려다봤다.
“다들 이곳에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오셨을 겁니다. 단순히 포뮬러카가 좋아서 오신 분도 있을 테고. 또는 레저, 아마추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
여기저기 히죽거리기 시작하는 학생들. 그의 연설이 길어지자 강당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아니면, F1 레이서가 꿈인 참가자들도 있겠죠. 자신의 목표가 F1 레이서이신 분은 손 한번 들어주실 수 있나요?”
40명의 참가자들 중 대략 절반 정도가 손을 들었다. 무리 중간에 앉은 서준하도 손을 높이 들었다.
“참가자들의 목적에 따라 그룹을 나누겠습니다. 지금 손을 든 참가자들을 제외하고, 모두 강당 밖으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교장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참가자들. 스태프들의 문을 열고 학생들을 인솔했다.
“저는 앞으로 지금 제 앞에 계신 여러분을 선수 참가자라고 부르겠습니다.”
강당이 조용해지자, 윌리엄이 다시 입을 열었다.
“F1 레이서를 꿈꾼다고 하셨으니까, 다들 레이싱 카트정도는 타봤을 겁니다. 그렇죠?”
윌리엄이 강당 위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
교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선수 참가자들.
“이제부터 여러분이 탔던 카트는 전부 머릿속에서 지우시길 바랍니다.”
어리둥절한 표정과 함께 당황한 참가자들.
“포뮬러는 카트처럼 우습게 보고 탈 수 있는 차가 아닙니다. 카트가 여객기라면 포뮬러는 군용 제트기와도 같죠.”
F1의 입문과정으로 카트를 타는 게 일반적이지만, 실제로 두 차의 성격은 아주 다르다. 속도, 크기, 비용 모든 면에서 카트와 비교가 안 될 정도.
“하지만 그저 외형이 다르고, 스피드만 빠른 게 아닙니다. 무엇보다 포뮬러카에 들어가는 비용이 어마어마하죠.”
윌리엄 교장이 다시금 진중한 눈빛으로 참가자들을 바라봤다.
“혹시라도 주행 중 사고라도 내게 된다면... 그 비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7천 파운드 정도는 기본이죠.”
단순한 사고로 1천만 원은 기본. 차체가 거의 손상되면 5배 이상의 수리비가 들어간다.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 모든 걸 부담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F1 무대에 도전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겁니다.”
포뮬러카는 꿈과 열정만으로 레이싱이 가능한 카트와 다르다. 서준하도 그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여러분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도 아니고, 우리 아카데미 차량이 부서지는 걸 염려해서도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건!”
목소리를 높여 참가자들을 집중시키는 윌리엄 교장. 강당에 모인 모든 이의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여러분의 생명도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엔트리 포뮬러급에서도 170, 180 km/h를 달리는 건 우스운 일이죠.”
공격적인 레이싱 스타일의 유럽 선수들. 카트처럼 전투적으로 레이싱을 했다간 단순히 몸에 멍에 드는 것을 떠나 운전자가 죽을 수도 있다.
“F1에 가겠다는 건, 앞으로 많은 시간을 이런 위험한 차를 타고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비용의 측면으로 보나, 삶의 안전성으로 보나. 쉽지 않은 선택인 거죠.”
입소하자마자 선수들에게 강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윌리엄 교장.
“그러니 저는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이 모든 걸 고려할 때,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장의 말에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몇몇 참가자들. 강당에 모인 대부분의 굳은 표정이 되었다.
“여기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
“자, 앉아 보세요. 카트보다 훨씬 차체가 클 겁니다.”
강사가 학생 한 명 한명에게 포뮬러카를 시승시켰다.
“카트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포뮬러카 역시 허리가 뜨면 안 됩니다.”
교육 1일차. 포뮬러카의 시승 교육 시간.
교장 주위로 파란색 직원복을 입은 아카데미 강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나저나 롭이 안 보이네.’
서준하가 강사들 얼굴 한 명 한 명 차근히 살폈다. 교장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롭.
‘아까 스태프들 소개하는 시간에도 없었고. 흠, 분명 여기서 일 했다고 들었는데.’
2013년이면 서준하에겐 7년 전 과거. 전생에 롭 스메들리는 서준하의 레이스 엔지니어가 되기 전 이 아카데미에서 생활했다고 들었다.
‘대낮부터 어디 짱 박혀서 울고 있는 거 아니야?’
유년시절 GP2 리그까지 우승했던 최고의 F1 유망주 레이서 롭.
하지만 경기 중 발생한 사고로 더 이상 레이스를 할 수 없게 되자, 그 이후는 우울감에 빠져 살았다고 들었다.
‘롭이 있어야 레이스가 편해지는데...’
레이서 혼자 운전을 잘 한다고 우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축구로 치면 이건 마치 메시 혼자서 골을 넣을 수는 없는 것과도 같다. 사비 같은 패스 마스터가 옆에 있어야 골을 넣기 쉬운 법. 서준하는 롭이 필요했다.
“단순히 차에 오르는 게 뭐가 어렵겠나 싶지만, 막상 타보면 그 느낌이 전혀 다를 겁니다.”
포뮬러카에 올라탄 참가자들. 몸의 어디부터 집어넣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포뮬러카의 시트를 콕핏이라고 불러요. 콕핏에 탈 때는 이렇게 발부터 먼저 쑥 집어놓고...”
포뮬러카와의 첫 대면부터 열정적인 강사들.
“거기 학생, 집중 좀 해줬으면 좋겠네요”
교육장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던 서준하. 그 모습에 강사 대니가 서준하를 불러 세우고는 이름을 물었다.
“준하, 딴 데 보지 말고 집중해요. 처음 타는 것부터 중요하다니까? 와서 한 번 타봐요.”
대니의 말에 서준하가 포뮬러카에 올라탔다.
탁.
능숙하게 시트에 안착한 서준하.
‘카트보다 훨씬 아늑해.’
오랜만에 꽉 들어찬 포뮬러 시트에 앉은 서준하. 자연스럽게 시트 벨트를 잠그고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강사들을 바라봤다.
“흠, 어디서 타봤나 보네요. 이름이 준하라고 했죠? 자 여러분 여기 이 교육생처럼 타면 되는 겁니다. 지금 운전자를 잘 보면 허리와 무릎이 차와 잘 접촉돼 있죠?”
서준하가 포뮬러카에 올라타자, 대니는 별 일 아니라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저기, 선생님. 혹시...”
포뮬러카에서 내린 서준하가 한쪽에 선 아카데미 스태프에게 조용히 물었다.
“롭 스메들리라는 사람, 여기서 일하지 않나요?”
“롭? 교장 선생님의 아들을 말하는 건가요?”
“네, 노란 머리에 맨날 모자 쓰고 다니는 녀석. 아, 아니 분이요...”
작은 머리에 모자가 잘 어울리는 롭은 항상 모자를 쓰고 다녔다. 설명을 하다 자신도 모르게 ‘녀석’이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만날 들쑥날쑥해요. 자기 출근하고 싶으면 하고. 뭐 그런 식이죠. 그게 다 그때 사고 이후로...”
남자의 설명은 이랬다. 몇 년 전 발생한 사고로 롭이 병원 신세를 졌다. 더 이상 레이싱을 하지 못하자, 아카데미에서 강사 생활을 했는데, 처음에는 열의를 보이고 출근하더니 요새는 도통 잘 안 보인다더라.
“아마 또 어디 펍에서 술이나 잔뜩 마시고 있겠죠, 뭐.”
“술이요?”
지금이 롭이 말했던 암흑기겠지 싶었다. 롭이 이 시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모르겠지만, 서준하는 빨리 롭을 만나고 싶었다.
“근데 롭한테 아시아 친구도 있었나? 롭을 잘 아나 봐요?”
마치 롭을 오랜 친구처럼 묘사하는 서준하. 그런 익숙함에 의문스럽게 보던 강사가 롭과 어떤 사이인지 물었다.
“음... 그냥 좀 알아요.”
서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
“이번 기수 참가자들 열의가 대단하던데요. 시승 끝나니까 운전은 언제 하냐고 물어 보더라니까요. 다들 엄청 타고 싶었나 봐요.”
“그래? 아까도 실습 때 딴청 피우는 녀석도 있고. 나는 잘 모르겠어.”
“엥? 딴청을 피워?”
“중국에서 온 남자 하나가 좀 거슬려.”
“허허, 두고 보라고, 진짜 포뮬러에 운전하면 딴청 피울 일이 없을 거야. 시동 걸고 악셀 밟는 순간, 묵직한 느낌이 확 밀려오는 걸 느끼면. 그 녀석 표정이 달라질 걸?”
입소식과 더불어 간단한 교육이 마무리된 1일차. 스메들리 캠프 내 강사 휴게실에서 강사들이 모였다.
“그리고 이번에 선수 참가자 중에 여자도 2명 있더라.”
“맞아, 맞아. 둘 다 진짜 괜찮던데. 몸매가...”
“그 중에 금발 이름이 케이시인가 그런데. 아무튼 걔네 아빠가 GP2 선수 출신이었다는데?”
“그래? 어디 어디, 신청서 뭉치 좀 줘봐.”
저마다 자신들의 교육 소감을 늘어놓는 강사들. 이례적으로 등장한 여성 참가자 때문에 흥분한 모습이었다.
강사 한 명이 참가자들의 신청서 뭉치를 가져와 테이블 위로 던졌다.
“케이시 카버트. 여기 있다.”
“열여덟? 아씨, 아직 어린데?”
“오, 입술이 진짜...”
참가자 신청서엔 사진과 함께 카트 이력, 지원 동기, 자시 소개 등이 적혀 있었다.
“오 진짜네, 아빠가 조시 카버트 모터스포츠 선수였네.”
“그렇지. 여자가 모터스포츠에 도전하는 거면, 이렇게 직접적인 영향이 있어야지.”
계속해서 강사들이 케이시의 이력을 읽어 내려갔다.
“오, 야 그래도 카트도 좀 탔네.”
“카트 경력만 5년이 넘어.”
“게다가 이번년도 유럽 카트 선수권 3위야.”
여자 선수치곤 화려한 카트 경력에 놀란 강사들. 케이시 카버트는 외모는 물론 실력도 뛰어난 참가자임이 분명했다.
종이를 넘겨 다른 선수 참가자들의 신상을 살폈다.
“다들 카트를 오래 탔네. 전부 5년 이상은 탔는걸?”
“루크 다이어, 얘도 재작년 유럽 선수권 2위네.”
“맞지? 내가 아까 말했잖아. 어쩐지 이번 기수 애들 눈빛이 달랐다니까.”
유럽 선수권 포디엄 출신도 몇몇. 선수 참가자 대부분이 화려한 카트 경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쯧쯧, 역시 이런 애들도 빠지지 않고 있다니까.”
“저런 애들은 여길 왜 오는 거냐.”
계속해서 신청서 뭉치를 넘기던 강사들. 몇몇 학생들의 이력을 보고 짜증난다는 투로 말했다.
“카트는 타 본적도 없다고?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걸 자기소개에 적는 거지?”
“냅둬. 집에 돈이 많은가 보지.”
포뮬러카에 올라 트랙 위를 밟는 건 많은 영국 젊은이들의 로망. 카트 경력과 같은 준비 없이 그저 부모 돈으로 지원한 철부지도 많았다.
신청서 뭉치의 끝부분에 다다르자 눈에 띄는 신청서가 등장했다.
“서준하? 아, 아까 그 동양인?”
“엥? 중국인이 아니었네.”
자기소개를 읽고, 뒷면의 이력 란을 살피는 사람.
“카트는 5년 째고, 또...”
수상 경력의 마지막 한 줄을 읽은 강사들이 경악하고 말았다.
“...!!”
“...!!”
“뭐? 로탁스 그랜드 파이널 우승...?!”
< (9월 28일 수정) 이제부터 여러분이 탔던 카트는 전부 머릿속에서 지우시길 바랍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