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F1. 그건 나도 좀 아는데. >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포뮬러카를 운전할 겁니다. 문웨이 서킷의 프리 주행을 하도록 하죠.”
윌리엄 교장이 스메들리 포뮬러 아카데미의 서킷, 문웨이를 가리켰다.
“앞서 나눠준 레이싱슈트을 입으시고, 프리 주행 교장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건네받은 하얀색 레이싱 슈트를 착용한 선수 참가자들이 피트 근처에 정렬했다.
“실내 교육에서 기본 조작법을 말씀 드렸습니다만, 한 번 더 간단하게 설명 드리도록하겠습니다.”
포뮬러카부터는 기어 체인지와 클러치 조작이 필요하다. 카트에는 없는 시스템, 윌리엄이 조작법에 대해 빠르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아씨, 뭘 또 저걸 설명해.”
“그냥 좀 빨리 태워주지 말이 너무 많아, 진짜.”
네덜란드에서 온 루크 다이어와 그의 친구 로만 콜슨. 지겹다는 표정으로 강사를 바라보며 불만을 털어놨다.
‘클러치 조작은 진짜 중요하지.’
강사가 다시 설명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서준하의 귀에 그들의 투덜거림이 들렸다.
“프리 주행을 하는 가장 큰 목적은 직접 포뮬러카를 몰며 자동차를 파악하기 위함입니다. 핸들을 얼마나 꺾어야 차가 돌아가는지, 클러치는 어떤 타이밍에 밟아야 하는지 등등 몸으로 부딪혀야만 알게 되는 사실이 있죠.”
걸음을 옮겨 포뮬러카 앞에 선 윌리엄. 한 손으로 스티어링 휠을 돌리며 바퀴의 움직임을 가리키자, 교육생들이 근처로 다가와 차를 유심히 바라봤다.
“오늘 준비한 포뮬러카는 4대. 선수 참가자들은 5명씩 각 차 뒤에 서서 대기해주세요.”
윌리엄의 말이 끝나자, 참가자들 모두 기대에 찬 얼굴로 너도 나도 먼저 타려고 서둘렀다.
“헤이, 거기.”
“응?”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서준하에게 루크와 로만이 말을 걸었다.
“뭐 하나만 물어보자. 너 어디서 왔지? 제팬? 차이나?”
“한국에서 왔어.”
“거봐 루크. 내 말이 맞다니까. 뭔가 다르게 생겼어.”
“엥? 코리안이였어?”
서준하의 답변에 신난 듯한 네덜란드인들이 별 일 아닌 것에도 웃으며, 잠시 말을 머뭇거렸다.
“근데 코리안, 너 어제 여기 왔을 때, 같이 온 여자 누구야? 여자친구?”
“여자라니?”
자신들을 소개하며 다시 시시덕거리는 녀석들. 뭔가를 봤다는 듯 서준하를 향해 물었다.
“너 어제 오렌지색 맥라렌에서 내렸잖아. 옆에 여자친구 아니야?”
아카데미로 서준하를 바래다준 한서윤을 본 모양. 서준하가 아니라고 고갤 저었다.
“오, 그래? 그럼 누구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서준하 앞에선 로만. 한서윤을 봤다면 그런 반응이 나올 만도 하다. 아시아인을 떠나, 키도 크고 스타일도 터프한 여자였으니까.
서준화와 대화를 나누던 로만에게 누군가가 그의 차례를 알렸다.
“야야, 로만 네 차례다. 빨리 가봐.”
“야 준하. 나 그 여자 좀 소개시켜줘. 잠깐 기다려봐 일단 타고 올게.”
큰소리로 말을 건네며 대기줄로 뛰어가는 로만. 덕분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됐다.
자신 있게 포뮬러카에 올라탄 로만.
두두두두.
둥.
탁.
로만의 포뮬러가 얼마 못 움직이고, 곧바로 시동이 꺼지고 말았다.
“이거 왜 자꾸 시동이 꺼지는 거야!”
포뮬러는 단순하지 않다. 조작에 능숙하지 않으면 주행은커녕 출발도 못하는 섬세한 차. 로만이 반복해서 시동을 꺼먹자, 멀리선 서준하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과 함께 미소 지었다.
***
“자, 다음 참가자 이쪽으로 오세요.”
윌리엄이 서준하를 가리키며 포뮬러카로 불렀다. 헬멧을 들고 포뮬러카로 다가서는 서준하.
“쟤는 어느 나라 사람이야?”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이제는 중국 애들도 여기와서 포뮬러 타나 보네.”
프리 주행 막바지. 주행을 마친 참가자들이 피트에 모여 마지막 순서의 참가자에게 집중했다. 유일한 동양인의 등장에 더 눈길을 끄는 모습.
“자, 앞에 보이는 트랙을 3바퀴만 돌고, 다시 피트로 돌아오면 됩니다.”
윌리엄이 문웨이를 가리키며 서준하를 향해 준비됐냐는 사인을 보냈다.
“퍼팩트해요.”
두두두두둥.
부드럽게 시동이 걸린 포뮬러카.
부우우웅.
위이잉.
피트를 빠져나간 서준하가 문웨이 위를 자연스럽게 올라탔다.
‘첫 주행이니까, 먼저 풀 브레이킹 한 번.’
시동을 꺼먹기는커녕, 첫 코너부터 순식간에 과감한 방향 전환을 시도하는 포뮬러카.
부우우웅.
끼익.
굉장한 엔진음을 내는 서준하의 포뮬러가 첫코너에서 무리없이 턴했다.
“...!”
교육생 대부분이 출발도 못 했던 상황. 계속되는 프로페셔날한 주행으로 피트 안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잘 타는데? 누구야?”
헬멧을 벗고 루크 곁으로 다가온 로만이 트랙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까 그 코리안.”
“에?!”
부우우우웅.
위이이잉.
속도를 올린 포뮬러카가 피트 앞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우아아아아.”
카트의 답답하고 투박한 엔진음과 달리 예리하고 날카로운 포뮬러의 엔진음. 문웨이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준하의 주행을 보고 모여든 아카데미 강사들.
“교육용 차가 저렇게 달리는 건 오랜만에 보네. 생긴 건 저래도, 저건 원래 포뮬러니까. 차가 임자 제대로 만난 거 같은데?”
아카데미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교육용이지만, 실제 엔진은 1600cc짜리 포뮬러카다. 200km/h에 가까운 속도를 내는 레이싱카의 본모습이 문웨이에 드러났다.
부우우우웅.
위이이잉.
“캡틴, 저 친구가 세계 대회 우승자라던데요?”
“포뮬러 이력도 있었나? 너무 잘 타는데요?”
윌리엄의 곁에선 아카데미 강사들. 서준하의 포뮬러카를 가리키며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위이이이잉.
휑.
‘벌써 끝?’
2바퀴를 돌며 어느 정도 서킷을 탐사한 서준하. 본격적으로 속도를 높이려고 할 때, 3바퀴가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쉬운 마음이 들며 스타트라인을 통과하던 그때,
‘대신 마지막 바퀴는 임팩트 있게 갈까?’
직선 주로에서 기어를 올린 서준하의 포뮬러가 순식간에 최고속도에 도달했다.
***
탁!
“롭, 잠깐 이리와 앉아라.”
집밖을 나서려던 아들을 발견한 윌리엄. 주먹으로 탁상을 내려치며 롭을 불러세웠다.
“왜 그러세요.”
짜증스런 반응을 보이던 롭이 윌리엄의 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꾸 창피하게 만들래?”
스메들리 포뮬러 아카데미 강사로 근무 중인 롭. 최근 무단으로 결근하는 일이 잦자, 아카데미 직원 사이에서 안 좋은 소문이 나돌았다.
“제가 뭘요.”
“너 출근 안 하는 거 내가 다 알고 있다. 자꾸 그런 식이면 직원들이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흥분한 윌리엄이 큰소리를 치자, 롭이 지겹다는 반응을 보이며 재빠르게 돌아섰다.
“거기 서! 내 말 아직 안 끝났다.”
“...”
“너 자꾸 왜 그러는 거냐?”
부상으로 레이서의 꿈을 접은 롭. 그가 느꼈을 상실감을 윌리엄도 잘 알았다. 누구보다 F1레이서가 되기 위해 열중했던 아들이 더 이상 꿈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젠 현실을 받아 들여야지. 시간이 많이 지났잖니.”
부상으로 선수 생활은 못 해도, 자신처럼 교육일은 가능했다. 윌리엄은 아들이 빨리 현실로 돌아오길 바랐다.
“아카데미에 그런 애들을 가르치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하나같이 전부 소질 없는 놈들이야.”
탑 클래스 유망주 레이서였던 롭에게 수강생들의 실력은 한없이 형편없어 보였다. 아카데미는 항상 답답하고, 희망없는 곳이었다.
“이 자식이...!”
윌리엄이 다시 한 번 탁상을 치며 롭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런 아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됐기에 크게 화를 내지 못하는 모습.
“아카데미가 싫으면, 팀에 들어가서 코칭이라도 맡아라. 스메들리 팀도 다시 F3 우승을 한 번 해봐야지 않겠어?”
아카데미 말고도, 따로 포뮬러 팀을 보유한 윌리엄. 아들이 그곳에서 지도자로서의 커리어를 쌓길 바랐다.
“F3 우승이요? 출전 팀 대다수가 스폰서 끼고 유망한 선수들을 내세운 팀이 대다수라고요. 근데 스메들리 팀은...”
제아무리 천부적인 레이싱 지능을 갖춘 롭이더라도, 자신이 직접 운전하지 않는 이상, 현재 전력으론 팀의 우승은 꿈도 꾸기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 들어온 포뮬러 참가자들이 정말 괜찮아. 특히 카트 세계 대회 우승자도 있단다. 어쩌면 걔네들이...”
오늘 서준하의 프리 주행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다소 섣부른 판단이었지만, 윌리엄은 이번 기수 교육생들에게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됐어요. 그래 봤자. 아직 포뮬러카로 레이스 한 번 안 해 본 놈들이겠죠, 뭐.”
세계 대회 우승자라는 말에 롭도 살짝 반응을 보였지만, 경험이 중요한 모터스포츠에서 수강생들은 아직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너도 직접 보면 마음이 달라질지도 몰라. 이번 금요일에 문웨이로 한 번 오거라.”
윌리엄의 말에 답하지 않은 롭이 재빠르게 집밖으로 빠져나왔다.
철컥.
“후... 잔소리 듣는 것도 이젠 지겨워 죽겠네.”
***
[MONKEY PUB]
“여기 미성년 출입 금지일 텐데.”
“아니, 합법이야.”
“합법이라고요?”
“너 혼자는 안 되지만, 나랑 들어가면 괜찮아.”
영국에선 19세 미만에겐 알코올을 팔지 않지만, 16세부턴 어른과 함께 펍에 들어갈 수 있다.
“한 잔만 마시고 나오자.”
한서윤이 서준하를 재촉하며 문을 밀고 들어갔다.
띠링.
철컥.
“어차피 사이다나 마셔야...”
“응?”
“아, 아니에요.”
아쉽다며 궁시렁대는 서준하. 그에 한서윤이 반응했지만, 서준하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자리에 앉았다.
“주문하고 올게~”
“잠깐, 뭐 시킬 건데요?”
“그런 걸 왜 물어. 펍에 왔으니까 맥주부터 마셔야지.”
“올.”
“응? 당연히 넌 사이다지.”
신난 표정으로 바(bar)로 걸어가는 한서윤. 반면 서준하는 술집에 와서 맥주 한 잔 못 마시는 상황에 살짝 짜증이 올라왔다.
‘어딜 가나, 시선 집중이야.’
펍에 들어오면서부터 느꼈다. 한서윤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 몽키 펍의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서준하의 테이블을 흘겨봤다.
“그래서 오늘 처음 포뮬러카를 탔다고? 어땠어?”
“좋았어요.”
양손에 맥주와 함께 슬라이스 레몬 장식이 꽂힌 사이다를 들고 나타난 한서윤. 서준하를 앞에 두고 보란 듯이 맥주를 들이켰다.
“다니면서 불편한 점은 없고?”
“네.”
“그래, 불편한 게 생기면 바로 바로 말해줘. 나도 교육장에 한 번 가야하는데, 새로 맡은 업무 때문에 그것까진 시간이 안 나네. 잘하고 있다니 다행이야.”
교육이 끝나고 매번 서준하의 상태를 묻는 한서윤. 다소 어수선한 성격이지만, 자신의 기분까지 체크하는 섬세함에서 서준하는 고마움을 느꼈다.
‘아무튼 좀 시끄럽긴 해도 빡빡한 데가 없어서 좋아.’
미팅 장소를 펍으로 정한 건 한서윤의 스타일이었다. 꽉 막힌 게 없는 그런 모습이 서준하도 맘에 들었다.
“오, 맥주 맛있다! 여기 자주 와야겠다.”
“그래요? 전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는 서준하.
띠링.
철컥.
몽키 펍의 문이 열리고, 들어온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루니, 나 맥주 한 잔.”
굵직한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맥주 한 잔을 시킨 남자. 자리에 앉아 펍 테이블을 둘러봤다.
“오호?”
펍 구석 테이블. 하얀 피부의 홀로 앉은 동양인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잠깐 망설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
터벅터벅.
탁.
혼자서 맥주를 홀짝거리는 모습에 남자가 한서윤의 테이블에 앉았다.
“밴버리에는 무슨 일로 왔어요? 여긴 관광할 데가 없는데?”
남자가 한서윤에게 물었다.
“미래의 F1 슈퍼스타 미팅차?”
“오, F1. 그건 나도 좀 아는데.”
“그래요?”
이런 대시가 낯설지 않은지, 남자의 접근에 한서윤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터벅터벅.
‘응?’
화장실을 나온 서준하. 펍의 구석에서 한서윤과 대화하는 남자를 발견했다.
‘하, 자리를 비운 사이 고사이에.’
남자를 뒷모습을 보곤 아까의 시선들이 떠올랐다. 테이블 근처로 다가간 서준하. 그런 서준하를 한서윤이 먼저 발견했다.
“어, 여기 왔다. 미래의 F1 슈퍼스타 준하 선수.”
서준하가 다가오자 먼저 자신을 소개하는 남자.
“오, 반가워요, 슈퍼스타. 나는 롭 스메들리라고 해요.”
< 오, F1. 그건 나도 좀 아는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