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F1 레이서-30화 (30/200)

< 이게 바로 브리티시 클럽 레이싱이라니까 >

“포뮬러 르노 2.0L 브리티시컵. 이 대회는 원메이커 경기입니다.”

원메이커는 경기에 참가하는 모든 경주차가 동일 조건으로 레이스한다는 의미다. 대회 참가자들을 바라보며 마이크를 집어든 오스틴 스튜어드(심판관)

“머신의 섀시를 비롯해 엔진, 타이어 등이 모두 같은 제품이죠. 따라서 포뮬러 르노 시리즈는 드라이버의 운전 능력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니 레이서 모두 무리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다시 한번 당부합니다. 레이서 모두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주행하기 바랍니다.”

F1은 물론 모든 경주차 대회에서 실시하는 드라이버 미팅. 긴장된 분위기 속 선수들이 오스틴의 말을 경청했다.

“아참 그리고, 이번 대회에선 이례적으로 르노 아카데미 선수들도 참가합니다. 잠깐 선수 소개를 부탁합니다.”

우측 가장자리에 앉은 르노 팀에게 오스틴이 마이크를 건넸다.

“르노 아카데미에서 활동하고 있는 쥴리앙 디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서준하가 아는 그 쥴리앙이 맞았다. 아직 어린 나이라 앳된 얼굴이었지만, 아래로 삐쭉한 매부리코는 여전했다.

“쥴리앙은 지난 시즌 포뮬러 르노 알프스컵 우승자입니다. 이번 브리티시컵에서도 멋진 모습 기대합니다.”

쥴리앙에게 원한이 있는 건 아니었다. F1에서 크러쉬는 빈번한 일이었고, 사고 때문에 선수가 사망하는 일이 종종 있었으니까. 하지만,

‘왜 이렇게 저 얼굴 보기가 역겹지.’

그날의 사고가 누구의 과실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쥴리앙이 무리하게 파고 들어 크러쉬가 발생했던 건 분명하다. 르노 팀을 바라보는 서준하가 주먹을 꽉 쥐었다.

‘드라이버 미팅이 무슨 쥴리앙 컨프런스 같네.’

선수 소개와 함께 르노 팀을 향해 박수를 요청하는 주최 측. 마치 재 자식을 챙기는 듯한 모습이 뻔뻔해 보였다.

‘근데 르노가 사람 제대로 잘못 봤지.’

아카데미 교육에서부터 다양한 대회 후원까지. 르노는 아카데미 최고 유망주 쥴리앙에 대한 서포트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쥴리앙은 F1 무대 오른 다음해, 곧바로 레드불로 이적하며 르노를 떠났다.

“그러면 이걸로 대회 규정과 선수 소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있으신가요?”

오스틴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손을 번쩍 드는 한 사람.

“롭 스메들리라고 합니다. 이번 대회 갑작스럽게 엔진을 변경한 이유가 뭔가요?”

“아, 그 부분이 빠졌군요. 우선 엔진을 변경한 건 맞지만, 갑작스럽게 변경한 건 아닙니다.”

“대회 2주 전에 바꾼 게 갑작스럽지 않다뇨?”

“2주면 넉넉한 시간 아닌가요? 서킷 변경도 일주일 전에 발표되지 않습니까.”

주최 측의 어이없는 답변에 롭이 혀를 내두르자, 이어서 다른 팀에서도 같은 반응이 쏟아졌다.

‘별 수 없어. 이런 대회를 아무나 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대형 자동차 회사가 개최하는 사설 대회. 결정권이 없는 다른 참가 팀들은 그저 주최 측의 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제가 조사해본 결과, 르노 아카데미에선 미리 신형 엔진으로 연습을 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닌가요?”

“맞습니다. 하지만 엔진 변경은 언젠가는 해야 했을 사항이고, 그게 이번 대회부터 적용된 것뿐입니다. 양해 바랍니다.”

계속되는 질문으로 달아오른 미팅장. 롭이 또 한번 질문을 던지자 오스틴은 단호하게 받아쳤다. 한편, 자신들의 팀명을 언급하자, 르노 아카데미 쪽에서도 롭을 바라봤다.

‘넌 내가 누군지 모르겠지.’

스메들리 테이블을 바라보는 쥴리앙. 그의 눈이 서준하와 마주쳤다. 영국 대회에 나 홀로 참가한 동양인을 신기하게 보는 쥴리앙. 그리고,

“거참, 말 많네. 어차피 전부 다 똑같은 엔진으로 레이스를 하는 거 아니야? 왜 자꾸 딴지를 걸어?”

“뭐? 말이 많아?”

“스메들리? 꼭 그런 팀들이 말이 많더라?”

스메들리 팀을 향해 비웃기 시작한 르노 아카데미 직원들. 결국 미팅장 엔 롭과 르노의 수석 코치로 보이는 남자 간의 고성이 오갔다.

혼란스러운 미팅장에서 서준하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기다려, 지는 레이스 같은 건 안 할 거니까.’

***

“준비는 잘하고 있겠지?”

“예, 대표님.”

2013 브리티시 포뮬러 르노가 열리는 캐드웰 파크. 서킷 주변 호텔로 독일의 고급 세단이 들어섰다.

“걱정 마십쇼. 아드님께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팀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고급스런 양복과 금 장신구를 두른 중년 남성. 영국의 의류 사업가 로리스가 세단에서 내렸다.

“좋은 결과?”

“예...? 제가 잘못 말씀드린 게 있는지?”

로리스가 되묻는 말에 어리둥절해 하는 포르텍 모터스의 마렐 감독. 팀 스폰서의 한마디에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최고의 결과를 내야지. 이번 브리티시 컵은 얀슨이 꼭 우승해야 하네. 선수 생활엔 첫 타이틀이 중요하지 않나?”

“아, 예예. 로리스.”

이번 브리티시컵은 아들 얀슨의 포뮬러 대회 첫 출전이었다. 걱정과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마렐을 바라보는 로리스.

“우리 가문에서도 F1 레이서가 한 명쯤은 나와야 하네.”

수백억에 달하는 클래식 자동차 수집가 로리스. 그는 영국 내 레이싱 서킷을 보유할 정도로 모터스포츠에 대한 열정이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할아버지 때부터 소망했던 F1 무대 데뷔. 이번에는 아들 얀슨이 꼭 이뤄내길 바랐다.

“뭐 하나만 물어보지, 마렐.”

“예, 그러시죠.”

“자네도 얀슨이 내 덕분에 포뮬러를 타고 있다고 생각하나?”

“아, 아닙니다. 누가 그런 소릴...”

소문을 들었다. 돈 많은 사업가가 돈 지랄을 한다고. 실력도 없는 아들에게 또 헛돈을 투자한다고.

“나는 사업하는 사람이야, 마렐. 밑 빠진 독에 물을 붓진 않아.”

“예, 예.”

“얀슨이 내 덕분에 포뮬러를 타는 건 맞지만, 카트 때부터 실력을 보여준 녀석이네.”

포뮬러는 아무나 시작할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다. 많은 선수들이 금수저이거나 그들의 부모가 레이서인 경우가 대다수. 얀슨도 그런 케이스지만, 어릴 적 고카트부터 남다른 실력을 보여줬다.

“흠, 부모덕에 포뮬러탄다는 말을 듣고, 제일 속상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얀슨일 거야. 이번 대회에서 꼭 실력 발휘할 수 있도록 감독이 좀 도와줘.”

아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신 덕분에 기회를 얻은 건 맞지만, 그걸 잡은 건 얀슨이었다. 로리스가 감독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참, 그리고 이번 대회 얀슨이 최연소랬지?”

“예, 그렇긴 한데. 한 명 더 있습니다.”

“한 명 더 있어?”

“네, 벤버리에서 온 선수 한 명이 얀슨과 나이가 같습니다.”

레이싱 업계에선 대회 우승 타이틀만큼 최연소 타이틀도 중요하다. 온갖 타이틀이 난무하는 통에 포뮬러 관계자들이 가장 눈여겨 보는 타이틀이 최연소기 때문.

“흐음... 아쉽구만.”

“아쉬워하실 거 없습니다. 어차피 우승해서 주목 받는 선수는 한 명이니까요.”

“그런가?”

“예. 예.”

“무슨 일이 있어도 얀슨이 포디엄에 오르게 만들게. 안 그러면 나도 다음 시즌은 장담 못하네.”

감독을 노려보는 로리스. 마렐은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

“자, 안으로 들어가자.”

사전 탐사를 위해 찾은 캐드웰 파크. 스메들리 팀이 서킷 입구로 들어섰다.

“이야, 벌써부터 사람들이 많은데?”

아직 대회 예선도 시작하지 않았지만, 서킷 주변, 공원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게 바로 브리티시 클럽 레이싱이라니까.”

모터스포츠 성지, 영국. 프로 모터스포츠 외에 아마추어 모터스포츠도 탄탄한 기반을 자랑한다. 전 세계 모터스포츠 팬들이 부러워할 클럽 레이싱 문화로, 어느 대회건 지역 주민들과 자국민의 관심이 쏠린다.

“오우, 저기도 핫하네. 잠깐 들를까?”

“뭘 잠깐 들려!”

“그건 좀 그렇지? 그럼 끝나고?”

서킷이라고 해서 관람객만 있는 건 아니다.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사람들부터 요리를 하는 사람들까지. 태닝하는 사람들을 발견한 롭이 신난 표정을 짓자, 한서윤이 그를 서킷 입구로 밀쳤다.

“어, 저거 보니까 생각난다. 옛날 생각 나는데?”

스타트라인의 커다란 천막을 가리키는 롭. 빛바랜 글씨로 ‘캐드웰 파크’라고 적힌 간판을 가리켰다.

“F3 때였는데, 캐드웰 파크가 그렇게 까다로운 서킷은 아니야.”

첫 코너를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하는 롭. 옛 기억이 떠오르는지 상념에 빠진 듯 보였다. 그리고 그의 뒤를 말없이 걷는 서준하. 그 역시 캐드월 파크는 낯설지 않은 서킷이었다.

“아, 맞어. 우리 탐사하러 온 거지. 크큭, 내가 잠깐 정신 나갔다.”

혼자 앞질러 걷던 롭. 저 혼자 첫 코너에 도착하자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따라라라라.”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롭. 이를 본 한서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봐도 미친놈 소리들을 만한 상황.

“쟤 왜 저래. 롭 빨리 노래 꺼. 다른 팀들이 다 쳐다본다고.”

롭을 다그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한서윤. 반면 서준하는 익숙한 장면인 듯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자, 포인트는 여깁니다. 남들 다 첫 코너에서 아웃-인-아웃 할 때, 준하 너는 인코스 하는 겁니다.”

첫 코너에서 자신의 레이스 전략을 설명하는 롭.

“...그걸 꼭 그렇게 하면서 알려줘야 하니?”

“좀 창피하긴 해도, 이렇게 보여주면 절대 까먹을 수 없지요, 하하.”

한서윤의 말은 무시한 채 전략 설명을 시작하는 롭. 노래를 틀며 엉덩이를 흔드는 건, 자신의 전략을 확실하게 각인시기키기 위한 그만의 방법이었다.

“막상 대회 시작하면 다 까먹는다니까? 이렇게 해야 포인트가 기억난다고.”

장시간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다 보면, 레이서들은 정신이 없다. 특히나 사고가 잦은 첫 코너에 돌입할 때면, 긴장감이 배가 돼 처음 전략을 새하얗게 잊고 만다.

‘저런 큐(que)가 몇 군데 더 있지...’

다시 한번 자신의 엉덩이를 툭하고 치며 손을 뻗는 롭. 방법은 보기 흉해도 정말 효과 좋은 큐였다. 밝게 웃던 서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준하. 엔진이 빨라진 만큼 차가 훨씬 무거워졌으니까, 이전보다 더 강하게 브레이킹을 해야 할 거야.”

전략 설명에 이어 서킷의 주의사항을 알려주는 롭. 예선 퀄리파잉부터, 본선 레이스까지. 첫 출전인만큼 서준하에게 알려줄 사항이 많았다.

“여긴 팀에서도 자주 안 오는 곳이라, 서킷 데이터가 오래됐어. 타이어 전략부터 프레임 사용까지 전부 준하, 네 감각을 믿고 타야해. 그래도 난 네가 잘 해낼 거라고 믿어.”

일반적으로 트랙 상황에 따라 포뮬러의 출발 세팅을 달리한다. 하지만 캐드웰 파크에 대한 데이터는 물론, 서준하 개인의 주행 기록이 없는 스메들리 팀. 롭이 서준하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흠, 그래서 말인데, 준하 선수. 이번 대회에 너무 크게 부담 갖지마. 르노 아카데미가 유리한 대회기도 하고. 어차피 포뮬러 대회는 이번이 처음이잖아?”

여러 가지 열악한 상황이 겹친 이번 대회.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던 한서윤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게다가 아직 신형 엔진 경험이 부족한 우리한테 어쩌면...”

“어쩌면?”

아직 서준하의 레이싱을 본 적 없는 한서윤. 말을 끝내지 못하고 뜸을 들이자, 서준하가 되물었다.

“아니이, 캐드웰 파크가 무난한 서킷이라고 하더라고... 예선에서 1위를 못하면...”

변수가 적은 만큼, 폴포지션을 차지하지 못하면 우승 가능성이 희박한 캐드웰 파크. 한서윤이 말을 잇지 못하자, 서준하가 자신있게 되물었다.

“트랙이 무난하다는 건, 더 빨리 달릴 수 있다는 말 아니에요?”

“응? 그런 건가? 근데 너만 빠른 게 아닐 텐데?”

0.1초를 가지고 아등바등하는 캐드웰 파크. 평범한 서킷인 만큼 모두가 빨리 달리는 곳이었다. 걱정스런 눈으로 서준하를 바라보는 한서윤.

하지만 그녀의 걱정과 달리 서준하가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만 빠르던데?’

전생 캐드웰 파크 페스티스트랩 보유자 서준하. 유일하게 2위와 10초 이상 차이를 벌리고, 역대 최고 기록을 남긴 레이서였다.

< 이게 바로 브리티시 클럽 레이싱이라니까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