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걸리는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
“이게 다 형 때문이야. 어제 비행기로 바로 넘어왔어야 했어.”
“뮐러랑 보아텡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냥 갈 순 없잖아? 그리고 너도 그렇게 신나게 마셔 놓고, 이제 와서 그래.”
스위스 취리히로 가는 비행기. 아침부터 두 형제가 티격태격 서로에게 불평을 늘어놨다.
“공항 도착해서 짐 찾고 뭐하면, 11시 30분쯤 될 것 같은데, 캠프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했지?”
“1시간 정도.”
“레이첼이 우리 태우러 마중 나온다고 했나?”
“아니, 그냥 알아서 찾아가겠다고 했지. 취리히는 오랜만이라, 아침에 우리끼리 좀 여유있게 가려고 했단 말이야.”
“이거 늦을 수도 있겠는데?”
“늦을 수도 있기는. 이미 늦었어. 이거 창피해서 어떡하냐.”
걱정이 쌓이는 동안 어느새 취리히 공항에 도착한 비행기
“야, 뛰어!”
약속한 도착 시간까지 30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 취리히에 도착한 두 형제가 공항 밖으로 빠져나왔다.
“Taxi!!!”
손을 흔들어 택시를 불러 세우는 두 남자. 늙은 택시 드라이버가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허허, 안녕하세요. 어디로 가십니까?”
“여기로 좀 부탁드릴게요.”
짐을 싣고 택시에 탄 승객들이 휴대폰에 적힌 주소를 드라이버에게 보여줬다.
“자, 그럼 출발합니다.”
우우우우웅,
공항을 빠져나가는 택시. 뒷좌석을 흘겨보던 드라이버가 말을 건넸다.
“두 분이 친구 사이는 아닌 거 같고, 어딘가 좀 닮아 보이네요?”
“네, 형제에요.”
계속해서 말을 붙이는 드라이버. 한 시가 급한 상황에 택시 기사는 너무 느긋해 보였다.
“후... 차까지 막히네.”
취리히 시내로 진입한 택시. 가는 길목마다 심한 교통 체증 덕분에 속도가 나질 않았다.
시간을 확인한 두 형제. 시간은 어느덧 11시 45분.
“저기요, 기사님.”
“네, 손님.”
“저...”
“하하, 말씀하세요. 취리히에 괜찮은 곳 좀 소개시켜드려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저희가 많이 늦어서 그런데,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제가 대신 운전해도 괜찮을까요?”
조수석에 앉은 남자. 정중한 말투와 함께 조심스럽게 사정을 설명했다.
“아참 그리고 이거...”
남자의 말에 머뭇거리던 택시 기사. 그러자 남자가 지갑을 열고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아! 누군가 했더니! 이거 운전 좀 할 줄 아는 양반이네, 그래.”
어쩐지, 라는 말과 함께 남자의 얼굴을 힐끗힐끗 흘겨보는 기사. 고속도로 진입 전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럼 출발할게요. 다들 안전띠 꽉 매고.”
드디어 조수석에 있던 남자가 핸들을 잡았다.
부우우우웅.
“어, 어, 지금 너무 빠른 거 아닌가?”
고속도로에 오르자 계기판의 속도가 순식간에 치솟았다.
“걱정마세요, 기사님. 우리 형이 4살부터 카트 탔던 인간이에요.”
“4살?!”
부우우우웅.
끼이익.
고속도로 출구로 빠져나가는 코너링에서조차 속도가 줄지 않는 택시.
“163km?!”
엄청난 속도에 눈이 휘둥그레진 택시 드라이버. 오랫동안 자신이 몰았던 차였지만, 처음 듣는 엔진음과 진동에 놀라고 말았다.
“...너무 빠른가요?”
반면 빠른 속도에도 어딘가 여유있는 운전석의 남자.
“내가 살면서 이 차로 저 속도는 처음 봐!”
“미니밴 치고는 잘 나가네요. 벤츠죠?”
“메, 메르세데스지.”
“역시 경주차 말고 이런 차는 잘 만든다니까요. 하하.”
어느덧 자신들의 목적지에 도착한 두 형제.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택시 드라이버에게 팁을 건넨 남자가 인사와 함께 웃어 보였다.
캠프장 입구에서 대기 중인 직원들.
“어, 왔다! 오셨나 봐요!”
센터 입구로 들어오는 택시 한 대를 발견했다. 조수석에서 내린 늙은 노인. 정작 기다렸던 인사가 보이지 않아 걱정하던 찰나,
“더 늦었으면 젊은 친구들한테 창피할 뻔 했네요.”
운전석 문이 열리고, 직원들을 향해 인사하는 슈마허가 보였다.
***
“그래서 마지막으로 저는 여러분들한테 네버, 네버,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여러분은 계속 싸워서 나아가야 합니다.”
서킷 위에선 거칠고 성깔있는 모습이지만, 어딜 가나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마누엘 슈마허. 어린 레이서들에게 F1 무대를 위한 실질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장시간 강연을 마쳤다.
짝짝짝.
‘아직 건강하시네.’
어린 레이서들로부터 쏟아지는 박수에 웃으며 화답하는 슈마허. 관중석 가장자리 서준하의 눈에 슈마허가 보였다.
“마누엘과 사진 찍으실 분들은 이쪽으로 줄 서주세요.”
팬들의 요청과 함께 무대 위 포토존과 사인회가 마련됐다. 시끌벅적 해진 행사장. 뒤편에서 대기 중이던 한서윤에게 서준하가 다가섰다.
“준하 선수는 사인 안 받아?”
“사인? 아, 받아야죠.”
“짜잔, 이럴 줄 알고 내가 챙겨왔지!”
가방에서 서준하의 오버롤을 꺼내 흔드는 한서윤.
“헐, 금세 줄이 저렇게 길어졌어!”
행사장 바깥까지 길게 늘어선 대기 줄. 슈마허에게 사인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몰리고 있었다.
어느덧 가까워진 서준하의 차례.
“가까이서 보니까 뭔가 더 훈훈한 거 같아.”
한서윤의 반응과 달리 자신도 모르게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온 서준하. 슈마허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자, 기분이 묘해졌다.
이어서 두 사람 곁으로 슈마허와 대화하는 다른 팬들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오늘 강연 잘 들었어요! 꼭 F1 레이서가 돼서 다시 찾아올게요!”
“슈마허! 저도 멋진 F1 레이서가 될게요!”
너도나도 F1 선수가 되겠다며, 저마다 자신의 포부를 밟히는 어린 레이서들.
드디어 서준하의 차례. 보기 드문 동양인의 모습에 슈마허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어느 나라에서 왔죠?”
“한국에서 왔어요. 오늘 강연 잘 들었어요, 슈미.”
“하하하, 슈미?”
슈미는 슈마허의 애칭. 낯선 동양인의 입에서 자신의 애칭이 나오자 슈마허가 크게 웃었다. 그러자 곧바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는 서준하.
“준하, 한국에서 왔군요. 레이서 같아 보이는데, 준하도 F1까지 도전할 생각이겠죠?”
한서윤의 손에 들린 레이싱 슈트를 가리키는 슈마허. 환한 얼굴로 한서윤에게도 눈인사를 건넸다.
“네, 맞아요. 근데 제 진짜 꿈은 따로 있어요.”
“오, 그래요? F1 말고 다른 꿈이 있나요?”
서준하의 말에 머쓱하게 웃으며, 어리둥절해 하는 마누엘 슈마허.
“무례하게 들리실 수도 있지만... 마누엘 슈마허가 세운 기록을 넘어서는 게 제 목표에요.”
한 시즌 전 경기 폴포지션과 최다승 그리고 그랑프리 우승 91회 등등, F1의 수많은 기록을 수립한 마누엘 슈마허가 제법이라는 눈빛으로 서준하를 바라봤다.
“제가 세운 기록이요? 하하. 어떤 거죠?”
두 손을 활짝 펴 숫자 ‘7’을 표현하는 서준하.
“총 일곱 번의 F1 월드 챔피언. 이걸 넘고 싶어요.”
슈마허가 F1의 황제라고 불리는 이유. 그는 무려 7번이나 F1 챔피언에 오른 역대 최고의 F1 레이서였기 때문이었다.
“오, 목표가 엄청 나군요. F1 레이서가 끝이 아니고, 월드 챔피언이라...”
왠지 모르게 가볍게 들리지 않는 젊은 레이서의 말. 이제까지 많은 레이서들을 만났지만, 자신의 앞에서 이런 포부를 밝히는 어린 레이서는 본 적 없었다.
타이밍을 보던 한서윤이 사진 찍자는 제스처를 취하자, 슈마허가 서준하를 자신의 옆으로 불렀다.
“준하, 그러면 나중에 FIA 갈라(Gala)에서 또 봐요.”
F1 월드 챔피언의 트로피 수여식이 열리는 행사, FIA 갈라. 슈마허가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아참,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밝은 표정으로 슈마허와 대화하던 서준하.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던 걸음을 멈춰 섰다.
“부디 스키는 조심히... 특히 알프스는 위험한 곳이래요.”
좀 있으면 다가올 2013년 연말, 스키를 타다 사고를 당해 몇 년간 혼수상태에 빠진 마누엘 슈마허. 이번 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중요한 시기를 앞둔 그에게 지금 이 말을 꼭 전해야 했다.
“스키...?”
진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내뱉은 서준하. 자신이 아는 모든 얘기를 꺼내놓고 싶었지만, 곧장 돌아섰다.
***
“내가 자네들을 부른 건, 다음 시즌 유로컵 때문이야. 일정이 공지 됐네.”
스메들리 포뮬러 팀의 오피스. 윌리엄을 중앙으로 팀 수석코치진들이 자리했다.
“오, 그래요? 이번엔 몇 팀이 나오려나, 각국 우승자 다 나오면, 일곱, 여덟 팀 되겠네요.”
“빨리 레이스하고 싶은데요. 이번에 새로 들어온 닐도 엄청 잘 타요. 이러면 유로컵도 해볼 만 하죠.”
첫 대회에서 우승한 스메들리. 날이 갈수록 주변의 관심과 함께 팀 주가가 치솟는 상황에서 팀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흠, 근데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네.”
자신감 넘치는 코치진들과 다르게 어딘가 어두운 표정의 윌리엄. ‘문제’라는 말에 잠시 오피스가 조용해졌다.
“이번 대회하고 다음 기수 아카데미 교육일이 겹쳐... 교육 준비 기간 포함해서 내가 거의 팀을 관리할 시간이 없네.”
아카데미 교육과 팀 감독의 역할을 모두 맡았던 윌리엄. 두 가지를 모두 할 수는 없었다.
“괜찮아요. 아버지 없으셔도.”
농담을 던지며 웃는 롭. 코치진들 모두 아무런 반응이 없자, 머쓱해진 그가 저 혼자만 오피스가 떠나가라 웃었다. 그 모습에 헨리가 말을 꺼냈다.
“사실 감독이라는 역할이 직접적으로 하는 일이 없긴 해. 근데 팀 부서마다 하는 일이 제각각이라 팀원 전체를 책임지고 매니징할 사람이 필요하지. 그런 역할을 여태껏 윌리엄이 잘 해주셨는데, 그 자리가 비면 큰일이지...”
다양한 포뮬러 팀에서 근무했던 헨리. 조직에서 관리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성향이 제각각인 포뮬러에선 더욱 그렇다.
“그럼 어쩔까요? 당분간 아카데미를 접어?”
모두의 눈치를 살피던 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만큼 아카데미 수강생이 몰렸던 적이 없어. 사상 최대 신청자인데. 이걸 소홀히 할 순 없지.”
브리티시컵 우승과 더불어 서준하의 방송효과로 상승세를 탄 스메들리 아카데미. 롭의 말에 반대하는 의견이 속출했다.
“사실 이것도 그렇고. 그 전에 내가 걸리는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롭을 한 번 째려본 윌리엄이 다시 말을 꺼냈다.
“무엇보다 서준하가 스메들리에서 대회를 나가려고 할까? 난 그게 가장 걱정이네.”
“에이, 이런 풋내기 리그에서 우승 한 번으로는 택도 없어요. 이제 시작하는 단계에서 자기가 뭐라고 팀을 골라요. 그 정돈 아니에요.”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갤 흔드는 롭. 그 모습에 다른 코치진들도 의견을 냈다.
“아니야. 여기저기서 준하를 노리는 팀이 많을 거예요. 게다가 지금 이렇게 감독 역할을 사람도 없다는 소리까지 들으면... 선수 입장에선 경쟁력 있는 팀에 가고 싶을 수도 있죠.”
하나 같이 맞는 말에 오피스 분위기가 더욱 어두워졌다. 심지어 이제는 유망한 선수일수록 좋은 팀으로 보내주는 게 옳다는 의견까지 나오는 상황.
똑똑.
그러던 중 누군가 오피스 문을 노크했다.
“마침 잘 왔네, 안 그래도, 내가 직접 물어보려고 불렀네.”
문을 열고 들어온 서준하. 한 자리에 모인 팀 수석 코치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굳은 표정의 코치진들.
“우리가 얘기를 좀 나눠봤는데 말이야...”
인사를 나누고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기 시작하는 윌리엄. 차분히 스메들리 팀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우리도 준하의 선택을 존중하려고 해. F1에 가는 게 꿈이잖아. 꼭 우리랑...”
말을 잇지 못하는 윌리엄. 그 모습에 서준하가 목소리를 높였다.
“네? 이미 숙소에 짐 들여놨는데...?”
주머니에서 룸 키를 흔드는 서준하.
“우승 상금이 삼십만 유로라는데, 안 해요?”
한화로 4억에 가까운 상금. 서준하가 말을 마치자, 코치진들이 달려들었다.
“정말?!”
< 내가 걸리는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