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준하는 기대하셔도 좋을 레이서입니다 >
유로컵 선발전이 한창인 스메들리 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아직 타깃에 도달한 레이서가 나오질 않았다.
“다들 더 이상 랩타임이 안 올라. 15랩에서 닐이 만든 32초 232가 베스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초반부터 미친 듯이 달린 선수들의 타이어는 닳아버렸으니까.
한 명도 타깃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레이스 엔지니어들이 불안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이거 타이어를 바꿔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안 됩니다. 그런 룰을 추가했다간 감독님한테 무슨 소릴들을지 몰라요...”
“그래도... 어떻게 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저러다 전부 떨어지게 생겼다고!”
눈치를 살피던 레이스 엔지니어들. 아론이 프랭크에게 다가서려 할 때, 롭이 그를 가로 막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닌 거 같은데?”
자리에서 일어난 롭이 서준하의 포뮬러를 가리켰다. 서킷 위로 스타트라인을 들어오는 포뮬러 한 대가 보였다. 그리고,
[5. 준하 / 10 / 1분 30.022초]
타임 로그에 측정된 서준하의 랩타임.
“엥? 30초 022?!”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20랩 이상을 돌며 34초대 이상을 기록하는 다른 포뮬러와 달리, 오히려 더 빨라지고 있는 서준하.
“다른 포뮬러카랑 다른 방식으로 달렸으니까, 결과도 달라야겠지?”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의 동료들 곁으로 다가선 롭. 서준하의 데이터 로거를 꺼내들었다.
“이것 봐. 다른 애들 스무 바퀴 이상 달렸을 때, 준하는 고작 10바퀴를 돌았어. 그리고 여기.”
데이터 로거의 옵션을 조작하자 서준하의 주행 라인 데이터가 나타났다.
“매 바퀴 변칙적인 라인들 보이지? 이건 초반 절반 이상의 랩에서 서준하가 다양한 라인 탐색에 들어갔다는 걸 의미해.”
그리고 눈에 띄는 또 다른 한 가지.
“어택-쿨링-쿨링, 이 패턴. 이건 타이어를 최대한 아껴 쓴 흔적이지.”
타이어는 소모품이다. 전력으로 달려 뜨거워진 타이어일수록 훨씬 더 빨리 닳게 되는 법. 하지만 차량의 열기를 식히는 쿨링 주행을 통해 그 속도를 훨씬 늦출 수 있다.
“근데 왜 저렇게 쿨링을 한 거지? 이건 타깃 트라이얼이라고, 머뭇거리다간 다른 레이서한테 메인 자리를 뺏길지도 모르는데?”
“맞습니다. 그리고 계속 더 많이 달려봐야 트랙에 적응하는 거 아닙니까?”
다시 한 번 이해하기 힘든 말에 맬릭과 아론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빨라지고 싶다면 먼저 천천히 달려봐야 해.”
“엥? 그게 무슨 말이야?”
“이건 타깃 트라이얼이라고요. 질질 끌다간 다른 선수한테 메인 자리를 뺏깁니다.”
두 사람을 보고 미소 짓던 롭이 설명에 들어가려던 순간,
“롭의 말대로 느림은 빠름을 향한 지름길일 수도 있네.”
엔지니어들 곁으로 다가선 프랭크 감독. 서준하의 데이터로그를 들여다 보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 선수들 모두 이 서킷이 처음이야. 오전에 직접 탐사를 했다곤 하지만, 포뮬러에 직접 올라 트랙을 밟는 건 처음이지.
트랙의 기울기와 곡면의 변화, 연석 마다의 크기와 높이 등의 차이 그리고, 차량의 하중이 이동하는 양상과 별다른 스키드음 없이 코너를 돌아나갈 수 있는 속도 등등. 무조건 빠른 기록을 내겠다고 연신 포뮬러를 몰아붙인다면 절대 느끼지 못 할 것들이 많지. 하지만 천천히 달린다면,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결국엔 빨리 달릴 수 있게 되는 법이네.”
서준하가 스프린트 레이스(대회 본선 레이스와 같은)를 했더라면,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매 바퀴 질주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타깃 트라이얼. 처음부터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쿨링 주행을 통해 타이어를 아끼고, 천천히 돌며 새로운 트랙을 더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지.”
프랭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팀원들. 서킷을 향해 고개를 돌린 프랭크가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테스트의 본래 목적은 전략 능력을 평가하려는 것이었네. 애초에 타깃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해.”
그 순간 피트 앞 서킷으로 지나간 서준하의 포뮬러. 엄청난 배기음에 프랭크의 시선이 쏠렸다.
***
‘0.22초가 모자라?’
스타트라인을 통과한 서준하의 포뮬러. 랩타임을 확인한 서준하가 다시 1코너를 향해 전속력으로 진입했다.
부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이잉.
휑.
넓은 직선 주로. 압도적으로 빠른 서준하의 포뮬러가 다른 차들을 앞질러 나갔다.
‘레이서가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으면 차가 혹사하는 거지.’
사이드미러로 초반부터 가장 속도를 올렸던 닐의 포뮬러가 보였다. 삐져나온 타이어 실밥 때문에 굴러가는 바퀴 모양이 불규칙했다.
‘막 밟는다고 빨라지는 건 아니니까.’
타이어는 닳기 때문에 한 바퀴, 한 코스, 한 턴이 소중하다. 결국, 자신의 판단과 행동은 모이고 모여 랩타임이라는 결과로 냉정하게 드러난다.
‘이 서킷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끝냈을 텐데...’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스네트. 서준하의 예상보다 랩타임이 나오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젠 끝낸다!’
여지껏 천천히 달리며 노면의 세세한 부분들을 보고 느낀 서준하. 이제 머릿속에는 스네트 서킷의 포인트가 완벽하게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부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이잉.
휑.
띠링.
스네트의 모든 코너에서 속도를 잃지 않은 서준하의 포뮬러가 최고속으로 피니쉬 라인을 통과했다.
“와! 엄청 빨라!!!”
“29초 002! 타깃 석세스입니다!”
목표 기록보다 1초나 더 앞선 랩타임. 5번 포뮬러의 피니쉬에 스메들리 팀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두두둥.
피트로 복귀한 5번 포뮬러. 서준하가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리려 하자, 미캐닉들이 환호와 함께 달려왔다.
“와하하하!”
헬멧을 벗고 바닥에 주저 앉은 서준하. 안면 보호를 위해 착용한 발라클라바를 벗으려던 그때, 저멀리 프랭크의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하는 거 맞나요, 선생님?’
사실 오늘의 전략은 서준하가 처음 대회에 출전할 때 프랭크로부터 배운 것. 그의 가르침은 F1에 오르기까지 모든 대회에 적용됐던 레이싱의 진리였다.
두두두둥.
우웅.
이어서 연료가 떨어진 포뮬러들이 하나 둘 피트로 복귀했다. 모든 포뮬러가 서킷 밖으로 나온 상황. 피트 앞으로 스메들리 팀 전원이 모였다.
“타깃을 달성한 사람은 5번 레이서 서준하. 이번 유로컵의 메인 레이서는 서준하로 결정됐다.”
프랭크가 타임 로그를 보며, 타깃 트라이얼 결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타킷에 도달하지 못 했구만...”
고개를 흔들던 프랭크가 잠시 말을 머뭇거렸다. 그 모습에 서준하를 제외한 다른 레이서들이 고개를 떨궜다.
“원래라면 모두 아웃이지만, 그 다음 타깃에 근접한 닐과 에릭에게 기회를 주겠네. 다니엘은 리저브(예비) 레이서를 맡도록...”
대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연료가 떨어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은 레이서들이 기특했던 터라 모두를 쳐내지 않았다.
이어진 프랭크의 총평과 함께 스메들리 팀이 복귀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장비를 챙기는 롭의 곁으로 다가선 프랭크.
“롭, 이번 대회에도 서준하의 레이스 엔지니어를 맡을 생각인가?”
“그래야죠. 지난 대회에서도 제가 맡았고, 드라이빙 스타일이 제 현역 때랑 비슷해서 특별히 더 맡고 싶기도 해요.”
두 사람 곁으로 지나가는 서준하. 밝은 표정의 롭이 서준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팀에 다시 왔을 때부터 저 친구의 전담 엔지니어를 한다고 했다며, 근데 오늘 보니 자네랑 정말 비슷한 레이서 같아.”
몇 번 본 건 아니지만, 서준하의 특별한 주행 스타일은 롭과 굉장히 유사했다. 트랙을 공략할 전략도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레이서에게 더 잘 들어맞는 법. 오늘에서야 롭의 선택이 이해됐다.
“근데 오늘 레이스는 어떻게 보셨어요?”
잘했다는 말은 없지만, 서준하의 얘기에 은근한 미소를 드러내는 프랭크. 타이밍을 잡던 롭이 질문을 던졌다.
“사실 원래는 젊은 레이서들한테 레이싱이 우스운 게 아니라는 경각심을 주고 싶었어.”
“경각심이요?”
“지난번 선웨이 서킷을 처음 찾았을 때, 이 친구들 연습 경기를 봤었지. 근데 아주 겉멋이 많이 든 것처럼 보이더구만. 게다가 첫날 늦는 녀석이 있질 않나...”
스메들리 레이서들의 첫인상을 얘기하는 프랭크. 그 이후로도 종종 어린 레이서들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아, 그건...”
롭이 그날의 파이론 주행에 대해 얘길 꺼내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랬었구만. 아무튼 나도 오늘 레이스를 보고 조금 생각이 바뀌었네. 앞으로 더 지켜봐야겠지만 말이야.”
조급하지 않은 레이싱 스타일. 그리고 주어진 과제의 목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전략으로 옮기는 판단력까지. 예상과 달리 경험 많은 레이서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자질을 서준하가 가진 듯했다.
“다행이네요. 준하는 기대하셔도 좋을 레이서입니다.”
***
타깃 트라이얼 이후 마침내 주말을 맞은 서준하. 하지만 유로컵을 앞두고 다시 체력 훈련에 들어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몸이 앞으로 기울면 허리 다쳐요. 집중!”
서준하의 숙소 근처 트레이닝 센터. 정동식이 다시 시작 사인을 보냈다.
“어우, 동식 씨 살살해요. 준하 선수 죽으려고 하잖아.”
거울을 보며 머리를 묶는 한서윤. 땀을 뻘뻘 쏟은 서준하가 불쌍하다며 콧소리를 높였다.
“너무 야하게 입었나, 저기 사람들 너무 쳐다본다.”
검정색 레깅스팬츠 위로 새하얀 브라탑. 트레드밀에서 내려온 한서윤이 주변 시선을 의식했다.
“에이, 정규 시즌 아닐 때 더 열심히 해야죠. 게다가 아직 메인 운동은 시작도 안했어요, 한번 더 갑시다!”
서준하의 개인 트레이너를 맡은 정동식. 자신이 구성한 운동 프로그램을 잘 따라오자 신이난 듯했다.
마지막 운동을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세 사람.
“자, 이제 오늘의 하이라이트!”
깁자기 동식 씨가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들며 소리쳤다.
“두 분, 이 영상 보셨어요?”
운동 시작 전, 이유를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서준하와 한서윤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세르지오 알론소, 목근육으로 호두 까기!]
페라리 F1 팀 메인 레이서 알론소. 타고난 목근육과 더불어 엄청난 훈련으로 딱딱한 호두를 반으로 쪼개는 영상이 재생됐다.
“목근육으로 호두를 까요?”
“...?”
“레이싱 선수라면, 목에 부담이 엄청나잖아요. 그걸 이겨내려면 목근육을 단련해야 합니다. 준하 선수 준비 됐죠?”
포뮬러에 올라타면 좌우 방향으로 중력이 가중돼 특히나 목에 엄청난 부담이 전해진다. 때문에 모든 레이서들이 중요시 여기는 근육이 바로 목. 전생의 서준하 역시 빼먹지 않고 했던 훈련이었지만,
“서, 선생님... 지금 뭐하는 거죠?”
자신의 두 손을 깍지낀 뒤 서준하의 목을 감싸는 동식 씨.
“제가 팔을 안쪽으로 당기면 준하 선수가 목 근육만 사용해서 바깥쪽으로 밀면 돼요. 자, 준비!”
“네? 아니, 그래도 이건 좀...”
전생엔 특수 기구를 이용해 운동했던 서준하. 이 상황이 웃기면서도 내심 무서웠다. 동식 씨의 전완이 너무 두꺼워 목이 부서질 것만 같았으니까.
“왜요? 무서워요? 아, 살살할게요. 자, 갑니다.”
센터 내 다른 고객들이 생소한 광경을 황당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 트레이닝은 매일 할 겁니다. 목으로 호두를 까는 그날까지!”
띠링.
두 사람을 촬영하던 한서윤의 휴대폰으로 알람이 울렸다.
“응? 뭐야.”
휴대폰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하는 한서윤.
“헐, 대박!”
이후 무언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다시 서준하를 바라봤다.
“준하 선수, 다음 시즌 유로컵 대회 장소가 나왔어!”
목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그저 한서윤을 바라보는 서준하.
“1차전은 영국! 스네트 서킷이야!”
타깃 트라이얼을 했던 스네트 서킷. 스네들리 팀에 호재가 일어났다.
< 준하는 기대하셔도 좋을 레이서입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