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꼭 그럴 것 같더라니만 >
“엔트리급 타임 트라이얼은 처음인데, 꽤 볼 만 하네?”
영국의 포뮬러 잡지사, 포뮬러 B의 편집장 숀 폴락. 2014 르노 유로컵 본선 레이스에 초청 받은 그가 본선 전 하루 일찍 스네트 서킷을 찾았다.
“저기 11번 포뮬러 보고 계신거죠? 일찌감치 어택에 들어간 거 같은데요?”
숀의 옆에선 그의 조수 존 핵이 홈스트레치 맞은편 백스트레치를 가리켰다. 타임 트라이얼 초반, 유달리 빠른 포뮬러 한 대가 두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런 초반 어택 전략을 엔트리급에서도 쓰는군요.”
“그러니까, 저런 건 서킷 경험이 풍부한 시니어급에서 볼 만한 전략인데, 레이서가 자신감이 넘치는데?”
“그러니까요. 스네트에서 많이 타본 레이선가? 그래도 처음부터 저렇게 달리면, 위험 부담도 큰데... 주니어 선수가 리타이어해서 맘 상할까 걱정되네요.”
모든 포뮬러가 서행하며 차량과 트랙 상태를 점검하는 상황. 반면, 초반 롤링 후 곧바로 속도를 올린 11번 포뮬러가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부우우우웅.
위이이이잉.
휑.
예선 극초반, 두 사람이 자리한 스탠드 앞으로 11번 포뮬러가 지나갔다.
“또! 또! 저거 11번 맞지?”
존의 말과 다르게 큰 문제없이 서킷을 도는 포뮬러. 가까이서 느껴지는 속도감은 다른 포뮬러들과 차원이 달랐다.
“스핀은커녕 레코드라인 그대로 미스 한 번 안내는데?”
빠른 속도로 스타트라인으로 들어온 포뮬러. 그리고,
“어! 줄였다!”
눈에 확 띌 정도로 갑작스럽게 속도를 낮추며 1코너로 진입했다.
“왜 갑자기 속도를 줄이는 거지? 지금 페이스 좋았는데?”
다른 포뮬러들이 지나가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아예 우측으로 빠진 11번 포뮬러카. 그 모습을 본 존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 그때,
“야, 존. 11번 차 타임 로그를 보라고.”
손을 뻗어 전광판을 가리키는 편집장 숀.
[Qualifying TIME LOG]
[순위/ Car no. 팀 /랩 /베스트타임]
[1위 /11번. 스메들리 /6랩 / 1분 30.302초]
[2위 /8번. MA레이싱 /4랩 / 1분 35.105초]
[3위 /24번. WD모터즈 /4랩 / 1분 36.056초]
.
.
“에?! 11번 1위?!”
30초대의 압도적인 기록을 내고, 서행하는 11번 포뮬러. 극초반부터 속도를 뽑아내며 기록을 세우고는 이제는 서행하고 있었다.
“이제 쿨링하면서 기다리겠다는 거지. 이야! 주니어 무대에서 이런 퀄리파잉을 볼 줄이야.”
일반적인 어택은 예선 막바지 파이널 랩에서 도전한다. 초반 어택은 서킷과 차량 컨디션에 자신있는 레귤러 레이서들이 사용하는 전략이다.
“초반에 저렇게 기록 세워두면 경쟁자들 심장이 더 쿵쿵 뛰겠는데요.”
먼저 베스트 랩타임을 세울수록 제한 시간이 있는 퀄리파잉에서 훨씬 유리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터. 하지만 애초에 주니어급에선 이런 전략을 쓰지 않는데, 트랙 경험이 없는 레이서들이 자칫하면 초반 긴장에 실수를 때문에 리타이어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 게다가 출발 전 연료량을 적게 채우고 들어와야 하는 사전 준비가 필요한 전략이다.
“저런 건 레이서가 능숙해야 쓸 수 있는 전략인데, 레이서가 대단하네요. 자신감 있는 거 보니까 연습 때랑 비슷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었나 보네요.”
사실 F1의 퀄리파잉은 총 3번, 각각 15분 내외의 제한 시간이 주어진다. 따라서 F1 레이서들은 이 짧은 시간 동안 베스트 기록을 만드는데 특화돼있다. 서준하 역시 예선 초반부터 어택하는 것에 익숙했다.
“이제 5랩 정도 되니까 다른 차들도 슬슬 속도를 높이기 시작하네. 이제 시간은 계속 흐르지, 11번 차의 기록은 따라가야지, 다들 엄청 부담스럽겠는데?”
두 사람의 시야로 우측 끝으로 달리는 11번 포뮬러가 보였다. 마치 혼자만 포메이션 랩을 도는 듯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
“뭐?! 30초대라고?”
오로라 모터즈의 피트 월. 퀄리파잉 초반, 서킷 상황판으로 1위 주자의 랩타임이 표시된 빨간 글씨가 등장했다. 상황판과 시계를 번갈아 확인하던 티아고 감독이 소리쳤다.
“저거 뭐야! 오류 아니야? 무슨 벌써 30초를 만들었어?”
“쿠시, 현재 1위가 30초대... 페이스를 올려라.”
레이스 엔지니어들도 자신들이 맡은 레이스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야이 무식한...!”
그 모습을 포착한 티아고 감독. 순간 아차 싶으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초반 트랙을 탐사하며 페이스를 올리고 있던 오로라 팀 레이서들. 누군가의 베스트 기록이 세워졌음을 듣고 조급하지 않을 레이서가 없었다.
“빨리 방금 전 내용 무시하라고 해! 페이스 유지시켜!”
티아고의 고성에 화들짝 놀란 레이스 엔지니어들. 무전을 끝낸 몇몇이 ‘먼저 소리친 무식한 놈이 누구냐’는 표정으로 감독을 바라봤다.
“1위가 스메들리야? 르노가 아니고? 아, 또 쟤넨 뭐야. 애들 기죽게 시작부터 저렇게 달려.”
2.0L Renault F4R 832 엔진을 착용한 포뮬러. 해당 차의 공식 페스티스트랩 기록은 30초대였다. 6랩 만에 워밍업만 마친 차량이 페스티스트랩과 유사한 기록을 만들자, 참가 팀 피트 분위기가 떠들석해졌다.
부우우우웅.
위이이이잉.
휑.
[Qualifying TIME LOG]
[순위/ Car no. 팀 /랩 /베스트타임]
[1위 /11번. 스메들리 /6랩 / 1분 30.302초]
[2위 /22번. 오로라 모터즈 /12랩 / 1분 30.855초]
[3위 /24번. WD모터즈 /13랩 / 1분 31.056초]
어느덧 퀄리파잉에 주어진 시간이 막바지에 이르며, 11번 레이서의 베스트타임에 근접한 선수들이 나타났다.
“그렇지! 우리도 30초대야! 선두까지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오로라 팀 레이서들의 랩타임을 보고 살아난 티아고 감독. 1위 스메들리의 기록과 근소한 차이였다. 그런데,
“가, 감독님. 쿠쉬가 한 템포 쉬겠답니다. 타이어도 많이 썼고...”
오로라 팀뿐만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베스트 랩타임을 기록한 포뮬러들이 트랙의 주로를 벗어나 서행하기 시작했다.
레이서도, 포뮬러도. 많이 지친 상태가 분명했다. 그리고 그때, 부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잉.
한동안 코스 밖에서 서행하던 11번 포뮬러가 다시 트랙에 등장했다.
“...!”
오로라 팀의 피트가 위치한 스타트라인 근처. 홈스트레치를 통과하는 11번 포뮬러의 엔진음이 지붕을 강타했다.
다시 한 번 최고속으로 달리기 시작한 포뮬러.
“스메들리?!”
어택을 중단한 포뮬러들이 벗어난 트랙. 트래픽이 없는 텅텅 빈 스네트 서킷을 11번 포뮬러가 질주하기 시작했다.
“어디 있다가 나타난 거야!”
그리고는 빠르게 한 바퀴를 돌며 속도를 높인 11번 차가 다시 스타트라인을 통과했다.
부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잉.
휑.
띠링.
그리고 오로라 팀 피트 월 상황판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Qualifying TIME LOG]
[1위 /11번. 스메들리 /21랩 / 1분 28.887초]
“또?!”
***
-준하, 폴 투 피니시 가자!!!
퀄리파잉 종료. 많은 팀의 실력자들이 서준하의 기록을 넘지 못했다. 레이서를 믿은 자신의 전략이 먹혀들자, 흥분한 롭이 무전으로 소릴 질렀다.
“준하아아아아!”
퀄리파잉이 끝나고, 피트로 복귀한 스메들리 팀 포뮬러들. 가장 마지막으로 서준하가 복귀하자, 팀 전체 분위기가 뜨거워졌다.
“예선 1위, 폴포지션!!!”
지난 연습 주행에서의 베스트 타임보다 더 빨라진 기록으로 본선 폴포지션에 오른 서준하. 특히나 가슴 졸이며 예선을 지켜본 미캐닉들이 난리가 났다.
반면, 별다른 표정의 변화없이 레이서들을 향해 손짓하는 프랭크 감독.
“레이서랑 엔지니어들은 모두 팀 오피스로 모이게.”
소란이 줄어들자, 서준하와 레이스들을 향해 말을 던지고는 곧장 오피스로 들어갔다.
갑자기 차분해진 분위기. 프랭크의 지시에 팀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전하시네.’
대회 기간동안 프랭크의 표정 변화는 없을 거다. 항상 다음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프랭크 키턴. 이를 잘 아는 서준하와 롭이 오피스로 걸음을 옮겼다.
끼익.
철컥.
“다 들어왔지?”
레이싱 슈트가 흠뻑 젖은 레이서들. 아직 레이싱의 열기가 식지 않았는지, 여전히 땀을 쏟아내고 있었다.
“닐, 1차전이 홈 그라운드에서 열린 만큼 여기선 선두권에 올라 왔어야지. 이번에도 브레이크 타이밍이 너무 빠르더구만.”
레이서들의 주행 감각이 아직 생생히 남아있는 만큼 경기 직후 피드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프랭크. 연습 주행보다 떨어진 베스트 랩타임으로 예선 6위를 기록한 닐과 얘기를 나눴다.
“에릭, 자네도 2차, 3차전은 영국이 무대가 아니란 걸 잘 알지 않나? 왜 중간에 포기하는 건가, 연료랑 타이어를 다 쓸 때까지 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자넨 항상 일찍 포기하는 듯해 아쉬워.”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열리는 유로컵 2,3차전. 지금보다 훨씬 불리한 상황에서 대회를 치루는 건 분명했다. 영국이 홈구장이라면 홈구장. 스메들리 입장에선 팀 레이서 모두가 유리한 1차전에서 포인트를 많이 따야했다.
“두 사람 너무 조급해 보여. 그러면 페이스를 잃기 십상이고, 그게 곧 레이스 위로 드러나는 거야. 엔지니어들, 자네들이 좀 도와줘.”
닐과 에릭을 향하던 프랭크의 시선이 그들의 레이스 엔지니어 맬릭과 아론에게 옮겨갔다. 서준하를 가리키는 프랭크.
“그리고 준하, 자넨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말게.”
폴포지션이라고 모두 우승하는 건 아니다. 단지 스타트 상황에서 조금 유리한 것일 뿐, 레이스는 그게 전부가 아니다. 프랭크의 말에 서준하가 고갤 끄덕였다.
“어? 아, 이거 거의 확실한 거 같은데요?”
구석에서 조용히 얘기를 듣던 롭. 휴대폰을 확인하던 그가 갑작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일 날씨 때문에 말이 많았는데. 지금 보니까 레이스 시작 전부터 계속 비가 내린다네요.”
“비? 꼭 그럴 것 같더라니만...”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음을 옮긴 프랭크. 창문을 열고는 고개를 내밀었다.
“일단 내일 상황을 봐야겠지만, 이렇게 되면 전략을 바꿔야겠구만.”
영국이라는 1차전 무대, 그리고 스메들리 레이서들의 급진적인 레이싱 스타일. 이 모든 걸 고려했을 때, 스메들리 팀은 본선 레이스에서 모두 공격적인 레이싱을 펼치려고 했다.
“경기 운영을 보수적으로 해야겠어.”
“보수적이라면? 그때 말씀하셨던, 디펜싱 위주의 레이싱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지.”
그를 향해 자세한 내용을 묻는 롭. 프랭크가 고갤 끄덕였다.
“롭, 지난번에 다뤘던 스네트 서킷의 디펜싱 포인트 적은 페이퍼 있지?”
“네, 감독님. 가져다 드려요?”
프랭크의 말을 듣고 곁에선 아론이 페이퍼 뭉치를 꺼내들었다.
“그거, 레이서들한테 나눠주게.”
레이서들에게 배부되는 페이퍼. 그 모습을 보던 프랭크가 아론에게 말했다.
“어, 서준하는 빼고.”
서준하를 향한 신뢰 가득한 눈빛. 그 모습에 서준하가 씨익 미소를 띄웠다.
< 꼭 그럴 것 같더라니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