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으응, 그래 오늘부터 경주 시합한다구? >
띠디디디.
띠디디디.
아침 6시. 알람 소리에 서준하가 잠에서 깼다.
터벅터벅.
침실을 빠져나와 곧장 화장실로 이동한 서준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거울을 보고 웃는 일이다.
“흐흐.”
가끔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기분은 좋다.
몸을 씻은 뒤 물을 한 잔 마시고, 간단한 스트레칭을 한다. 몸이 깨어나는 듯하며 기분이 더 좋아지는데,
“오늘부터 시작인가.”
오늘은 1차전 각 팀의 공식 연습 주행이 있는 금요일. 새 시즌의 공식 일정이 시작되는 날. 특히나 이런 하루의 시작은 설레고 즐거워 견딜 수가 없다.
“아아, 크음. 주문을 외워 봅시다.”
침실 문 앞으로 다가선 서준하. 문에 붙여놓은 페이퍼를 읽어 내려갔다.
[매일 아침 Incantation(주문)]
-나는 인생을 즐긴다.
-나는 끊임없이 발전한다.
-나는 내게 필요한 모든 자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집중하고 에너지 넘치며 유연하다.
-나는 내 감정의 주인이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나는 항상 최고의 상태다.
즐겁고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고픈 서준하. 단순히 정신적인 영역 또한 흘러가는 대로 상황에 맞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해서 훈련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고, 이를 매일 실천했다.
“...나는 항상 최고의 상태다.”
다시 한번 F1에 가겠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원하는 삶이 있고, 더 나아지길 바란다면 그것이 가능하도록 매일 아침 자신을 준비시켜야 했다.
띠링.
띠링.
여유롭게 아침을 먹는 서준하. 그의 옆으로 휴대폰이 알람을 울렸다.
[페이스톡 메신저]
장윤호: 이번에도 챔피언 먹어라ㅋㅋㅋ 안 그러면...
케이시: 준하, 오늘 대회 시작이지? 이번에 꼭 응원갈게...
한서윤: 좋은 아침! 내가 바래다 줄게요, 9시까지 숙소 앞으로 나와 있어요...
.
.
어젯밤부터 쏟아진 서준하를 향한 응원의 메시지. 이 길이 꼭 혼자만 걷는 건 아닌 듯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 사람 저 사람 간단히 고맙다는 답변을 보냈다. 다시 아침 식사에 집중하려던 찰나, 벨소리가 울리는데,
“준하야, 할미야!”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화면으로 보이는 할머니의 머리카락.
“이거 영상 통화에요. 얼굴 보여 주셔야지.”
그래도 여전히 바뀌지 않은 화면. 옆에선 엄마의 목소리와 함께 할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아이고, 화상 통화구나. 얘 준하야, 밥은 묵었어?”
“이제 먹어요. 할머니는 진지 드셨어요?”
식탁 위로 카메라를 들이미는 서준하.
“으응, 그래 오늘부터 경주 시합한다구?”
“네, 아마 내일부터는 한국에서도 볼 수 있을 텐데, 엄마가 말 안해주세요?”
“잠깐만. 야, 애미야. 준하가 그러는데....”
화면에서 사라진 할머니의 얼굴. 잠시 후, 함박웃음과 함께 다시 등장하셨다.
“할머니, 우리 팀 이름이 스메들리 포뮬러에요. 그 팀 응원하시면 돼요.”
“스메, 뭐어?”
“스메들리. 아니 그냥, 파란색 자동차 응원하면 돼요.”
“해외라 멀어서 그른가, 잘 안들리다이. 애미야, 준하가 그러는데...
손자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 할머니.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 번 사라지셨다.
“할머니... 그냥 맨 앞에 자동차 응원하면 돼요.”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그만큼 자신 있었다.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꼭 맨 앞에서 달리겠다고 다짐하는 서준하.
“손자가 얼마나 빠른지 보여드릴게, 기대하셔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하며 활짝 웃자, 할머니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어났다.
***
“다들 피지컬이 왜 저렇게 좋아. 무슨 격투 선수 같아.”
실버스톤 서킷의 주차장. 먼저 도착한 독일의 모터 파크팀이 피트로 짐을 나르고 있었다. 미캐닉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남성들이 한서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쪽도 분위기 살벌하네. 아트 그랜드 파크 선수들인가.”
지난 시즌 루키 드라이버를 여럿 탄생시키며 돌풍을 일으킨 프랑스 팀. 다소 엄격해 보이는 감독 주위로 미캐닉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머, 다들 와있어. 우리 팀이 좀 늦은 건가?”
“영국 무대니까, 다른 나라 팀들은 서두를 수밖에 없지. 한 바퀴라도 더 타봐야 하니까.”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스메들리 팀. 공식 연습 주행 시작 전,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도로로로롱.
우우웅.
“이야, 저건 또 뭐냐.”
서킷 입구 바로 앞으로 들어서는 세 대의 버스. 메르세데스 벤츠의 럭셔리 리무진이 특유의 엔진음을 내며 멈춰섰다.
“루나 레이싱이네.”
“귀한 집 자제분들은 버스도 저런 거 타는구나.”
귀족 팀이라는 별칭을 가진 루나 레이싱. 레이스 장비는 물론, 팀의 이동과 같은 사소한 부분까지 아낌없이 거액을 투자하는 팀으로 유명했다.
“하도 소문을 많이 들어서 그런가, 진짜 레이서들이 귀티가 난다.”
새하얀 유니폼을 입은 루나의 팀원들. 차례로 버스에서 내리는 모습이 한서윤의 눈에 들어왔다.
“어우 떨려, 진짜 시작인가봐. 준하 선수 어때?”
이어폰을 꽂은 채 음악을 듣는 서준하. 한서윤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그저 리듬을 타며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었다.
“...!”
피트로 걸음을 옮기는 스메들리 포뮬러 팀. 피트 근처에서 누군가 그들을 반겼다.
“헤이!”
바람결에 휘날리는 금발. 케이시 카버트가 스메들리 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허... 여신이다.”
케이시를 처음 본 스메들리의 새로운 팀원들. 가까이서 본 그녀의 얼굴은 아주 작았다. 금방이라도 빠져들 것만 같은 파란색 눈동자가 몇몇 팀원들의 눈길을 끄는데,
“일찍 왔네, 케이시. 레이스 당일에 온다더니, 연습 주행도 보려고?”
“응, 롭. 다른 곳도 아니고, 영국이잖아요. 올 수 있을 때 와야죠!”
레이서 시절 케이시도 꿈꿨던 F3 무대. 스메들리 팀을 응원하는 목적을 떠나 자주 찾던 실버스톤이었다.
“준하!”
곧이어 서준하를 발견한 케이시. 가장 뒤에서 걸어온 서준하도 그녈 향해 손을 흔들었다.
“준하 여자친군가?”
“그런가봐. 아시안이 취향일줄은 몰랐는데.”
“왜, 둘이 잘 어울리는구만.”
“옛날에 스메들리 아카데미 때부터 준하랑 친한 사이였대.”
그 모습을 보고 수군거리는 몇몇 팀원들. 새로운 팀원 몇몇은 부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준비는 잘 하고 있는 거야?”
“응, 그때 말했던 잡지사에서 여름부터 일 시작할 거 같아.”
레이서를 그만두고 모델의 길로 들어서기로 마음 먹은 케이시 카버트. 대회 준비부터 그녀의 새로운 직장까지, 서준하와 안부를 물으며 대화를 나눴다.
“레이스까지 응원할게, 절대 다치면 안 돼, 준하.”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본격적으로 주행 준비에 들어가는 서준하.
“가볍게 스트레칭 한 번 하고, 식사 그리고 출발 전 점검 후 장비 착용...”
그리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가볍게 몸을 풀기에 나섰다.
터벅터벅.
참가 팀 가운데, 가장 오른쪽 자리에 위치한 스메들리의 피트. 서준하가 걸음을 옮겨 서킷 가까이로 다가섰다. 그런데,
“헤이, 코리안!”
자신을 부르는 듯한 낯선 목소리. 그쪽으로 고갤 돌리자, 검정색 오버롤을 입은 레이서가 눈에 들어왔다.
“맞지? 서준하.”
윙크를 날리며 인사하는 레이서.
“아까 네 여자친구야?”
자신이 누군지도 밝히지 않은 채 던지는 뜬금없는 질문. 무례한 태도에 남자의 얼굴을 그저 바라봤다.
“그냥 궁금해서 그래, 너무 그렇게 보지마. 아까 금발 영국인 여자 말이야. 네 여자친구냐고.”
짧게 자른 머리와 함께 날카로운 눈매. 영국인으로 보이는 남자의 가슴팍에는 ‘제이크’라는 글씨가 세겨져 있었다.
아니, 라는 말과 함께 무표정으로 반응하는 서준하.
“오케이, 알려줘서 고마워어. 너 잘 탄다며? 나중에 레이스에서 보자.”
서준하의 말에 기분 좋아진 듯한 레이서. 싱거운 웃음을 한번 짓고는 곧바로 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Calin Racing British Formula]
어딘가 거만해 보이는 그의 걸음걸이. 유니폼 등에 자수로 새겨진 팀의 이름이 서준하의 눈에 들어왔다.
“응? 쟤 제이크 러셀 아니야?”
서킷 탐사를 위해 서준하의 곁으로 다가선 롭. 멀어져가는 남자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그때 봤던 녀석이잖아. 아까 보니까 막 실실 웃던데, 뭔일 있어?”
방금 전 서준하와 곁에 있던 제이크를 보고 묻는 롭.
“몰라, 그냥 미친놈 같아.”
멀어져가는 레이서를 바라보는 서준하. 이내 남자가 귀엽다는 듯 웃어보였다.
***
“이번 주말까지 기온 변화가 그리 크지 않을 거야. 다들 오늘 연습 주행이 정말 중요한 거 알지?”
실버스톤에 도착한 스메들리 팀. 점검과 함께 연습 주행 준비를 마쳤다.
“준하야, 오늘 환경에서 최대한 감을 끌어올려야해.”
오늘 주행이 중요한 이유는 대회 시작 전 세팅값을 점검해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 출발 전 점검을 마친 헨리가 말을 건넸다.
“타이어는 네가 말한 대로 가장 소프트한 타이어로 껴뒀어. 이거 맞지?”
타이어를 발로 툭툭 건드리는 헨리.
“엔진하고 타이어 예열도 미리 해뒀으니까, 곧바로 속도를 내도 괜찮을 거야. 하지만 타이어 수명은 얼마 안 남았으니까, 오래는 못 타. 그것 말고는 다운 포스 세팅은 안 건드렸다.”
경주차가 받는 공기의 흐름을 조절하는 앞뒤 날개부터 타이어의 종류까지. 실력있는 드라이버라면, 이 모든 사항들을 자신이 직접 설정한다. 서준하 역시 매 경기 엔지니어들과 상의 후 자신이 직접 세팅값을 정하는데,
두두두두두두두둥.
포뮬러카에 올라탄 서준하. 통신 체크와 핸들링을 점검한 후 곧바로 피트에 퍼팩트 사인을 보냈다.
부우우우우웅.
천천히 피트를 빠져나가며, 매끄럽게 달리기 시작하는 서준하의 포뮬러카. 그리고,
[Prema Racing Italia Formula]
서킷으로 나가는 피트 레인으로 들어서자, 우측 시야로 익숙한 팀 마크가 보였다.
“프리마 레이싱...”
지난번 경쟁팀 분석 회의에서 확인했던 프리마 레이싱의 존재. 전생 GP2 시리즈 시절 자신의 소속 팀 마크를 다시 보자, 기분이 묘해졌다.
부우우우웅.
위이이잉.
피트 레인으로 빠져나가기 전 속도를 줄이는 서준하. 점점 가까워지는 프리마 팀의 피트를 유심히 살펴봤다.
“조르조 페린.”
전생에 알던 몇몇 엔지니어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대부분이 모르는 얼굴들. 그 가운데 몇 번 인사를 나눴던 조르조 감독의 얼굴이 보였다.
“페트로 피터발디.”
자신이 알던 그 피터발디가 맞았다. 레이서 가운데 유난히 작은 체형의 브라질인. 옛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제프...”
그 옆으로 보이는 또 다른 레이서. 프리마 팀의 상징과도 같은 새빨간 오버롤 착용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아직 사람들은 네가 누군지 모르겠지.”
남자의 비밀 아닌 비밀을 잘 아는 서준하.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과 함께 오랜 기억들이 떠올랐다.
-혼자 뭐라고 자꾸 중얼거려.
피트 레인 출구에 다가서자, 날라온 무전. 대충 웃어넘긴 서준하가 전방을 바라봤다.
“이제 출발한다, 롭.”
본격적인 F3 무대의 시작, 서준하가 서킷에 올랐다.
< 으응, 그래 오늘부터 경주 시합한다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