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럼 이번 1차전이 곧 챔피언 결정전이라는 말이잖아요 >
“2015 FIA 포뮬러 3 유로피언 챔피언십, 드라이버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연습 주행을 마친 참가팀들. 저녁 컨퍼런스가 있기 전, 각 팀의 레이서들이 미팅을 가졌다.
“FIA F3 유럽 지역 운영국장, 알베르라고 합니다. 매번 있는 브리핑이지만,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프랑스 사람 특유의 발음과 함께 느릿느릿한 영어로 자신을 소개하는 알베르. 국장을 제외한 회견장의 모든 이가 경청했다.
“다들 알다시피 지난 시즌 치열한 경쟁 탓에 우리는 한 선수를 사고로 잃었습니다...”
사고라는 말에 긴장된 회견장 분위기. 강조할 게 있다며 힘주어 말을 꺼내는데,
“우리는 또 한 번 그런 일이 일어나질 않길 바랍니다. 따라서 이번 대회부터는 충돌에 대해 가감없는 페널티를 부여할 겁니다. 접촉을 일으킨 선수도 예외 없습니다. 이번 스튜어드들께서 굉장히 민감하게 여기는 사안이라는 점 알고 계시길 바랍니다.”
포뮬러에 적응한 선수들의 무대이자,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의 무대. 대회 시작부터 몸싸움이 치열할 것으로 예상되자, 국장이 단단히 경고했다.
“허허, 안 그래도 서늘했던 분위기가 더 심해졌군요. 모두들 연습주행은 잘 하셨는지요? 서킷 운행이나 건의 사항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자리한 선수들을 한 번 쭉 둘러보던 알베르. 너털웃음을 짓고는 마이크를 내려놨다.
“...”
계속되는 침묵. 그동안 국장의 시선은 계속 프리마 레이싱의 두 선수에게로 향했다. 그러던 순간,
“어, 폴라, 저쪽으로 마이크 좀 갖다 줘요.”
루나 레이싱이 자리한 우측 테이블. 레이서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레이서 데니스 스위팅입니다. 하나 말씀드릴게요. 다들 10코너 마곳(Maggots)부터 시작하는 삼연속 코너 있지 않습니까?”
“계속 말해요, 데니스 군.”
“여기는 진입 이후 속도가 떨어지면 안 되는 구간인 거 아시죠?”
에이펙스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정교한 테크닉이 요구되는 삼연속 슬라럼. 최대한 빠르게 진입과 탈출 속도를 유지해야 하는 구간이다.
“근데 연습 주행은 말그대로 이런 곳에서 테크닉 연습하라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근데 오늘 저길 서행하는 레이서가 있더라고요. 그렇게 느리게 달리면, 뒤차들 힘 빠져요. 쉴 거면 완전히 코스 아웃하던가, 이도저도 아니고, 뭐하는지 모르겠네요. 다들 좀 매너있게 탔으면 좋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대열의 중앙을 흘겨보는 데니스 스위팅. 회견장에 들어서면서부터 심기 불편해 하던 그의 첫인상이 이해가는 대목이었다.
“음, 그랬군요. 좋은 의견입니다. 2차전 부터는 다른 차들 연습 주행에 방해되는 행동은 삼가길 바랍니다. 이후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면, 그 레이서는 스튜어드들과 면담을 갖게 될 겁니다.”
차분히 말을 꺼내는 국장. 그도 데니스가 흘겨본 팀을 향해 고갤 들어 말했다.
“나도 봤어. 진짜 짜증나더라.”
“우린 아니야, 저쪽 아니야?”
그에 따른 선수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데니스 주위에선 그게 누구냐고 묻는 선수부터, 자신은 아니라고 고갤 흔드는 레이서들까지. 회견장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해졌다.
“이곳에 올라온 뛰어난 선수들인 만큼 매너있는 행동을 보여주리라 믿습니다. 자, 브리핑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국장의 말이 끝나고 회견장을 빠져나가는 선수들. 하지만 여전히 선수들의 관심은 그런 행동을 한 레이서였다.
“파란색 차였던 거 같은데, 그거 저쪽 아니냐?”
서준하와 강민수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몇몇 선수들.
“모터파크도 파란색이긴 한데... 근데 왠지 쟤네 같기도 하고.”
F3 시리즈에 새로 참가한 스메들리 팀. 어딘가 무시가 섞인 발언들이 서준하의 귀에 들리는 듯했다.
“반 스페르트 레이싱?”
남자들을 향해 고갤 돌린 서준하. 오버롤에 새겨진 팀 이름을 머릿속에 박아두었다.
***
간단한 인터뷰를 마치고 팀 하우스로 복귀한 서준하. 롭이 그를 오피스 안으로 불렀다.
“오늘 주행 데이터를 좀 분석해 봤어. 이거 보고 대회 때 쓸 타이어를 고르자.”
퀄리파잉 시작 전, 대회 주최측에 예선부터 본선까지 사용할 타이어 4세트를 미리 신청해야 한다.
레이스 순위를 좌우하는 타이어 선택, 롭은 레이서와 의견을 조율해 타이어를 고르는 엔지니어였다.
“이전이랑 상황은 똑같아, 노면은 확실히 거친 편이지. 아무리 관리를 잘 한다고 해도 프라임은 2개 모두 미디움으로 고르는 게 좋을 거 같아.”
F1 최초로 하드 타이어가 레이스 용 타이어로 쓰였을 정도로 거친 노면. 롭이 사용 가능한 타이어 목록이 적힌 페이퍼를 꺼내놨다.
“일반적으로 F1 클래스에선 대부분이 S(소프트)-M(미디움) 타이어 조합으로 레이스를 마쳐. F3 보다 경기 시간이 길지만, F1 선수들 타이어 관리 능력이 훨씬 뛰어나니까 아마 조합은 비슷할 거야. 그리고 우리가 가진 데이터로는 40분짜리 레이스에서 M-M 조합도 안정적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해?”
초반 소프트 타이어가 오래 버텨주지 못한다면, 타이어 교체 타이밍이 빨라지고, 그만큼 후반에선 속도가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괜찮아. S-M으로 가자. 타이어는 자신 있어.”
S-M으로 실버스톤 레이스를 소화하는 건 F1 시절 자신의 전략이었다. 충분한 자신감을 보이는 서준하.
“오케이, 그럼 퀄리파잉에선 뭘 쓰지?”
총 30분 동안의 퀄리파잉. 대부분의 선수들이 종료 직전 마지막 바퀴에서 플라잉 랩에 도전한다.
“잠깐, 그전에. 비가 온다는 소식은 없었지?”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체크하는 서준하. 그의 말에 롭이 고갤 저었다.
“토요일, 일요일 모두 전반적으로 기온이 높은 편이 아니야. 초반 어택을 노리기엔 타이어 그립감이 올라오는 시간이 좀 늦을 거야. 소프트로 타다가, 중반에 어택하는 게 어때?”
1차전인 만큼 타이어 전략에 신중을 가하려는 롭. 이전 대회에서의 전략과 달리 계속 안정적인 선택을 제안했다.
“롭, 그냥 처음부터 그립감이 좋은 타이어로 타면 되지 않을까?”
서준하의 말에 고민에 빠진 롭. 레이서는 초반 어택을 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뭐? 그럼 준하 네 말은 소프트로 가자는 거지?”
초반 어택. 그렇다면 연료량을 낮추고, 그립력 높은 타이어를 선택해야 한다. 실버스톤에서는 소프트 타이어가 무난한 편. 하지만,
“아니, 다른 걸로 가야지.”
서준하가 손가락으로 그가 원하는 타이어가 그려진 페이퍼를 집었다.
“흠... 괜찮겠어?”
다소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준하를 바라보는 롭. 하지만,
“믿고 맡겨줘, 원하는 성과를 가져올 테니까.”
대회 시작부터 기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하면 입 아플 정도. 확신에 찬 서준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
“드디어! 대망의 2015 포뮬러 3 유러피언 챔피언십을 시작합니다!”
유로컵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꽉 들어찬 관중석. 영국 팬들은 물론, 여러 나라에서 건너온 관중들도 많았다.
“아! 오늘 레이스가 있는 날인줄 어떻게 알았나요? 오늘 날씨 역대 최고네요!”
구름 한 점 없는 노샘프턴의 하늘. 늘 우중충한 구름으로 어두웠던 실버스톤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저희도 이렇게 떨리는데, 팀과 선수들은 얼마나 긴장되겠습니까?”
“그렇죠. 레이서 모두 F1 콕핏을 노리는 선수들이거든요? 이번 대회에 F1 관계자들도 여럿 오셨을 겁니다. 성적 압박이 엄청날 거예요.”
유럽 최고의 F3 레이서를 가리는 대회. 1차전 무대가 영국인 만큼 영국을 본거지로 두고 있는 F1 스태프들 대부분이 서킷을 찾았다. 게다가,
“오우! 이거 대박이군요. 나이젤의 모습이 보입니다. 나이젤 만셀이 실버스톤을 찾았습니다!”
메인 스텐드 부근 푸근한 인상의 남자가 단독샷에 잡혔다. 흥분한 중계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하, 콧수염이 없는 모습이 어딘가 어색한데요.”
“80년대 F1 스타까지 등장한 걸 보면, 이번 대회 정말 관심이 뜨겁습니다.”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드라이버 중 한 명으로, 화려한 F1 커리어를 자랑하는 80년대 스타 나이젤 만셀.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이 사라진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경기 시작에 앞서 잠시 대화를 나누는 중계진들.
“F3 유로피언 챔피언십은 무엇보다 1차전이 중요합니다.”
“뭐든 시작이 중요합니다만,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하하, 있습니다. 지난 4년 동안 1차전 우승자와 대회 챔피언이 동일하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네? 그럼 이번 1차전이 곧 챔피언 결정전이라는 말이잖아요?”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 퀄리파잉이 정말 중요합니다!”
실버스톤 구석 구석을 비추던 중계 카메라. 이어서 인터뷰를 하는 레이서와 차량을 정비하는 미캐닉들의 모습이 중계 화면에 등장했다. 그리고,
[PIT LANE OPEN]
[29 분: 59 초]
“퀄리파잉 시작합니다!!!”
방송과 함께 전광판에 표시된 피트 레인 오픈. 퀄리파잉이 시작됐음을 알리며 중계 화면으로 참가 팀들의 피트가 등장했다.
부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잉.
모두가 눈치를 보는 가운데, 가장 먼저 피트 레인에 올라탄 황금색 포뮬러카.
“제이크 러셀! 오늘 퀄리파잉의 첫 번쨰 주자입니다!”
“이어서 페트로 피터발디! 프리마의 포뮬러카가 그 뒤를 따라나섭니다!”
하나둘 아웃랩(Out Lap)을 시작하는 레이서들. 갤러리의 함성이 거세졌다.
“선수들 대부분 S 타이어를 장착한 것 같죠?”
“그렇죠, 대략 12바퀴 정도의 주행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좋은 기록을 위해선 오늘 소프트 타이어는 최고의 선택입니다!”
퀄리파잉에선 팀이 어떤 타이어를 선택했는지는 공개되지 않는다.
다만, 출발 전 잠깐 동안 포뮬러카가 카메라에 잡히는 경우가 있는데, 타이어 옆면으로 소프트를 상징하는 노란색 줄무늬가 중계진의 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 10번째 주자는 바로 프리마 레이싱의 제프 베시! 오, 이런!”
연이어 선수들이 서킷으로 나가고, 우승 후보인 프리마 레이싱의 새빨간 포뮬러카가 화면에 잡혔다.
“제프! 이번 퀄리파잉 다소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 같습니다!”
단기간 레코드 기록을 위한 도전에서 주로 쓰이는 슈퍼소프트 타이어. 차 색깔과 똑같은 붉은 무늬 타이어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이번 대회 첫 출전이죠? 스메들리 팀의 서준하 선수가 11번째로 피트레인에 오릅니다!”
이어서 등장한 스메들리 피트. 화면에 서준하가 잡히자마자 곧바로 사라져버렸다.
“아! 타이어를 못 봤네요.”
서준하의 타이어를 살피던 해설진. 아쉬운 목소리와 함께 레인으로 들어가는 파란 포뮬러를 유심히 살피는데,
“밝은 색은 아니던 거 같은데요. 아마 공격적인 선수라 옵션 타이어를 장착하고 나왔을 듯 합니다.”
출구로 나와 천천히 트랙을 도는 앞선 포뮬러들. 하지만,
“...!!!”
유난히 속도를 높이기 시작하는 포뮬러카 한 대. 느릿느릿한 앞차들을 피해 달리는 파란색 포뮬러카가 단독샷에 잡혔다.
“저거 스메들리 서준하 선수 맞죠?!”
갑작스런 서준하의 스퍼트에 깜짝 놀란 중계진들.
“이, 이 선수 워밍업도 안 하나요?!”
손톱으로 살짝 눌러도 파일 정도의 약한 내구성을 가진 US 타이어.
“서준하! 워밍업 따윈 생략한 듯 질주를 시작합니다!”
1차전 퀄리파잉, 울트라 소프트 타이어를 장착한 서준하가 등장과 동시에 플라잉 랩을 시작했다.
< 그럼 이번 1차전이 곧 챔피언 결정전이라는 말이잖아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