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의 예측이 빗나가는 순간인데요? >
콜린의 팀 하우스 메인 홀. 어둠이 깔린 노샘프턴의 하늘을 바라보는 조쉬 감독.
“이런 퀄리파잉은 처음이야.”
가장 자신있는 무대, 실버스톤 서킷. 매 시즌 콜린의 레이서 모두 순위권에 오르며 이번에도 제이크와 톰이 예선 1,2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한 명은 순위권에도 못 올랐고, 한 명은 그마저도 3위라, 흠...”
팀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두 선수 각각 7위와 3위에 랭크한 상황. 믿기 힘든 결과에 조쉬 감독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밖에 나가면 전부 코리안 레이서 얘기뿐이에요. 아직 레이스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우승자가 나왔다는 분위기더군요...”
“임팩트가 크긴 했어. 43초대를 만들었으니까. 그것도 단 2랩만에...”
“트래픽 없는 초반을 제대로 공략한 것 같습니다. 아직 젊은 선수치고 자신감이 엄청나네요.”
콜린 팀이 아닌 다른 팀 얘기로 실버스톤이 이렇게 떠들썩했던 적은 없었다. 감독의 곁으로 제이크의 레이스 엔지니어가 다가섰다.
“남 칭찬만 할 때가 아니지, 타이어는 어떻게 하기로 했나?”
“식사 마치고, 제이크를 불렀습니다. 이제 곧 올 거예요.”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좌절하기엔 아직 이른 상황. 예선은 본선이 아니다.
끼익.
철컥.
마침 메인 홀로 들어온 제이크 러셀. 대회 시작 전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회의 시작하시죠, 감독님.”
여느 때와 달리 강한 의지를 내보이는 제이크 러셀. 코치진 모두 고갤 끄덕이며, 테이블 주위에 앉았다.
“예선에서 미디움을 썼으니까... 남은 타이어는 소프트 2개, 미디움 1개.”
예선에서 대다수의 참가자들이 소프트를 사용한 상황에 제이크는 미디움 타이어를 장착했다. 그만큼 서킷이 자신 있었고, 무엇보다 폴포지션을 차지한 후 장기 레이스에서 격차를 더 벌리기 위한 전략을 택했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 결과가 다르지만, S-M-S 투 스탑(두번의 피트 스탑) 전략으로 가면 되겠지?”
엔지니어의 말에 고갤 끄덕이던 제이크. 잠시 멈칫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소프트 두 개를 먼저 쓰죠.”
“S-S-M으로 가자는 거야?”
“그럼 초반에 승부를 보겠다는 건가?”
코치진의 말에 다시 한번 고갤 끄덕이는 제이크. 경쟁자들이 미디움과 같은 안정적인 타이어로 초반 스타트를 끊을 게 분명한 상황에서 그가 강수를 던졌다.
“초반에 밀어 붙여야 해요. 소프트를 두 개나 가진 이점을 살려야죠. 피트 스탑에서만 실수 안 나오게 해주세요.”
자신의 앞마당 영국 레이스였고, 이곳에선 항상 가장 높은 포디엄에 올랐다. 레이스의 1위 말고는 생각없는 제이크 러셀. 초반 승부를 노리며 공격적인 타이어 조합을 선택하는데,
“그렇지, 어차피 앞차들은 미디움으로 나올 거야. 우린 초반을 노리는 게 좋을 듯 싶네.”
초반 추월에 실패한다면, 자칫 페이스가 흔들릴 수 있는 전략이지만, 감독은 선수를 믿었다.
게다가 어느 팀 부럽지 않은 실력 있는 콜린의 미캐닉들이 있었다. 두 번의 피트스탑 역시 부담스럽지 않았다.
“이번엔 앞에서 알짱거리는 것들 전부 밟아버릴 겁니다.”
창가로 다가선 제이크. 예선 2랩에서 뜬금없이 청색기를 봤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원숭이 새끼, 우쭐대는 게 꼴보기 싫네요.”
예선 초반, 달려오는 서준하에게 자릴 비켜준 제이크. 자신의 앞을 지나간 파란색 포뮬러카의 뒷모습이 떠오르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
“순위권 레이서들 기록이 저번 시즌보다 평균 1.5초 더 빠른데요?”
1차전 퀄리파잉을 관람한 포뮬러 B의 기자 존 핵. F3 관련 기사를 내놓기 위해 레이스 기록을 분석했다.
“포인트권 선수들도 빨라요. 하위권하고는 기량차가 너무 심해요. 오히려 10위권 밖은 저번보다 훨씬 기록이 저조하더군요.”
매 시즌 대회 챔피언 자릴 예측하는 기사를 작성하는 포뮬러 B 잡지사. 존의 말에 편집장이 고갤 돌렸다.
“그렇다면, 순위권 싸움에 변수가 하나 더 추가되겠네.”
“하나 더요?”
“기량차가 많이 난다며. 그럼 그만큼 백마커들이 나온다는 소리 아니겠어?”
“아하, 그렇네요. 역시 예리하십니다.”
존의 말에 어깨를 한번 들썩이는 편집장.
“그것 말고도 변수는 아주 많지. 영국이잖아. 오늘 좋았다고, 내일도 좋으란 법 있나? 비가 또 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진짜 그건 경기 준비하는 팀 입장에선 엄청 짜증나는 일이겠네요. 웨트 컨디션이 되면, 타이어 전략 뒤바뀌지. 피트 스탑에 차들 몰리지...”
서킷의 다양한 변수를 만드는 우천. 하지만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변수가 하나 더 있어요. 예선에서 타이어 펑쳐가 세 건 이나 있었어요. 그것도 고작 서너 바퀴를 탔던 초반에 일어났죠.”
“허허, 그거 참 문제구만. 언제쯤 재포장에 들어가려나.”
지난 30년 동안 재포장을 한 번 뿐이 안한 실버스톤. 그만큼 노면은 거칠었고, 특정 구간에선 타이어가 쉽게 상했다. 이번 레이스 역시 많은 타이어 펑쳐가 예상되는 상황.
“아직 1차전이라 다들 타이어 관리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 지 모르겠지만, 스무 바퀴 동안 실수 없이 타는 게 가장 중요하겠네요.”
“그렇지, 피트 스탑도 수준급은 아닐테니까. 역시 원메이커 성향의 대회는 승부 예측하기가 어려워.”
F1의 경우 새 시즌 좋은 차를 개발한 팀이 유리하기에 우승자를 예측하는데 조금 어려움이 덜하지만, 오로지 레이서들의 실력으로 승부가 가려지는 원메이커 대회는 그만큼 예측이 힘들었다.
“내일 우승 예측 기사에 다들 관심이 많아요. 흠, 이거 잘 써야 할 텐데...”
치열한 예선전에 부담스러워진 존 핵 기자.
“우선 가장 우승 가능성이 높은 건 폴포지션이니까요. 서준하 선수가 어떤 전략을 들고 나오는지. 일단 그게 중요하겠네요. 조금 보수적으로 타려나?”
존의 말에 편집장이 피식하고 웃었다.
“작년에 몬차 서킷에서 본 거 잊었어?”
유로컵 대회를 참관했던 두 사람. 편집장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데,
“스타팅 위치가 어디건, 서준하는 방어적으로 드라이빙 하는 레이서가 아니야.”
어느 위치에서건 속도를 즐기는 듯한 과감한 주행이 인상 깊었던 코리안 레이서.
“이번에도 미친 듯한 주행을 다시 봤으면 좋겠어. 성적과 별개로 경주차 타는 게 참 즐거워 보이는 선수란 말이지.”
고갤 끄덕이는 존. 레이스 예측 기사에 무언가를 빠르게 적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어제에 이어, 오늘도 실버스톤을 찾아주셨는데요. 영국 선수들을 응원하러 오셨다고요?”
중계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나이젤 만셀. 1차전 레이스 현장에 나간 캐스터가 마이크를 들이 밀었다.
“으험, 네. 어제 우연히 들렸는데, 재밌더라구요. 브리티시 선수들이 선전하길 바랍니다.”
특유의 능글맞은 말투와 함께 씰룩씰룩 움직이는 입. 나이젤이 그리드에 대기 중인 선수들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하하, 저 역시 어제 퀄리파잉은 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레이스, 나이젤에게 요거 안 물어보면 섭하죠. 나이젤, 오늘 우승 누가 할 것 같나요?”
캐스터의 말에 다시 그리드를 바라보는 나이젤.
“으험, 네. 다들 폴투피니시를 예측하던데요. 으험, 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폴투피니시. 그렇다면 스메들리의 서준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데뷔 무대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 실력입니다. 주법이 특이한 게 계속 눈이 가요. 하하하.”
서킷 전광판에 등장한 나이젤의 웃는 얼굴. 그리드에 선 서준하도 그 모습을 확인했다. 그리고,
“서준하 선수! 출발 전 지금 기분이 어떠신가요?”
때마침 포뮬러카에 올라탄 서준하의 곁으로 카메라가 다가섰다.
“빨리 달리고 싶네요. 기분 좋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 카메라를 향해 서준하가 굿사인을 보냈다.
“방금 전 나이젤 만셀이 서준하 선수를 우승 후보로 지목했습니다. 어떤가요? 그의 기대에 보답할 자신 있나요?”
캐스터의 말에 방긋 웃어 보이는 서준하.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꺼내는데,
“영국 관중 앞에서 서니까... 평상시 보다 훨씬 빨리 달릴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이 드네요.”
갤러리 여기저기 터져나오는 박수. 서준하의 말을 알아들은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나 휘슬을 불었다.
“하하, 나이젤의 그 옛 발언과도 비슷하네요. 참 센스까지 좋은 서준하 선수! 오늘 멋진 레이스를 부탁합니다!”
현역 시절 실버스톤 GP를 앞두고 '홈 관중 앞에서 레이스를 펼치면, 평상시보다 랩 당 0.1초를 당길 수 있다'는 말을 남겼던 나이젤 만셀.
실제로 자신의 주장이 결코 허무맹랑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 바 있었다.
서준하의 센스있는 답변으로 응원 열기가 더욱 뜨꺼워지는데,
[출발 5분 전]
그리드 주위에서 차량을 체크하던 미캐닉들. 출발 시간이 임박하자, 헨리의 지시와 함께 모두 피트로 들어갔다.
“자, 드디어 본선 레이스 출발 직전 포메이션 랩에 들어갑니다.”
부우우우우웅.
위이이이잉.
끼익.
서준하를 선두로 롤링으로 포메이션랩에 들어간 포뮬러카들.
두두두두두두둥.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제 위치에 섰다.
“2015 F3 유로피언 챔피언십 1차전 본선 레이스...”
빨간색 불이 하나씩 들어오고,
“이제 시작합니다!!!”
다섯 개의 신호가 전부 꺼지고 포뮬러카들이 일제히 스타트 했다.
부우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이이잉.
“재빠르게 시프트 업하며 속도를 높이는 포뮬러카들!”
출발한지 몇 초가 채 지나지도 않은 상황.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하위권에선 휠스핀을 일으킨 선수들이 선두권과 멀어졌다.
“미끄러집니다아아아!”
“선두에 서준하! 그 뒤로 순위 변동없이 제프와 제이크가...”
같은 차라고 똑같은 속도를 내는 건 아니다. 기어를 변속하는 속도부터, 코너를 탈출하며 재가속에 이르는 타이밍까지. 포뮬러간 벌어진 격차는 곧 레이서들의 실력 차이를 의미했다.
“선두 차! 예선보다 더 빠른 듯합니다!”
삼연속 슬라럼 앞에 선 선두차. 예선과 같이 속도를 줄이지 않고 3턴에 진입했다.
“이거, 모두의 예측이 빗나가는 순간인데요?!”
“와, 저 선수 안정적인 드라이빙에는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프라임 타이어를 장착하고 보수적 운영을 예측했던 중계진들.
“직선주로에 오른 서준하, 240! 250km/h! 최고속을 향해 달려갑니다!”
초장부터 남은 옵션 타이어를 끼고 나타나 실버스톤을 달구기 시작한 선두 차량.
“자, 그리고 제이크가 심상치 않아요!”
“제프와 제이크! 아슬아슬 누가 앞으로 나설지!”
초반 초강수를 띄운 콜린 팀의 제이크. 제프의 빈틈을 노리며 추월을 시도했다.
“2,3위 자리 경쟁이 치열한데요!”
아슬아슬 연석 밖으로 빠져나갈 듯한 두 선수의 차량
“제이크가 앞질러 나가는데요!”
브레이크 타이밍을 최대로 늦추며 5턴에서 속도를 살려내는 제이크.
“중위권 싸움도 치열합니다. 자, 그리고 다시 선두를 볼까요?!”
그리고 선두에게로 넘어간 중계 카메라.
"서준하 2,3위 배틀에서 자유로웠었는데요!"
배틀을 해설하던 중계진. 곧이어 11턴을 이후 완만한 코너가 등장했다.
“에?!”
황당한 표정과 함께 중계진이 말을 멈추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 지금 이 격차가 뭐죠?!”
시작부터 총 11개의 턴에서 벌어진 격차. 그 실력 차이가 고스란히 뒤차와의 간격으로 드러났다.
“서준하! 시작부터 압도적인 격차를 벌립니다!”
< 모두의 예측이 빗나가는 순간인데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