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차 진로 변경이 늦어, 추돌 주의! >
“믿을 수 없습니다, 서준하!”
“왜 그러시죠?!”
기본적으로 코너링은 아웃-인-아웃이 기본이다. 하지만 비가 올 때는 반드시 이 방법을 써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서준하의 차를 유심히 살피던 해설자가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는데,
“지금 서준하는 모든 코너의 아웃 사이드를 타고 있습니다. 이건 빗속에선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라인일지도 모릅니다!”
차량들이 주로 타는 레코드 라인. 이는 수많은 주행으로 매끄럽게 다듬어진 상태로, 비가 오면 타일처럼 가장 미끄러운 라인이 돼버린다.
하지만 모든 코너의 아웃사이드는 차가 전혀 지나가지 않은 곳이기에 비교적 노면이 매끄럽지 않고 충분히 날카롭다. 덕분에 주행 시 타이어의 그립력이 더 생길 수밖에 없다. 게다가,
“거의 모든 코너는 경사져 있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비가 오면 자연히 빗물이 코너 안으로 흘러들어와 고이게 되죠. 그러면 아웃사이드에는 비교적 물웅덩이가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요. 바깥 쪽은 건조할 때부터 모래가 많이 남게 되는데. 이게 타이어의 미끄럼을 방지하는 역할을 해주는 겁니다...!”
“근데 그건 서준하뿐만 아니라 다른 레이서들도 아웃 사이드를 공략할 수 있단 걸 들어보지 않았겠어요?”
“그렇죠. 근데 그런 차이는 경험에서 나오는 겁니다. 서준하가 정말 노련한 레이서라는 거죠.”
아직 새파랗게 젊은 선수에게 베테랑 레이서에게나 할 법한 칭찬을 건네는 해설자. 캐스터가 그 이유를 물었다.
“100이면 100. 어린 선수 대부분이 포뮬러를 시작할 때부터 코너를 아웃-인-아웃으로 주행해야 한다고 배웁니다. 때문에 처음 저런 방식에 상당한 위화감을 느끼게 되죠. 애초에 저 방식을 못 받아들이고, 시도조차 안 합니다. 저런 주행 라인을 찾아내서 실제로 적용하는 건, 엄청난 경험이 뒷받침돼야 할 수 있는 일인 겁니다! 그래서 노련하다고 한건데...”
차분히 설명을 이어가던 해설자. 무언가를 앞두고, 말을 잇지 못하는데,
“더욱 놀라운 건, 서준하의 배짱입니다. 사실 아웃사이드 라인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괜히 아무나 못 하는 게 아니에요.”
코너를 최대한 아웃으로 달리면 조금만 미끄러져도 나가떨어진다. 자칫 실수라도 하는 경우 평소보다 심각한 사고가 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빠르단 걸 알아도 웬만해선 시도하질 않는다.
“하... 지금 이 순간, F1 레전드 니키 라우다의 말이 떠올라요.”
서준하의 드라이빙에 깊이 감동한 해설자.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듯 보였는데,
“라우다는 실력 있는 드라이버의 신경은 궁둥이와 뇌가 직결돼있다고 말한 적 있었는데요! 지금 저 선수의 모습이 딱 그렇습니다...!!!”
논리와는 동떨어진 방식으로 빗속을 달리는 서준하. 아슬아슬 아웃라인 코너링에 성공하며 뒤차와 격차를 벌려나갔다.
“연속으로 위험천만한 코너링 성공 중인 서준하! 외줄타기 하듯 온 신경을 노면의 감각에 기울이고 있습니다!”
***
“조쉬, 3턴에서...”
선두 차량의 드라이빙에 연신 감탄사를 뿜어내며 바라보는 콜린 팀 조쉬 감독. 부감독이 갑작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3턴이 뭐.”
“토, 톰이 스핀했습니다...!”
부감독의 말에 불이나게 3턴 방향을 바라보는 조쉬. 곧이어 중계 스크린으로 5위를 달리던 톰 베이크의 차가 뒤집어진 걸 확인했다.
“...!!!”
중계 화면으로 스핀 장면이 리플레이 되자, 다시 그쪽으로 고갤 돌린 조쉬.
“스티어링 시작할 땐 절대 브레이크를 밟지 말라고, 몇 번이나 일러줬구만...”
코너 진입 시 바퀴가 중립으로 놓였을 때 속도를 줄여야 한다. 코너링에서 과하게 브레이크를 밟은 것으로 보이는 장면에 조쉬가 분개했다.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잖습니까... 확실히 웨트 컨디션은 준비가 더 필요해 보입니다...”
막상 미끄러운 노면 위에 올라 달리다 보면, 레이서도 코너 진입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럼 저 녀석은 도대체 뭐야...!”
레이스 중반까지 예술에 가까운 코너링을 보이며 속도가 떨어지지도, 미끄러지지도 않는 스메들리 팀의 포뮬러카. 조쉬가 서준하의 차를 가리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
부감독도 아무런 말을 내놓지 못 할 때, 레이스 엔지니어가 흥분한 목소리로 서킷의 상황을 알리는데,
“제이크! 제이크가 7위까지 만들어 냈습니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고와 리타이어. 군데군데 레이스가 지체되는 가운데, 꼴찌에서 시작한 제이크 러셀이 중위권까지 올라왔다.
“허허, 맨 뒤에서 달리는 것도 나쁘진 않구만... 타이어 교체하고 본격적으로 추월 시도를 지시하게.”
톰의 리타이어로 앞차들을 지연시킨 것마저 제이크의 질주에 도움이 된 상황. 팀의 퍼스트 레이서의 선전에 감독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부우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이잉.
“이렇게 되면 서킷 위를 달리는 선수가 몇 안됩니다. 톰이 또 리타이어했고요. 전반적으로 속도가 좀 떨어지는데요?”
빗속 주행은 위험하고 무섭다는 생각이 레이서의 머릿속에 뿌리깊다. 게다가 노면이 건조할 때 보다 훨씬 겁이 나는데, F3급 정도 되면 평균적으로 주행 속도가 높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1,2,3위 순위권은 여전히 변동 없구요. 나름 안정적인 주행을 보여주는 페트로가 4위, 그 뒤로 강민수가 달립니다.”
서킷에 남은 레이서가 10명도 채 되지 않는 상황에 중계진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자, 최후미에서 치고 올라온 제이크. 마지막 턴을 빠져나와서 다시 홈스트레치로 들어가는데요. 속도가 심상치 않습니다!”
빠른 탈출 속도로 직선 주로에 들어서자마자 앞차의 뒤에 붙는데,
“제이크! 데니스의 슬립 스트림에 들어갑니다!”
빗속에서도 슬립스트림은 여전히 가능하다. 최대한 속도를 끌어올리며 순식간에 진로를 바꾸는 제이크.
“성공! 제이크 순시간에 6위에 랭크합니다!”
“하하, 이 선수 놀랍습니다. 오늘 사고가 많긴 했지만, 순전히 본인 실력으로 네 대나 제쳤어요”
전체적으로 레이스 중반 피트 스탑에 들어갔던 참가자들. 레이서들의 집중력이 떨어질 틈을 타 제이크가 치고 나왔다.
[Smedley Formula Brithsh]
제이크의 전방으로 보이는 파란 포뮬러카. 순간 혈압이 치솟았다.
“예선 꼴지가 꼭 본선 꼴지하는 건 아니라는 걸 제이크가 보여줍니다!”
“자, 그러면 이제 앞에는 또 다른 코리안 레이서가 있죠. 스메들리 강민수와의 배틀이 예상 되는데요?”
어쩌면 강민수를 날려버리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올라온 걸지도 모른다. 무서운 기세로 몰아치는 제이크,
“배틀! 제이크 강민수의 앞으로 나가기 위해 안쪽을 공략하지만, 진로를 막는 강민수! 적절한 블로킹이었습니다!”
윙미러로 황금색 포뮬러카를 확인한 강민수. 뒤차의 움직임을 예측하기 위해 보다 더 필사적으로 드라이빙에 나섰다.
“하위권 차량들을 쉽게 쉽게 제치고 올라온 제이크! 이번에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렇죠, 강민수! 절대로 자리를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데요!”
한 번의 추월 실패로 주춤했던 제이크. 2, 3, 4턴 연속으로 속도를 살려내며 다시 한번 기회를 노리는데,
“제이크가 이번에는 바깥쪽으로 들어오는데요오오오!!!”
거대 헤어핀 5턴에 들어서는 강민수. 그의 바깥으로 황금색 포뮬러가 최대한 브레이킹을 늦추며 노즈를 밀어넣었다.
“제이크 나란히 서는데 성공!!!”
“자, 바깥쪽의 제이크! 안쪽의 강민수! 누가 더 힘이 좋은가요오오오!!!”
자신의 좌측으로 다가서는 제이크를 흘겨본 강민수. 이번만큼은 결코 제이크에게 물러설 수 없었다.
“...!!!”
헤어핀 안쪽을 물고 늘어진 강민수. 안쪽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엄청난 G 포스와 사투를 벌이는데,
쿵.
순간 두 차량의 바퀴가 접촉하고 말았다.
끼이이이이익.
접촉과 동시에 급격하게 속도가 떨어진 제이크의 차량.
“실패! 제이크의 파워가 부족해 보입니다!”
“좋아요, 강민수! 절대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제이크의 추월을 다시 한번 막아냅니다!!!”
힘이 빠져버린 제이크와 격차를 벌리는 강민수.
“와아아아아아!!!”
“한번 더 오면 부숴버려, 민수야!!!”
강민수와 제이크의 상황을 잘 알았기에 더 흥분할 수밖에 없는 스메들리 팀. 중계 화면을 보던 미캐닉들이 난리가 났다.
***
부우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잉.
-준하, 전방에 백마커 주의
“copy that.”
서준하의 전방으로 보이는 백마커. 왠지 느낌이 이상하다. 재빠르게 브레이크 페달을 밟으며 속도를 줄이는데,
끼이이이이이익.
전생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서준하는 조금 더 영리해졌고, 더 참을성이 좋아졌다. 예전이라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추월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3단, 4단.
이제는 백마커 앞에서 추월보다 브레이크를 밟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걸 잘 안다. 뒤늦게 진로 변경하는 백마커를 지나치며 재빠르게 시프트 업하는 서준하. 윙미러로 후방을 살피자 스핀하는 백마커가 보였다.
끼이이이익.
쿵.
역시나 결과는 예상대로. 금방이라도 사고가 날 것 같은 차량이 더 잘 보였다. 수천 번 레이스를 경험한 레이서의 직감이 더욱 예리해진 듯한데,
-4턴 이후 또 백마커. 조심해라
빨리 달리기 위해 필요한 건 정확한 예측 능력이다. 자신의 레이스카가 어떤 조건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에 대한 대처능력 그리고, 다른 차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일어날 사태를 예측해야 한다.
부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잉.
4턴에 진입하는 서준하. 코너 탈출 바깥으로 백마커의 라인을 그려보며 코너링에 들어갔다.
끼익.
휑.
서준하에겐 백마커지만, 이들은 참가자로서 필사적으로 달리는 중이다. 청색기에도 생각보다 빠르게 반응하지 않았다.
-앞차 진로 변경이 늦어! 추돌 주의!
롭의 걱정과 다르게 탈출 후 살짝 차의 방향을 돌려놓은 서준하. 곧바로 앞차의 우측을 파고들었다.
-하나 더!
사람은 한꺼번에 모든 것을 볼 수 없다. 필요하지 않은 것은 무시하고, 중요한 것에 정신을 집중시켜야 한다. 연이어 백마커가 등장하자 그들의 라인에 집중하는 서준하.
부우우우우우웅.
휑.
다가오는 한 대를 추월하자, 전방으로 보이는 여러 대의 포뮬러카들이 보였다. 동시에 그틈을 파고들 공간을 그리며 가속 페달을 밟았다.
***
“레이스 종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달리는 참가자들의 모습입니다.”
“어! 2,3위 배틀이 다시 시작인데요?!”
홈 스트레치에 접어든 3위 파비앙이 2위 제프의 슬립스트림에 들어갔다. 계속되는 경합, 중계진의 관심이 파비앙에게 향하는데,
“파비앙! 추월에 성공합니다!”
제프를 앞질러 나오는 파비앙 쉴러. 막판 집중력을 발휘하는 모습이었다.
“자, 기세 좋습니다! 파비앙! 이 기세로 서, 선두... 까지...”
파비앙의 앞으로 보이지 않는 선두 차량. 당황한 캐스터가 말을 잇지 못 했다.
“엥?”
곧바로 선두 차량으로 넘어간 카메라.
“서, 서준하 어딨죠?!”
중계 화면에 등장한 여러 대의 포뮬러카. 서준하를 찾던 해설진이 결국 당황하고 말았다.
“지금 이게 어떻게?! 에? 어떤 게?!”
4위를 시작으로 줄지어 달리는 네 대의 포뮬러카. 무리의 끝으로 파란색 포뮬러카 두 대가 화면에 등장했다.
“저기 있네요!!!”
경쟁자들과 엄청난 격차를 벌린 서준하. 6위 강민수의 뒤에서 또 다른 추월을 준비했다.
“팀 메이트 강민수의 바로 뒤를 달리는 서준하! 와하하하! 지금 6위와 한 바퀴 차이입니다!!!”
< 앞차 진로 변경이 늦어, 추돌 주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