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초에 그 방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셈이기도 하죠 >
“포인트를 정확하게 알고 있구만.”
총 길이 1.1km의 롱 홈스트레치를 지나 만나게 되는 1턴 헤어핀. 전형적인 헤어핀의 디자인과 다르게 설계된 까다로운 곳이다.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르클레르를 보고 아리바베네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헤어핀보다는 마치 두 개의 코너가 겹친 모습으로 생각하고 도는 것 같군요.”
전형적인 헤어핀을 돌 때 속도가 올라가도 안전하도록 설계돼있지만, 무젤로의 헤어핀은 다르다. 헤어핀 모양이 절묘하게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진입과 탈출 한계 속도가 다른 곳. 처음에 잘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속도를 유지하며 돈다면 탈선하기 쉬운 난코스다.
안토니오치 역시 스피드보단 안전성에 초점을 맞춘 르클레르의 드라이빙에 흡족함을 드러내는데,
“확실히 워밍업을 마친 것으로 보입니다. 3랩 이후부터 점점 랩타임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한 바퀴를 돌 때마다 중고속 코너에서 악셀을 끊는 타이밍을 일찍 가져가는 르클레르. 악셀 페달에서 조금 일찍 발을 뗀 후 곧바로 차량을 턴인시켰다. 이후 재빠르게 다시 악셀을 붙여가며 가속량을 끌어올리는 게 스태프들의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시켜 랩타임을 끌어올리려는 게 눈에 보이네. 역시 빨리 달리는 법을 잘 아는 친구야.”
섬세한 가속 페달링으로 고속 코너 돌파가 강점인 르클레르. 브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악셀 만으로 턴인과 가속을 연이어 성공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준하는 확실히 조심스러운 모습입니다. 트랙의 폭을 최대한 넓게 쓰는데 치중하는 것 같군요.”
내리막의 끝에서 코너가 꺾이는 코스. 서준하는 빠르게 재가속 타이밍을 가져가기보단, 연석까지 최대한 차량을 바깥으로 밀어붙이며 트랙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었다.
“흠...”
초반 워밍업보다 랩타임이 오르고 있었지만, 증가 폭은 르클레르가 더 높았고, 베스트 기록 역시 조금 전 4랩의 르클레르였다.
안토니오치의 말에 아리바베네 감독이 서준하의 주행을 유심히 살피는데,
“초반에 공을 많이 들이는구만.”
10바퀴는 생각보다 짧았다. 4랩을 마친 지금, 피트 월 엔지니어 대부분이 르클레르의 승리를 점치는 가운데, 감독과 안토니오치는 쉽사리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서준하가 랩타임에 치중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무언가 자신만의 페이스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
“르클레르 5랩 피니시. 22초 387! 르클레르가 22초대에 들어왔습니다!”
“생각보다 랩타임이 일찍 나오는군요. 역시 적응이 빠른 선수입니다.”
“서준하 5랩 피니시. 24초 851! 직전 랩보다 0.9초 앞당겼습니다!”
두 선수의 기록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아리바베네 감독. 계속 빨라지던 르클레르가 팀이 예상했던 베스트 타임에 일찍이 들어왔고, 서준하 역시 빨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랩타임이 좋을 수밖에 없지. 둘 다 실수를 안 하고 있으니까.”
테스트 드라이버들의 중간 점검과 같은 오늘 레이스. 최종 결과와 상관없이 열심히 달려주는 선수들의 질주는 감독을 즐겁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부와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앙.
여섯 바퀴를 돌며 무젤로에 완벽하게 적응한 르클레르. 자신감 넘치는 질주를 이어가며, 7랩의 꽈배기 코너에 진입했다.
‘오르막 시작점에서 브레이크 스타트. 왼쪽 진입과 동시에 다시 브레이킹하며 미끄러진다!’
까다로운 코너에서도 흔들리거나 언더스티어 없이 롤러코스터 코스를 돌파했다.
‘악셀 페달도 자연스러워. 리듬이 느껴져. 이제 이 페이스만 유지하면 돼!’
10턴을 빠져 나와 짧은 직진을 달렸다. 약간의 내리막을 빠져나오며 악셀의 온오프를 박자감 있게 밟아 코스를 공략했다.
까다로운 코스 돌파 후 윙미러를 흘겨봤지만, 경쟁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코스 탈출 성공과 함께 커다란 희열이 밀려왔다.
‘이 페이스로만 가면, 내가 이긴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다. 제아무리 역대급 유망주라도, GP2 챔피언인 자신보다 빠른 건 불가능하다. 자신감으로 충만한 르클레르의 머릿속으로 지난 몇 년간 자신이 힘들게 노력해온 시간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럼 그렇지, 흐.’
직선 주로를 달리자, 보이지 않았던 서준하의 모습이 작게나마 윙미러에 들어왔다. 레이스 전, 시뮬레이터 주행 기록에서도 자신의 기록이 우세했었다는 사실을 매니저로부터 들었고, 그때 이미 승부는 끝난 거라고 생각했다. 초라하게 보이는 경쟁자의 경주차의 모습에 르클레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와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앙.
띠링.
르클레르가 7랩을 피니시하자, 레이스 엔지니어가 평소보다 높은 톤으로 랩타임을 알렸다. 또다시 본인의 베스트 랩타임을 갱신했기 때문.
하지만 축하를 보내는 엔지니어의 무전에도 르클레르는 대답 없이 전방에 둔 시야를 조금도 흩트리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방심해선 안 된다. 더 이상은 F1 하위 클래스가 아니다. 피니시 전까지 더 나은 기록을 뽑아내기 위해 집중력을 쥐어 짜내야 한다는 걸 경험적으로 아는 르클레르였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롤러코스터 코스를 지나 짧은 직선 주로에 오른 르클레르. 순간, 조금 더 강해진 뒤차의 배기음과 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
윙미러로 이전보다 더 가까워진 서준하의 차량이 보였다.
‘갑자기?!’
***
[Test Race for P.P.D]
[Time Log]
.
.
[5랩 - 르클레르 1분 22초 387]
[5랩 - 서준하 1분 24초 851]
[6랩 - 르클레르 1분 22초 079]
[6랩 - 서준하 1분 23초 306]
[7랩 - 르클레르 1분 21초 781]
[7랩 - 서준하 1분 21초 810]
“7랩! 두 선수 모두 21초대에 들어왔습니다!”
“준하도?!”
엔지니어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직접 타임 로그를 살피는 아리바베네 감독. 자신의 예상과 다른 결과에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는데,
“정말이구만... 근데 세 바퀴 동안 1.5초씩 줄였다고?”
갑작스럽게 7랩에서만 빨라진 게 아니다. 5랩부터 서준하는 1.5초씩 랩타임을 단축시키고 있었다. 같은 시기 0.3초 정도 단축시키고 있는 르클레르에 비하면, 놀라울 속도로 빨라지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까지 봐야 할 것 같구만.”
“확실히 전 바퀴보다 빠르다는 게 느껴졌는데, 정말이었군요.”
아리바베네와 안토니오치는 물론, 다른 엔지니어들도 놀랍다는 반응뿐. 섣불리 승부를 예측했던 스태프들이 이제는 조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레이스를 바라봤다.
“지금 보게, 확실히 준하와 르클레르의 코스 탈출 라인이 확실히 달라. 드라이빙 스타일의 차이 같기도 하고, 서준하가 좀 더 트랙을 적극적으로 쓰고 있단 느낌이 드는구만.”
방금 전의 소식을 들은 후로 감독은 궁금했다. 서준하가 어떻게 갑자기 저렇게 빨라질 수 있었는지를. 그의 말에 안토니오치 역시 유심히 서준하의 주행을 살피는데,
“그렇군요, 두 선수가 조금 다릅니다.”
내리막 코스를 빠져나온 르클레르와 서준하의 경주차를 지켜보던 두 사람. 서준하의 탈출을 지켜보던 안토니오치가 두 선수의 차이점을 발견한 듯 보였다.
“차이점은 주행 반경 같습니다. 르클레르가 탈출 시 최대한 빠르게 안쪽으로 들어오기 위해 악셀을 늦추고, 스티어링을 조작하고 있다면, 서준하는 탈출 시 바깥으로 밀려난 그대로 연석 위를 달립니다. 런오프에 빠질 듯 말 듯 미묘하게 말이죠.”
“무젤로 연석은 거칠기로 유명해서 저런 식의 주행이 쉽진 않을 텐데, 흠...”
기존에 연습한 시뮬레이터 주행에도 무젤로 서킷은 연석 활용을 평소 다른 곳보다 자제해야 랩타임이 잘 나왔다. 안토니오치의 말대로라면, 르클레르는 연습대로 타고 있었고, 서준하는 이론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코스를 공략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서준하가 빨라졌다는 건... 애초에 그 방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셈이기도 하죠... 아마도 마지막까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안토니오치가 말을 마치자, 그와 동시에 두 선수의 포뮬러카가 엄청난 속도로 피트 앞 코스로 등장했다.
안토니오치의 시선은 르클레르에서 점점 서준하에게로 향했고, 결국 신입에게로 고정됐다. 울려 퍼지는 배기음과 동시에 그의 심장은 조금 더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
부와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앙.
앞서 달리는 르클레르의 주행 라인은 단조로웠다. 코너에서 시간 손실을 최대한으로 줄이려는 노력은 시뮬레이터가 가르쳐준 레코드 라인과 동일했다. 그의 주행은 마치 가상의 포뮬러카를 서킷 위에 재현한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빠르긴 빨랐지만, 자신보다 빠르진 않았다.
‘이게 바로 시뮬레이터의 맹점이지.’
짧은 준비 기간과 경험 없는 서킷이 주는 불안감은 레이서의 눈을 멀게 했지만, 서준하는 달랐다. 오전 탐사와 초반 워밍업 몇 바퀴에서 실제 무젤로 서킷이 시뮬레이터의 환경과 다르다는 사실을 파악했고, 이를 토대로 속도를 더 살려낼 수 있는 라인을 따라 주행했다. 바로 이런 곳에서,
‘6, 7턴 내리막 탈출 코스. 실제 서킷은 연석을 최대한 밟아도 전혀 밸런스가 무너지지 않는다!’
이밖에도 서준하는 코스를 탈출할 때 연석을 최대한 사용하며 악셀을 끝까지 밝았다. 시뮬레이터가 자제하길 권고했던 바로 그 코스들에서.
어쩌면 오늘 이런 주행이 가능했던 건, 결코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 않는 서준하의 평소 습관 때문일지도 모른다. 권위 있는 인물의 말은 물론, 수억을 호가하는 컴퓨터가 보여준 데이터일지라도, 서준하에겐 100퍼센트 신뢰할 수 없는 타인의 판단일 뿐이었다.
부와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앙.
8랩을 마치고 스타트 라인으로 르클레르와 서준하가 들어오고 있었다. 덕분에 더욱 긴장감이 치솟은 피트에선 모두가 타임 로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띠링.
[8랩 - 르클레르 1분 21초 281]
먼저 들어온 르클레르가 직전보다 0.5초나 랩타임을 앞당겼다. 놀라운 성과였지만, 피트에선 그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뒤따라오는 차의 배기음은 다른 엔진을 장착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훨씬 컸으니까.
“서준하! 8랩!! 1분 20초 744!!!”
“와하하!”
“20초?! 마, 말도 안 돼!!”
7랩보다 1초 이상 랩타임을 줄인 서준하. 피트 월 스태프들은 물론, 안토니오치와 아리바베네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
“...!!!”
“...!!!”
끝이 아니었다. 모두의 시선이 굉음을 뽑아내는 서준하의 카로 향하고,
“이, 이게 뭐가 어떻게...!!!”
플라잉 랩을 달리려는 듯한 서준하. 르클레를 추월할 기세로 그와의 간격을 좁히기 시작했다.
< 애초에 그 방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셈이기도 하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