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라리가 모험을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
[8랩 - 르클레르 1분 21초 281]
[8랩 - 서준하 1분 20초 744]
레이스 엔지니어로부터 경쟁자의 랩타임을 전해 들은 르클레르. 처음으로 자신보다 빠른 기록을 듣고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20초대...?! 확실한 거야?”
처음에는 무전 내용을 의심했지만, 뒤차와 조금씩 가까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자, 르클레르의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아직 두 바퀴나 남았어. 0.5초 차이면 할 만해.
직전 랩에서 자신도 0.5초를 줄였지만, 그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기적에 가까운 결과였다. 랩타임을 조금 더 줄여볼 순 있겠지만, 0.5초를 한 번 더 줄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도대체...! 갑자기 어떻게 저렇게 빨라진 거냐고!!”
출신, 배경, 이력 등 자신보다 무엇 하나 잘난 것이 없어 보이는 신입 레이서의 스피드를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패배를 직감한 그의 감정은 곧 분노로 뒤바뀌고 말았고, 잡고 있던 스티어링을 강하게 내리치게 만들었다.
띠링.
스타트 라인을 통과하며 9랩을 마친 르클레르. 엔지니어의 무전을 기다렸지만, 그는 말이 없었다. 덕분에 르클레르의 정신력은 점점 깨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파이널 랩! 끝까지 포기하지 마, 르클레르!
매 바퀴 그의 랩타임을 알려줬던 엔지니어였지만, 9랩 기록을 확인하고는 차마 랩타임을 알려줄 순 없었다. 대신 그는 레이서가 더욱 치욕스러운 상황을 면하게 하기 위해 매달렸다.
“...!!!”
하지만 르클레르는 엔지니어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정신력과 함께 그의 페이스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고, 그게 곧 레이싱에 반영됐다.
그는 이미 나락 속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받았는데, 그 시발점은 윙미러로 보이는 서준하의 경주차가 더 커졌을 때였다. 그리고,
-허...!
“...!!!”
르클레르와 그의 레이스 엔지니어가 동시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파이널 랩의 3턴 이후 직선 주로. 두 사람은 보고 말았다. 르클레르의 경주차 뒤에 붙기 위해 엄청난 스피드로 따라붙는 서준하의 경주차를.
***
“서, 설마...!”
9랩에서 승부는 이미 결판난 것처럼 보였다. 서준하는 직전 랩보다 0.5초나 더 줄였지만, 르클레르의 랩타임은 오히려 2초나 떨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페라리 피트 월이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던 건 지금 눈앞에 벌어질 상황 때문이었다.
“스, 슬립 스트림에 들어가려 합니다!”
3턴을 빠져나온 서준하는 르클레르의 뒤를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마치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것처럼 앞차의 리어윙을 향해 돌진했다. 덕분에 피트 월 스태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고, 몇몇이 감탄을 내뱉었다. 그리고,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앙.
“들어갔어!”
멘탈이 박살 난 르클레르는 코스를 타이트하게 쓰지 못했고, 결국엔 완전히 페이스 다운돼버렸다. 연약한 먹잇감이 돼버린 르클레르의 뒤로 서준하가 달려들었다.
훼에에에에에에엥.
“...!!!”
“...!!!”
“...!!!”
뒤차는 르클레르의 리어윙과 부딪히기 직전까지 갔다가 순식간에 다음 코스 진입 전 인코스로 튀어나왔다. 시간 격차를 두고 르클레르보다 뒤늦게 출발했던 서준하가 파이널랩에서 그를 앞서는 믿기 힘든 상황이 연출됐다.
“엄청나...!”
르클레르를 이용해 더 빠르게 달리는 서준하. 이미 9랩에서 상대보다 훨씬 앞선 기록을 세웠지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악감정이 있는 것도, 코치진들에게 임팩트를 주기 위함도 아니었다. 다만 다시 한번 F1 카의 최고 스피드를 느끼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노브레이킹 테크닉이 절정에 달했어! 브레이킹 없이 악셀 페달링만으로 연속해서 턴인하는구만...!”
서준하의 주행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리바베네 감독. 그의 실력은 기대 이상이었고, 어쩌면 현역 메인 레이서들의 그것과도 비슷한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띠링.
서준하가 골인함과 동시에 파이널 랩의 피니시를 알리는 효과음이 피트 월에 울려 퍼졌다.
“서준하! 1분 19초 891! 무젤로 공식 트랙 레코드보다 0.1초 뒤집니다...!”
“...!!!”
“...19초?!”
F1 무대만 10년 차 챔피언이 만들었던 무젤로 트랙 레코드. 이제 막 팀에 합류한 신인 레이서가 단 10바퀴 만에 그와 비슷한 기록을 만들자, 페라리 피트가 뒤집히고 말았다.
“레이스를 안 했으면 어쩔 뻔했나...”
“허허, 페라리의 앞날이 더욱 밝아진 것 같군요.”
피트로 복귀하는 서준하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아리바베네와 안토니오치. 뒤이어 르클레르가 들어왔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그의 랩타임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들의 처음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결국 서준하라는 레이서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게 됐고, 경쟁 팀들 앞을 달리는 일을 상상했다. 그와 함께 해보고 싶다는 감정이 밀려옴과 동시에 그에게서 엄청난 승리의 기운을 느꼈다.
“...페텔과 라이쾨넨도 긴장해야겠습니다.”
감독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서준하 역시 다음 타겟을 떠올렸다. 페라리 팀이 시즌 시작 전, 한 번 정해진 주전 레이서가 다른 선수로 교체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는 늘 이변을 만들어내는 레이서였다. 헬멧을 벗은 서준하가 하늘을 바라보며, 곧 있으면 다가올 자신의 데뷔 무대를 상상했다.
***
“전방 300m 앞, 당신의 꿈을 후원하는 티엘은행이 있습니다.”
시즌 시작 전 어느 주말 오후. 이태리의 어느 한적한 도심 속 위치한 카메라 앞에선 서준하.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개인 스폰 기업이 요청한 CF 촬영에 들어갔다.
“자, 좋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컷만 찍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오전에 치른 강도 있는 체력 훈련 때문에 피곤할 법도 하지만, 촬영장에서도 전혀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서준하. 이런 활동이 자신이 드라이버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는 걸 잘 아는 프로였다.
“커트. 잠시 쉬었다 갈게요. 서준하 선수는 옷 바꿔 주세요. 스타일링 다시 하겠습니다.”
분장팀 앞으로 걸어가는 서준하에게 이것저것 챙겨주는 한서윤.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스테이지 바깥으로 나와 앉았다. 옆으로 촬영 감독이 보이자, 한서윤이 얘길 꺼내는데,
“감독님, 오늘 대략 몇 시쯤 끝날까요?”
“흠... 적어도 2시간 안에는 끝날 것 같습니다.”
“아, 네...”
오늘은 차량 개발 연구 스케쥴이 없는 주말이었지만, 근래 서준하가 어떤 생활을 했는지 잘 알기에 길어지는 촬영 시간을 두고 한서윤은 힘이 빠지고 말았다.
“제가 아까 준하 선수한테 양해를 좀 구했는데요.. 저녁 식사까지 조금 늦어져도 괜찮다고 하시더라고요. 게다가 오늘은 저녁 훈련도 없으시다고...”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유일한 휴일. 그런 휴일마저 광고 촬영으로 시간을 보내는 서준하를 보니 매니저로선 조금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사실 준하 선수가 거의 쉬는 날이 없거든요. 아직 주전이 아니니까 여유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하루에 먹고, 자는 시간을 빼면 나머지는 훈련과 테스팅으로 가득해요. 예정된 시간에 끝내도록 좀 부탁드릴게요, 감독님...”
“그렇군요... 서준하 선수가 워낙 에너지가 넘치셔서 전혀 그런 걸 못 느꼈네요. 최대한 빨리 끝내보도록 하겠습니다.”
화려한 유명인의 삶도 남이 볼 땐 다 편해 보이는 법. 하지만 서준하는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스포츠 무대로 평가받는 F1 무대에 뛰어든 선수다. 겉으론 미소를 잃지 않아도 그의 실제 스케쥴은 평범한 사람이 버텨내기 벅찬 강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스케쥴도 빡빡한데 또 그걸 대충대충 하는 스타일도 아니에요. 매사 적극적이고, 정성을 쏟는 성격이라...”
“오늘 보니까 진짜 그런 것 같아요. 근데 질문 하나 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네.”
“제가 듣기론 서준하 선수가 지금 페라리에 입단한 것도 엄청난 업적이라고 말하는 기사를 본 적 있거든요? 거기에 F3 챔피언이라는 것도 하셨고. 근데 도대체 F1이 뭐길래. 그렇게 오랜 기간 힘든 스케쥴을 소화하면서까지 가려는 걸까요?”
감독이 보기에 이미 서준하는 많은 걸 가진 사람이었다. 한국의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을 알았고, 광고나 우승 상금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는 소문도 들었다. 충분히 많은 걸 이뤄낸 듯 보이는 선수가 아직도 쉬질 못한다는 말을 듣자, F1이란 것이 궁금해졌다.
“저도 잘 모르겠지만... F1의 우승 상금이나 연봉 아니면, 명예나 지위, 이런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거예요.”
“흠... 스포츠 선수라서 돈과 명예가 어느 정도 동기부여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더 있나 보군요.”
서준하의 포뮬러 시작부터 함께 했던 한서윤. 그녀가 보기에 분명한 건, 서준하는 레이스를 잘하다 보니 돈과 명예를 얻었지,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레이스를 한 건 아니었다.
“네, 확실해요. 그것 말고 준하 선수를 움직이게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요.”
서준하 말고는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 언젠가는 듣게 될 대답을 나름대로 떠올려보며 한서윤이 서준하를 바라보았다.
***
“Haas-Ferrari의 프리 프렉티스 드라이버에 서준하?”
포뮬러 원의 상업권을 보유한 포뮬러원매니지먼트그룹(FOM)의 총수 바니 에클레스톤. 페라리의 B팀 Haas의 예비 선수로 뜻밖의 이름이 보이자, 안경을 벗고 다시 페이퍼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서준하? 얼마 전에 페라리에 들어간 친구 아닌가?”
“맞습니다. 작년 이적 시장에 나왔던 한국 선수죠.”
F1 규정상 프리 프렉티스 선수 등록은 작년 시즌을 기준으로 4위 아래 팀들만 가능하다. 따라서 작년 2위 페라리 팀은 자신들의 B팀으로 여기는 하스 팀으로 서준하를 등록한 상황. FOM의 매니징 디렉터 렌스 브라운도 예상 밖이라는 반응인데,
“르클레르를 내보낼 줄 알았는데 이거 의외입니다. 내부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지. 흠...”
“그래 맞아, 페라리에 GP2 챔피언이 있었잖나. 흠, 아리바베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만.”
TV 중계료, 개최지의 개최료, 입장권, 각종 스폰 수입 등 F1에서 벌어들이는 돈의 상당 부분을 FOM이 챙긴다. 출전 선수에 따라 수익이 달라질 수 있기에 FOM에서도 눈여겨보는 사항이다.
“이제 막 들어온 선수를 내보낸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페텔이나 라이쾨넨이 시즌 아웃이라도 한다면, 곧바로 이 친구를 쓰겠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런 일은 원치 않지만, 페라리가 서준하를 올려둔 건 어쨌든 발 빠르게 데뷔시키겠다는 의도가 있는 거니까.”
“흠, 페라리가 모험을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페라리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선택에 브라운이 고갤 갸우뚱거렸다. 잠시 후, 생각에 잠겼던 회장이 다시 얘길 꺼내는데,
“근데 말이야, 저런 식으로 데뷔해서 슈퍼스타가 된 레이서들이 몇 명 있었지...”
F1에서 입단 후 곧바로 연습 주행에 나오는 케이스는 드물었지만, 회장의 머릴 스치고 지나가는 인물이 몇 명 있었다.
“아마 2007년 페텔이 그랬었지.”
2007년 F1 팀 BMW 자우버의 테스트 드라이버 발탁과 동시에 주전 선수의 부상으로 F1에 데뷔한 저스틴 페텔. 이후 최연소 4회 연속 월드 챔피언에 오르며, F1 사상 최대의 이변을 만들어낸 선수다.
“그때도 지금처럼 다들 모험이라고 말했지만, 결과는 대박이었네. 어디 한번 지켜보자고.”
최정상 드라이버들은 매번 이변과 모험 속에서 탄생했다. 바니가 서준하의 프로필을 지긋이 바라봤다.
“페라리의 서준하라...”
페텔과 같은 레이서는 역사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선수. FOM의 두 사람이 페텔과 서준하의 이름을 번갈아 살폈다.
< 페라리가 모험을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