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F1 레이서-128화 (128/200)

< 그날이 데뷔전일 줄은 몰랐습니다 >

“메르세데스의 프론트 로우가 상당히 견고해 보이는군요.”

아부다비 GP 레이스 초반. 서준하의 앞차들은 결코 실수를 내지 않았다. 레코드 라인을 정확하게 밟았고, 서준하가 비집고 들어올 조금의 공간도 허용하지 않았다.

선두 해밀턴과 그 뒤를 달리는 로즈버그. 그들은 숙련된 레이서들이었다. 챔피언 자릴 두고 다투는 경쟁 관계지만, 서로에게 무엇이 이득인지도 잘 아는 절친한 팀 메이트기도 했다.

‘지금은 승부를 볼 때가 아니라는 거겠지.’

55바퀴를 돌아야 하는 오늘 레이스. 메르세데스 팀의 경쟁자들이 노리는 타이밍은 초반이다. 레이스 시작 메르세데스 듀오의 타이어는 닳아 있었고, 경쟁자들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만약 초반부터 두 선수가 배틀에 들어간다면, 그건 그들에게 손해일 수밖에 없다. 배틀과 동시에 타이어는 더 빠르게 마모되고, 코스 돌파가 더 늦어진다. 이는 곧 뒤따르는 경쟁자들에겐 기회. 메르세데스 듀오의 챔피언 승부는 분명히 레이스 후반에 시작될 것으로 보였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앙.

서킷의 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제와 기온은 같았고, 바람도 적게 불었다. 덕분에 레이스 시작 이후 서킷의 환경을 파악하기보단 경주차의 상태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리어 쪽보단 최대한 프론트를 더 써야 해.’

라이쾨넨이 탔던 경주차의 특성을 의식하며 드라이빙하는 서준하. 프론트 그립이 높게 설계된 차량이기에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운전을 해야 한다. 평소보다 핸들링을 민감하게 조작했고, 과감한 스티어링은 자제했다.

‘조금씩 리듬감을 만들어 내자.’

레이서의 주행에도 자연스러운 리듬이 존재한다. 행동 하나하나를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동작들. 조작에 있어 0.01초의 뒤늦은 반응은 랩타임에 더 큰 영향을 주기에, 무엇보다 반복된 동작으로 익숙함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했다.

‘타이밍은 반드시 온다.’

오늘 레이스 역시 평소와 다른 주법에 충분히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억지로 기회를 만들기보단 자신의 주행 페이스를 만들어가며 때를 기다려야 한다. 새로운 주법에서 리듬감이 생겨나는 타이밍, 또는 경쟁자들의 주행이나 피트 스탑 상황이 만들어 내는 추월 타이밍은 반드시 온다.

“9턴을 빠져나오며 DRS 구간을 맞이한 페라리의 페텔! 서준하와 바짝 붙으며 DRS를 작동합니다!!”

DRS(Drag Reduction System, 공기 저항 축소 시스템) 리어윙의 각도를 틀면서, 공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다운 포슬를 줄여 속도를 높이는 경주차의 특수 기능이다. 서킷의 특정한 구간(DRS ZONE)에서만 사용 가능하며, 작동 시 차량의 직진 속도가 평균 약 15km/h 정도 상승한다.

앞차와 1초 이하의 간격에서만 사용 가능하며, 선두는 DRS를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선두와 백마커 차량 사이의 간격이 1초 이내라면 선두도 DRS 사용 가능하다. 경기 시작 후 두 바퀴 동안 사용 불가하고, 마찬가지로 세이프티카 철수 후에도 두 바퀴 이후부터 사용할 수 있다.

‘페텔은 어떻게든 앞으로 나오려고 하겠지.’

두 번째 직선 주로가 끝나고, 서준하가 윙미러를 흘겨봤다. 출발보다 더욱 가까워진 팀 메이트 페텔이 보였다. 4년 연속 월드 챔피언을 달성한 실력자는 초반 적응도 빨랐고, 경쟁자들의 페이스를 읽어내는 능력도 탁월했다.

“서준하의 우측으로 튀어나온 페텔! 페라리 팀이 나란히 마지막 턴을 빠져나옵니다!”

“오늘 마지막 GP, 페텔도 작정했습니다. 팀 메이트고 뭐고, 두 바퀴를 돌자마자, DRS를 활용하며 랩타임을 줄여가는군요!”

초반부터 과감하게 몰아붙이는 페텔의 목표는 서준하가 아니었다. 이번 시즌 내내 메르세데스에게 고전했기에 마지막 GP에선 어떻게든 포디엄에 오르기로 마음 먹었다.

“2턴을 빠져나오는 페라리 선수들! 엎치락뒤치락! 3위 자리가 계속 뒤바뀝니다!”

다음 코스 유리한 자리를 점하기 위해 배틀을 걸어오는 페텔. 서준하 역시 룰에 맞는 적절한 디펜스로 공간을 내주지 않았다.

***

“페텔과 준하, 7턴을 빠져나오면서 다시 배틀에 들어갔습니다!”

“...”

긴장된 분위기의 페라리 팀 피트 월. 팀 메이트 간 배틀이 다시 한번 벌어지자 엔지니어들의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치열한 경쟁은 크러쉬라는 대참사를 낳을 수 있기에 초조함은 더 커져갔다.

“준하와 로즈버그의 차이는?”

“아까보다 0.2초 더 늘어습니다. 메르세데스의 스피드가 오르고 있다기보단 뒤차와 배틀의 영향이 더 큰 것으로...”

코스 돌파하랴, 뒤차의 움직임을 읽고 방향을 바꾸랴, 서준하의 랩타임은 빨라질 수 없었다. 현재 레이스 상황을 파악한 아리바베네 감독이 말없이 고민에 잠겼다.

“지금 추세라면 예상보다 피트 스탑 타이밍이 앞당겨질 것으로 보입니다. 배틀을 막아야 할 것 같지 않겠습니까, 아리바베네?”

“흠...”

레이스 막바지 선두 자릴 두고 다투는 배틀이라면 모르겠지만, 초반 3위 자릴 두고 겨루는 배틀은 서준하와 페텔에게 손해다. 공격과 방어를 위한 불필요한 움직임은 타이어의 수명을 더욱 단축시키는데다가, 지금은 선두 메르세데스에게 압박을 가해야 할 시기로 보였다.

“페텔과 5위 페르스타펜과의 격차 역시 줄고 있습니다. 준하보고 물러나라고 할까요?”

오늘 GP마저 레드불에게 밀릴 순 없다. 시즌 마지막 레이스에서만큼은 페라리의 자존심을 회복해야 했다. 페라리 팀 메이트 간 배틀은 레드불이 원했던 시나리오. 위기감을 느낀 레이스 엔지니어들이 감독에게 제안을 꺼냈는데,

“아니, 그냥 두게.”

표정의 변화 없이 두 선수의 주행을 바라보며 단호히 말하는 아리바베네.

“오늘 레이스만큼 팀 메이트끼리 겨뤄보기 좋은 날은 없지.”

오늘 레이스 결과에 상관없이 이미 레드불에게 시즌 2위를 빼앗긴 상황. 마지막 GP에서 레드불을 누르며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그건 일시적인 것일 뿐이란 걸 잘 안다. 평소 같은 상황에선 세컨드 레이서에게 속도를 늦출 것을 주문했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감독님 말이 맞아. 다음 시즌을 생각한다면, 서로 미리 겪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전략 책임자 안토니오치 역시 지금 상황을 그리 나쁘게만 보지 않았다. 오늘 레이스에선 성과가 중요하지 않다. 새 시즌을 위해 문제점을 발견한다거나, 새로운 시도를 하는 편이 오히려 나을 수 있다.

한편 서준하의 잠재성을 끌어올리고픈 마음이 강한 그에겐 오늘 레이스야말로 좋은 배움터였다. 분명 페텔이라는 정상급와의 배틀은 서준하에게 많은 걸 일깨울 거다.

“언젠간 페텔과 경쟁하게 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날이 데뷔전일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안토니아치는 불안과 동시에 은근한 기대감에 빠졌다. F3에서 곧바로 F1으로 이적, 이후 빠른 적응을 통해 FP를 경험하며 한 시즌 만에 F1 무대에 적응한 어린 선수. 서준하란 레이서는 또 한 번 이변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래, 우린 지켜보자고.”

팀 레이서들의 치열한 경쟁을 지켜보는 아리바베네 감독. 스스로 결단을 내린 듯한 말을 내뱉고는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

부와아아아아아앙.

끼이익.

부와아아아아아아앙.

서준하가 DRS 존에 들어가 페텔을 추월하면, 다음 DRS 존에서 다시 페텔이 서준하를 추월했다. 결국 두 선수의 배틀은 패턴의 반복이었다.

“...”

페텔의 눈앞으로 다시 팀 메이트가 등장했다. 다섯 바퀴 내내 벌어졌던 배틀에서 이번 시즌 처음으로 서준하의 드라이빙을 유심히 살폈다. 신기하게도 그의 드라이빙은 라이쾨넨의 그것과 비슷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자연스러워졌다. 덕분에 초반 더 강력한 푸쉬를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후회가 들기까지.

-다음 턴 끝나고 앞차의 슬립에 들어가자, 페텔.

전담 레이스 엔지니어 아다미로부터 날아든 무전. 서준하의 뒤에 붙은 페텔이 확실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copy.”

페텔은 지금 무전을 듣고 확신했다. 현재 팀은 서준하에게 물러나라는 오더를 내리지 않았다는 것을. 추월을 시도하라는 아다미의 무전에 페텔은 자존심이 상했다.

특히나 오늘 레이스 목표는 서준하가 아닌 단연 우승. 답답함과 동시에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1턴이 좋을 것 같다. 이번엔 이전 랩보다 더 과감하게 안을 파고들어라.

더 이상 지체할 순 없다. 낮은 봉우리 앞에서 시간을 끌 순 없는 법이다. 클래스 차이를 증명함과 동시에 추월 이후 다시는 앞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묶어버릴 것이다.

곧이어 레이스 엔지니어의 판단과 자신의 생각이 동일하자, 페텔이 자신감에 찼다. 그리고,

‘비켜라, 신입.’

슬립 스트림에 들어갔던 페텔이 11턴 안쪽으로 순식간에 튀어나오며 서준하를 추월했다. 이어지는 연속 슬라럼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며 앞차에게 공간을 내주지 않았다.

-좋아, 이제 계속 격차를 벌려!

추월 성공과 동시에 아다미의 흥분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그도 지금 서준하와의 배틀이 당황스러웠고, 자신의 레이서가 손해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가득했다.

“이젠 진짜 끝이다.”

앞으로 다가올 코스들에서 매턴 초(sec)를 앞당기겠다고, 어린 신입에게 챔피언의 드라이빙을 실감하게 만들어주겠다고, 마음 먹었다.

“다시 3위에 올라선 페텔! 연이은 코너에서 더욱 날카로운 코스 돌파를 보여줍니다!”

“열 바퀴 동안 길고 길었던 배틀이었는데요. 드디어 페텔이 자리를 잡은 것 같군요...!”

배틀을 지켜보던 이들의 표정은 다양했다. 페텔의 선전에 독일팬들을 환호했고, 한국팬들은 조용했다. 엄청난 긴장감에 휩싸였던 페라리 피트는 별다른 사고가 나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페텔이 다시 주도권을 가져가면서 이제는 메르세데...”

늘 순위권에 머물었던 페텔의 모습이 익숙했던 중계진. 좀전의 추월 이후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예측하던 중 갑자기 말을 잇지 못하는데,

“...!!!”

페텔의 뒤로 잠시 멀어졌던 페라리 경주차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 배틀이 끝나지 않았군요...!”

“서준하! 페텔의 슬립 스트림에 들어가려 합니다! 이 선수 끈질겨요!!!”

추월 이후 서준하의 페이스가 떨어졌다고 생각한 건 오판이었다. 추월당한 어린 드라이버는 침착함을 잃고 무너지기 십상이라는 통념과 달리, 서준하는 오히려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55바퀴 내내 해보는 거야. 쉽게 물러설 생각 없어!’

다시 기회를 만들겠단 의지가 불타오르는 서준하. 7턴 헤어핀을 상대보다 빠르게 빠져나오며 조금 더 그의 뒤에 붙었다. 그리고,

“DRS ON!!!”

페텔과의 격차가 1초 이내로 줄어들자, 서준하가 DRS를 작동시켰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훼에에엥.

현재 속도 317km/h. 초고속에 오른 서준하가 페텔과 부딪히기 일보 직전 그의 좌측으로 튀어나왔다.

< 그날이 데뷔전일 줄은 몰랐습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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