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도 있겠어요 >
-53랩, 1분 44초 812! 오늘 가장 빠른 기록이다!
레이스 종료까지 두 바퀴를 남겨둔 서준하. 본인의 레이스 베스트 랩타임을 세우며 로즈버그를 맹추격했다. 전담 레이스 엔지니어 데이브의 들뜬 목소리가 팀라디오에 등장했다.
-로즈버그와의 격차는 0.512초! 끝까지 포기하지 마, 준하야!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 서준하의 베스트 랩타임에도 앞차와의 격차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는 서준하가 빠른 만큼 로즈버그 역시 빨랐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훨씬 더 견고해졌어...!’
월드 챔피언 문턱에 오른 레이서의 주행은 마지막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주행 라인은 더욱 정확했고, 디펜스를 위한 예측 능력은 날카로워졌다.
서준하가 몇 번 허를 찔렀지만, 로즈버그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특정 섹터에서 서준하가 필사적으로 달려들면, 로즈버그는 흔들리지 않고 다음 섹터에서 잃었던 초(sec)를 회복했다. 23번 가까이 그랑프리를 우승한 진정한 실력자다웠다.
‘엄청난 집중력이야...’
파이널 랩에 가까워질수록 로즈버그는 되려 빨라지고 있었다. 그의 의지는 상당히 강하게 느껴졌는데, 순간적으로 저속 시케인에서 그와 가까워졌을 땐 마치 그의 투지 넘치는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지금 이 순간을 분명히 기억하자!’
2016 시즌 자신의 커리어를 통튼 최고의 노력을 보여준 로즈버그. 그가 보여준 레이싱에 F1 팬들은 로즈버그를 결코 잊을 수 없는 드라이버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했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조금씩 빨라지는 로즈버그를 보며 서준하는 감동과 존경심을 느꼈다. 그리고,
“1분 44초 755!!! 로즈버그, 54랩에서 페스티스트 랩 달성하며 파이널 랩을 시작합니다!”
로즈버그가 서준하와 배틀을 하는 사이 해밀턴은 조금씩 격차를 벌렸지만, 레이스 종료 직전까지 로즈버그는 페스티스트 랩을 연달아 기록하며 지난 10바퀴 동안의 격차를 단숨에 좁혀버렸다.
“로즈버그가 서준하를 떼어놓고, 이젠 해밀턴을 추격합니다! 이렇게 되면 로즈버그가 챔피언을 차지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졌는데요...!”
“안주하지 않아요, 로즈버그! 파이널 랩의 피니시 라인까지 스피드를 살려내겠다는 의지가 돋보입니다!”
로즈버그가 위기에서 벗어나는 순간 메르세데스와 독일 팬들은 엄청난 환호를 보냈다. 새로운 월드 챔피언의 탄생을 눈앞에 두고 스탠드의 모든 관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2016 시즌의 마지막 체커드 플래그가 휘날립니다!”
“해밀턴 피니시! 그다음으로 로즈버그가 피니시하면서 이번 시즌 챔피언을 확정 짓습니다!”
전생엔 2018 시즌 데뷔했기에 처음 로즈버그와 겨뤄봤다. 지금 눈앞에서 그의 마지막 주행을 경험한 서준하. 그가 보여준 챔피언에 대한 강렬한 의지와 노력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뒤로 피니시하는 서준하! 믿을 수 없는 결과가 일어났습니다! 이번 시즌 데뷔전에서 페라리의 루키가 포디엄 피니시를 달성했습니다!”
챔피언이 탄생하는 날이었고, 메르세데스가 압승한 날이었지만, 서킷을 찾은 티포시들은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서준하를 통해 페라리의 미래를 확인했고, 커다란 기대감을 갖게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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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아부다비 GP, 98년생 코리안 레이서의 데뷔전. 포물러 원 사상 최초의 데뷔전 포디엄 피니시를 달성한 순간이었다.
***
“와아아아아아아아!!!”
레이스를 마치고 완주한 선수들이 파크 퍼미(parc ferme, 레이스 이후 주행을 마친 차량을 보관하는 장소)에 도착했다. 오늘 레이스 우승자는 해밀턴이지만, 모두의 관심은 뉴 월드 챔피언에게로 향했다.
로즈버그는 차량 세레머니를 마치고, 헹가래를 받으며 수십 명의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 잠시 후, 검차와 레이스에 대한 스튜어드들의 판정이 끝나고, 시상식이 진행됐다.
“데뷔전 3위를 기록한 서준하 선수입니다!”
3위 트로피 전달 받은 서준하. 포디엄 위에 올라 두 팔을 벌려 환호했다.
“예쓰!!!”
물론 데뷔전 3위는 놀라운 기록이었지만, 서준하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레이스에서 성과를 거둔 드라이버가 할 일은 기뻐하는 일.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응원을 보내고, 서포트해준 다른 이들을 위해서다.
찰칵.
찰칵.
서준하를 향한 플래시 세례는 그 어느 선수가 3위를 기록했을 때보다 뜨거웠다. 이번에도 다시 한번 이변을 만들어냈고, 믿기 힘든 기록을 달성한 상황이니까.
“마지막 몇 바퀴는 정말 무서웠다. 첫 포디엄 축하한다, 준하.”
세레머니를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오자, 로즈버그가 웃는 얼굴로 서준하에게 속삭였다.
“월드 챔피언이라니, 축하해요, 닉. 같이 레이스를 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어딘가 심상치 않게 들리는 서준하의 말. 공식적으로 은퇴 소식을 밝히지 않은 로즈버그로선 마치 서준하가 자신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축하한다, 준하.”
곁에선 해밀턴도 먼저 악수를 청하며 가벼운 축하의 말을 건넸다. 챔피언 자릴 놓쳐서인지, 아니면 서준하란 존재가 그리 달갑지 않아서인지, 그의 표정은 평소만큼 밝아 보이지 않았다.
“메르세데스 듀오와 인터뷰하기 전, 먼저 서준하 선수와 잠시 얘길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와, 축하드립니다, 서준하 선수!”
트로피 세레머니를 끝으로 마이크를 들고 다가선 한 사람. 전직 유명 F1 드라이버이자, 현재 Channel 4 TV의 코멘테이터 데이비드 쿨사드가 서준하의 곁에 섰다.
“믿을 수 없습니다!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습니다! 생애 첫 포디엄!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F1 사상 최연소로 그랑프리에 데뷔한 것도 모자라, 첫 레이스 3위를 기록한 상황. 게다가 서준하에게 최적화된 환경이 아니었으니, 새로운 챔피언이 탄생한 날임에도 뉴페이스를 향한 관심은 뜨거웠다.
“먼저 훌륭한 드라이버들과 함께 레이스 할 수 있어서 굉장히 기뻤습니다. 특히나 데뷔전을 치를 기회를 만들어준 팀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동방예의지국의 레이서답게 겸손으로 시작된 서준하의 코멘트. 그를 지켜보는 페라리 팀원들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지고,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날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달리고 싶습니다. 아직 배가 고픕니다. 2017 시즌은 오늘과 다른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놓는 서준하. 챔피언 레이서들 앞에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았고, 루키답지 않은 그의 말과 행동에 플래시 세례는 끊이지 않았다.
‘다음 시즌엔 다 쓸어버리겠어.’
드라이버가 레이스를 하는 건 이기기 위해서다. 다음 시즌 반드시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하겠다고 다짐하며 카메라를 향해 당당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이번엔 준하의 데이터입니다.”
시즌 마지막 레이스를 끝내고 마라넬로로 돌아온 페라리 팀. 기나긴 시즌이 끝났음에도 팀 스태프들은 쉬지 않았다. 아리바베네를 중심으로 엔지니어들과 수석 코치진들이 대회의실 탁자에 둘러앉았다.
“연습 주행부터 레이스까지. 라이쾨넨과 한 번 비교해서 보도록 하지.”
각 팀의 경주차가 겉으론 비슷해 보여도, 성향은 제각기 다르다. F1팀의 기술개발 감독(Technical Director)은 이런 경주차 개발 사상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 인물. 서준하의 성과에 엄청난 호기심을 가졌던 알리슨이 스태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안 그래도, 제가 미리 비교해봤는데요. 이것 보시죠. 레이스 당일엔 지난 시즌 라이쾨넨의 아부다비 텔레메트리(Telemetry, 원격측정 시스템)와 거의 비슷합니다.”
“와하하, 이거 그냥 라이쾨넨이 탄 거 아닙니까? 어떻게 쓰로틀 당기는 포인트가 이렇게 똑같죠?”
레이스 카에 탑재된 모니터링 장비에서 수집된 데이터를 비교하는 기술개발 팀원들. 퀄리파잉과 비교했을 때 서준하의 주행은 레이스 당일 더욱 라이쾨넨의 그것과 비슷했다. 데이터를 살피던 알리슨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단시간에 다른 주법을 터득해서 써먹을 수 있는 거지?”
드라이버의 주법이 달라지면, 디펜스 방식과 추월 포인트 역시 달라지기 마련. 본래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기에 공격과 방어를 연신 해야 하는 레이스에선 다른 주법을 유지하기 어렵지만, 서준하는 이 모든 걸 적응하며 성과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거면,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도 있겠어요. 기존 스타일이랑 조금 다른 성향의 차를 타더라도, 거기에 금방 또 적응할 테니까요.”
“운 좋게 라이쾨넨의 주법이 준하에겐 익숙한 주법이었던 걸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준하의 주법과는 다른 건 사실이지. 적응력이 뛰어나긴 하네.”
“흠, 이런 드라이버가 있으면 신차 개발도 다양한 색깔을 가져볼 수 있겠는데요?”
드라이버의 특성에 따라 제작되는 F1 경주차. 매 시즌 조금이라도 속도를 높이기 위해 차량 개발에 다양한 시도를 했었지만, 드라이버가 적응하지 못해 엎어진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운전을 잘하는 F1 레이서들이지만, 그들은 저마다의 드라이빙 스타일을 고수했고, 기존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난 차량들은 잘 다루지 못했다.
“좋아, 이런 친구는 위로 올라가야지.”
개발팀의 회의 내용을 듣던 아리바베네. 기술개발 감독에 말에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리바베네, 다음 시즌 준하의 연봉은 얼마로 결정됐나요?”
지난 시즌 약 1.5억 원의 연봉으로 테스트 드라이버 자리에 앉은 서준하. 주전으로 뛰게 될 경우 협상을 통해 연봉을 인상키로 했다. 데이터 분석이 끝나고, 수석 코치진끼리 남은 회의실 안. 팀의 커머셜 책임자 마티아치가 감독을 향해 묻는데,
“2년 계약으로 첫 시즌엔 200만 유로(한화 25억), 다음 시즌엔 300만 유로(한화 38억)면 되지 않겠습니까?”
“음, 그게 일반적이긴 하지...”
F1 선수들의 연봉은 선수에 따라 천차만별. 해밀턴, 라이코넨, 페텔과 같은 슈퍼스타들의 연봉은 300~500억 원이지만, 하위권 영드라이버들의 경우는 2~3억 원을 받는다.
서준하의 라이벌인 레드불의 막누스의 연봉이 20억 아래인 것과 페라리 팀 메인 레이서라는 걸 감안하면, 그의 연봉 20~30억이 적당해 보였다. 하지만,
“슈퍼 루키를 일반적으로 대할 순 없지 않겠나.”
확실한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며, 이변을 만들어온 서준하. 그런 선수에게 일반적인 보상은 적절치 못하다. 게다가 로즈버그의 갑작스러운 은퇴 발표로 메르세데스의 콕핏 한 자리가 비면서, 다른 팀에선 서준하에게 이적 제의를 해본다는 소문까지 나도는 상황.
“500만 유로, 이 정도가 적당하지 싶네.”
“500만 유로요?!”
“...!”
한화로 63억 원. 마싸, 그로장, 페레즈와 같은 5년 이상 성과를 보인 레귤러 레이서들보다 훨씬 많은 금액. 페라리가 사실상 첫 시즌을 치르는 서준하를 두고 그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500만 유로, 준하는 그 이상의 성과로 보답할 거라고 믿네.”
16시즌 3위에 랭크하며 굴욕을 맛본 페라리. 팀이 위기를 맞은 상 감독은 서준하라는 신인에게 엄청난 기대를 걸었다.
<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도 있겠어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