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마 지금 준하 선수가 가장 필요한 사람? >
“2017 시즌은 차체 디자인이 대폭 변경됐지. 전반적으로 차량의 크기가 커졌다고 보면 되네.”
2016 시즌이 끝난 12월. 드라이버들은 물론, 팀 스태프들 모두 휴식에 들어가는 기간이다. 하지만 다음 시즌 준비에 한창인 페라리의 R&D 팀은 여전히 신차 개발에 몰두하고 있었다.
“타이어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프론트 윙과 플로어의 폭이 늘어났지. 무엇보다 드라이버가 유의할 건 차량의 무게야, 무게.”
페텔을 비롯해 테스트 드라이버 역시 윈터 시즌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서준하는 마라넬로에 남았다. 예상보다 빠르게 시즌에 투입됐기에 개인 훈련은 물론, 신차 개발을 도와야 했다.
마라넬로에 위치한 R&D 센터에서 테크니컬 디렉터 알리슨이 서준하가 타게될 신차의 모형을 스크린에 띄웠다. 16시즌 차량의 무게보다 26kg이나 늘어난 신차를 두고 알리슨이 주의사항을 늘어났다.
“제한됐던 에어로파츠들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됐고, 아마 F1 사상 가장 빠른 경주차가 되지 않을까 싶네. 하지만 덕분에 프레임과 타이어의 무게는 늘어났지. 이렇게 되면, 드라이버가 체중을 좀 더 줄여줘야 하는데...”
고작 1~2kg 차이도, 0.001초를 다투는 초고속의 세계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레이스의 진행 시간이 끝을 향할수록 좋은 랩타임이 나오는 건, 퓨엘 이팩트와 더불어 줄어든 드라이버의 몸무게로 전반적인 차량의 무게가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이번 시즌 차량의 무게가 무거워짐에 따라 드라이버의 체중관리는 더욱 혹독해질 것으로 보이는데,
“최대한 몸무게를 낮춰보겠습니다, 알리슨.”
알리슨의 걱정과 달리 17시즌은 서준하에게 새로운 컨디션이 아니었다. 이미 전생에선 7kg이나 더 무거운 F1 레이싱카를 몰았고, 그에 맞는 체중과 체력 관리를 해봤으니까.
“시즌 시작 전에 급하게 몸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건 그걸 유지가 힘들다는 사실이네. 윈터 시즌 동안 최대한 몸을 만들어 두는 것이 좋을 거야.”
F1 드라이버들이 윈터 시즌에도 영양과 운동에 있어 제한된 생활을 유지하는 건 F1이라는 스포츠의 특성 덕분. 일 년 내내 20번 이상의 GP에서 항상 같은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는 일은 단기간의 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매일 치열한 자기 관리 속에 살아야만 하는 운명인 것이다.
‘물고기가 낚싯바늘을 물지 않고 낚싯밥을 먹을 순 없는 법이니까.’
데뷔전 GP가 끝나고 그 피로감은 엄청났다. 이를 20번 이상 버텨냄은 물론 거기서 더 나은 성과를 내려면 그만한 체력이 뒷받침돼야 하고, 그 체력을 만들기 위해선 매일을 그 치열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이미 모두 각오했던 일. 무언가를 원한다는 건, 그것에 따른 고통도 함께 원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화려한 뉴시즌을 앞둔 서준하.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잡기 위한 혹독한 과정을 시작했다.
***
“뭐? 이게 말이 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페르스타펜 가문의 저택. 막누스의 아버지이자, 전 F1 드라이버 출신 요스 페르스타펜이 휴대폰으로 모터스포츠 채널의 새로운 소식들을 둘러보던 중 놀라고 말았다.
“왜 그러세요, 아버지?”
“페라리가 서준하와 연봉 협상을 끝냈다는데. 그 금액이 500만 유로... 라는데?”
휴대폰을 꺼내 들어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소식을 확인하는 막누스. F1 공식 언론에서 서준하와 마르치오네 회장이 계약서에 서명하는 사진이 SNS 상에 도배되고 있었다.
“...500만 유로...”
2015년 토로 로쏘 팀으로 F1 데뷔 당시 3억의 연봉을 받았던 막누스. 두 시즌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보이며 17시즌 20억에 가까운 연봉을 받게 됐다. 그런 그가 보기에 아직 제대로 시즌을 소화하지도 않은 영드라이버가 자신보다 3배가 넘는 연봉으로 계약했다는 소식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응? 뭐야, 게다가 1년도 아니고, 2년 계약이라고...?”
일반적인 계약 기간보다 긴 기간. 이는 페라리가 서준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엄청난 대우를 받고 다시 한번 화제의 인물이 된 라이벌 서준하. 자세한 내용을 읽어내려가던 막누스의 얼굴이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
“...그나저나 아직 소식 없었죠?”
“아마 18시즌을 기대해봐야 할 것 같다. 제안을 넣은 선수가 우리 말고도 많았을 테니까...”
로즈버그의 은퇴 소식에 다른 F1 선수들은 들떴다. 드라이버를 챔피언 자리에 올려줄 최강 팀 중 하나였기에, 막누스 역시 메르세데스에 이적 제안을 보낸바 있었다.
“이렇게 되면, 17시즌이 굉장히 중요해졌어, 막누스. 이전보다 더 나은 성과를 보여준다면, 메르세데스도, 페라리도, 관심을 안 가질 수 없겠지.”
F1 팀들은 자신의 팀 드라이버들에 대한 정이 없다. 그들은 오직 성과를 내는 선수만을 자신들의 드라이버로 삼는다. 페텔이나, 해밀턴 같은 슈퍼 챔피언들도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언제든 팀으로부터 추방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 막누스의 레드불 팀이 약팀은 아니지만, 확실히 챔피언 가능성이 다른 두 팀보다 떨어지는 건 확실하다. 월드 챔피언을 꿈꾸는 막누스에겐 메르세데스와 페라리가 필요했다.
“이번 시즌 확실히 퍼스트 레이서로서 입지를 다져야겠어요. 전체 순위 3위 안에 반드시 올라갈 겁니다.”
2016 시즌 5위라는 엄청난 업적을 달성하며 가능성을 보여준 막누스. 라이쾨넨과 로즈버그 같은 챔피언들이 순위권 경쟁 구도에서 제외된 상황에서 새 시즌 자신감이 넘쳤다.
***
“테오, 잠깐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메르세데스 AMG F1팀의 매니징 디렉터 앤디. 긴급한 연락을 받고 테오 울프 감독의 집무실을 찾았다.
“한 시즌만 더 해줬으면 했는데... 아쉽군요.”
2016년 12월 2일. 이번 시즌 챔피언 닉 로즈버그의 갑작스러운 은퇴 발표로 팀의 콕핏 한자리가 비어버린 상황. 게다가 이미 다음 시즌을 두고 많은 드라이들이 이적을 확정지은 상황까지 겹치며, 메르세데스 컨트롤 타워가 혼란에 빠졌다.
“베를라인은 어떻습니까?”
적응과 새 시즌 준비를 위해선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새로운 드라이버를 물색하던 앤디. DTM(독일 투어링카 마스터즈) 최연소 챔피언이자, 유년 시절부터 메르세데스가 후원하고 있는 신예 드라이버 파스코 베를라인을 추천하는데,
“저도 생각해봤는데요. 매노어(Manor Racing F1 Team)팀에서 기록했던 성적이 맘에 들지 않네요. 그 친구 생각보다 실전에서 약해요.”
“확실히 신예 레이서들이 데뷔 시즌 좋은 모습을 보이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흠, 이런 걸 보면, 페라리의 그 친구가 확실히 물건이란 생각이 드네요.”
처음 F1 무대에 오른 영드라이버가 한 시즌을 풀타임으로 소화해도 단 1포인트(레이스 순위가 10위 안)조차 따내기 어려운 실정. 하지만 페라리의 신예는 단 한 번의 데뷔전으로 15포인트를 따냈으니, 특별해 보이는 건 당연했다.
많은 영드라이버들에게 서준하의 데뷔전은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만약 테오가 서준하의 활약을 보지 못했다면, 베를라인이 메르세데스에 들어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거다. 테오의 반응을 살피며 생각에 잠겼던 앤디가 다시 얘길 꺼내는데,
“서준하 같은 영드라이버를 앉히기 힘들다면, 레귤러들을 데려와야겠지요.”
“그죠, 근데 이미 대부분 계약을 마친 상황일 텐데, 협상이 쉽지 않겠죠. 혹시 생각해 보신 선수는 있으세요?”
팀과 드라이버가 계약을 마쳤더라도, 2010년대 최고의 성능을 발휘하는 엔진을 보유한 메르세데스가 그 팀이 원하는 것들을 제공한다면, 계약을 마친 드라이버를 데려오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보타스가 가장 적합합니다. 윌리엄스가 우리 엔진을 썼으니 사실 지금 상황에선 보타스만 한 레이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역시 보타스를 생각하셨군요. 근데 윌리엄스가 쉽게 내주진 않을 것 같아요.”
현재 윌리엄스와 17 시즌 재계약에 들어간 퍼스트 레이서 발트 보타스. 그는 윌리엄스의 피드백과 포인트를 책임지고 있는 팀의 주축이기에 협상이 쉬울 것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윌리엄스가 요구하는 건 전부 들어줘서라도 데리고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윌리엄스가 보타스를 공짜로 내줄 리 없다. 무리한 협상 조건을 제시하더라도, 현재 드라이버가 급한 상황에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경쟁팀 페라리의 기세를 생각한다면, 결코 다음 시즌 신예 드라이버를 기용하는 모험을 걸 순 없었다.
“해밀턴의 독주 체제를 이어가기 위해선 안정적인 보타스가 더할 나위 없이 좋을 듯합니다.”
2010년 이후 전폭적으로 팀의 퍼스트 레이서 해밀턴을 지원하고 있는 메르세데스 팀. 평소 팀 오더를 착실히 따르는 보타스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영입은 팀이 전략을 세우는데도 수월함을 가져다줄 것이 분명했다.
“그래요, 해보죠. 다음 주 곧바로 윌리엄스와 미팅 잡아보세요.”
2010년대 절대적인 챔피언 팀으로 자리매김한 메르세데스. 2017 시즌에도 최정상에 머물기 위한 뉴 드라이버 영입에 큰 투자를 시작했다.
***
“윈터 시즌에는 웨이트 트레이닝의 빈도를 높여서 훈련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정규 시즌 때보단 체력적인 부담이 덜하거든요.”
마라넬로에 위치한 드라이버 피트니스 센터. 국내 방송사의 카메라 앞으로 서준하가 서 있었다. 데뷔전 이후 한국에서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는 F1이라는 스포츠. F1 경주차부터 F1 드라이버의 훈련까지, 자국민들을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TV 프로그램 촬영에 서준하가 참여하게 됐다.
“체력 훈련부터 엔지니어링 지식들까지. 서준하 선수를 보니까 정말 F1 드라이버는 정말 극한 직업인 것 같아요.”
어제 오전부터 서준하와 함께해온 담당 PD. 혹독한 체력 훈련을 마치고 잠시 휴식에 들어간 서준하를 두고, 대단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너무 자세히 설명 안 해주셔도 괜찮아요. 훈련하랴, 말씀하시랴, 진짜 힘드실 텐데... 아, 정말 너무 고마워요, 서준하 선수.”
“멀리 여기까지 와주시고 이런 프로그램 만들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죠. 덕분에 많은 분들이 F1에 대해 알아갈 수 있다니까, 보람 있고 그렇게 힘들지도 않네요, 하하.”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응원했던 팬들과 F1 무대를 꿈꾸는 어린 레이서들을 생각했다. 본래 자신의 일과에 더 큰 의미가 부여된 듯한 느낌을 받았고, 이런 전달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함까지 느꼈다.
“데뷔전 이후로 몇 년 전에 찍으셨던 F3 다큐가 다시 인기를 끌고 있대요. 그래서 이번 프로그램 제작도 정말 많은 분들이 기대하고 계시다고 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서준하 선수, 호호.”
“저도 잘 부탁드려요, PD님, 하하.”
함께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만드는 건 의미 있는 일. 지난 며칠간의 촬영에도 스태프들과 서준하 사이에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준하 선수, 밖에 누가 왔는데, 잠깐 보러 갈래요?”
“누구죠?”
스태프들 곁으로 다가선 한서윤. 평소보다 훨씬 밝은 표정에 서준하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아마 지금 준하 선수가 가장 필요한 사람...?”
그가 왔음을 직감한 서준하. 한서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 아마 지금 준하 선수가 가장 필요한 사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