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도 17시즌 바레인 레이스였어 >
-1분 28초 571!!! 완벽했다! 그대로 인 랩 들어가, 준하야
Q2 자신의 최고 기록보다 1초 이상 빠른 Q3 베스트 랩타임. 보타스와 비슷한 시기에 어택을 시작했던 서준하가 압도적인 잠정 폴 기록을 만들며, 기분 좋게 피트로 복귀를 시작했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우측으로 서행하던 서준하. 멀리서부터 엄청난 배기음을 쏟아내는 경주차 두 대가 그의 시선을 빼앗았다. 플라잉 랩을 달리는 듯 단순히 배기음만으로도 그 속도를 짐작할 수 있었는데,
‘이제 거의 끝나간다.’
서준하의 옆을 순식간에 지나치는 또 다른 페라리카. 잠시 후, 뒤이어 해밀턴의 차량이 다시 한번 서준하를 지나쳤다. 섹터 1의 직선 구간을 빠르게 돌파하는 페텔과 해밀턴. 탈출 후 재가속 타이밍이 어찌나 빨랐는지 마치 DRS를 사용한 것만 같은 착각을 선사했다.
‘급감속 구간에서 저 속도로 진입하겠다고?’
Q3 종료 3분 전까지 서킷에 나오지 않았던 두 선수. 서준하의 잠정 폴 기록이 꽤 높았기에 첫 어택에서 굉장히 타이트하게 코스를 돌파했다.
타이어의 부담을 앉고서라도 스피드를 살려내겠다는 의지는 초고속 직선 구간의 끝인 4턴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110km/h 가까이 급감속해야 하는 구간 앞에서도 페텔과 해밀턴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적당한 레이트 브레이킹으로 타이어 부담은 최소화하면서도 속도는 떨어뜨리지 않아...’
피트레인 입구에 도착하기까지 멀어져가는 마지막 주자들을 바라보는 서준하. 준비된 전략을 실행했고, 목표 타임을 달성했다. 피트로 돌아가는 동안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챔피언들의 코스 돌파를 유심히 살폈다.
-이야, 섹터 2부턴 G포스가 엄청날 텐데 둘 다 컨트롤이 엄청 섬세해.
“롭, 지금 랩타임 차이가 얼마나 나지?”
-섹터 2 피니시. 흠... 현재까지 페텔과 해밀턴 둘 다 0.1초 빨라. 섹터 3에서 승부가 나겠다.
실제 서킷에서 그들의 주행은 빨라 보였다. 역시나 자신보다 빠른 랩타임을 만들어가고 있는 챔피언들. F1에서만 10년 가까운 커리어를 쌓아가는 두 선수의 주행은 확실히 남달랐다.
‘아직도 배울 게 많아.’
다년간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주행 퍼포먼스와 팀의 적극적인 서포트가 만들어낸 챔피언 드라이버들의 드라이빙. 전자는 확실히 서준하가 계속해서 쌓아야 할 덕목이다. 실전에서도 스펀지와 같은 자세로 강자들의 장점을 흡수해야 이들과 견줄 수 있다.
‘하지만 한순간에 뒤집어 버리겠어.’
지금 서준하는 자신의 계획대로 팀에 흡수되고 있었고, 참가자들과의 경쟁에서도 조금씩 우세한 결과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때는 서서히 오고 있다. 이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챔피언 자릴 두고 경쟁할 그날이.
-보타스 1분 28초 594! 0.02초 차이다!
두 번째 어택으로 승기를 잡으려 했던 보타스의 전략이 실패했고, 페라리 팀은 환호했다. 곧이어 페텔과 해밀턴이 피니시했고, 서준하는 잠정 폴 기록에서 물러나며 예선 3위를 기록했다.
***
“인터뷰 준비는 잘하고 있어?”
3라운드 퀄리파잉이 끝난 늦은 저녁 페라리의 팀 하우스. 라운지로 들어선 한서윤을 발견한 롭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섰다.
“뭐 그럭저럭? 그냥 내가 아는 그대로 솔직하게 전달하려고.”
3차전 레이스가 끝나고 국내 한 언론과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한 한서윤. 서준하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면서, 그의 주변 인물들 역시 국내 팬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오늘 퀄리파잉에서도 서준하가 순위권에 오르며 앞으로 그 관심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였는데,
“전에도 그런 인터뷰 비슷한 걸 했던 적 있지 않았어?”
“응, 아마 마카오 GP 끝나고 시상식 때 잠깐 했었던 거 같은데. 이번처럼 내 얘기가 궁금하다고 직접 요청이 들어온 건 처음이야.”
“그렇긴 하지. 준하의 퍼스널 매니저이기 전에 페라리라는 회사의 직원이니까.”
“또 내가 화면빨이 좋잖아?”
“음, 그건 잘...”
국내 F1에 대한 관심은 레이스와 경주차를 시작으로 팀과 스태프 그리고 해외 자동차 문화 전반까지 넓어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실제 그 문화의 중심에서 일하고 있는 한서윤의 스토리는 한국인들에게 또 다른 기대를 샀다.
“나도 이렇게 관심을 받게 되니까, 이 일을 대하는 태도랄까? 생각이 많이 달라졌어.”
인터뷰 준비를 위해 지난 몇 년의 시간들을 돌이켜 봤던 한서윤. 서준하를 서포트할 기회를 가졌다는 것에 감사함과 동시에 마음속으로 전에 없던 무언가가 생겼는데,
“그냥 예전에는 단순히 준하를 서포트하는 일에 실수가 없도록 잘하자고 생각했다면, 요샌 책임감이 더 강해졌어. 앞으로 F1팀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좋은 롤모델이 되자, 뭐 이런?”
자동차와 모터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F1팀은 꿈의 직장. 한국인 스태프를 찾아보기 힘든 F1 무대에서 그녀는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됐다. 언론에 조금씩 노출되면서 F1 진입에 대한 개인적인 질문들을 끊임없이 받고 있었다.
“좋은데? 너처럼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언젠간 한국에서도 F1팀이 출전하는 날이 오는 거 아니야?”
“진짜 그러면 좋겠다. 사실 나는 몰랐는데, 자국팀, 자국 선수, 자국 무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나도 은근히 부러워했던 것 같아.”
국가주의적인 이념들을 꺼렸던 한서윤이지만, 타지의 이방인으로 생활하며 종종 고향 사람들과의 유대를 그리워하는 자신을 발견했었다. 특히나 국가 대항전의 성격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스포츠 무대의 일원으로서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갔다.
“근데 롭 너는 요새 어때? 적응 잘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던데?”
자신의 얘기를 너무 많이 했다고 생각한 한서윤이 다시 롭을 바라봤다. 갑자기 지어낸 말은 아니었고, 실제 스태프들의 얘길 전해주고 싶었다.
“오, 무슨 얘길 들었어?”
누군가 자신을 평가하는 건 두렵기도 한 일이지만, 지금 한서윤의 밝은 얼굴로 봐선 나쁜 얘기는 아닐 듯했다. 게다가 현재까지 성과만 놓고 봤을 땐 세컨드 드라이버팀으로서 200%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으니까.
“처음보다 스텔라하고 대화하는 게 편해진 것 같고, 전략 회의 시간에 준하랑 너의 비중이 많이 늘었잖아. 확실히 처음보다 자유로워 보여.”
처음 롭의 배경을 두고 그 실력에 의문을 품었던 팀원들도 세 경기 만에 그를 인정하는 듯 보였다. 유쾌한 성격과 철저한 레이스 분석, 무엇보다 드라이버를 안정적으로 컨트롤해내는 능력이 주요했다. 서준하의 적응만큼이나 롭을 걱정했던 한서윤으로선 지금 상황이 흐뭇할 수밖에 없었다.
“전부 준하 덕분이지. 난 그냥 예전처럼 준하와 했던 것들을 하고 있을 뿐이야.”
치열한 전쟁터 같은 F1 무대에서 두 사람의 하루는 기쁨으로 가득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걱정보단 설렘이 커져갔고, 더 나은 미래를 그려보게 됐다. 그리고,
“뭐해, 안 자고?”
피곤했던 예선을 마치고 또 다른 레이스를 기다리는 저녁. 모처럼 진솔한 대화를 나눈 두 사람 곁으로 마침 보고 싶었던 인물이 창문 밖에서 고갤 내밀었다.
“준하야!!”
서준하를 발견한 두 사람이 그를 향해 해맑게 웃었다.
***
“이제 해가 거의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사키르 주변 사위가 어둑어둑해졌는데요.”
저녁 6시에 시작되는 바레인 GP 레이스. 트랙 전체에 배치된 화려한 조명이 빛나는 레이스의 배경은 이전까지의 그랑프리들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냈다.
“오늘 레이스 총 57바퀴, 300km이상 달리게 되는데요. 나이트 레이스지만, 아무래도 사막 지역이라 트랙의 온도가 높기 때문에 선수들의 체력 관리가 중요하겠습니다.”
“그렇죠. 3차전은 휴식기가 없었기에 선수들의 컨디션이 좋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도 잘 견뎌내야 하는 것이 바로 F1 드라이버의 숙명이죠.”
일반적으로 GP 사이 2주 이상 텀을 두지만, 이번 바레인 GP는 2차전이 끝난 바로 다음 주에 시작된 백투백(Back-to-Back) 레이스다. 중계진의 예상대로 레이스 당일 드라이버들은 많이 예민해 있었다.
“자, 이제 미캐닉들이 경주차 주변에서 물러나고요. 페텔을 시작으로 선수들이 하나둘 포메이션 랩을 시작합니다!”
레이스 당일 컨디션은 어제 예선과 같았다. 대부분의 팀들이 예선과 동일한 셋업을 했고, 레이스 전략 역시 큰 변화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사키르의 유일한 변수가 있다면 바로 이것,
“서킷 바깥쪽을 달리는 선수들이 그립감이 떨어진다고 호소하고 있군요. 역시나 이번 사키르 레이스에서도 모래 먼지가 큰 변수가 될 것 같습니다.”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바레인 서킷. 주변 사막으로 고착제를 뿌리는 조치를 취했지만, 여전히 많은 모래바람이 불고 있었다. 덕분에 트랙 곳곳으로 더트 사이드가 형성됐고, 포메이션을 잠깐 도는 동안 몇몇 선수들의 타이어에 모래 먼지가 들러붙었다.
“이렇게 된다면, 전반적으로 속도감이 떨어지는 경기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그렇죠. 트랙 에볼루션(경기가 진행될수록 노면이 깨끗해지는 이펙트) 타이밍이 오고 적정한 그립을 확보한 뒤에야 본격적인 순위 경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트랙의 이곳저곳을 체크하던 중계 카메라. 이제 다시 포메이션 랩을 도는 선수들에게로 포커스를 옮기는데,
“...!!!”
“아! 지금 이게 무슨 일입니까?!”
화면에 등장한 페텔과 해밀턴의 레이싱카. 두 선수의 행동에 중계진이 사태 파악에 나섰다.
“6턴을 빠져나온 페텔이 갑자기 해밀턴과 부딪혔습니다. 뒤에서 황당하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페텔인데요...!”
포메이션 랩을 달리던 선두 해밀턴이 갑작스럽게 멈추며 뒤따라오던 페텔과 부딪히고 말았다. 그런데,
“아! 페텔이 다시 해밀턴에게로 돌진합니다!”
그러자 페텔이 해밀턴의 옆으로 나오며 다시 그를 들이받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모두가 예민한 상황입니다. 두 선수 신경전을 자제할 필요가 있어요! 지금 충돌로 차량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고요. 지금 이런 행동은 두 선수에게 손해에요, 손해!”
“어떤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 해밀턴이 일부러 멈춘 건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요...!”
메르세데스와 페라리의 팀 라디오. 두 선수 모두 상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어이없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부와아아앙.
부와아아아앙.
두 선수의 뒤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서준하. 단순한 신경전으로 보기엔 심상치 않은 행동에 두 선수와 조금 더 거릴 두는데,
‘그래, 아마 이때쯤이었지?’
평소 라이벌이지만, 서로를 존중하며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해온 페텔과 해밀턴. 하지만 그 좋았던 관계가 틀어진 계기가 있었으니,
‘그때도 17시즌 바레인 레이스였어...!’
과거의 기억들을 되짚어보는 서준하. 두 선수의 신경전의 끝이 떠오며 기분 좋은 예감이 밀려왔다.
< 그때도 17시즌 바레인 레이스였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