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이널 랩을 노리려는 건가? >
“40랩 스타트! 막누스와 격차는 2.214초! 이전보다 0.43초가량 단축했습니다!”
마지막 타이어 교체 이후 분주해진 참가 팀들의 피트. 그 가운데 무거웠던 메르세데스 팀의 분위기가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오늘 같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폼이 확실히 좋아졌어.”
보타스의 온보드 영상을 뚫어지라 바라보는 테오 감독. 교체 이후 곧바로 새 타이어에 적응하고 있는 모습에서 테오가 흡족함을 드러냈다. 곁에 선 레이스 엔지니어들과 보타스의 주행 데이터를 살피던 라우다도 희망에 찬 얼굴로 피트 월에 나타났다.
“오늘이야말로 자기 장점을 제대로 살리는 주행이 나왔구만.”
“페달링이 괜찮죠?”
“확실히 하드 브레이크 구간에서 트레일 브레이킹으로 이점을 보고 있어. 한두 바퀴 안에 승부가 날지도 모르겠네...!”
보타스의 장점은 섬세한 페달링을 살린 트레일 브레이킹. 스피드 트랩과 코너 진입 속도를 살려 랩타임을 절약하는 스타일이다. 더불어 종속 가속을 끝까지 활용할 수 있고, 타이어 역시 균일하게 소모할 수 있는 보기 드문 테크니션이다.
“13턴 스피드 트랩 327.7km/h! 오늘 레이스 최고 속도입니다!”
“327.7km/h?!”
스피드 트랩은 메르세데스 경주차의 최고 강점. 현존했던 레이싱 카 가운데 가장 빨랐다고 평가받았던 지난 시즌 경주차를 보타스가 탔다면, 아마 더 빠른 기록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전의 메르세데스 드라이버들이 세웠던 최고 속력보다 훨씬 빠른 기록이 등장했는데,
“막누스와 격차 1.412초!!! 다음 DRS 존에서 무조건 추월 가능합니다!”
막누스의 슬립 스트림을 타며 빠르게 고속 직선 구간을 통과하는 보타스. 타이어 교체 후 SS 타이어의 빛을 발휘하기 위해선 한시라도 빨리 선두로 치고 나가야 한다. 보타스가 제아무리 타이어 관리에 능숙하다고 해도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건 사실이니까.
“DRS 액티베이션!!!”
“그대로 나와, 보타스!!!”
팀의 예상대로 이어지는 DRS 존에 들어온 보타스가 막누스의 리어윙을 향해 돌진하는데,
“예쓰!!!”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메르세데스 피트 앞으로 보이는 홈스트레치. 거대한 은빛 화살이 막누스를 가볍게 제치며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 페이스 그대로 페라리까지 잡는 거야!!!”
팀원들과 함께 환호하는 테오 감독. 이번 시즌 처음으로 보타스의 추월에 흡족함을 드러내며, 그의 앞으로 보이는 붉은색 페라리 카에 시선을 고정했다.
***
“막누스를 제치며 41랩 2위로 올라선 보타스! 레이스 후반을 위한 전략과 새로운 타이어가 빛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아직 SS 타이어의 피크 타임이 한참 남았습니다. 지금 이 기세라면 단번에 선두까지 노려볼 만한데요...!”
“아! 서킷 여기저기 배틀이 치열합니다! 이렇게 되면 레이스 결과 마지막까지 봐야 할 것 같아요!”
마지막 피트 스탑 전까지 순위 변동 없이 진행된 바레인 레이스. 순위권뿐만 아니라 중위권 선수들의 포인트 쟁탈전이 더욱 치열해졌다. 추월 이후 막누스의 압박이 닿기도 전, 중계진의 말처럼 보타스가 점점 선두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타스! 서준하의 슬립 스트림을 탑니다! 이번 시즌 처음으로 보타스가 선두 자릴 노리는데요...!”
“아! 타이어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직선 구간 스피드가 훨씬 빠릅니다!”
15턴을 빠져나온 두 선수. 브레이킹 포인트를 최대한 늦춘 보타스가 선두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며 페라리카에 바짝 붙었다.
“이렇게 되면 다음 DRS 존에서 추월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다시 한번 앞차의 뒤에 바짝 붙은 보타스. 막누스에 이어 페라리의 루키까지 단 한 번의 어택에 무너지는 상황이야말로 그가 원했던 순간이었다. 아직 추월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다가올 코스들을 두고 보타스는 조금씩 희열을 느끼기 시작했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어느새 서준하의 윙미러로 보이는 메르세데스의 경주차. 그만큼 보타스의 현재 페이스는 굉장히 빨랐고, 스트레치 돌파 속도는 압도적이었다.
-어쩔 수 없어. SS 타이어의 피크 타임이다. 하지만 계속 앞으로 치고 나가는 걸 허용해선 안 돼. 1~2초 사이로 격차를 유지해라, 준하야
팀 라디오에 울려 퍼진 롭의 목소리. 보타스는 최고 속도를 낼 수 있는 타이어를 서준하와 동일한 타이밍에 교체했기에, 현재 직선 구간에서 그의 속도에 견주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코너에서만큼은 격차를 벌리면서 보타스의 타이어 관리를 방해해야 레이스 막바지 서준하에게도 기회가 온다.
‘확실히 브레이킹 감각이 절정에 달했어...’
눈앞에서 펼쳐지는 보타스의 트레일 브레이킹은 전생을 통틀어 서준하가 봤던 그의 주행 가운데 가장 날카롭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지금이 F1 생애 첫 우승을 따낼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기 때문인 듯했다. 하지만,
‘그걸 반복해서 쓴다면, 결국엔...’
보타스가 직선 구간에서 격차를 좁힐수록 서준하는 코너 공략에 집중해 격차를 벌렸다. 옵션 타이어의 피크 타임에도 끝은 있다. 피니시까지 남은 열 바퀴, 물밑으로 보타스를 유인하기 위한 전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
“마지막까지 모르겠는데요...?”
여섯 바퀴를 남겨둔 3차전 레이스. 바레인 서킷으로 모여든 스포츠 기자들 사이로 포뮬러 B의 기자 존이 편집장을 향해 말을 꺼냈다.
“지금 추월과 재추월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어요. 그런데도 막누스랑 격차가 큰 걸 보면, 두 선수 정말 대단하네요.”
타이어 교체 이후 선두 자릴 두고 엎치락뒤치락하는 서준하와 보타스. 덕분에 지켜보는 기자들은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곁에선 편집장 역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두 선수의 주행을 유심히 관찰하는데,
“둘 다 오늘 우승을 가져갈 자격이 있어. 하지만 디펜스 능력만큼은 서준하가 훨씬 뛰어난 것 같구만.”
“음... 그런가요?”
편집장의 말이라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였지만, 존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지금 상황은 두 선수 모두 상대의 공격을 허용하며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보타스가 뒤에 있을 때 서준하의 움직임을 한번 잘 살펴보게.”
다시 한번 발생한 선두권 배틀. 두 사람의 주변 슈퍼 스크린에는 아예 두 선수만을 담은 경기 장면이 등장했다. 마침 서준하가 다시 한번 선두에 오르자, 편집장이 손을 뻗어 그의 움직임을 가리켰다.
“지금 페라리카를 잘 보게. 보타스가 아웃라인으로 추월하려 하니까 라인을 바꾸는 게 보이지? 그리고 아주 살짝 브레이킹을 걸어서 보타스의 쪽으로 차를 밀어붙이고 있어.”
“아, 정말 그러네요... 근데 얼른 도망가기도 바쁠 텐데, 왜 브레이킹을 하는 거죠...?”
아주 미묘했지만, 앞선 서준하는 오히려 보타스와의 격차를 좁히는 행동을 일부러 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보타스 경주차의 일부분을 파손해 페널티를 받을 수도 있는 상황. 피니시까지 얼마 남지 않은 레이스라 더욱 이해하기 힘든 움직임이었는데,
“압박은 뒤에서만 가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지금 서준하는 앞에서 보타스를 압박하고 있네. 레이싱에서 디펜스는 단순히 상대의 추월을 막는 행위만이 아니야.”
“그렇다면...?”
“아주 적은 움직임으로 내 타이어와 페이스는 관리하면서도, 상대의 타이어 관리에 방해를 주는 것. 이런 서준하의 움직임 덕분에 보타스가 타이어를 낭비하고 있지 않나.”
앞차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추격자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특정 코스에서 자신의 가까이에 붙는 서준하 때문에 보타스는 어쩔 수 없이 급 브레이킹을 사용하고 있었다.
“F1 그랑프리를 우승한다는 건 운도 중요하지만, 그 드라이버가 엄청난 실력자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셈이지. 확실히 저런 아슬아슬한 테크닉까지 완성도 있게 구사할 줄 아는 선수가 세계 최고의 레이싱 드라이버가 되는 거야.”
“어쩌면 오늘 정말 서준하가 우승할지도 모르겠군요...”
“아마 그럴지도... 실력 면에선 서준하가 한 수 위네.”
F3 시절부터 봐온 어린 선수가 또 한 번의 이변을 앞둔 상황. 말을 마친 편집장의 시선은 선두를 달리는 페라리 카에 고정됐다.
***
“이제 피니시까지 남은 랩은 단, 두 바퀴! 하지만 여전히 선두권의 배틀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DRS 존만 들어갔다 하면, 뒤바뀌는 선두 자리. 일곱 바퀴 내내 1초 격차를 유지하며 어느 누구도 쉽게 승리를 굳히지 못했다.
“보타스가 서준하의 슬립 스트림에 들어가면서 DRS ON!”
그러던 그때, 56랩의 첫 번째 DRS 존 진입을 앞두고 보타스가 또다시 추월을 시도했다.
“다시 한번 보타스가 서준하의 우측으로 튀어나오는데요!!”
이어지는 우측 코너 4턴 진입에서 안쪽으로 파고드는 보타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중계진이 또다시 순위가 뒤바뀔 것을 예상하는데.
“아! 예상과 반대로 4턴을 먼저 빠져나오는 건 서준하! 서준하가 선두 자릴 유지합니다!!”
“보타스...! 혹시 파이널 랩까지 기다리겠다는 건가요?!”
분명 앞으로 나올 수 있는 기회였음에도 선두 자리로 나오지 않던 보타스. 갑작스럽게 달라진 그의 모습에 중계진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왜 안 나온 거지? 파이널 랩을 노리려는 건가?!
의아한 건 롭 역시 마찬가지. 패턴을 깨는 행동에 긴장감은 더욱 높아지고 말았다. 그러던 그때,
“아니, 쟨 끝났어...!”
-뭐?!
갑작스러운 서준하의 말에 당황한 롭. 반사적으로 타임 로그로 눈을 돌리며 상대와의 격차를 살폈다.
-...!!!
1초 안을 맴돌던 격차가 어느 순간 2초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다시 서킷으로 고갤 돌리자, 이제는 육안으로도 그 격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건 내가 이겼다!!!”
특정 코스에서 타이어의 그립감이 급격히 떨어지고만 보타스. 섬세한 페달링 덕분에 상대를 따라붙었다는 건 엄청난 착각이었다. 피니시 직전 SS 타이어라는 불리함, 트레일 브레이킹과 라인 크로스를 수차례 반복했던 그의 타이어는 한순간에 한계에 이르고 말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요?! 계속해서 격차가 늘고 있습니다!!! 환호하는 티포시와 페라리 팀!!!”
마치 퀄리파잉의 마지막 플라잉 랩을 달리듯 질주를 시작하는 서준하. 파이널 랩에선 고의적으로 상대에게 붙지 않고 앞으로 쭉쭉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니시!!! 페라리의 서준하가 바레인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합니다!!!”
오늘 레이스 최고의 장면들을 몇 차례 보여준 서준하의 페라리카가 가장 먼저 체커기를 받았다.
“예쓰! 예쓰!! 예쓰!!!”
-네가 가장 빨랐어, 준하야! 오늘은 네가 세계 최고의 드라이버다!!!
스타트 라인 펜스로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감격에 차 소리를 내지르는 서준하. 울음과 기쁨이 한데 섞인 목소리가 전 세계에 방송됐다.
“F1 최연소 그랑프리 우승과 더불어, 오늘 결과로 월드 드라이버 챔피언 종합 랭킹 1위는 서준하 선수입니다!!!”
페라리의 통산 226번째 승리와 710번째 포디엄 피니시를 이끈 서준하. 환생 후 그의 첫 번째 포뮬러 원 그랑프리 우승이라는 영광스러운 업적을 달성했다.
< 파이널 랩을 노리려는 건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