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시 함정이 있었구만 >
‘1턴 캅스, 여기는 바로 옆이 벽이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어.’
스타트 초반, 서준하를 맹렬하게 압박하고 있는 해밀턴. 홈스트레치를 달리며 1턴 진입에서 자신이 파고들 라인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다시 한번 인라인을 타서 최단거리로? 아니면 바깥 라인을 타서 스피드 경쟁을 붙여봐?’
홀샷(레이스 스타트 직후 1코너에 진입하는 것)에서 본능적으로 택했던 인라인 추월 시도가 막히고 말았다. 또 한 번의 실패를 막기 위해 이번에는 철저하게 상대와 자신의 상황을 분석하는데,
‘그래, 엔진 차이를 살리자. 어디 견딜 수 있나 보자고, 페라리...’
2010년대 참가 팀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파워 트레인을 보유하고 있는 메르세데스. 엔진 파워의 장점을 살리기로 마음먹은 해밀턴이 1턴 진입을 두고 최대한 바깥쪽 라인을 타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바바바바.
해밀턴의 경주차가 1턴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로이스, 이번엔 너무 바깥쪽으로 빠졌다.
연석 바깥으로 사이드가 긁혀 흙먼지가 일었고, 덕분에 그의 움직임을 알아챈 서준하가 곧바로 진로를 막아섰다.
“알아.”
사실 런오프로 빠진 건 의도한 움직임이었다. 상대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해밀턴이 압박을 시작했다.
‘...이제 넌 1턴에 들어올 때마다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어.’
이후에도 해밀턴은 추월 포인트의 안쪽과 바깥쪽 모두 추월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후 분명한 추월 기회를 만들어갔다.
“스타트 초반 중하위권에선 배틀이 치열한 가운데, 아직 선두권에선 순위 변동이 없습니다.”
“오늘 레이스 초반 해밀턴의 움직임이 굉장히 조심스럽지 않습니까? 한 번쯤 과감하게 배틀을 해 볼 만하지만, 무리하지 않는 모습이군요.”
해밀턴은 오늘 레이스 승리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준비했다. 공식 행사 일정에 참가하는 대신, 실제 레이스에서 벌어질 모든 상황에 대해 자신만의 전략을 세웠다.
‘이제 다음 랩 정도면 가능해.’
성적이 떨어질 때마다 그의 주변에선 라이프 스타일을 비난하지만, 실제 자신은 시뮬레이션이나 기본 트레이닝조차도 소홀한 적이 없었다. 시즌 초반 몇 번의 실수를 두고 몰락이나 실패 따위의 수식어가 붙는 상황이 너무나 우스웠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10랩 가까이 서준하를 몰아세우는 데 성공했다. 이제부터는 페이스를 끌어올리며 추월을 시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
비가 내릴 듯 말 듯 어두웠던 노샘프턴의 하늘. 경주차 주변으로 들이닥치는 갑작스러운 바람을 의식함과 동시에 팀 라디오로 무전이 날아들었다.
-... 보이나, 로이스?
“그래, 온다.”
실버스톤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손님, 비구름. 선두의 움직임에 집중하던 해밀턴의 시선이 주변으로 향했다.
-소나기로 보인다. 타이어 상태 체크해서 곧바로 피트 인 타이밍 전달하겠다. 잠시...
레이스 도중 비가 내리면 피트 승탑 타이밍과 타이어 전략은 레이스의 승패를 가를 정도로 중요하다. 새로운 변수에 대처하기 위해 보노가 엔지니어들과 전략 회의에 나서던 그때,
[Race Control Message]
[VSC] [VSC] [VSC]
한두 방울 내리던 비가 순식간에 폭우로 변하며 혼란스러워진 실버스톤 서킷. 운영진들이 대형 사고에 대비해 경기를 중단했다.
열 바퀴를 꾹 참아왔던 메르세데스 팀으로선 기운이 쭉 빠지는 순간. 하지만 이어지는 해밀턴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담겨있었는데,
“타이어 준비해, 이번 랩 곧바로 교체한다.”
지금 그의 머릿속으론 16시즌 영국 그랑프리가 오버랩 되고 있었다.
“차라리 잘됐어...!”
지난날 자신의 우승 레이스 내용을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
“레이스 시작 때 트랙의 온도는 31도까지 올라갔었는데요. 소나기가 내린 지금 현재 온도는 28도까지 내려갔습니다.”
세 바퀴째 VSC가 지속되며,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타이어 교체를 진행했다.
“트랙이 뜨겁다고 얘기할만한 상황은 아니군요. 그렇다면 젖은 트랙과 차가운 트랙에서 퍼포먼스가 좋은 팀들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레이스를 펼칠 수 있겠습니다.”
이제 슬슬 비가 그치기 시작하면서 VSC 종료가 예상되는 가운데, 서준하도 피트 스탑에 들어갔다.
“흐음, 메카닉들 손에 들려있는 타이어는 초록색, 인터미디어트 타이언데요. 선두 서준하의 선택이 조금 의외군요.”
2위 해밀턴과 3위 보타스 등 순위권 경쟁자들 대부분이 웨트 타이어로 교체한 상황. 선두 차량의 새 타이어를 보고 중계진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번 시즌 서준하의 행보도 그렇고요. 아무튼 정말 예측하기 힘든 선수인 건 분명합니다.”
비는 그치고 있었지만, 노면은 이미 충분히 젖은 상태였다. 인터미디어트 타이어도 미끄러질 위험이 있어 보였는데,
부와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앙.
-투입과 동시에 VSC 해제될 것 같아. 나가자마자 바로 속도를 높여야할 듯!
중계진의 걱정과 달리 페라리 팀은 여유로웠다. 오히려 리스타트 초반을 조심하라기보단 빠르게 대열에 합류하라는 오더가 떨어졌을 정도. 피트레인을 빠져나온 서준하도 팀과 같은 마음이었다.
-오늘은 팀을 믿고 달려! 미끄러져도 그건 네 책임 아니니까 걱정마라, 준하야!!
“Copy...!”
서킷 복귀와 동시에 과감하게 속도를 높이자, 경주차 뒤로 커다란 물보라가 뿜어나왔다.
오랜만에 맞는 레인 컨디션은 어색하지 않았고, 지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비가 그치면 레코드 라인은 반드시 마른다...!’
추적추적 계속 내리는 비였다면, 웨트 타이어를 선택했겠지만, 곧 있으면 소나기는 그칠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레인 컨디션에서 선두에서 달린다고, 보수적으로 레이스를 하는 건 서준하의 스타일이 아니다. 웨트 컨디션 이야말로 진짜 실력 차이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젖은 노면은 나만 위험한 게 아니야.’
스프린트를 만들며 경주차 무리에 들어서는 서준하. 이제 대열에는 피트 스탑 이전보다 더욱 무거운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촤아아아아악.
끼이이이익.
“VSC 종료! 16랩 레이스 재개됐습니다!”
종료와 동시에 서서히 속도를 높이는 경주차들. 조금이라도 타이어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 그립을 찾으려 안간힘을 썼다.
“참가자 전원 타이어 교체 완료했습니다! 사실상 영국 GP가 새로운 흐름으로 전개되는군요...!”
물보라로 인해 경주차 후방의 깜빡거리는 불빛을 제외하고, 좀처럼 트랙의 상황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끼이이이이이이익.
콰가가가가쾅.
고속 슬라럼 이후 더 뷰(THE VIEW) 스탠드로 울려 퍼진 소리는 현재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아! 리스타트와 동시에 11턴에서 사고가 난 것 같은데요?!”
비가 그치고 다시 빠르게 달릴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서킷 전역 슈퍼 스크린으로 미끄러진 차량의 모습이 등장했다.
***
“역시 함정이 있었구만.”
리스타트 이후 벌어진 사고 장면을 지켜보는 메르세데스 팀의 피트 월. 11턴에서 테오 감독과 스태프들의 시선이 향했다.
“작년에도 그랬잖습니까. 저 주변으로 요철이 심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겁도 없이 실버스톤에서 인터미디어트를 택하다니. 데이터가 있을 텐데도 저런 선택을 한 게 신기하군.”
“비가 그쳤으니까 앞으로 치고 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욕심이 부른 죄가 아니고 뭐겠나.”
드라이 컨디션에서도 요철 때문에 브레이킹 도중 사건 사고가 많았던 11턴. 이번에도 많은 물이 고였고, 요철로 인해 물이 잘 마르지 않았다. 결국, 인터미디어트 타이어를 장착한 드라이버들의 레이스를 망칠 수 있는 함정으로 작용하고 말았는데,
“젠장! 이번엔 또 뭐 때문이야?!”
애비에서 스핀한 베를라인이 그래블에 빠졌고, 위험한 위치에 차량이 멈췄기 때문에 잠시 동안 또 한 번의 VSC 상황이 선언됐다.
“흐음...”
경쟁 차량들의 낙오에 반해 메르세데스의 경주차들은 안정적이었다. 덕분에 피트 분위기는 밝았지만, 테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이런... 베를라인이 페라리를 돕는구만.”
테오의 곁에선 라우다도 무거운 얼굴로 스크린을 바라봤다. VSC라도 경주차들은 계속해서 서킷을 돌아야 하는 상황. 이번에도 확실히 이득을 챙기는 선수는 다름 아닌 서준하였다.
다행히 2랩 만에 레이스는 재개됐고, 메르세데스 팀의 예상대로 아쿠아 플레이닝(수막현상)은 여전히 버티기 힘든 수준이었다.
“아! 지금 또 뒤쪽에서 그로장과 마싸가 불안해 보이는데요. 그립이 없으니까 언더스티어가 계속 나와요!”
인터미디어트 타이어로 트랙에 나온 드라이버들은 일부 마른 구간에서 빠른 속도를 냈지만, 여전히 많은 물이 고인 구간에서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서준하! 선두를 달리는 서준하도 언더스티어가 나고 있습니다!”
“미스를 포착한 해밀턴이 따라붙는데요...!”
웨트 타이어로 평소보다 속도를 낼 순 없었지만, 경쟁자의 빈틈을 포착한 해밀턴이 더욱 가까이 붙어 추격을 시작했다.
“21랩 해밀턴이 서준하보다 랩타임이 더 빨라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한두 바퀴 내로 충분히 추월을 노려볼만하겠는데요?!”
“아! 페라리 팀 타이어 초이스가 아쉬운 상황입니다! 이런 웨트 컨디션은 레인 마스터, 세나가 돌아와도 속도를 내기 힘든 상황이에요...!”
선두 경쟁이 다가올수록 환호하는 메르세데스 팬들과 선두 차량이 미끄러질까 초조해하는 티포시들의 표정이 극명하게 갈리고 말았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촤아아아악.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물웅덩이를 피해 최대한 레코드 라인을 따라 달리는 서준하. 그의 윙미러로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진 해밀턴의 경주차가 보였다.
-2.42초! 해밀턴이 붙는다!
“...!”
레이스는 치고 나가는 것보다 뒤에서 몰아붙이는 게 훨씬 즐겁다. 스타트부터 계속해서 자신을 압박하며 웃고 있을 해밀턴의 얼굴이 보이는 듯한데,
‘거의 다 말랐어...!’
첫 번째 경기 중단 이후 아홉 바퀴를 넘어서자, 이제 조금씩 레코드라인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바짝 달라붙은 추격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이젠 끝이다!!!’
점점 더 많은 그립이 느껴지자 자신감이 부쩍 올랐고, 카운터 스티어링을 날리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잘 버텼어! 이제 보여줘!!!
코너 탈출을 하며 재빠르게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서준하가 온 신경을 스티어링 휠과 브레이킹 페달에 집중했다.
끼이이이이이익.
코너 탈출과 동시에 타이어가 마른 노면 위에 닿은 걸 확인한 서준하.
-좋아! 그렇게 타이어를 바짝 달구는 거야!!!
스티어링을 비틀며 타이어의 물기를 날려버리는 테크닉을 선보였다.
< 역시 함정이 있었구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