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F1 레이서-192화 (192/200)

< 하지만 내일은 상황이 다르잖아 >

“해밀턴이 라인을 바꾸는 와중에 뒤에서 끼어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가요? 라인을 바꾼 거라기보단 진로를 막은 것처럼 보이는데요?”

17라운드 퀄리파잉이 끝난 관제타워의 레이싱컨트롤. Q3 충돌 사고에 대한 판정을 내리기 위해 심판관들이 저마다 의견을 꺼내놨다.

“해밀턴이 진로를 막을 이유가 있을까요? 이게 레이스도 아니잖아요, 실비아.”

상황실 스크린으로 다시 등장한 사고 장면.

“이유야 충분히 있죠. 경쟁자의 플라잉 랩이었고, 기록 달성을 방해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그랬을 수도 있는 거 아닐까요?”

해밀턴이 이미 공간을 선점한 와중에 서준하가 뒤에서 끼어들었다는 의견과 아직 아웃 랩을 마치지도 않는 해밀턴이 고의적으로 서준하의 어택을 방해했다는 의견.

사고 장면을 다양한 각도에서 수십 번 돌려봤지만, 스튜어드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미카, 사고 장면 20턴 안쪽 카메라에서 찍은 걸로 다시 재생해보게.”

매 판정마다 어떤 페널티를 적용할지 의견이 엇갈린 경우는 많았지만, 오늘처럼 페널티를 적용할 대상을 정하지 못해 심사가 길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심판관들의 의견을 듣던 스튜어트 위원장 데렉이 사고 장면을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흐음...”

시즌 후반 모든 팀들의 순위에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한 경기였기에 위원장은 신중했다.

“위원장님, 선수들 모두 대기실로 모였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

“일단 선수들 보내고 좀 더 시간을 가질까요?”

서준하가 파고드는 타이밍도 자연스러웠고, 해밀턴이 빠른 돌파를 위해 라인을 변경하는 움직임도 자연스러웠다.

영상만으론 누구의 잘못이 크다고 판정을 내리기 힘들었는데,

“아니, 내일까지 끌고 갈 수 없지. 결정을 지어야해... 그러니까...”

페널티를 적용할 대상은 불확실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충돌 이후, 서준하의 뒤를 달려오던 다른 어태커들이 속도를 줄였던 상황. 두 선수의 충돌로 다른 참가자들이 손해를 본 건 분명하다.

끼익.

심판관들과 회의를 통해 결론을 지은 위원장이 선수 대기실로 들어왔다.

“오늘 스튜어드들의 퀄리파잉 판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Q1의 SC 상황입니다...”

평소와 같이 음료를 마시며 여유를 부리는 선수들도 있었지만, 몇몇 선수들의 표정은 상당히 어두웠다.

“맥라렌의 스토펠 선수, 감속 사인에도 충분히 속도를 줄이지 않는 행위는 앞차와 사고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5초 페널티를 부여하겠습니다. 다음으로...”

판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지만, 명백한 실수였음을 인정한 스토펠이 위원장의 말에 고갤 끄덕이고,

“이제 Q3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해 판정 결과를 말씀드릴 텐데요...”

이번 라운드 모든 선수들의 운명을 뒤바꿀 판정. 순간 엄청난 긴장감이 대기실에 흘렀고, 모든 이의 시선이 데렉에게로 향했다.

“심판진들은 이번 충돌 사고를 어느 한 명의 과실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

“...!”

“따라서 서준하 선수와 해밀턴 선수 모두에게 3그리드 페널티(출발 순서를 세 단계 낮춤)와 슈퍼라이센스 벌점 2점을 부여하겠습니다.”

위원장의 말에 선수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데렉의 가장 가까이 있던 해밀턴은 어깨를 들썩이며 어이없다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막누스를 비롯한 순위권 참가자들의 얼굴은 한층 밝아졌다.

“따라서 내일 레이스 두 선수의 최종 스타팅 그리드는 각각 4위와 13위로 결정됐습니다.”

“왓?! 13그리드?!”

“이의 신청은 제 코멘트가 끝나면 받도록 하죠. 자, 다음으로 내일 레이스...”

이후 스튜어드들과의 면담에서 서준하 역시 자신의 의견을 항변했지만, 판정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저희 심판관이 분석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오히려 서준하는 사고 영상을 다시 보면서 좀 더 강한 페널티가 적용되지 않았음을 다행이라고 느꼈다.

영상으로 봤을 땐, 해밀턴의 주장처럼 자신의 차량이 무리하게 끼어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

‘해밀턴이 13위라...’

미국전 승률이 83%가 넘는 해밀턴. 아무리 그런 최강자라도 13번 그리드라면 순위권 도약은 거의 불가능하다. 서준하로선 상당히 부담이 준 셈이었다.

“잠깐만요! 준하! 잠깐만요!”

관제타워에서 선수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기자들이 서준하 주위로 모여들었지만, 서준하는 이를 무시한 채 팀 하우스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판정 나왔어? 어떻게 된 거야, 준하야.”

심각한 표정의 서준하가 피트를 박차고 들어섰다.

“롭, 내일 스타팅 그리드 보여줘 봐.”

더욱 감정적으로 변하기 쉬운 이때, 그저 다음 스텝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하다.

“내 앞에 세 명 누구야.”

레이스 직전 휴식 따윈 없다. 피트에 도착한 서준하가 전략팀을 긴급 소집했다.

***

[컨스트럭터 챔피언십 스탠딩즈]

[Pos / Construtor / Points]

[1~16 라운드 종합]

[1. 스쿠데리아 페라리: 540]

[2. 메르세데스: 395]

[3. 레드불 레이싱: 315]

[4. 포스 인디아: 159]

......

퀄리파잉이 끝난 저녁, 판정 결과를 전해 들은 안토니아치가 아리바베네의 집무실을 찾았다.

“챔피언 확정까지 남은 포인트는 27포인트. 내일 메르세데스 드라이버 모두 포디엄에 오르는 건 불가능해 보이고... 사실상 WCC는 확정이구만.”

미국전에서 메르세데스가 1, 2위를 차지하더라도, 27포인트만 획득하면 WCC 챔피언을 확정 짓는 페라리 팀. 오늘 해밀턴의 페널티 소식과 페텔의 폴포지션에 상황은 더욱 유리해졌다.

“그렇다면 이제 잡아야 할 건 WDC인데...”

“준하가 뒤로 밀렸지만, 페텔이 폴포지션이라 희망적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일도 충분히 힘겨운 레이스가 될 뻔했으니까요.”

스타팅 그리드가 바뀌면 그에 따른 레이스 전략도 달라져야 한다. 코치진의 고민이 깊어지고,

“흐음, 그렇지. 내일 레이스 전략이 중요하겠구만.”

사실상 페텔은 WDC의 반전을 노리기 힘든 상황이다. 이미 WCC 역시 페라리가 우세한 시점에 페텔의 활약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할 것으로 보였는데,

“그래서 말입니다... 감독님...”

안토니아치가 이곳을 찾은 이유를 말하려는 순간,

“준하의 언더컷 타이밍을 잘 잡아주게.”

이미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감독의 말투. 아리바베네가 창밖으로 고갤 돌리며 얘길 꺼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의 의중을 알아챈 안토니아치가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는 집무실을 빠져 나와 팀 하우스 내 회의실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터벅 터벅.

“오늘 타이어 상태로 봤을 때, 열여덟 바퀴 이상은 무리야.”

“그렇지, 아마도 두 번째 타이어 교체 시기가 빠를 거고. 잘하면 마지막에 한 번 더 피트 스탑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흠...”

회의실에선 전략팀원들과 아직 환복도 못한 서준하가 머릴 싸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한 시즌 만에 팀 내 진정한 에이스 드라이버가 된 듯한 서준하. 전략 파트는 물론, 엔지니어링 파트까지 팀 전체가 서준하를 따르고 있었다.

진정한 에이스 드라이버는 커멘더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건 감독도, 엔지니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불과 한 시즌도 되지 않는 기간. 서준하는 팀원들과 신뢰를 쌓고, 행동과 성과로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냈다. 전성기 시절 슈마허와 같은 리더십이 서준하에게서 보였다.

“마지막 피트 스탑은 하지 않는 게 좋겠구만.”

“어, 오셨어요. 디렉터 님.”

주로 한두 번의 피트 스탑 전략을 사용하는 미국 그랑프리. 안토니아치가 회의실로 들어서며 타이어 전략에 대한 의견을 드러냈다.

“첫 번째 타이어 교체를 서두르고, 두 번째 타이어로 최대한 버티는 게 좋겠어.”

“음, 저희도 그 방법을 생각해봤는데, 그러면 중후반 추월이 쉽지 않을 텐데요?”

갑작스럽게 등장한 안토니아치가 확신에 찬 말투로 전략을 꺼내놓자, 팀원들이 피드백을 이어갔다.

“설사 언더컷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타이어 하나로 후반부 압박을 버텨내기가...”

“쉽지 않겠지. 하지만 내일은 상황이 다르잖아.”

“상황이 다르다면...?”

어리둥절해 하는 팀원들의 시선이 안토니아치에게 향하고,

“선두가 페텔이지 않은가?”

“아 그렇다면... 페텔을...”

전략 감독의 말을 알아들은 팀원들. 페라리 팀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COTA 서킷을 질주하는 서준하의 페라리카. 2턴에 진입한 서준하의 눈앞으로 6턴까지 이어지는 코스가 펼쳐졌다.

‘여긴 조금만 엇나가도 스핀이다...!’

실버스톤의 마곳-베켓-채플의 고속 슬라럼을 오마쥬한 COTA의 흔들기 구간. 리드미컬하게 돌파를 시도했지만, 도로의 박자에 차량을 맞추기는 여간 쉽지 않았다.

‘리듬이 만들어지지 않아... 그렇다면 차라리 직선으로 달려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줄인다...!’

어딘가 달라진 듯한 COTA 트랙의 상태. 평소와 같은 레코드 라인과 돌파 전략이 먹혀들지 않았다.

곧바로 대응 방식을 달리하며 탈출 속도를 높이이기 위해 힘쓰는데,

‘롭, 전방에 트래픽 보고해줘.’

앞선 경쟁자들이 보이지 않는 상황. 다급한 서준하의 목소리가 팀 라디오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급변하는 트랙의 환경에 대처하는 것도 힘든 마당에, 롭은 대답이 없었다.

‘롭! 뭐 하고 있는 거야!’

순간 분노가 치밀은 서준하가 목소리를 높였다.

정신없는 섹터2 코스 돌파를 마치고, 기다란 백 스트레이트에 올랐는데,

‘...!!!’

순간 긴장이 풀려 주변을 둘러봤지만, 자신을 제외한 어떤 차량도, 마샬이나 갤러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무슨?!’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상황 파악에 들어서려는 순간, 직선 주로가 끝나고 또다시 COTA의 코스들이 서준하를 향해 날아들었다.

‘뱅크각이 달라졌어...!’

앞선 섹터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난이도보다 높아진 코스들에 서준하는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계속 변한다고...?!’

이후에도 서킷은 계속 변화했고, 자신이 적응할 때마다 그 모습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정신없이 수십 바퀴를 달린 서준하는 결국 이 드라이빙조차 즐기게 됐다.

그렇게 몇 바퀴를 더 돌다 어느 순간 강렬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

갑자기 경주차가 사라져버리며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어머, 잠깐 졸았나 보네?”

주변 시야가 밝아졌고, 대기실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무슨 꿈 꿨어?”

갑작스럽게 몸을 들썩거리며 잠에서 깬 서준하. 한서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전에는 이런 적 없었던 거 같은데, 이상하네...”

하지만 지금 그의 기분은 최고였다. 왜냐하면,

‘미쳤다, 이거!!!’

다양한 코스 돌파를 시도해 볼 수 있었던 최고의 기회.

수백 바퀴를 도는 동안 체력적인 부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시뮬레이션을 하는 것만 같은 느낌.

“응? 근데 좋은 꿈이었나 보네.”

현실과도 같은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서킷의 모든 변수를 체험한 듯한 기분에 서준하는 싱글벙글이었다.

“시간 됐다! 이제 나가자.”

대기실을 빠져 나와 트랙으로 이동하자, COTA는 이미 누군가의 등장으로 열기가 뜨거웠다.

“헤이, 와썹 브로!”

스타트 라인으로 등장한 서준하를 향해 손을 흔드는 2미터의 거구.

“오, 준비됐어요?”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남자가 특유의 포즈를 취하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 하지만 내일은 상황이 다르잖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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