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원 1
손목시계를 두르고, 부드럽게 발을 감싸는 진회색 로퍼를 신었다. 외출 준비는 현관에 서서 낡은 스니커즈를 보는 것으로 끝이 났다.
겉모습을 구성하고 있는 것에는 하등 허술함이 없었다. 보이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내부를 구성하는 것, 박석연 하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제멋대로 빠져나가려 하는 내부의 구성 요소가 허점이라면 허점이었다.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하고 현관을 나섰다. 밖의 펜스 라인에 세워 둔 차에 올라타 곧장 에어컨을 작동시켰다.
운전대를 잡고 약속장소로 향하는 동안 차 내부는 서늘한 기운으로 바뀌어 나갔다.
속도를 올릴 때마다 내비게이션이 경고음을 뱉어 냈다. 내장형만 아니었으면 진작 떼어 버렸을 것이다.
밀리는 도로에서 벗어나고자 핸들을 꺾어 골목으로 들어갔다. 일방통행 길을 따라가다 목적지 라인의 도로로 다시 빠져나왔다.
저기 한정식 집 간판이 보였다. 내키지 않은 만남이지만, 시간을 더 지체하기도 싫었다. 한적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정문으로 걸어갔다.
자박, 자박, 자갈들이 발밑에서 마찰했다.
들어오자마자 안내를 받은 방에는 깔끔한 정장 차림의 늙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곧게 편 허리가 평소 바른 자세를 일삼는다는 걸 대신 알렸다.
우습게도 DNA는 숨기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나 자신이 저 사람의 피를 이어받았음을 잠시 실감했다.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빈말을 내뱉으며 좌식 의자에 마주 앉았다. 식사는 이미 끝낸 듯 테이블 위에는 수정과와 전통과자가 놓여 있었다.
그중 눈이 가는 동그란 양갱을 내려다봤다.
“갑자기 부른 것치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그런가요.”
양갱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버지는 의중을 알 수 없는 내 태도에 입술을 불쾌하게 씰룩댔다.
“여원이 너 전에 말이다. 그쪽에게 굉장한 실례를 했지 않느냐. 근시일 내로 찾아가서 따로 인사를 드리는 게 좋은 생각이 아닐까 싶다.”
예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말에 오랜만의 만남이 식상할 정도였다.
“그간 도와주신 부분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맞선은 별개고요.”
아버지가 수정과를 마시며 나를 날카롭게 훑었다.
“그래서 재운이를 이사 자리에 앉힌 거냐? 더는 내 지원을 받지 않으려고?”
“딱히 이유가 있던 건 아닙니다.”
“그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라면 다른 이로 알아봐 주마.”
“후계자는 준경이죠.”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스무 살 터울 나는 동생. 준경은 아버지가 느지막이 얻은 막둥이였다. 그것도 세 번째 부인에게서 얻은 자식이었다.
“그래, 말 한번 잘했다. 준경이 클 때까지는 네가 뒷받침을 해 줘야 하지 않겠냐.”
어떻게든 자신을 옭아매려 하는 남자를 서늘하게 쳐다봤다.
애틋한 부정이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미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피는 남보단 가깝지만 마음만은 먼 사이였다.
“저 남자 좋아합니다.”
탕!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던 수정과가 옆으로 넘어졌다. 나는 앞에 놓인 물수건을 내밀었다.
“오늘은 그 말씀 드리러 나왔습니다.”
“입에 침 하나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구나.”
“제가요?”
눈을 접고 웃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거짓말로 인해 일어나는 논쟁은 시간 낭비라는 것을.
“네가 무슨 소릴 하든지 난 상관없다. 네 의무만 제대로 이행해 준다면,”
“두 사람이나 감당할 생각 없습니다.”
박석연 하나만으로도 벅찰 지경이다.
“투자한 금액을 전부 회수한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말이냐.”
“준비해 두겠습니다.”
아버지가 투자금을 회수한다면 어느정도 타격은 입겠으나 자리를 잡은 이상 뿌리가 휘청이진 않을 것이다. 어차피 투자자는 당신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현재 상황에서 투자금을 회수한다는 소리는 말 그대로 본전만 찾는 셈이었다. 또한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아버지는 덤덤한 내 표정을 보더니 헛웃음을 자아냈다.
“희명이를 쏙 빼닮았어. 속에 불을 숨기고 살던 것마저도 말이야.”
“…….”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무감각했던 신경에 날이 올라왔다. 그녀를 입에 담는 것조차 용인할 수 없었다.
“난 희명이가 조용해서 좋았지. 그녀를 보고 있으면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더군. 같은 여자를 보고 있는 것만큼 지루한 일도 없지.”
일부러 나를 자극하는 듯한 말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남녀 간에도 길어야 몇 년이다. 얼마나 갈지 궁금하구나.”
“그렇군요.”
잠시 불어온 바람에도 날 놓으려 했던 박석연이라면 저 질문에 쉬이 대답하지 못했겠지. 돌이켜보니 입맛이 쓰다.
“그래도 노력해 볼 생각입니다.”
이미 충분히 의사는 전달했으므로 이 이상의 말은 불필요했다. 그는 끈끈함이 머물러 있는 손을 물수건으로 닦아 내렸다. 이어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언제가 되건 보기 좋은 꼴이 될 거다. 나와 희명이처럼 말이다.”
애써 찝찝함을 남겨 주려는 이처럼 충고 아닌 노여움을 내비쳤다. 발소리가 등 뒤로 멀어지고 문이 열렸다.
대나무 꽃석 안에 놓인 양갱 하나를 잡았다. 그대로 가져와 동그란 양갱을 손안에서 굴렸다.
지나치게 달고, 짙었던 맛으로 기억한다. 새삼 지금 맛보면 어떨지 궁금해졌다. 매만지던 양갱을 툭 바구니에 떨궜다.
수정과가 엎어진 자리를 정리하러 들어온 직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대로 포장 가능합니까?”
“꽃석 바구니하고 같이 말씀이세요?”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새로운 것으로 포장해 오겠다는 직원이 방을 빠져나갔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직원은 네모난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국화 무늬 이바지함이었다. 과한 포장에 설핏 미간을 찡그렸다. 결혼 예물이 담긴 것도 아니고 양갱일 뿐인데.
그래도 이걸 받고 방방 뛸 박석연을 생각하면 이 정도 화려함이야 어떤가 싶었다.
상자를 들고 일어나는 순간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형, 개나리랑 개살구 언제 데리러 올 거야?]
옆구리에 상자를 끼고 답변을 보냈다.
[지금.]
***
컹컹컹-
뒷좌석에서 털을 휘날리는 개 두 마리가 정신 사납게 장난을 쳤다.
예정대로라면 박석연과 같이 뒤의 두 녀석을 돌봐야 했건만 아버지 때문에 예정이 틀어져 버렸다.
정해 둔 일정을 벗어나는 것만큼 불쾌한 상황은 드물었다. 짜 맞춘 틀의 올이 풀린 순간, 나머지 올도 연달아 나가 버리는 법이다.
하나의 어긋남으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들은 수두룩했다. 물론 애초에 틀을 벗어나 있는 것 또한 존재했다.
내가 정해 놓은 틀 밖에 서서 어슬렁거리는 이색분자는 박석연이었다.
보고 있노라면 즐거워지는 솔직한 언사들도 그렇고, 적반하장인 것을 알면서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오기를 부리는 면들 또한 사람 기분을 좋게 했다.
‘제가……. 자전거를 밖에다 세워 뒀는데 도둑이 훔쳐 가려고 해서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꼴이 났죠. 그래도 아예 사라진 것보단 낫지 않을까요…….’
얼굴이 벌게져 씩씩대는 꼴이 생각났다.
건방졌지. 자전거를 그 꼴로 만든 게 황당하기도 했고. 한마디만 더 함부로 뱉었다면 회사에서 내쫓았을지도 모른다.
배를 움켜쥐고 끙끙대며 쓰러졌을 때 든 생각은, 뭐가 그리 무서울까 였다.
작고 상처 많은 강아지일수록 짖음이 잦다. 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아무 데서나 위협적으로 짖어 대는 것일 뿐 허세 같은 건 아니었다.
그렇게 굴면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고 혼자 남게 돼 버리는 상황이 온다는 것 또한 알지 못한다. 그게 박석연이었다.
펜스 옆에 주차를 하고 개 두 마리를 끌고 정원으로 들어갔다. 두 녀석의 목줄을 길게 늘어뜨려 고정대에 걸어 놓고 현관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열어 놓은 작업실 유리문 안에서부터 팩스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장 작업실의 짧은 계단을 걸어올랐다.
팩스를 확인하는 도중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상대를 확인하고는 통화 버튼을 누른 뒤 스피커로 전환했다.
[진 사장, 팩스 보낸 거 봤어?]
“방금.”
하재운이 길게 한숨을 뱉어 내는 소리가 들렸다. 복합기 앞에 서서 프린트되는 사진을 내려다봤다.
[너 걔한테 뭔 불만이라도 있었냐?]
“적잖이.”
[안 그래도 세노스에서 출셋길은 꽉 막혔다더라. 씨바, 나만 저주받게 생겼어. 그 새낀 다 내 탓 할 거 아니야.]
걱정하는 것치고 목소리는 가벼웠다.
“악의는 악의로 갚아 줘야지.”
[그건 그런데 너무 궁지로는 몰지 마라. 불쌍하지 않냐? 명색이 동기인데.]
“하 이사 인간미에 감동하겠는데.”
[퍽이나. 나도 석연이 엿 먹인 거 짜증 나긴 하는데 너무 궁지로 몰지 말라 이거지. 괜히 불똥 석연이한테 튀면 어쩌냐.]
“박석연 걱정은 내가 해.”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전화를 끊으려는 때에 하재운이 입을 열었다.
[진 사장님 직원 사랑에 감동할 지경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냐? 그 사진 퍼뜨리면 걘 완전 끝이야. 결혼도 했던 놈이잖냐.]
덧붙여 진여원 너답지 않다면서 물어왔다.
프린트가 끝난 팩스 세 장을 들어 올렸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복사본을 보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잘 보일까 고민 중이라.”
뭐? 누구한테?
딱따구리처럼 같은 말만 반복해 대는 하재운의 목소리를 끊어 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끌어내리고 책상 위에 팩스 용지를 던졌다. 뒤돌아 매직을 들어 유리벽에 쓱쓱 글씨를 써 내려갔다.
내일 박석연에게 전달할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