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연 2
“오늘 점심 햄버거 먹을까?”
곽일영이 지우개 가루를 뭉쳐 만든 미니 햄버거를 내밀었다. 손때에 색이 까무잡잡해져서 그렇지 모양은 그럴싸했다.
디자인하는 사람 중 대부분은 손재주가 좋은 편이었다. 나야 신발 만드는 것 제외하고는 영 젬병이니 열외였다.
“전 밥 먹을래요.”
“원래 밥은 상사가 결정하는 건데.”
곽일영이 웬일로 상사로서의 위엄을 보였다. 그래도 햄버거보단 밥이다.
의사를 바꾸지 않자 곽일영이 지우개 햄버거를 입에 쏙 넣었다.
“으악, 뭐 하세요!”
시위하듯이 입에 넣고 우물우물거리는 것을 입을 벌려 억지로 빼냈다.
내가 간과하고 있던 게 떠올랐다. 곽일영의 마의 구간.
“먹어요, 먹어. 상하이 스파이스? 빅맥? 어린이 세트?”
축축하게 젖은 지우개 덩어리를 쓰레기통으로 휙 던져버렸다. 곽일영이 삐친 기색을 지우지 않고 볼을 부풀렸다.
애가 따로 없다. 나 애들 때도 저런 심통은 안 부렸던 것 같은데.
티슈를 휙 뽑아 침이 묻은 손을 닦았다. 연달아 티슈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벌써 한 통 다 썼나 보다.
티슈 곽을 흔들어서 안을 확인하고 폐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저 자료실 다녀올 건데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빅맥.”
“그건 점심에요.”
동그란 머리통을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돈 남 말인가. 사장님 자전거 부수고도 멀쩡한 사람이 여기 있는데 말이다.
내가 진여원이었다면 해고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잘못은 내가 했지만 그때는 진여원을 오해해 미워했던 것뿐이다. 아마 지금이었다면 죽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석고대죄를 했겠지.
밖으로 나왔더니 사무실보다 복도가 더 시원했다. 사무실 창문은 블라인드로 가려 놨지만, 태양이 쏘아 대는 열이 어마어마했다.
건물 전면 유리가 미관에는 좋아도 여름엔 최악이었다. 복도를 걷다가 아차 싶어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4층 자료실은 회사 ID 카드가 있어야 입장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돌아온 김에 ID 카드와 함께 달 지난 패션잡지 여러 권을 챙겼다. 온갖 종류의 잡지를 다 구독하고 있으니 달마다 새로 들어오는 권수도 제법 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서 내려 인식기에 카드를 긁자, 투명한 유리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진여원 이제 보니 투명 참 좋아한다.
건물도 유리, 집 작업실도 유리, 심지어 포카리스웨트도 투명했다.
전에 인터넷상에서 읽고 뇌리에 강하게 남았던 글귀가 떠올랐다.
[성공한 CEO의 대부분은 소시오패스다!]
분명 진여원의 속은 시커멓게 어두울 텐데 외견이나마 투명하게 보이고 싶어 이런 디자인을 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나는 시원함을 만끽하며 복도 끝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제4 자료실부터 입구 쪽으로 다시 나올 생각이었다. 제일 끝에 있는 5 자료실은 잡지가 아닌 일반 서책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직원들 심신안정을 위해 마련된 도서대여실 같은 곳이었는데 정작 이용하는 사람은 손꼽았다.
4 자료실의 문을 열자마자 한기와 함께 갓 베어 낸듯한 나무 특유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발매일 순서로 잡지가 나열된 책장에 저번 달 것을 진열했다.
사람의 온기가 머무르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냉동고처럼 시원했다.
“으흥, 읏. 아앙.”
순간 손에서 놓칠 뻔한 잡지 한 권을 뛰어난 운동 신경을 발휘해 꽉 붙들었다.
귀신 곡소리가 아니라면 지금 들리는 이 소리는, 여자 신음이었다. 벽으로 가까이 다가가 귀를 바짝 대자 남녀의 헉헉대는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자료실이니만큼 각 방의 방음 환경은 열악한 모양이었다.
“목소리 좀 줄여.”
“아, 그치마안…….”
내가 얼굴을 맞댄 벽쪽에서 행위를 하고 있는지 적나라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당황해 눈꺼풀만 빠르게 깜박였다.
벽의 차가움에 얼얼해진 뺨을 떼어 냈다. 살금살금 걸어 마저 잡지를 다 꽂아 넣고 문을 슬며시 열었다.
들어올 때는 쾅 소리가 나게 닫았던 것 같은데, 옆 자료실에 있는 커플은 그 소리마저 못 들은 것 같았다.
3 자료실을 흘끔 보고 발소리를 최대한 죽여 걸었다. 퇴근까지 못 참고 회사에서 발정이라니! 물론 불꽃이 튀는 격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자질구레한 회사 물품들은 2 자료실에 모여 있었다. 이번 역시 살며시 문을 열어 티슈를 챙겨 나올 생각이었다.
문을 빠끔히 열고 내부를 봤다. 문고리를 잡고 있지 않았으면 점프를 뛰며 경기를 일으킬 뻔했다.
허준성이 품에 두루마리 휴지를 안고 좀 전의 내 자세와 같이 벽에 귀를 대고 있는 중이었다.
허준성도 나를 보더니 놀라 자세를 바로잡았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선생의 눈을 피해 짝꿍의 지우개를 빌리려는 학생처럼 개미 목소리가 뻗어 나갔다.
허준성이 입에 손가락을 붙였다. 그러고는 옆방을 가리켰다. 이제 보니 관음증까지 있는 놈인가 보다.
나는 허준성을 무시하고 각 티슈 두 통을 잡아 밖으로 나왔다. 허준성도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나를 따라 나왔다.
1 자료실 근처에 다다라서야 허준성이 푸하- 숨을 크게 터뜨렸다. 어차피 사람 숨 쉬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을 텐데 왜 참고 난리야.
“저 옆방에 있는 사람들 누군지 봤어요?”
허준성이 콕콕 3 자료실 방향을 찔러 댔다.
“아뇨.”
“에이……. 설마.”
허준성이 사람 궁금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놈도 충격이 웬만큼 컸는지 평소의 시비조는 온데간데없었다.
“제가 여기 올라오면서 본 사람은 사장님뿐인데 말이죠…….”
유리문 앞에 서서 움찔했다. 휙 허준성을 돌아보자 놈은 여전히 제3 자료실 쪽을 향해 있었다.
나도 같이 시선을 따라 옮겼다.
“직접……. 보셨어요?”
“사장님이 저랑 같이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왔거든요.”
“그럼 상대도요?”
“그건 모르죠. 4 자료실에서 한참 잡지 찾다가 여기로 넘어온 거라……. 우리 사장님 진짜 화끈하시네요.”
사장이 아니라 일개 직원이 회사에서 섹스를 했다면 바로 해고감이었다. 사회적 위치에 대한 편견을 새삼 실감했다.
진여원 그렇게 안 생겨서 화끈하게 밝히는 인간이구만. 허허허 웃으며 걸어 나가야 하는데 다리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부릅뜬 눈으로 3 자료실을 노려볼 뿐이었다.
진짜? 진짜라고?
저 안에서 여자와 그 짓을 하고 있는 게 진여원이라고?
‘목소리 좀 줄여.’
그 목소리를 다시 곱씹어 보니 진여원 같기도 했다. 아니 사실은 어떤 목소리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불륜을 저지르는 애인의 방 앞에 선 사람의 심정이 지금 딱 이렇지 않을까.
손발이 차게 식지만, 머리는 열이 들끓는 상태였다. 다짜고짜 자료실로 걸어가려는 때에 허준성이 내 팔뚝을 잡았다.
“어디 가요. 미쳤어.”
처음으로 허준성에게 고마운 감정이 들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자료실의 문이 잠겨 있었어도 박살 냈을 것이다.
복도 유리창에 등을 잔뜩 기댔다. 해는 반대쪽에서 비춰 등이 뜨거워질 일이 없는데 옷 안으로 열이 피어올랐다. 허준성도 갈 생각을 하지 않고 내 주변을 서성거렸다.
“갑시다, 얼굴 마주치면 어쩌려고 그러나 이 사람.”
퍽도 내 걱정을 해 주는 것 같은데 내 보기엔 허준성도 호기심 한가득이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사람 보는 내 눈이 바닥을 인증하는 건가.
어이없음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이미 경험을 통해 이 사람은 절대 아닐 거라는 확신이 얼마나 위험한 착각인 줄 알고 있지 않았나. 그런데도 진여원은 절대 아닐 거라고 믿었다.
지금 이 순간 미치도록 복도를 벗어나고 싶었다. 행여 자료실에서 나오는 사람이 진여원일 경우에, 나는 회사도 사람도 잃게 될 것이다.
별의별 생각들이 다 들었다. 남자인 나와는 플라토닉 러브, 몸은 다른 이에게 풀겠다는 심보일지도 모른다고.
그럼 어제 약속을 깬 것도 특별한 이유가 있던 게 아니라……. 차라리 잘된 건가. 더 빠지기 전에 현실을 알아 버렸으니.
그때였다. 달칵, 자료실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부터 베이지색 슬랙스에 무지 셔츠를 입은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다름 아닌 진여원이었다.
그를 한껏 노려보다가 다리에 힘이 풀릴 뻔한 것을 단단히 버텨 섰다. 지금 전신을 휩쓰는 감정은 단 하나, 허탈함뿐이었다.
진여원의 손에는 두꺼운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그는 서책들이 있는 제5 자료실에서부터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여전히 3 자료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옆에 선 허준성에게 속으로 이를 갈며 쳐다봤다.
애먼 사람 잡게 만들고, 하여간 인생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놈이다. 허준성은 뭐가 아쉬운지 입맛만 다셨다.
나는 안녕하십니까? 하고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왜 그렇게 노려봐.”
진여원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처음엔 3 자료실에서 나오는 줄 알고 노려봤지만, 아닌 걸 알자마자 눈에 힘을 풀었던 탓이다.
귀신 같이도 내 눈초리를 알아차렸나보다. 하긴 오죽 눈에 불을 담고 노려봤어야지.
진여원은 3 자료실을 쳐다보며 미간을 구겼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곳의 은밀한 소리가 5 자료실까지 넘어간 것 같았다.
어쩐지 한바탕 파란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허준성이 내게 쓱 몸을 가져왔다.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쳐 옆으로 물러났지만, 놈이 또 그만큼 거리를 좁혀왔다. 그리고는 내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석연 씨 때문에 곤란해졌잖아요, 그러게 내가 분명히 아까 내려가자니까.”
“애초에 이상한 소리 한 사람이 누군데요. 사장님이라면서요.”
나 역시도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말했다. 어느새 내 앞에 온 진여원이 책을 든 채로 팔짱을 꼈다.
“내가 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황급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그가 들고 있는 책의 제목이 한눈에 들어왔다.
진여원은 내 품에 안긴 각 티슈를 보더니 쓱 나를 지나쳐 갔다. 다행히도 허준성과 내 대화에 대해 추궁하지 않을 심산인가 싶었다.
그의 뒤를 허준성과 내가 부지런히 따라 걸었다. 엘리베이터로 향할 줄 알았는데 진여원은 비상계단으로 가고 있었다.
허준성이 길게 찢어진 눈 속의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렸다. 엘리베이터로 가야 하나, 계단으로 가야 하나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나는 각 티슈를 품에 안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허준성도 엘리베이터를 선택한 듯 내 옆에 섰다.
“박석연 씨.”
비상계단의 문을 연 진여원이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나를 불렀다.
“예.”
괜히 의심한 게 미안해져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의 뺨에 따끔거리도록 내리쬐는 햇빛이 닿아 있었다.
“누명 씌우는 취미는 언제 버릴 거야.”
“……!”
타앙, 그가 빠져나가자 비상계단의 문이 닫혔다. 진여원은 내가 그를 노려본 이유에 대해 알아차린 게 분명했다.
진짜 쥐구멍이 있다면 발로 부수고라도 들어가고 싶다. 허준성 때문에 괜히 의심한 것만 들켜 버렸다. 허준성을 힘껏 노려봐 주려다가 내 눈알의 안녕을 위해 간신히 참아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진여원이 사내섹스를 알면서도 아무런 충고 없이 넘어갔다는 것이다.
회사가 모텔이야? 저 안의 몹쓸 커플에게 이런 한 소리 정도는 할 줄 알았다.
“안 타면 나 그냥 내려갑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허준성이 빨리 타라며 성화였다.
“탑니다.”
만일 앞뒤 안 보고 3 자료실 문을 열었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2층으로 내려가는 짧은 시간 동안 엘리베이터 거울에 머리를 통통 박았다.
“아, 근데 진짜 누군지 궁금하네. 박석연 씨는 안 궁금해요?”
허준성이 턱에 손을 대고 누구팀의 누구인가, 애먼 사람들을 유추하기 시작했다.
“헛소문내시게요?”
“헛소문이라니?! 나를 뭐로 보고.”
언성을 높이던 허준성이 큼큼 헛기침을 했다.
내게 함부로 지껄였던 전적이 있으니 저러는 것 같았다. 양심이 아예 없지는 않네.
“그 뭐냐. 박석연 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였다. 허준성은 내리지 않고 나를 불렀다.
저렇게 진여원이 나를 부를 때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데 허준성의 부름에는 심기만 불편해졌다.
“말씀하시죠.”
“전에 말이죠. 그 뭐냐.”
뭐긴 뭔데. 자꾸만 뜸을 들이는 허준성을 불쾌하게 바라봤다.
“이번에 세노스 건도 그렇고, 내가 그쪽을 좀 오해한 거 같아서.”
그제야 허준성도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섰다. 놈은 벅벅 뒷머리를 긁으며 웅얼웅얼거렸다.
“뭐라고 하는 건지 잘 안 들리는데요.”
“거……참! 미안하다고요!”
허준성의 언성에 놀라 버렸다. 목소리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과 때문이었다.
“그……. 김대영이 말하기론 자기가 그쪽에게 가지고 놀다가 버려진 거라고 해서요. 이혼도 그쪽 때문이라고. 근데 생각해 보니 기획 가져간 것도 그렇고…….”
김대영의 천직은 디자이너가 아닌 시나리오 작가였나.
대체 어디서 약을 팔고 다닌 건지 감도 안 잡힌다.
“오해는 말아요. 그쪽이 대표님들 대학 동문이라 이제 와서 눈치 보는 건 아니니까.”
제 말만 한 허준성이 쌩 하고 나를 지나쳐 갔다. 누가 잡을세라 제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저 시비쟁이 허준성이 왜 저러지? 장염이라도 걸렸나? 그러나 이미 미운털이 여러 개가 단단히 박혀 있어 사과 한 번으로 전부 빠질지는 모르겠다.
우리 부서 사람들에게 종종 시비를 거는 것이, 한 번 정도는 이겨 보고 싶은 오기 때문이었나 싶다. 항상 말해 봐야 본전도 못 찾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각 티슈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창가를 따라 걸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기에 비 예보를 했던 기상청을 의심해야 했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신입이 내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나도 화답을 해 주었다.
허준성이 내가 게이인 것을 알고 있으니 저절로 소문이 퍼질 거란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반응을 보아하니 아직 소문은 생성되지 않은 것 같았다.
세상엔 보기만큼 나쁜 놈은 없나 보다. 보기만큼 착한 놈도 없듯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각 티슈를 옆구리에 꼈다. 문고리를 잡은 순간 진여원의 말이 저절로 곱씹어졌다.
누명 씌우는 취미.
그건 복합적인 의미겠지. 또한 처음으로 진여원이 오해에 대해 언급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학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내 오해를 받아도 풀 생각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마치 지금은 내게 어떤 오해도 받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계단으로 향하다 문득 멈춰 서 말을 던진 것만 봐도 그렇지 않나?
내 멋대로 착각한 거라 해도 좋다. 이번에는 내 눈이 틀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가 믿는 사람이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신뢰를 다시 한번 가져 보고 싶었다.
콩콩콩, 이미 심장은 내 의지를 벗어나 있었다. 이 안에 뛰는 걸 작동시키는 사람은 진여원이었다.
그리고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분명 진여원의 손에 들려 있던 건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였다.
***
그것과 이건 별개.
왜 이런 말이 있다.
아무리 상대방이 좋아도 자존감은 잡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면 자존감과 자존심이 충돌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차이점을 냉정하게 분석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 자신의 허세를 충족시키기 위해 상대방에게 오기를 부리는 건 자존심이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진여원에게 하고 있는 짓은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는 거였다.
불타는 금요일, 친구와 놀고 그를 만나러 간다 했으니 여기저기서 시간을 때워야 했다.
사실 친구라 부를 만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대학 때의 친분은 얕기 그지없었고, 게이로 소문나버려 그나마 있던 동기도 멀어졌을뿐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고 고교 때 친구들을 자주 만날 수도 없었다. 행여 어딘가에서 내 소문을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피해 의식 때문이었다.
나를 생판 모르는 이가 나를 손가락질하는 건 괜찮았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살갑게 대화를 나눈 이가 돌아서는 건 비수가 되어 꽂혔다.
낯부끄럽지만 없는 놈이 더 있는 척한다고 내가 딱 그 짝이었다. 사실은 일 끝나자마자 진여원의 집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왜 친구랑 놀다 오신다면서.
그런 말을 들으면 화부터 날 게 분명했다. 서러워지기도 하겠고.
내뱉은 말을 지키면 적어도 자존심은 지킬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자존감은 대체 어디로 증발해 버린 건가.
누군가 너 자신을 사랑하냐? 묻는다면 주저 없이 ‘예스’라고 하겠지만, 너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 있냐 물어보면 ‘아이 돈 노’였다.
서점에서 잡지책이나 뒤적거리는 게 자아존중을 위한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얄궂은 자존심은 불과 30분을 넘기지 못했다. 나는 잡지 가격보다 비싼 특별 부록이 딸린 것을 계산대로 들고 갔다.
부록은 여행용 파우치에 담긴 화장품 패키지 세트였다. 물론 내가 쓸 건 아니었다. 나름 볼 만한 화보가 있기에 부록은 엄마에게 줄 겸 구입한 것이었다.
엄마는 일주일에 한 번 병원을 찾는 일을 제외하곤 전보다도 더 괄괄해졌다.
규칙적인 운동은 할 만하지만, 야식을 못 먹는 건 참기가 힘들다며 툴툴대는 게 일과였다. 물론 내게 직접 말하진 않으셨고, 아버지에게 듣기로는 그랬다.
엄마 몸무게가 키가 큰 아버지에 버금가니 건강을 위해서라도 야식은 전면 금지였다. 특히 심장 수술을 한 사람들은 혈관이 막히면 위험하기 때문에 식이조절이 필수라고 했다.
쇼핑백에 담긴 잡지와 부록을 설렁설렁 들고 서점을 빠져나왔다. 서점 앞에서 나눠 준 부채로 얼굴을 부치며 근처 정류장을 찾았다.
확실히 여름은 여름인지라 이제야 겨우 해가 지고 있었다.
진여원의 집까지 한 방에 향하는 버스를 타고 에어컨 바람을 정수리부터 쬈다.
한여름이나 겨울만큼 자가용이 절실한 때가 없다. 안 그래도 여름이 지나기 전에 실기시험에 다시 도전해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드림카를 한 대 뽑는 거다.
실상 드림카는 무슨. 오피스텔 계약도 이번 해까지니 지금보다 가격이 저렴한 곳으로 이동하고, 남은 돈은 형편에 맞춰 차를 알아봐야 했다.
문득 서류 가방에 고이 담겨 있는 격려금이 탐이 나기 시작했다. 돌려주지 않으면 차를 뽑을 때 엄청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누가 보는 이 없는데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래 쓸데없는 욕심은 부리는 게 아니었다. 다 자신의 분수에 하나하나 맞춰 살아나가야 하는 거다.
아버지가 자주 하던 말씀이니 따라서 나쁠 것도 없었다. 아직 면허도 없는 주제에 헛물이나 켜고 있는 지금만 봐도 그렇지 않나.
정류장에서 또 10분을 더 걸어서 낮은 언덕을 걸어 내려갔다. 그의 자전거 뒤에 타 보슬비를 맞던 그 언덕이었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신기했다. 그때는 진여원의 정강이를 스파이크로 찍어 줄 생각만 가득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진여원은 나를 얼마나 또라이로 봤을까.
술주정에, 스파이크에, 반말에, 자전거 박살까지…….
손가락으로 세다가 자괴감이 들어 포기했다. 비글이라는 소리에 열부터 났었지만 충분히 그렇게 불릴 만했다.
그래도 이게 다 오해를 풀지 않았던 진여원 탓이었다. 제아무리 지옥견이라도 해도 사람 봐 가면서 행동하는 법이다.
진여원의 펜스가 점차 가까워지는 만큼 내 발걸음도 빨라졌다.
왜 이렇게 일찍 왔냐고 묻는다면 친구들 두고 당신 보러 왔다며 생색이나 내줄 생각이었다.
펜스 너머를 쳐다보자마자였다.
컹컹, 컹컹컹!
우렁찬 개 소리가 들렸다.
“개나리!”
반가움에 개나리를 부르자 녀석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꼬리를 맹렬하게 흔들었다.
오늘은 개나리 옆에서 같이 짖어 대는 다른 녀석도 있었다. 개나리보다 훨씬 큰 몸통을 가진 검은 개였다.
그런데 놈은 반가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내게 덤벼들 듯이 이를 보이며 컹컹댔다.
온통 까만 털에 입 주변과 네 발만 갈색이었는데, 미간의 주름 때문인지 더 험악한 분위기를 풍겼다.
견종이 뭔지 대충 짐작할 수는 있었다. 개들 사이의 조폭이라 불리는 로트와일러였다.
할머니 살아 계실 적 옆집에서 키우던 미친개가 저거와 똑같이 생겼었다. 개 훔치러 온 개장수 팔을 물어뜯어 놔 오히려 옆집 할머니가 치료비를 물어줘야 했었지.
지금 생각해도 한국 법 한번 이상했다. 도둑놈을 치료해 주는 이상한 세상이다.
대문의 벨을 두 번이나 눌렀는데도 진여원이 나와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전거는 저 안에 있는데 차가 밖에 세워져 있지 않은 걸 봐선 어디를 나간 듯했다.
사람 오라고 해 놓고 자기는 나가다니 뭐 이런 경우가 있나.
일찍 온 게 후회됐다. 쯧, 나는 혀만 차고 펜스를 훌쩍 뛰어넘었다. 나를 도둑 취급하는 로트와일러가 미쳐서 날뛰었다.
무슨 개 이빨이 호랑이 같냐. 한번 물리기라도 하면 뼈가 나갈 것 같았다. 목을 두른 쇠사슬이 끊어질 정도로 철컹철컹거렸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바람에 펜스를 도로 넘으려던 때였다.
깽-! 커다란 덩치에서 얇은 비명이 나왔다. 개나리가 로트와일러의 목덜미를 와작와작 씹고 있었다.
그러더니 컹컹컹, 로트와일러의 주변을 돌며 온갖 성질을 부려 댔다.
침을 질질 흘리며 나를 위협하던 로트와일러가 고개를 갸웃갸웃거리며 이쪽을 살폈다.
개나리가 로트와일러의 주둥이를 제 입으로 삼켰다. 그러자 로트와일러의 눈이 기가 죽은 것처럼 풀려 나갔다. 어째 둘 중에 개나리 서열이 더 높은가 보다. 불테리어도 원래 투견 견종이긴 했다.
쭈쭈쭈, 입으로 소리를 내자 바짝 세우고 있던 꼬리가 천천히 내려갔다. 흔들어 주지는 않았지만, 아까보다는 흥분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개에게도 저들만의 언어가 있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개나리, 이 기특한 자식.”
달려가서 쓰다듬어 주고 싶은데 아직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작교 역할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곧장 진여원에게 전화를 연결했다.
전화벨 소리가 얼마 가지 않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회사는 아닌지 주변이 다소 소란스러웠다.
“어디십니까.”
[밖.]
누가 그걸 모르냐.
“저 이미 집인데요. 안 계시는데 그냥 갈까요?”
[비밀번호 다시 알려 줘?]
그 쉬운 비밀번호 기억도 못해? 라는 듯했다. 도둑 들었다고 뻥치고 다 털어 갈까 보다.
“그럼 언제 오십니까.”
[내일.]
“예?!”
내 목소리에 개나리의 귀가 쫑긋거렸다.
“저 그냥 가렵니다.”
[개나리, 개살구 밥 주고 자고 있어.]
저 로트와일러의 이름이 개살구였다. 그러고 보니 입 주변 갈색털이 살구색 같기도 했다.
“내일 몇 시에 오시는데요.”
[새벽에.]
자정이 넘으면 내일로 넘어가는 건 맞았다. 난 하루 꼬박 새우고 내일 오후에나 온다는 소린 줄 알았다.
“혹시 강아지 밥이나 주라고 저 부른 겁니까.”
[강아지는 아니지.]
“개나 강아지나 다를 거 없죠. 이젠 막 공짜로 부려 먹으시려는 거 같은데 저 그렇게 안 쌉니다.”
[잔업수당 줄 생각인데.]
말이나 못하면 얄밉지나 않다.
“얼마 주실 겁니까.”
[규정 야근 수당 두 배.]
“예, 천천히 오세요.”
내가 먼저 뚝 전화를 끊었다. 실은 야근 수당 같은 건 안 받아도 그만이었다.
진여원 보러 온 거니까.
사장이라 바쁜 거 아는데 이틀 연타로 이 꼴이니 부아가 났다. 일부러 늦게 오려고 했던 내 심보를 알아차리고 그가 먼저 선수를 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건 심히 비약적이었다.
“야, 개살구.”
말꼬리를 늘이며 부르자 개살구의 늘어진 입술이 씰룩거렸다. 동시에 개나리가 앞발로 개살구의 뺨을 날렸다.
개나리의 아이큐가 사람 버금가는 건 아닌지 대견했다. 허리를 낮춰 천천히 걸어가자 개살구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새끼, 엄청 박력 있게 생겼네.
목줄이 닿을 거리까지 다가갔는데도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개나리가 내게로 오기 위해 용을 썼지만, 긴 목줄이 팽팽하게 당겨질 뿐이었다.
개나리는 뒷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앞다리를 허공에서 마구 흔들었다. 녀석에게 다가가 안아 주자 얼굴이고 목덜미고 할 것 없이 혀로 핥고 난리가 났다. 기쁨의 침 세례였다.
“자식, 그렇게 반갑냐?”
만지지도 못하게 발광을 해 대는 통에 엉덩이를 잔디에 붙이고 앉았다. 근육으로 두꺼운 몸을 끌어안고 만질만질한 배와 다리를 긁어 주었다.
녀석과 씨름을 하듯 한참을 토닥여 주자 개나리도 차츰 진정을 찾아갔다. 길게 찢어진 눈에 못생긴 얼굴은 여전했다.
개살구가 저 뒤에서 우리를 까만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올까 말까 망설이는 모양새였다.
“너도 이리 와.”
손을 까닥까닥하자 체조선수 도약하는 것처럼 힘차게 달려왔다. 공격하러 오는 줄 알고 기겁을 했지만 곧 개나리처럼 재롱을 부리기 시작했다.
생긴 것만 험악하지 하는 짓은 개나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진여원 동생이 키운 게 개나리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이렇게 맡긴 걸 보면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혹시 범인을 잡다가 어디 다친 건가?
전화를 끊기 전에 그것도 물어볼 걸 그랬다.
“나리, 살구. 너희 주인 또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성씨인 개자를 빼니 주먹만 한 애완견 수준의 이름이 탄생했다. 두 마리가 나란히 꼬리만 흔들었다.
“하긴 사람 말 알아들으면 그게 짐승이겠냐. 개나리, 오늘은 밖에서 자도 되겠네, 개살구도 있어서.”
컹컹! 이번엔 알아들었다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두 녀석의 엉덩이를 톡톡 때려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이 후덥지근해서 여태 모르고 있었는데 일어난 엉덩이가 축축했다.
잔디의 스프링클러가 돌아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바지 뒤춤에 손을 넣어 보자 팬티까지 젖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속옷이라도 사 오는 건데. 여기서 편의점까지 나가기도 귀찮았다.
녀석들 밥그릇에 사이좋게 사료를 듬뿍 쏟아부어 주고 현관으로 다가갔다.
6, 5, 4, 3, 2, 1. 비밀번호는 여전했다.
안으로 열리는 현관을 밀자, 기다렸다는 듯 진여원에게 덥석 안겼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의 심장은 달려왔던 나만큼이나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손바닥을 펼쳐 내려다봤다.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감각을 되새겨봤다.
내 손바닥을 두드리던 그의 심장 박동을 실제로 느끼고 싶었다.
나중에 진여원 잘 때 몰래 가져다 대 봐야겠다. 그냥 있을 때와 나를 의식하고 있을 때의 차이점이 어떤지 말이다. 만약 둘 다 똑같으면 나름 좌절할 테지만.
구두 한 켤레만 내려와 있는 현관에 나란히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섰다.
자연스레 시야에는 왼쪽에 위치한 유리 작업실이 들어왔다. 커다란 유리창을 무심히 보던 시선이 유심히로 변한 건 한순간이었다.
[박석연 간식]
유리 중앙에 진여원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글씨체는 운동화 박스에 적혀 있던 글귀처럼 무성의하기 그지없었다.
글자 밑으로 표시된 화살표를 따라가 보니 네모난 함이 놓여 있었다. 나는 작업실 계단을 껑충 올라가 함 앞에 쭈그려 앉았다.
자세 때문에 젖은 속옷의 면적이 늘어났다. 찝찝함이 더해졌지만, 옷을 말리기보다 이게 뭔지 확인부터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국화 무늬로 된 고급 천이 덧씌워져 있는 함을 열었다. 천과 같은 꽃무늬가 새겨진 양갱 여러 점이 비단에 감싸여 있었다.
중앙에 놓인 양갱들 말고도 먹음직스러운 약과 여러 개도 함께였다.
“이게 뭐야.”
웃음이 나왔다. 대체 주는 선물이라곤 만날 양갱이야. 돈도 많은 사람이 명품 옷이나 한 벌 좀 뽑아 주지.
나는 팥으로 만든 양갱을 잡아 투명한 비닐 포장지를 벗겼다. 한입 베어 물자 달달하고 감칠맛 나는 향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살면서 무수히 많은 양갱들을 먹어 봤지만, 이 녀석처럼 뒤가 깔끔한 단맛은 처음이었다. 달콤한데 상큼한 희한한 양갱이었다.
맛있는 건 양이 적다는 만고의 진리답게 진짜 조그맣긴 했다. 팥 양갱을 다 먹어 치우고 노란 빛깔이 감도는 녀석을 잡았다.
이건 먹어 보니 호박 맛이었다. 양갱은 팥이 최고지만 호박도 나쁘지 않았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사 오는 건지.
함을 들어서 이리저리 상표를 둘러봐도 어디 제품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국화꽃으로 수가 놓인 이런 함은 결혼 예물을 담을 때나 쓰는 게 아닌가 싶었다. 물론 직접 겪은 건 아니고 드라마를 통해 습득한 결과였다.
쭈그린 다리를 펴고 책상으로 걸어갔다. 디자인지 하나 없이 깨끗한 책상 위에 매직이 보였다. 매직 뚜껑을 뽁 소리 나게 열었다.
유리창에 있는 그의 글을 빤히 바라보다가 곧이어 그 밑에 글씨를 적어 나갔다.
[다음엔 팥 양갱으로만.]
내가 진여원보다 나은 점을 하나 발견했다. 글씨체는 내 것이 훨씬 깔끔하다는 거다. 의기양양하게 바라보는 것도 웃겨서 함만 들고 거실로 내려왔다.
모델 하우스 같은 집은 여전히 깨끗했다. 이 집에 어울리지 않은 낡은 스니커즈 또한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나는 버릇처럼 TV을 켜고 바지를 벗었다. 속옷도 훌렁 벗고는 욕실로 쫄래쫄래 걸어갔다. 젖은 부분을 세면대에서 빨고 탁탁 털었다. 끈적끈적한 엉덩이도 닦아내야 할 것 같아 손으로 샤워기를 들었다.
땀이 말랐다 났다 반복한 몸 또한 끈끈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샤워라도 할까 싶어 티셔츠도 벗어 전라가 됐다.
슈즈 디자인 일이 내 적성에 알맞은 이유 중의 하나는 굳이 정장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사장부터가 캐주얼한 차림이 대부분인데 직원이라고 눈치 볼 것도 없었다.
얼음장 같은 물을 몸에 끼얹자 더위에 늘어졌던 살들이 바짝 올라붙는 기분이었다.
욕실을 죽 둘러보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커다란 편백나무 욕조는 따로 목욕탕을 찾을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내 오피스텔 욕실은 간단한 샤워가 전부라 한 달에 서너 번은 동네 목욕탕을 찾아야 했다. 대학 때 어떤 놈이 너한테 남탕은 우리에게 여탕이나 마찬가지겠다는 말을 지껄인 적이 있었다.
우리 동네 목욕탕 와 봐라, 젊은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거의 아버지,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만 가득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남자에게 관심 있는 것도 아니고, 특히 너 같은 놈은 줘도 싫다고.
그때는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고 넘어가서 그런지 아직도 분이 쌓여 있었다.
몸을 닦은 수건의 보들보들한 느낌이 좋아 뺨에 문댔다. 우리 집 수건은 전부 개업 선물로 들어온 것들이었다. 수건에 전화번호나 글씨가 없는 걸 보니 이건 직접 산 것 같았다.
수건 하나에서도 삶의 질이 느껴지니 억울한 처사다.
식은 몸 위에 벗어 둔 셔츠를 걸치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빨아둔 속옷을 바닥에 펼치고 나서 바지는 세탁하는 대신 그냥 말리기로 했다. 아무리 주인 없는 집이지만 달랑 셔츠만 입고 돌아다니기는 조금 뭐했다.
진여원의 침실로 느릿하게 걸어가며 괜찮아, 혹시 입을만한 게 있나 찾으러 가는 거니까,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왜인지 침실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긴장이 됐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급해져 붙박이 옷장에서 속옷이 있을 법한 칸을 열었다. 다행히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속옷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막 입어도 될까 하는 고민은 몇 초 하고 말았다.
그러게 왜 날 집에 혼자 두고 그러냐. 이건 그의 살림을 뒤진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행동이다. 초등학교 친구 중에 우리 집만 오면 꼭 냉장고를 열어 보던 녀석이 있었는데, 지금 나도 다를 바 없는 듯했다.
속옷을 입고 내게 맞을 만한 바지를 찾았다. 되도록 낡은 걸로 입으려 했는데 어째 새것 같은 운동복뿐이었다. 설마 운동복도 드라이클리닝 맡기는 건 아니겠지?
나란히 걸려 있는 것 중 여름용이 아닌 봄·가을용을 꺼냈다. 침대에 털썩 앉아 바지에 발을 끼워 맞췄다. 침실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침대는 여전히 부담스러운 크기였다.
가죽 원형 프레임이 딱딱해 그 위에 얹힌 매트리스로 훌쩍 뛰어올랐다. 전에 여기서 정신없이 자고 간 이유를 알겠다. 수면제 복용 버금가는 안락한 스프링 때문이었다.
‘자고 있어.’
별생각 없이 넘겼던 말인데 지금에서야 가슴이 두근거렸다. 진여원의 집에서 자고 간 사람은 아마 나뿐일 것이다.
진짜 우리가 사귀긴 사귀는 거겠지?
그런데 부산 집과, 이곳도 비밀번호는 사귀기 전에도 알려 줬었다. 진여원 없이 자고 간 적도 있었고…….
자고 있어 라는 말에 혹시 거실에서가 빠진 건 아닐까.
물론 끝까지 그런 말은 안 했으니 내 마음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동공만 굴려 유리창 너머로 켜 둔 TV을 바라봤다. 이거 좋네. TV 한 대만 있어도 스피커만 좀 키우면 거실, 작업실, 안방 할 것 없이 아무 데서나 시청할 수 있으니까.
멍하게 누워서 드라마를 보는 동안 밖에선 이따금 개나리와 개살구 짖는 소리가 들렸다. 침입자 때문이 아닌 저들끼리 장난치는 듯 편안한 짖음이었다.
로트와일러가 엄청 사납기로 유명하다던데 그냥 맡기고 간 진여원에게 뾰족한 마음이 올라왔다. 내가 저 짐승에게 물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왕 야근수당 받기로 한 거, 생명수당까지 추가해야겠다.
침대 끄트머리에 놓인 에어컨 리모컨을 찾아 천장에 대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집도 회사처럼 중앙냉방 형식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저 위에서부터 쏟아져 몸이 노곤노곤해졌다.
샤워를 마치고 시원한 바람을 쐬는 때에는 천국이 따로 없었다. 거실 쪽으로 아예 틀어 누워 TV에 집중했다. 엄마 병간호하느라 몇 회차나 놓친 드라마는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 저 주인공이 복수를 결심하게 됐는지, 주인공의 재산이 어째서 전부 압류당했는지 혼란하기만 했다. 나중에 몰아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침대의 스프링이 어서 자라, 어서 자, 하면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옆으로 머리를 받치고 있던 팔이 툭 침대 시트 위로 떨어졌다. 다시 올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
드르륵, 탁, 쿵쿵쿵. 조용하던 귓가에 인기척이 파고들었다. 옆집 사람이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건가 싶어 짜증스럽게 눈을 떴다.
잠기운이 서려 가느다랗게 떴던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 밖으로 누군가의 발이 보여 고개를 휙 들었다.
진여원이 허리춤에 수건을 걸치고 머리를 터는 중이었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난 상황 파악이 잘되지 않아 잠시 멍하니 있어야 했다.
진여원의 집인 걸 깨달은 순간, 머물러 있던 잠기운이 삽시간에 날아갔다.
“오셨……습니까.”
나는 뺨을 문지르며 침대 끝으로 내려왔다. 진여원은 조금 피곤해 보이는 눈으로 말없이 나를 보기만 했다.
왜 저렇게 보냐. 제 침대에 대자로 뻗어 자서 그런가. 거실에서 잘 걸 그랬나.
그가 바라보는 동안 여러 생각들이 오갔다.
“거실로 갈까요?”
아슬아슬하게 허리춤에 걸쳐진 수건이 자꾸 눈에 거슬렸다. 수영복을 입고 있을 때 이미 실컷 봐 온 상체인데 어둑한 조명 아래서 보니 입이 더 메말랐다.
탄탄한 어깨에서부터 쇄골까지 이어지는 라인이 손을 뻗어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일게 했다. 물론 꾹 참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거실로 가라는 말을 따로 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누워.”
“저 여기서 잡니까?”
나는 그의 침대를 검지로 콕콕 가리켰다.
“그럼?”
진여원은 여기 말고 어디서 자느냐며 당연한 걸 물어본다는 듯 대답했다. 일어난 것도 무색하게 침대에 앉다가 알아 버렸다. 뭔가 이상함을.
진여원이 평소와 달리 나른해 보였다. 흐트러짐이 없던 자세도 오늘은 다소 불량했다. 그 때문인지 찌르면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사람이 지금은 퇴폐적인 분위기가 농후했다.
게이 바에서 만났으면 너도나도 침을 꿀꺽 삼켰을 모양새였다. 그게 단순히 피곤하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혹시 술 드셨습니까?”
진여원이 수건을 테이블로 던졌다. 허리춤의 수건을 풀지 않은 채로 그가 침대에 털썩 앉았다. 그 바람에 내가 앉은 곳의 스프링까지 울렸다.
술 기운 때문인지 진여원의 상체가 앞으로 쏠려 있었다. 그는 허벅지에 두 팔을 걸치고 비스듬히 내 쪽을 바라봤다.
턱선에 조명이 어른거리자 그림자조차 요사스러웠다. 보아하니 한두 잔은 아닌 듯했다. 진여원이 이리 가까이 오라며 손을 까딱거렸다. 나는 무릎걸음으로 시트를 헤치고 다가갔다.
“많이…… 취하셨나 봅니다.”
나는 서너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다가가던 것을 멈췄다.
“그래 보여?”
그런데 말투만큼은 멀쩡했다.
“뭐, 그냥요. 주무시죠.”
진여원이 웬일로 내 말을 따르며 침대에 누웠다. 나도 침대 가장자리로 이동해 다리를 뻗고 누우려고 했다. 진여원이 툭툭 제 옆자리를 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달라붙으라는 무언의 지시에 침을 꿀꺽 삼켰다. 술주정이 저 정도면 양호한 편이지. 내가 진여원에게 한 주정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안 좋은 일이 있으셨나 본데요. 혹시 동생분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개나리랑 개살구 데려온 것도 그렇고요…….”
“박석연.”
휙 그가 손을 뻗어왔다. 침대를 내리눌러 상체를 지탱한 내 팔이 그에게 잡혔다. 진여원이 잡아당기자 그대로 그의 품으로 끌려갔다. 순식간에 가둬진 상황에 눈만 깜빡였다.
그의 열기 서린 어깨에 뺨이 문질러졌다.
“어색해서 그래?”
주절주절 말을 떠들어 댄 게 사실 그 이유 때문도 있었다. 달리 말없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침묵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조금은……요.”
“그럼 빨리 익숙해져.”
그가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쿵쾅쿵쾅 내 심장이 함부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를 마주 끌어안으려는데 팔이 차렷 자세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그냥 그의 어깨에 얼굴을 대고 입술만 움직였다.
“저는 차차 익숙해질 테니 사장님은 선물 센스 좀 키우시죠. 저 화려한 상자에 양갱이…… 뭡니까.”
병문안 선물도 양갱, 그냥 선물도 양갱. 이러다 생일날은 특별히 대형 양갱을 선물해 줄 것 같았다.
“왜 좋으면서.”
머리카락이 그의 입술에 사락거렸다.
“좋긴 하지만.”
“지금은 그것밖에 몰라.”
박석연이 좋아하는 거. 그가 그렇게 속삭였다.
“양갱 말고도 많은……데요.”
“알 기회를 줬어야지.”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도 그가 좋아하는 건 포카리스웨트, 그리고 아마도 나. 그것밖에 몰랐다.
우리가 사랑을 하게 되면 좀 더 많을 것을 알게 될까. 당신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사실은 양갱만큼 내가 비비빅을 좋아한다든지 하는 시시콜콜한 것들.
“그러니까…….”
진여원에게서 나지막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박석연이 좀 봐줘.”
그가 나를 더욱 끌어안는 순간이었다. 머리가 텅 비어 버렸다. 지금은 우리 둘 다 연애 초짜라서 서로를 능숙하게 살피지 못하고 있었다. 그 역시 자신의 서툶을 인정하고 있었다.
진여원은 언제나 솔직한 반면 나는 허세를 부렸다. 타고난 성격이 외골수라 사랑을 하면 그것 하나밖에 보지 못했다. 행여 다른 이가 그랬던 것처럼 진여원이 내게 질릴까 봐 그랬다.
온종일 기대한 약속이 깨졌을 때 엄청난 실망을 했지만, 그에게 내색하지 않은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우리 둘 사이의 성격 차이는 남아 있겠지만 그건 시간이 차차 해결해 줄 것이다. 진여원의 짧은 말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있으니까.
지금처럼 숨은 뜻을 온전히 헤아릴 날이 올지도 모른다. 사실 과연……. 싶기는 하다.
“술 드시니까 말이 많아지시네요.”
머리 위에서 진여원이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내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올렸다.
콩콩콩, 뜨거운 살갗 안에서 그의 심장이 내 손을 두드리고 있었다. 진여원이 나를 한껏 끌어안은 채로 고른 숨소리를 내뱉었다.
엄청난 고백을 내뱉어 내 잠은 다 달아나게 만들더니 정작 저는 쿨쿨 자기 시작했다. 빠르게 박동하던 고동은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내 심장은 여전히 달리는 채였고, 스킨에 섞인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어쩐지 싫지 않았다.
***
누구 덕분에 새벽 늦게 잠들었더니 일어난 것도 정오가 다 되어서였다. 눈두덩이가 부어서 평소보다 시야가 좁았다.
나는 까치집인 머리를 내리누르고 침대를 둘러봤다. 진여원이 보이지 않았다. 눈을 비벼 가며 거실로 고개를 돌렸다.
진여원은 거실 테이블에서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소파의 높이가 테이블과 크게 다르지 않아 앞으로 허리를 굽힌 자세였다.
지금 저 상태에서 나를 보면 카메라라도 들이대야 할 듯했다. 때마침 진여원의 무심한 시선이 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를 보는 순간 감정 없던 눈에 이채가 섞여든 느낌은 필시 기분 탓일 거다. 고개를 꾸벅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구겨진 시트를 쫙 펴서 정리하고는 뒤늦게 거실로 걸어 나왔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익숙하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 누군가에게 인사하는 것도, 눈앞의 사람이 진여원인 것도.
김요한 말처럼 망상증이라면 큰일이었다.
“왜 이렇게 못생겼어.”
그래, 망상증일 리가 없다.
내가 아침마다 얼굴이 자주 붓는 체질이긴 하지만 대놓고 말하니 웃으며 받아 주긴 힘들었다.
“좋으시겠네요, 떡이 되도록 술을 드셔도 멀쩡하시니까요.”
“밥 가져와.”
진여원이 내 말을 싹 무시했다. 그가 손가락 하나만 들어 주방을 가리켰다. 식사는 거의 밖에서 해결하거나 인스턴트로 때우니 직접 준비할 자신은 없었다.
뭘 만들어야 할지 고민해 가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싱크대와 가스레인지가 ‘ㄱ’자로 연결된 홈바 위에 샌드위치가 올려져 있었다.
야채를 얼마나 많이 집어넣었는지 양상추와 오이가 식빵 밖으로 삐져나왔다. 식빵 테두리는 깔끔하게 잘려 있어 부드러운 살점만 남아 있었다.
내가 샌드위치 만들었으니까 가져오라는 말을 덧붙여 주면 얼마나 좋아. 난 나보고 직접 만들어 대령하라는 줄 알고 입이 댓발 나올 뻔했다.
그래도 진여원의 음식 솜씨를 보는 건 이번이 세 번째였다. 바비큐나 장어는 양념된 것을 굽기만 하면 되지만 샌드위치는 보기보다 손이 많이 갈 텐데, 밖에서 파는 것만큼이나 생김새가 완벽했다.
샌드위치만 들고 갈 수는 없어 냉장고에서 꺼낸 우유를 컵 두 개에 나눠 따랐다. 쟁반이 보이지 않아 거실과 주방을 두 번이나 왔다 갔다 해야 했다.
나는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놨다. 이쪽은 쳐다도 안 본 진여원이 샌드위치를 쥐고 크게 베어 물었다. 먹는 것도 격식 따져 가며 까다롭게 굴 줄 알았는데 운동선수 버금가게 박력 있었다.
나도 샌드위치를 잡아 한입 물었다. 아삭아삭한 야채들이 씹혔다. 살다 살다 샌드위치에 햄이 안 들어간 건 처음이었다. 맛은 나름 괜찮았으나 내겐 슬라이스 햄이 절실했다.
“샌드위치도 직접 농사지은 재료로 쓰시나 봅니다. 이왕이면 햄도 키우시죠.”
“복근 좋아해?”
“……뱃살보단 좋죠…….”
의아하게 그를 봤다. 서류에 시선을 박고 있던 진여원이 갑자기 셔츠를 휙 들어 올렸다. 몸 잘난 거 자랑하십니까, 이죽거리고 싶었는데 탄탄한 복근에 눈이 고정됐다.
“다 거기서 나오는 걸걸.”
진여원이 턱짓으로 샌드위치를 가리켰다. 그의 손이 옷에서 떠나자 복근이 가려졌다.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진여원, 네 복근이 다 이런 야채에서 비롯된다 이 말이냐?
진여원에게 유기농남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수여해 줘야겠다. 나는 잠시나마 그의 몸에 정신 팔렸던 것을 티 내지 않으려 입을 열었다.
“근육은 단백질에서 나오는 거 아닙니까? 이건 식이섬유고요.”
“알아, 자랑 한번 해봤어.”
그가 짓궂게 말하는데 괜히 몸에 열이 올랐다. 목도 마르지 않지만, 일부러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제가 뭐 도와드릴까요?”
식사 준비도 진여원이 다 해 둔 터라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리고 디자인에 관련된 일이라면 충분히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서류를 내려다보니 웬걸, 빼곡한 글씨와 숫자뿐이었다.
“못 도와드리겠네요.”
“포기가 빨라.”
“제 분수를 알거든요.”
사장이 하는 일이 디자인뿐이랴. 나중에 내 브랜드 하나 갖고 싶은 바람이 있었는데 저걸 보니 가능할까 싶었다.
“워커홀릭이셨나 봅니다.”
일이야, 나야. 이런 말을 지껄일 생각은 아니었다. 진여원이 안경 안으로 손을 넣어 눈꼬리를 쓸어내렸다.
“세 시간. 그 안에 끝나.”
진여원 자신도 주말에 일하고 있는 게 그리 즐거워보이진 않았다. 나는 얌전히 소파에 앉아 우유를 홀짝였다.
급한 사정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인지, 그의 휴대폰도 내내 불이 나는 중이었다. 나야 디자인만 제출하면 되는 월급쟁이니 회사 경영에는 까막눈이었다.
가만히 있기도 뭐해 빈 그릇을 주방으로 가져갔다. 식기 세척기를 돌릴 수도 있지만 시간도 때울 겸 접시와 컵을 싹싹 닦았다.
젖은 손을 바지춤에 닦으며 나오니 그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그쪽에서 헐값에 내놓는 바람에 타격이 있었습니다. 하 이사와 제 쪽에서 전부 사들여 문제는 없지만 아무래도 주주들께서 노파심이 들었던 거겠죠.”
잊고 있었다. 저 인간 일할 때는 상상 초월로 말이 많아지고 말발도 더 강력해진다는 것을.
평소 말이 짧은 건 일할 때의 에너지를 비축하기 위함인가?
진여원이 걱정하지 말라며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말을 두 번이나 던졌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옆으로 툭 던졌다.
“뭔가……. 많이 심각한 일이 있나 봐요.”
걱정스레 입을 열자 진여원이 픽 웃었다. 저 인간의 여유 없는 모습은 회사가 망할 때가 되어도 못 볼 것 같았다.
“혹시 제가 알면 안 되는 겁니까?”
“대주주 하나가 우리 주식을 시장에 풀어서 그거 처리 중이거든.”
주식에 손대면 패가망신한다는 말을 맹신하는 나였다. 그래서 잘은 모르지만 꽤 심각한 사안인 건 알겠다.
“대체 왜요? 지금 저희 회사 잘 나가지 않습니까.”
“심술이 났나 보지.”
“미련한 사람이네요. 분명 주가 계속 오를 텐데……. 우리 회사 타격 입는 건 아니죠?”
“왜, 걱정돼?”
진여원이 남 일 말하듯 물었다.
“예, 그야 당연히…….”
“월급은 제때 줄 생각이야.”
“누가 그걸 걱정합니까?”
날 이기적인 놈 취급해도 전적이 있으니 변명할 말은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파 옆에 세워 둔 가방을 가져왔다. 가방의 똑딱이를 열어 흰 봉투를 꺼냈다. 잠시 주저했지만, 두 손으로 봉투를 꾹 쥐고 입을 뗐다.
“전에요. 어머니 병원 찾아오셨었다면서요. 그것도 제가 퇴짜 놨을…… 때요.”
또 그때 생각이 나 버려 속상해졌다.
“그랬지.”
“저 같이 제멋대로인 놈 뭐가 좋다고…….”
오셨던 겁니까. 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왕 뻔뻔하게 구는 거 끝까지 그러려고 했는데 그냥 목이 막혔다.
“내 마음이야.”
진여원의 대답에 막혔던 목이 트이며 한숨이 터져 나왔다. 복잡한 것들을 뭐든 한마디로 일축시키는 것도 진여원의 능력이었다.
시원한 대답 덕인지 어느새 미안함과 속상함이 사라지고 고마움만 남았다.
“그래도 이거 격려금…… 말이죠. 너무 많이 주셨습니다.”
들고 있던 봉투를 그에게 휙 내밀었다.
“이렇게 퍼주니 회사가 어려워지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받으려 하지 않을 게 분명하기에 일부러 툴툴댔다.
“그거 격려금 아닌데.”
진여원이 내 손에 들린 봉투를 가리켰다. 그럼? 하고 그를 쳐다봤다.
“내 사심인데.”
쿵쾅쿵쾅 잠시 얌전했던 심박 수가 또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진여원이랑 같이 있다 보면 심장병 걸려서 일찍 죽는 건 아닐까.
엄마가 수술한 것도 아버지가 하도 두근거리게 만들어서 얻은 병일지 모른다는 어이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달아오른 얼굴을 숙이고 중얼거렸다.
“그럼 사심만…… 따로 받을 테니 이건 회사에 보태 쓰시죠.”
이걸로 주식을 사 봐야 코딱지만 할 테지만 성의는 보이고 싶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봉투를 내밀고 있는데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진여원이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뭐가 그렇게 웃기는지 턱을 괴고 가슴을 울려 댔다. 저렇게 기분 좋은 얼굴은 대학 때부터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착한 거야, 바보야, 영악한 거야.”
“저는 착하고 영악한 거 같은데요.”
뜻 모를 물음이었지만 선뜻 대답했다. 진여원이 그것도 그러네, 하면서 웃음의 잔해를 남겨 두었다. 이내 서류를 들더니 눈만 나를 향해 말했다.
“한 시간 안에 끝낼 테니까 가서 놀아.”
세 시간이라고 말한 게 불과 몇 분 전이었다. 벌써 두 시간이 지났을 리는 없겠고.
“저랑 놀아 주시려고 빨리 끝내려는 겁니까.”
“아니.”
그래, 내가 무슨 대답을 기대하냐.
격려금을 테이블에 탁 올려 두었다. 까치집인 머리를 내리누르며 샤워실로 성큼성큼 걸었다. 진여원은 한참 전에 일어나 샤워를 마쳤는지 욕실 바닥에 물기가 적당히 말라 있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소시오패스다. 술을 그렇게 먹고도 저리 멀쩡하게 일을 하는 걸 보니 말이다.
붕 뜬 머리부터 찬물을 맞았다. 그러면서 거울을 보는데 기분이 묘했다. 부은 내 얼굴이 못생겨서가 아니라 그의 집에서 샤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괜히 의식하다간 걸음걸이도 쭈뼛쭈뼛해질 것 같았다. 몸에서 샤워 거품을 전부 닦아 내고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샤워 부스 밖에 벗어 둔 옷으로 다시 갈아입자 개운함이 가득했다. 대충 물기만 닦아 낸 머리를 손으로 털며 거실로 걸어갔다.
진여원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것 봐라, 저 인간은 평소랑 같은데 의식해 봐야 나만 손해지.
개나리와 개살구에게 가려고 현관에 놓인 슬리퍼를 신었다. 그런데 나보다 일이 일 순위라면 그건 또 그것대로 섭섭하다. 한 번 째릿하고 봐준 다음에 현관문을 열었다.
후욱, 더운 열기가 식은 몸에 달라붙었다. 날씨 진짜 좋은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녀석들 쪽으로 다가갔다. 개나리와 개살구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목줄의 길이가 텃밭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정원을 마음껏 뛰어놀기에는 충분했다. 잔뜩 힘을 실어 내게 점프를 하는 두 놈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바닥에 벌러덩 넘어졌다.
가슴팍에 올라탄 개나리의 말랑말랑한 앞발을 꾹꾹 눌렀다. 순간, 크헝헝! 컹컹! 고막이 찢어질 듯하게 개살구가 짖어 댔다. 놈의 쇠목줄이 철컹철컹거렸다.
대체 왜 저러나 싶어 밖을 보자 지나가던 사람이 펜스 너머로 이쪽을 구경 중이었다. 선량한 시민을 강도 취급하는 개살구의 입을 손으로 꾹 막았다.
“옆집에서 민원 들어온다.”
축축한 코를 퉁 튕겼다. 말귀는 잘 알아듣는 놈인 걸 보니 진여원 동생이 교육 하나는 기똥차게 시킨 것 같았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서 바비큐 테이블로 걸어갔다. 두 마리는 내가 가는 길마다 쫄쫄 따라왔다. 그래, 이런 맛에 개를 키우지. 그제야 밖에서 커다란 개를 구경하던 사람도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바비큐 벤치에 앉아 나보다 근육이 탄탄한 두 마리를 만졌다.
“너네도 야채 먹고 근육 생겼냐?”
두 녀석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까 개나리, 나 지금 내쫓긴 거 맞지? 설마 방해된다고 쫓아낸 거 아니야?”
블라인드로 가려져 있는 거실 창 쪽을 노려봤다. 내 옆을 서성거리던 개살구가 허벅지에 턱을 댔다. 눈동자만 올려 나를 보는 얼굴이 험악하지만 나름 귀여웠다. 개나리만 부르지 말고 저한테도 말을 해 달라는 듯했다.
“놀아 주려고 일찍 끝내는 것도 아니면 대체 뭐야.”
푸흐- 하고 개살구가 내 대신 개 한숨을 쉬었다. 휴대폰을 안에 두고 와 버려 시간의 흐름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엎드려 나무 테이블에 뺨을 기댔다. 저기서 스프링클러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풍경과 더불어 시원한 풀냄새가 코를 파고들었다.
자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눈의 깜빡임이 느려졌다. 개나리가 내 등에 올라타 셔츠를 잘근잘근 씹어댔고, 개살구는 내 허벅지에 얼굴을 대고 이미 눈을 감은 채였다.
습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행복한 바람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골목 소음이 빈번한 내 오피스텔과는 다르게 진여원의 정원은 고요하기만 했다. 이따금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말소리도 기분 좋게만 다가왔다.
잠들지 말라며 나를 괴롭히던 개나리도 분위기에 휩쓸려 남은 허벅지에 얼굴을 댔다. 두 녀석 머리가 생각보다 무거웠다.
위이이잉- 위잉- 스프링클러 소리가 자장가처럼 다가왔다. 이따금 바람을 타고 날아온 물방울이 뺨에 보슬보슬 내려왔다. 손을 올려 닦아 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진정으로 휴일다운 휴일이었다.
***
허벅다리에 묵직하게 내려 있던 무게감이 싹 사라졌다. 두 마리가 벤치에서 훌쩍 뛰어내리는 게 느껴졌다. 나도 선잠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쩌억 하고 이마에 달라붙었던 팔뚝이 떨어졌다.
어느새 나타난 진여원의 주변으로 두 녀석들이 신이 나서 뱅글뱅글 돌았다. 침을 흘리진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뺨을 닦아 내렸다. 진여원이 두 녀석의 머리를 차례로 쓰다듬으며 물었다.
“땀 흘렸어?”
덥냐고 묻는 것도 아니고 땀 흘렸냐니. 나한테서 쉰 냄새라도 나냐?
“아뇨, 여긴 시원하네요.”
대답을 하며 좀 전과 다른 점을 발견했다. 진여원의 얼굴에는 안경이 없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오라며 고개를 까딱했다. 딱히 정원에 있어야 할 이유도 없어서 벤치에서 일어섰다.
그를 따라 현관으로 걷다가 아치형의 유리막 밑에 우뚝 멈춰 섰다. 여긴 그와 내가 내리던 소나기를 구경하던 자리였다.
밖이 화창하니 그날과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저기 푸르스름한 감나무에는 아오리 색을 닮은 감이 듬성듬성 매달려 있었다. 덜 익은 감을 눈여겨본 건 오랜만이었다.
나와 같은 방향을 주시하던 진여원이 이번엔 나를 내려다봤다. 뺨이 따끔따끔해지는 것 같았다. 한참 감을 보고 있노라니 그가 내 머리에 물을 뿌리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분명…….
“잘 자란 거 같습니까?”
잘 자라라고 했었지.
진여원이 설핏 눈을 내리깔더니 알 수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더 방치하다간 곶감 되겠어.”
우스갯소리로 던진 말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마치 빨리 먹어 치우겠다는 말에 괜스레 야한 분위기가 형성된 것 같았다.
나는 어설프게 입술만 올려 웃었다. 상황을 타계하기 위한 말 돌리기 스킬은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한다.
“그나저나 일은 잘 해결된 겁니까?”
지금처럼.
“그럴걸.”
“다행이네요.”
“박석연 씨 야근 수당도 문제없겠고.”
“참고로 생명 수당도 추가해 주셔야 됩니다. 로트와일러가 엄청 사나운 개인 거 모르십니까? 사람도 물어 죽이고 막 그런다던데요.”
진여원이 꼬리를 흔드는 개살구를 보고 다시 나를 봤다. 오히려 나를 사나운 개 취급하는 것 같은 눈이었다. 맞다, 이 인간의 눈에는 내가 바로 지옥견이었지.
“그리고 말이죠. 굳이 저랑 안 놀아 주셔도 됩니다. 개나리랑 개살구랑 놀면 되니까요.”
쫓아낼 때는 언제고, 들어오라고 하니 쪼르르 따라간 내 모습이 꼭 저 두 녀석과 다를 바가 없이 느껴져 던진 말이었다.
“내가 왜 빨리 끝냈는데.”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모양을 보아하니 아직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저야…… 모르죠.”
설마 나 심심할까 봐 사정 봐준 건가. 그러면 또 마음이 사르르 풀려 버릴 게 분명했다.
“너랑 자고 싶어서.”
진여원이 강력한 한 방을 던졌다. 띵- 머리가 울렸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휙 고개를 쳐들었다. 진여원은 놀라는 내게 여상하게 말을 내뱉었다.
“혼났어.”
그가 안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그 상태서 의문을 띄웠다. 혼나다니, 진여원이 대체 누구한테…….
“눈앞에서 살랑대는 거 참느라.”
“…….”
목구멍이 탁 막혔다. 뭐라고 반박이라도 해야 하는데 물 밖으로 나온 붕어처럼 입만 뻐금거렸다. 저 정도로 말하는데 못 알아듣는 놈이 바보다.
그러니까 세 시간 걸릴 거 한 시간도 안 돼서 끝낸 게 진짜 나랑 자고 싶어서라고? 아니 섹스야 일을 제쳐 두고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물론 그랬다면 나 역시 회사 상황이 마음에 걸렸겠지만.
“……랑.”
목소리가 작게 나왔다. 진여원이 허리를 굽혀 내 목소리를 들으려 다가왔다. 쿵쾅쿵쾅 내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와 내 머리카락에서 같은 향이 풍겨 오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떼었다.
“남자랑…… 자는 법은 아십니까.”
“아니, 몰라.”
모르면서도 저렇게 떳떳한 인간은 아마 진여원뿐일 거다.
“여자……와는 많이 다릅니다.”
“박석연이 알려 주면 되겠네.”
손바닥에 땀이 찼다.
이대로 도망가 버려?
그가 내 맨몸을 보고 식으면 어쩌지. 엄청 상처받을 텐데…….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진여원이 끙끙대는 내 고민을 종식시키듯 팔을 잡아끌었다.
한껏 맞닿은 그와 내 가슴에서 서로의 박동이 얽혀 들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진여원이 새까만 눈동자가 나만큼이나 초조함을 띠고 있는 듯했다.
덤덤했던 말과는 다르게 그의 입술 역시 메말라 있었다. 나도 모르게 천천히 손을 올려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박석연- 그가 고개를 옆으로 해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입술에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고민 따위는 벌써 저 멀리로 날아가고 있었다.
화악, 그가 내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평소와 다른 조급한 손길이 내 등줄기를 훑어 나갔다. 위에서부터 내려온 입술이 내 입에 포개어 왔고 시작부터 짙게 내리눌러왔다.
그에게 화답하듯 바짝 그를 붙들고 키스에 열중하며 침실로 이끌리듯 다가갔다.
쿵. 침실과 거실을 나눈 유리에 내 등이 부딪혔다. 놀라 돌아보니 그의 손자국과 내 등의 흔적이 유리에 뿌옇게 남았다.
“하아.”
진여원이 내 턱을 돌려 다시 키스를 퍼부었다. 침대로 향하는 동안 발을 헛디뎌 휘청이는 나를 꽉 붙들었다. 차가운 팔뚝에 뜨거운 손이 휘감겼다.
다시 맞부딪힌 입술은 처음보다 더 습했다. 서로가 빈틈없이 밀착하며 몸을 맞댔다. 마찬가지로 달라붙은 하반신에 단단하게 발기한 것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섰……네요.”
“그러게. 박석연 씨가 열심히 도망 다닌 대가를 치러야겠지?”
내가 무슨 변명도 하기 전에 진여원이 입술을 밀어 붙여왔다. 이어 그의 손이 바지 뒤춤을 파고들었다. 트레이닝복이 삽시간에 쓰윽 바닥으로 떨어졌다.
몸을 비비면서 흥분한 나 역시도 속옷 앞이 팽팽했다. 고개를 한껏 올린 채로 그의 입술을 탐닉하며 버클을 풀었다. 지익,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현실감 없게 들려왔다.
그의 속옷으로 손을 미끄러뜨리자, 손바닥에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것을 부드럽게 쓸어 올리는 동안 진여원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가져왔다. 그의 혀가 맥박이 뛰는 부분을 간질였다.
감각을 참지 못하고 꾹 성기를 움켜쥐었다. 진여원이 보답이라도 하듯 내 목을 콱 깨물었다.
반쯤 풀어 헤쳐진 셔츠 밑으로 탄탄한 복근과 속옷을 뚫고 올라온 것이 보였다. 질척한 침이 목구멍에 달라붙었다. 곽일영의 말이 진실로 판명 나는 순간이었다.
“혹시……. 조상 중에 서양분이 계신 건 아니죠?”
진여원이 나를 침대에 내리 눕혔다.
“이제 그만 까불어.”
그가 허리를 안아 주고 있어 충격은 와 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나는 그의 목을 감싸서 내 품으로 이끌었다. 부드러운 입술을 지나 매끈한 뺨과 턱에도 쪽쪽 입을 맞췄다. 그동안 그는 내 티셔츠를 목덜미까지 끌어 올려버린 뒤였다.
숨결이 느껴질 만한 거리에서 진여원이 눈을 접고 웃었다. 아마 셔츠가 목을 한껏 감싸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스웠나 보다. 조금 더 솔직히는 애정이 섞인 눈길이었다.
“왜요, 제가 귀엽습니까?”
마약 해? 라는 말이 돌아오진 않을 것 같았다.
“동물 같지.”
“비글요?”
“목도리 도마뱀.”
그럴 줄 알았다. 그를 옆으로 밀쳐 내며 훌쩍 위에 올라탔다. 브리프를 사이에 두고 허리를 비벼 댔다.
점점 더 딱딱해지는 좆에서 후끈한 열이 올라왔다. 손끝마저 파르르 떨리고 저릿저릿했다.
그간 몸만이라면 타인에게서 얼마든지 충족할 수 있었지만, 가만히 보기만 해도 심장이 오작동을 일으키는 사람과 달라붙어 있는 건 또 달랐다.
왜 손바닥에 땀이 고이는지 알았다. 이건 명백한 긴장이었다.
메마른 허벅다리에 손바닥을 문지르며 그의 쇄골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의 성기를 다시 붙잡았더니, 팽팽하게 선 기둥에서 육중한 맥박이 손바닥을 두드렸다.
그의 손도 내 속옷을 헤치고 들어왔다. 기다렸다는 듯 내 것이 그의 손에 찰싹 달라붙었다. 내 선액으로 젖은 건지 그의 손이 축축한 건지 애매했다.
그가 내 속옷을 휙 잡아 끌어 내렸다. 무릎에 걸려 있는 것을 벗으려 하자, 그가 허리를 내리누르며 동시에 두 개의 성기를 맞잡았다.
맞물린 귀두가 미끌 하고 파인 홈을 따라 예민한 곳을 지나갔다. 이번에는 발가락이 꼿꼿해졌다. 또 다른 그의 손이 내 뒤를 파고드는 그때였다.
“잠깐만요……!”
상체를 번쩍 들어 일으켰지만, 여전히 두 개의 성기가 그에게 잡혀 있었다. 아래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지끈한 통증이 일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어쩐 일인지 진여원이 잡고 있던 내 것을 놔주었다. 진독사 주제에 이럴 때는 말을 잘 듣는 게 이상했다. 열에 들뜬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야 알아차렸다.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한 태도라는걸.
섹스의 신세계를 보여 주고 싶은데 초짜처럼 손을 꼼지락거리기만 했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가 그에게 바람이 가지 않도록 살살 내뱉었다. 발목에 걸려 있던 속옷도 침대 밑으로 떨어뜨렸다.
“그……. 일단 준비가 필요한데요.”
무릎 걸음으로 침대를 걸어가 테이블에 놓인 로션 하나를 들었다. 한두 푼 하는 건 아니겠지만 내 엉덩이도 소중하니 아낌없이 쓰기로 했다.
진여원은 가만히 내 행동을 눈여겨보고만 있었다. 남자끼리의 섹스를 배우겠다는 학생의 태도치곤 눈빛이 매우 불손했다. 공손해도 모자랄 판국인데…….
손에다 로션을 쭉쭉 짜서 양손에 비볐다. 그의 허벅다리에 올라타 로션으로 범벅된 두 손으로 좆을 쥐었다. 내 것도 마찬가지로 같이 비비며 엉덩이 사이로 손 하나를 가져갔다.
아무래도 오랜만이라 잘 풀어 줘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저 크기에, 과연 기승위가 가능할까 싶긴 하지만, 꽉 다물려 있는 구멍을 중지로 매만졌다. 갑자기 진여원이 내 손목을 붙들었다.
“왜……요.”
얼빠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돌아.”
“……예?”
“봐야 배우지.”
안 그래? 라는 말까진 하지 않았지만 대충 뉘앙스는 알아들었다.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진여원이 제 복부를 가리켰다. 거기 앉아 엉덩이를 까 보이라는 뜻이었다.
“저……. 마음의 준비 좀 해도 됩니까.”
“3초.”
3, 2, 1 반의 반, 1 반의 반의 반. 천천히 세고 있는데 그가 내 허벅지를 잡아 돌렸다. 엉덩이를 고스란히 진여원에게 드러내 보인 꼴이 됐다.
허벅지를 제 쪽으로 더 끌어 올리는 바람에 진여원의 빳빳한 성기가 가슴팍에 탁 부딪혔다. 앞으로 기어가고자 했지만, 허벅지가 단단히 잡혀 있어 소용없었다.
엎드린 자세로 팔을 들어 상체를 일으켰다. 아래로 기울어진 내 성기가 설핏설핏 그의 뱃가죽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엉덩이부터 시작해 긴장으로 탱탱하게 올라붙은 불알까지 그가 훤히 본다고 생각하니 얼굴로 열이 올라왔다.
“앗!”
진여원이 내 엉덩이를 잡아 벌리자, 차가운 공기가 숨겨져 있던 안쪽을 서늘하게 휘감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어째 경험의 우위를 보여 주기는커녕 내가 손해 보는 것만 같은데……. 여기까지 와서 수줍게 물러서 봤자다. 로션으로 젖은 손을 아래로 가져갔다. 그가 한쪽 엉덩이를 벌리고 있어 만지기는 좀 더 수월했다.
밑을 로션으로 매끄럽게 만들어 중지를 쿡 쑤셔 넣었다. 확실히 오랜만이라 따끔따끔했다. 엉덩이에 뜨거운 숨결이 닿은 것 같기도 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벽을 넓히며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아랫배가 딱딱하게 굳었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얼굴은 불타고 있었다.
내 성기에서 그의 복부로 끈끈한 선액이 흘러내렸다.
“흐읏!”
동시에 푸욱 그의 손가락 하나가 깊숙이 안을 파고들었다. 밭은 숨을 내쉬며 몸을 앞으로 뺐더니 앞으로 고꾸라질 것만 같아 다급히 두 팔로 침대를 지탱했다.
손가락을 급히 뺀 탓에 아래의 따끔거림이 더 심해졌다. 잔뜩 팽창한 진여원의 것이 흉흉하게 내 상체를 찔러 댔다. 내 손가락보다 길고 딱딱한 진여원의 손가락이 빙글 안을 휘저었다.
“아……읏…….”
내가 직접 하는 것보다 반동이 훨씬 크게 다가왔다. 쿨쩍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손가락 하나가 더 안으로 들어왔다.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자 진여원이 손가락을 뒤로 뺐다가 손바닥을 위로 해 쿡 찔러 들어왔다. 그의 손가락이 꼬리뼈를 향해 내벽을 밀어 올리는 바람에 시야가 깜빡 깜빡이며 점멸했다.
좁은 내부가 억지로 열리는 기분이었다.
“아……. 그렇게 하면.”
진여원이 손가락 세 개를 한 번에 쑤셔 넣었다.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벌렸다. 저 인간 분명 어떻게 하는지 다 알고 저러는 게 분명했다.
따지고 싶어도 뱅글, 뱅글 안을 자극하는 손가락 때문에 얕은 숨만 뱉어 내야했다. 팔에 힘이 빠지며 엉덩이가 저절로 위로 들렸다. 그가 손가락을 전부 빼내자 구멍이 빠끔거리며 닫혔다 열리기를 반복했다.
“윽……!”
그가 불시에 넣은 손가락을 구부렸다. 그 상태로 한 바퀴를 돌리니 눈으로 모든 열이 확 몰렸다.
“여기 원래 이렇게 벌어져?”
나직히 웃는 것을 보니 일부러 그러는 게 확실한데도 나는 그의 허벅지에 얼굴만 비벼 댔다. 아래를 넓히며 파고든 손가락이 네 개까지 늘어났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솟았다.
제일 긴 손가락이 내벽에 볼록하게 솟은 전립선을 건드리며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허리가 비틀리며 좆이 그의 배에 짓눌렸다. 그가 다시 한번 도톰한 점을 누르고 올라오는 때였다.
아! 갑작스러운 사정감에 피핏, 그의 배 위에 정액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지독한 쾌감에 몸서리를 치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진여원이 손가락을 더 깊숙이 박아 돌렸다.
쿡, 쿡, 쿡, 전립선을 손끝으로 찔러 댔다. 아아……! 신음을 내지르며 성기를 쥐었지만 경련하는 몸이 멈추지 않았다. 구멍이 그의 손가락을 더없이 꽉 물었고, 그는 내벽을 부드럽게 긁으며 빠져나왔다.
사정의 여파에 흐려지는 눈을 바로잡으며 몸을 돌렸다. 그렇지 않고서는 또 무방비하게 아래가 파헤쳐질 것 같았다.
입술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진여원이 섹시해 보이다니, 이제 나도 끝장이었다. 그가 숨을 몰아쉬는 내 입술을 혀로 동그랗게 핥았다. 덧바른 로션으로 허벅지가 미끈미끈했다.
“우……등생이시네요. 예습도 하시나, 봅니다.”
심보는 진독사 네가 더 못됐다. 다 알고 있으면서 대체 뭘 가르쳐 달라고 한 건지. 이봐, 진초짜. 거기는 전립선이고, 고환 위쪽을 눌러주면 쾌감이 짙어. 이런 교육을 하려 했던 나 자신이 우스워졌다.
물론 산통 깬다고 하면 할 말은 없었다. 진여원이 아직 반쯤 서 있는 내 성기의 끝을 엄지로 마찰했다. 사정 직후의 예민한 성기에 요의를 닮은 찌릿함이 찾아왔다.
“복습도 할 생각인데.”
그가 슬며시 닫히고 있는 아래에 또 손가락을 가져왔다. 나는 재빨리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대로 손을 깍지 꼈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이대로 주도권을 넘겨줄 순 없는 노릇이다.
허리를 들어 뭉툭한 귀두를 아래에 살살 비볐다. 진여원에게서도 쾌감에 짙은 숨이 흩어졌다. 엉덩이 골 사이에 그의 것을 가두고 오갔더니, 서둘러 들어가고 싶어 하는 듯 꼿꼿하게 선 성기가 밑을 찔러댔다.
“이런 게 강아지라고…….”
진여원이 깍지 낀 손에 힘이 들어가 기막혀 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슬쩍 입구에 그의 것을 머금었다 떼어 내며 크기를 가늠했다.
이대로 앉으면 아래가 사달이 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재촉에 가까운 시선에 아랫입술을 보이지 않도록 깨물었다.
나는 천천히 허리를 내렸다. 즈윽 소리가 나듯 아래가 벌어졌다. 이대로 앉으면 될 것만 같은데 시큰거리는 통증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다. 다시 허리를 올린 다음 두 번째 삽입을 시도했다.
빡빡하게 벌어진 입구에 가장 두꺼운 귀두가 통과되고 나서야 숨이 트였다. 그 숨 속에서도 앓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더는 못 움직일 것 같아서 곤란하게 그를 내려다보자 그와 동시였다.
퍽! 그가 허리를 쳐올렸다.
“흐앗!”
손가락이 닿지 않았던 안쪽까지 기어코 한껏 벌어졌다. 억지로 비집고 올라오는 좆 때문에 허벅지가 충격으로 굳었다.
속수무책으로 그에게로 쓰러져 내렸다. 내 몸을 따라 꺾인 성기가 아래를 더 팽팽하게 벌렸다. 깍지를 낀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의 악력이 더 거셌다.
“아…… 아파요. 진짜……. 아파.”
꾀병도 아닌데 진짜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흡사 그의 것이 내 안을 전부 밀어내고 더 깊은 곳까지 자리하려는 것 같았다.
그가 또 쿡 하고 쳐올렸다. 간신히 얽힌 손을 풀고 그의 가슴팍에 손을 올려 몸을 지탱했다. 힘을 빼자 아래도 좀 전보다는 훨씬 살 만했다.
긴장이 풀림을 그도 알아차렸는지 내 허리를 잡아 남은 부분까지 단번에 쑤셔 넣었다. 턱을 위로 젖혀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는 것에 적응하려 했다.
“하아, 벌려 봐.”
그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의 아랫배에 손을 대고 허벅지를 넓게 벌렸다. 움직일 때마다 안에서 비틀리는 성기는 더 팽창하고 있었다. 어쩐지 내가 본 게 완전히 발기한 상태가 아닌 듯했다.
“벌려보라니까.”
이미 벌린 다리를 또 어떻게 벌리라는 건지. 인상을 쓰고 그를 노려봤다.
그가 거기 말고 여기. 하면서 내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럼 처음부터 입술을 벌리라고 말을 할 것이지.
나는 키스당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진여원이 헛소리를 하지 못하게 위아래로 마구 분탕질을 쳐 주고 싶은데 여전히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물론 쾌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대로 슬쩍 움직이기만 해도 금세 사정할 수 있을 듯했다. 문제는 진여원이었다. 내가 위에서 깔짝거린다고 해서 그가 사정을 할까. 엉덩이를 약간 흔들어 봤는데, 그 잠시 잠깐에도 내벽이 진탕 울렸다.
배 안의 압박감에 눈이 달아올랐다. 버거운 상황만 이어지고 있었다. 허리마저 욱신거려 그에게로 또다시 쓰러지려는 찰나였다.
내가 못 참겠는데. 속삭인 진여원이 예고도 없이 나를 넘어뜨렸다. 어깨까지 올라붙은 허벅지를 그가 꽉 움켜쥐었다.
“아앗! 윽!”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항의할 새도 없었다. 그의 것이 내 안을 쾅쾅 때려 박았다. 나갈 때는 천천히, 들어올 때는 순식간이었다. 좁은 내벽을 탓하듯 그의 좆이 거칠게 움직였다.
“처…… 천천히요. 조금만……! 아읏!”
“누가…… 감질나게 하래. 귀엽긴 한데.”
방금 뭐라고, 말을 하려는데 그가 반쯤 빼냈던 좆을 쿡 찔러 올렸다.
꽉 막힌 목에서 새된 소리가 짧게 터져 나왔다. 구멍에 걸쳐 있던 귀두가 진입하며 전립선을 자극했다. 탁탁탁, 안을 쳐올리는 반동에 내 것도 흔들렸다.
만지지도 않았는데 단단히 발기해서 찔끔찔끔 첫 사정의 잔해를 내뱉었다. 내 허벅지를 쥔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도드라진 손목의 힘줄이 느껴졌다.
그의 음모가 엉덩이를 간질였다. 안쪽, 그보다 더 깊은 안쪽을 진여원의 좆이 함부로 갉아 대고 있었다.
쓸리고 함부로 비벼진 전립선이 퉁퉁하게 부어올라 내벽 전체로 예민한 감각이 퍼져 나간 것 같았다. 빠르게 허리를 흔들던 그가 반쯤 기둥을 빼낸 채로 물었다.
“아파?”
허스키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몸이 움찔했다.
“흐으……. 당연……하죠.”
그가 땀으로 축축한 내 이마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난 좋은데.”
짙은 숨과 함께 그가 속삭였다. 박석연 안이, 라고.
그의 목소리를 곱씹을 여유조차 없었다. 이내 분탕질이 시작됐다. 진여원의 좆이 탐욕스럽게 내 안을 파고들었다. 거친 마찰에 로션이 메말라 가며 더욱 찐득하게 내벽과 좆이 맞물렸다.
찌릿거리는 쾌감이 쓰라린 통증을 삼켜 버렸다. 난잡하게 내 아래를 헤집는 진여원의 허리 짓이 점점 더 거칠게 변해 갔다.
맨살이 거세게 부딪히고 뿌리까지 온전히 박아 넣은 그가 허리를 빙글 돌렸다. 내부가 그의 것을 따라 요동쳤다. 벌어질 대로 벌어진 입구와 마찰당한 내벽이 후끈후끈해졌다.
배앓이를 하는 것처럼 욱신거리고 뜨거웠다. 그는 음모를 엉덩이에 비비며 더 안으로 진입했다. 내리눌린 허벅지에 진여원의 습한 상체도 달라붙었다.
“흐읏…….”
악문 잇새를 타고 쾌감인지 고통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 소리가 나왔다. 그가 내 고환과 함께 좆을 한 데 움켜쥐었다. 여전히 음모가 닿아 있는 상태로 허리를 탁, 탁, 탁 쳐올렸다.
대체 어디까지 치달아 오르려는 건지도 모르는 채 시트 위를 허우적거렸다. 배 안이 얼얼했다. 잔뜩 밀려난 내부가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그만 괴롭히라며 그의 좆을 바짝 감쌌다.
진여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엉덩이를 벌렸다. 즈윽, 좆을 빼냈다. 내부가 그의 좆에 달라붙어 밖으로 딸려 나가는 것만 같았다. 진여원이 내 고환을 올려 연결된 부분을 내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내가 손을 내려 막자 다시금 그의 좆이 난폭하게 안을 탐했다. 충격에 눈이 깜빡깜빡했다. 흐윽……. 뒤늦게 울상을 지으며 허리를 비틀자 그가 허리를 곧게 일으켰다.
그가 내 종아리를 잡아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허리가 들려 버려 배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의 성기의 힘줄까지 더 여실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진여원 냉정하게만 생겨서 섹스는 정반대였다. 쉴 틈 없이 몰아붙이는 바람에 헐떡이는 숨을 쉬는 게 고작이었다.
그가 내려찍듯 쾅 때려 박았다. 허리가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철퍽, 철퍽, 음란한 소리까지 울렸다.
허리를 한껏 뒤로 빼서 귀두만 남겨 놓으려는 행동에 아래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 흐릿한 시야로 그를 올려다봤다. 진여원이 내 것을 잡아 흔들었다. 빠르게 성기를 마찰하는 박자에 맞춰 진여원이 안을 쑤셨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쾌감, 다른 감각은 다 날아가고 그것만 남아 버렸다. 어깨에 올려진 발끝이 꼿꼿해지며 두 번째 정액이 방출되기 시작했다.
그는 사정하는 나를 봐주지 않고 퍽, 퍽 수축하는 내벽을 함부로 파헤쳤다.
“이거……ㄴ……. 괴로워…… 아아…….”
그는 사정 중인 내 성기를 잡은 손에 힘을 빼며 가볍게 쓸어 주었다. 그 또한 쾌감이 절정에 달해 평소보다도 사나운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나를 살피고 있었다.
창피도 느낄 새 없이 나를 쑤셔 놓았기에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은 그냥 안에 담긴 그의 것을 더 세게 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손을 뻗어 진여원의 목덜미를 껴안으며 중얼거렸다.
“괴로워요…… 그런데……. 좋아…….”
몽롱한 눈으로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문질렀다.
“후우……. 이럴 때만 솔직하지.”
잠긴 그의 목소리를 느끼며 마지막 정액을 쏟아 냈다. 뒤에도 저절로 힘이 잔뜩 들어갔다. 진여원은 팔을 벌려 침대를 내리눌렀다.
좀 전까지의 행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더없이 난폭하게 허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자글자글 타 버리는 것 같았다. 불알이 지끈지끈거렸다.
그는 커다란 좆을 내게로 마구잡이로 쑤셔 넣었다. 잔뜩 혹사당한 안쪽은 고통마저도 쾌감으로 여기고 있었다. 퍽 하는 소리가 둔탁하게 터졌다. 그가 안을 최대한 깊숙이 때려 박은 채로 멈췄다. 움찔, 배 속 깊은 곳으로 뜨거운 정액이 튀어 올랐다.
너무 깊은 사정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진여원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키스를 하며 수차례 정액을 방출했다. 그의 사정 한 번에 온몸의 진이 다 빠져 버렸다.
그가 좆을 빼내자 아래에서 정액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아직도 모자란지 다시 쑤시자 구멍 틈새를 비집고 정액이 간신히 새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내 안에 넣은 채로 허리를 잡아 일으켰다. 그리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나는 그에게 올라탄 자세가 되어 어깨를 늘어뜨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땀을 털어 내듯 고개를 저었다. 진여원의 가슴팍도 오르락내리락했다.
그가 내 두 손목을 나란히 맞잡았다.
“아……. 또 섰어.”
사정 직후 바로 딱딱해진 진여원의 좆에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그는 올라탄 나 대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정 당한 뱃속이 찌르르 울렸다. 내벽을 쑤시는 성기는 여전히 난폭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완전히 그에게 체중을 실어 앉았다.
더욱 깊어진 연결에 싸질러 놓은 정액이 밖으로 튀며 내 엉덩이와 그의 하반신을 잔뜩 더럽혔다. 엉덩이를 들어 아릿아릿한 감각을 지우려 했지만, 그가 내 허리를 붙들았다. 잡힌 골반뼈가 저릿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쾌감이라 몽롱한 정신을 되잡기가 힘들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움직임을 따라 허리를 들썩거렸다. 힘을 주어 그의 좆을 꽉 물었다. 진여원의 이마가 설핏 찡그려졌다.
꼴좋다, 하면서 웃기에는 내게 온 여파가 더 컸다. 그래도 정액으로 젖은 터라 이물감은 처음보다는 덜했다. 손을 뒤로 해 그의 허벅지를 단단히 잡았다. 허리를 천천히 들었다가 그보다 더 천천히 내리며 성기를 삼켰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허리가 진여원의 위에서 야살스럽게 흔들렸다. 그가 내 아랫배를 손등으로 쓱 훑었다.
“하, 미치겠네. 뭐 이런 게…….”
그가 어이없다는 듯 짧게 웃고는 나를 침대로 내리 눕혔다. 뒤로 넘어간 몸에 멀미 같은 현기증이 일었다. 그가 내 다리를 들어 올리자 고여 있던 정액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더 깊숙이 스며들었다. 나는 침대 시트를 손에 그러쥐었다.
다물린 입에서 앓는 소리가 속수무책으로 쏟아져 나왔다. 내벽이 촉촉이 젖어 부드러워진 만큼 좆의 딱딱함이 더 확연히 느껴졌다. 연해진 내벽을 단단한 것이 제멋대로 긁으며 빠져나갔다. 그의 숨소리도 점점 거칠어졌다.
그가 내 종아리를 잘근 깨물며 손자국이 나 있는 부근을 매만졌다. 진여원의 손이 닿는 곳마다 홧홧한 불길이 이는 것 같았다. 가장 큰 열기는 배 안쪽에서부터였다.
처음보다 헐렁해진 구멍에 완전히 좆을 빼냈다가 콱콱 박아 넣었다. 커다란 것이 빠져나갈 때마다 안이 허했다.
그가 성기를 끝에 끝까지 빼내 걸쳐두고 구멍의 입구에서 잘게 오갔다. 귀두가 들어왔다가 빠지는 바람에 내 아래도 마찬가지로 빠지는 것 같았다.
간헐적으로 신음만 내뱉던 입술을 그가 틀어막았다. 그리고 그대로 한 번에 쳐올리니 목구멍이 파르르 떨렸다. 잘게 떨리는 혀끝을 그가 빨아 들였다.
아흐, 괴로워요. 키스에 모든 말이 뭉개졌고, 그가 내 안에 정액을 쏘아 올렸다. 내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정액의 감각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체내 사정은 한 번도 벅찬데 두 번째에 그것도 양도 많았다. 힘겨운 눈으로 천장으로 바라봤다.
몸이 나른하게 늘어지고, 눈꺼풀까지 무거워졌다. 그의 것이 부드럽게 안을 휘젓고는 밖으로 빠져나왔다. 주륵하고 정액이 쏟아지는 느낌이 당황스러웠다.
아래에서 질질 흘러내리는 정액을 그가 손에 담았다. 그대로 닦아 주는 줄 알았더니 안으로 다시 넣는 짓을 하고 있었다. 한 번 더 하겠다는 심보처럼 느껴져 놀라서 그를 노려봤다.
“짐승이 따로 없네요…….”
“그러게.”
진여원은 저 자신도 이럴 줄 몰랐다는 듯이 가볍게 내뱉었다.
“하아……. 저 내일 휴가 주실 겁니까.”
숨을 가다듬으며 말을 또박또박 내뱉으려 했다.
“베갯머리송사가 빨라.”
그가 부어오른 구멍을 어루만지듯 매만졌다.
“그런 말은, 앗……. 이사 자리쯤은 주시고 하시죠.”
“사장은 어때.”
그가 안에 넣은 엄지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흐읏.”
무심코 튀어나온 신음을 급히 막았다.
정액으로 축축해진 그의 손이 내 젖꼭지를 문질렀다. 그가 꽉 꼬집고는 다시 살살 굴렸다. 반대쪽 젖꼭지는 입술로 물더니 곧 이를 세워 잘근거렸다.
그가 젖꼭지를 빨아올리자 허리가 저절로 들렸다. 그 반동에 정액이 울컥 쏟아져 버렸다. 나는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내 가슴을 간질간질거렸다. 강약을 줘 가며 유두를 괴롭히는 그가 내 좆을 쥐었다.
비누거품을 칠한 것처럼 매끄러운 손의 감촉이 좋았다. 그가 혀를 뾰족하게 세워 젖꼭지를 툭툭 건드렸다.
진여원이 내 고환을 손에서 가볍게 굴렸다. 회음부까지 손으로 갉작이며 또다시 구멍에 손가락을 꽂아 넣었다. 동시에 내 젖꼭지도 깨물렸다.
“아흣!”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내 위에 올라탔다. 배꼽까지 흉흉하게 서 있던 좆이 내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간신히 줄어들었던 안이 다시금 치릿거리며 벌어졌다.
내일 쉴 거다, 기필코 쉰다.
억울함을 토해 가며 진여원의 팔뚝을 긁었다. 미령에게 최음제라도 받아 왔더라면 병원에 실려 갔을지도 모르겠다. 허벅지에 벌써부터 근육통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진여원이 좆을 넣은 채로 나를 뒤집었다. 나는 침대에 바짝 엎드려 다리를 쭉 뻗었다. 그가 내 두 다리를 빈틈없이 붙이고 나서야 엉덩이에 올라탔다. 양쪽 엉덩이를 잡고 최대한으로 벌려 안을 쿡 찍었다.
입구가 주름 하나 없이 벌어졌을 건 안 봐도 뻔했다. 강하게 내리 찌르는 자세에 아랫배가 튀어나오는 착각이 뒤따랐다. 차라리 무릎을 세워 엎드려서 받을 걸 그랬나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기에는 이미 체력이 바닥나 있었다.
찰팍, 찰팍, 정액이 튀는 소리와 함께 배꼽 근처가 찌릿찌릿했다. 얼굴을 옆으로 돌려 연방 달뜬 신음을 내뱉었다. 침이 흘러내리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그의 움직임에 따라 마구 흔들렸다.
그의 손이 쑥 내 가슴께로 들어왔다. 젖꼭지를 찾아 돌리며, 빠르고 잘게 안에서부터 좆을 쳐올렸다. 욱신거리는 아랫배에 손을 가져갔다. 그가 내 안을 찌를 때마다 정말로 아랫배가 볼록 튀어나오는 게 손바닥에 느껴졌다.
전에 어떤 놈이 했던 얘기가 진짜였다. 애인 거시기가 너무 커서 뱃가죽이 다 튀어나올 정도였다는 말이. 이때까지 농담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갑자기 덜컥 겁이 나 시트를 잡고 기어가려 했다.
“앗!”
진여원이 젖꼭지를 꽉 비틀어 꼬집었다. 그리고 내 목덜미에 이를 박고 더 거세게 처박았다. 의식을 해 버리니 배가 한없이 밖으로 밀려나는 것만 같았다.
진여원이 젖꼭지를 괴롭히던 손을 놓고 내 허리를 둘러 안았다. 긴장한 몸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왜 그래.”
거칠고 습한 목소리가 나를 걱정했다.
“배……. 아래가 튀어나오니까.”
당황해하자 그가 내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커다란 손이 얼얼한 배를 만져 주니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에게서 나른함과 더불어 굶주린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늘 서늘했던 진여원의 얼굴과는 달랐다.
“하, 박석연.”
그의 가슴팍이 내 등에서 오르내렸다. 여유 없는 그의 부름에 나는 묘한 도취감에 휩싸였다.
“그만 좀 부추겨.”
“하아, 제가요? 아!”
진여원이 완전히 내 허리를 지탱한 채로 다시 움직임을 시작했다. 눈에서 번쩍번쩍 불이 튀고 얼굴이 제멋대로 일그러졌다.
손안에 있는 시트를 움켜쥘 힘조차 사라져 갔다. 그를 담고 있는 구멍만 남겨 두고 온몸이 다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의 성기가 더할 수 없이 안을 오가고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쯤이 되어서야 또 정액을 쏟아 냈다. 이미 고여 있던 정액보다도 더 많은 양이 꿀럭거리며 아래를 채웠다. 그가 사출을 할 때마다 성기가 내부에서 요동치며 움찔거렸다.
주르륵, 기어코 진여원의 성기가 빠져나갔다. 그가 그제야 나를 침대에 놓아주었다. 허리가 빠져 버려 똑바로 돌아누울 수도 없었다. 내 옆에 누운 그가 자신을 돌아보게끔 만들었다.
꿀럭하고 아래에서 정액이 쏟아질 때마다 얼굴이 이상해졌는지, 그가 내 눈가를 쓸었다. 손을 뻗어 그를 안고 싶었다.
마냥 할 일을 끝낸 것처럼 섹스를 마친 후 등을 돌리는 게 아닌, 감정의 충만함을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었다.
“이제……. 게이 되셨어요.”
다행히 입은 살아 움직였다. 진여원이 한 팔로 옆머리를 지탱한 채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가 내 머리카락에 입술을 대고 말했다.
“잘됐네. 혼자가 아니라.”
그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그가 턱으로 내 머리를 누르고 있어 쇄골만 보였다. 혼자가 아니라. 그 말을 곱씹다 눈가가 울컥거렸다. 이제 아웃팅을 당해도 혼자 버티지 않아도 된다는 말 같았다.
손가락을 들어 올려 그의 쇄골을 훑었다. 나 진짜 외로웠나 보다. 당신 그 말에 이렇게 가슴 안이 꽉 차는 걸 보니 말이다.
얼굴을 그의 어깨에 바짝 가져갔다. 아직은 당신이 나를 얼마큼 사랑하는지도 모르고, 또 확신 같은 건 없지만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족했다.
진여원의 말처럼 서로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으니 차차 알아가는 것 또한 연애의 묘미 아니겠나. 그래도 약간의 불안함은 언제고 남아 있을 것 같았다. 그것 또한 연애의 묘미니까.
숨결이 잦아들며 눈꺼풀도 내려앉았다. 진여원이 샤워하라며 나를 흔들었지만 지금은 곧 죽었다 깨어나도 꼼짝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말이다. 좀 닦아 주고 그러면 되지, 꼭 저렇게 나를 들들 볶아 씻으라고 하냐. 나는 속으로 구시렁구시렁거리며 눈을 꼭 감았다. 들리지 않는 척을 하다, 진짜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며 시야가 암전됐다.
뭐 이런게 굴러들어왔지.
웃으며 나를 끌어안는 진여원의 마지막 말만 기억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