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58)

하늘에서 팬티가 내려왔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팬티가 내려왔다.

처음부터 그것이 팬티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은 아니었다.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미친년 널뛰듯 펄럭거리는 조그만 것의 정체를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홀랑 벗고 잔디밭에 누워 선탠을 즐기던 그의 얼굴 위로 축축하게 젖은 팬티가 철썩 붙어 버린 것이다. 어찌나 잘 들러붙었는지 꼬박꼬박 졸던 그는 졸지에 질식사할 뻔했는데 처음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양껏 좋던 기분이 순식간에 곤두박질친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얼굴에 찰싹 들러붙어 있는 팬티를 집어 올렸다.

꼴상을 보아하니 제 것인데 만날 잘 개어져 서랍장 안에 들어 있는 것만 봤지 이런 데서 보니 희한하기도 하다. 그리고 암만 제 것이래도 보송보송하게 말라 정돈되어 있거나 그걸 꺼내 입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한번 입고 벗어 놓으면 그 때부터는 찝찝한 것이 인지상정. 더군다나 젖은 팬티로 질식사하는 것은 꿈에서도 사양하고픈 일이다.

“변태에유?”

“……?”

한참을 그렇게 젖은 팬티를 노려보는데 요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는 말도 뜬금없거니와 집에서 들릴 리 없는 낯선 목소리다.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시선을 던졌다.

“음마……. 이쯤 허면 뭐라도 집어 입어야 하는 거 아닌감유?”

“누구냐 넌.”

저 촌스러운 때깔이며 말도 안 되는 사투리는 또 뭔가. 그의 얼굴이 심상찮게 굳어짐에도 불구하고 코딱지만한 녀석은 척 하니 손을 내밀었다.

“뭐!”

“달라구유.”

“그러니까 뭘.”

“빤쓰요.”

“빤…… 팬티?”

“야. 빤쓰 줘유.”

“이게 어디서 반말이야.”

“지가 언제 반말을 했남유?”

“방금 야라면서.”

“야.”

“이게……!”

조그만 손에 팬티를 쥐어 주고 벌떡 일어나 앉은 그가 막 소리를 지르려는 찰라 코딱지가 쪼그려 앉았다. 정말 코딱지만한 놈이 쪼그려 앉기까지 하자 진짜로 코딱지만 하게 보인다.

“뭘 봐!”

“말이 친구하자 안 그려유?”

“……?”

“완전 말좆이네 말좆. 이비! 벌건 대낮에 뭐해유? 살짝 돌았서유? 옷이 음써유? 왜 넘의 집에서 그라고 자빠져 있는 거래유?”

냇가의 차돌멩이처럼 반딱반딱한 코딱지가 말을 한다.

그는 흉흉한 눈을 부라리며 짐짓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겁먹어야 하는 코딱지는 꿈쩍도 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아래로 위로 부지런히 그의 몸을 훑고 있는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정삼봉!”

이번에도 그는 소리 지를 기회를 놓쳐 버렸다. 배 변호사의 음성에 발딱 고개를 치켜든 코딱지를 보니 이 코딱지의 이름이란 것이 ‘정삼봉’인 모양이었다.

“너 거기서 뭐하냐?”

“워떤 놈이 넘의 집 마당에 빨개 벗고 자빠져 있어 구경하는 중인디유?”

“푸훗!”

그의 노여움은 이제 배 변호사에게로 향했다. 이 말도 안통하고 생긴 것은 더 안통하는 코딱지보다는 배 변호사 쪽이 족치기에 더 만만하다. 그러니 그는 흉흉한 눈으로 이제 배 변호사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 넌 처음 만난 거로구나. 사장님이야. 출장 갔다 어젯밤 늦게 돌아오셨지. 사장님? 얘는 정삼봉이라고 앞으로 일 년 동안…….”

“이 집 쥔 양반이 말좆이었시유?”

“……?”

그는 다시 자신을 향해 말좆이라 평가하며 아래위로 훑어보시는 코딱지의 시선에 기가 막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뭐 이런 게 다 있어.’하며 짜증을 내도 그 당사자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하니 갈데없는 신경질이 돼 버릴 뿐이다.

“이거 뭐야.”

“장호에 어르신이 일전에 깔머슴 하나 쓰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아이가 일주일 전에 와서 집안일을 하고 있습니다.”

“뭔 머슴?”

“내기 돈 대신 받았다고 당신께서는 장기 크루즈 여행 가신다고 데려갈 수 없으니 여기서 데리고 있다 보내라고 하셨을 때 알았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언제.”

배 변호사는 또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그를 난감한 한숨과 함께 노려보았다. 노려본다고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당사자를 앞에 두고 싹 무시하는 싹퉁머리가 난감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배 변호사는 장호에 어르신이 그에게 깔머슴 쓰는 일을 당부한 날짜를 생각하며 길게 말꼬리를 늘어트렸다. 하지만 싹퉁머리는 단박에 그의 말을 잘라먹었다. 맛이 있는지 매 번 요런 식으로 남의 말허리를 잘라 먹어 버린다.

“됐고. 저런 건 내 취향 아니니까 갖다 버려.”

“예?”

“음마…….”

배 변호사와 코딱지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뜻 없는 말이 나오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딱 봐도 코딱지만 하고 뜯어봐도 코딱지만한데다 까만 얼굴에 들창코. 도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데 깔머슴은 뭔 놈에 깔머슴이냐 싶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가 발정 난 말 새끼 소리를 들으며 산다 해도 취향이라는 것은 존재했다.

“저기……. 머슴 쓰는 게 취향 따지실 일은 아닌 듯 생각됩니다만.”

배 변호사는 슬쩍 인상을 쓰면서 아직도 옷 주워 입을 생각은 하지도 않는 그의 중심에서 눈을 돌렸다. 그래도 변함없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 거물을 구경하는 정삼봉이란 녀석도 대단하다. 사실 아무리 같은 사내 간이라도 저 물건 저만큼 뚫어져라 눈 한 번을 깜빡이지 않고 보는 일도 쉽지는 않을 터이다. 하지만 정삼봉은 위력적인 그의 심기 불편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내도록 스스로 ‘말좆’이라 칭한 물건에 무슨 볼일 있는 사람 마냥 눈을 떼지 않았다.

“요즘 세상에 머슴은 뭔 놈에 머슴이야. 갖다 버리라니깐. 저딴 걸 침대에 들일 이유 없으니까.”

“그러니까 삼봉이를 왜 침대에 들이신다는 말씀이시냐구요.”

“까는 용도로 쓰라고 깔머슴 아냐?”

배 변호사는 저 멀쩡한. 아니, 너무 멀쩡해서 눈이 부실 정도로 잘난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무식한 소리를 해대는 남자에게 질리는 기분이었다.

매 번 이런 식으로 당하는 일상이지만 깔머슴이 침대에서 깔라고 있는 머슴이라는 발상 자체가 얼마나 무식한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당당했다.

잘났기 때문에 저런 소리를 해도 하등의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것인지 이 남자의 성격 자체가 무식함이 줄줄 세는 소리를 하고도 뻔뻔하게 당당할 수 있는 것인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였다.

어쨌거나 배 변호사가 남자의 지나치게 잘난 얼굴과 심하게 무식한 상식의 괴리감으로 공황 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깔머슴 정삼봉은 내도록 잘난 사내의 잘난 알몸을 잘 구경하고 있었다.

“깔긴 뭘 깔아유. 노망 났시유?”

“시끄럽거든? 코딱지만한 게……. 배변! 이거 갖다 버려!”

“이봐유! 쥔 아자씨. 아까부텀 참 요상하게 말씀 허시는디. 이짝 말도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니겄시유? 더군다나 여즉 깔머슴이 뭔 중도 모르고 사는 모양인디. 깔라고 있는 게 깔머슴이 아니라 세경 깔아 놓고 쓴다고 깔머슴이유. 것두 몰러유? 사람 참 멀쩡하게 생겨서 가당찮게 무식한 모양일쎄?”

“저기 삼봉…….”

실제로 무식한 주제에 무식하다는 말에는 지랄 발광을 해 주시는 남자 성격을 아는 까닭에 배 변호사는 정삼봉을 말려야 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탐방탐방 튀어 나가는 정삼봉의 말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뭐. 무식해?”

“금. 무식허지 유식헌 줄 알았시유? 자고로 말이여유. 지가 무식한 중 아는 놈은 무식해도 덜 무식한 거고 지가 무식헌 중 모르는 놈은 시상에서 젤루다 무식헌 놈인 거여유. 인자라도 본인이 무식한 중 알았으면 공부 좀 혀유!”

‘잘한다. 정삼봉!’ 물론, 마음속의 외침이었지만 배 변호사는 큼큼 헛기침을 해대면서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하늘만 바라보았다. 애가 똑똑하고 야무진 것은 알았지만 안하무인 무대책에 되로 받으면 말로 갚고 쫀쫀한데다 뒤끝까지 제대로 있어 주시는 저 남자에 맞서 한끝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말 다 했냐?”

하지만 살짝 후환이 두렵기는 했다. 살벌하게 내리깔리는 남자의 음성은 더 그런 불길함을 부추기고 있었다. 이쯤 해서 정삼봉을 말려 볼까 싶었던 배 변호사의 귀에 생각지도 않았던 씩씩한 음성이 들려왔다.

“덜 했시유. 글고. 아까 참에서부터 살살 맴에 거실리는 말을 하시는데유. 지가 물건이어유? 아니면 내다 버릴 쓰레기여유. 사람 면전에다 대고 이거저거 하면서 내다 버려라 치워라 하시는데유. 사람이 그러면 못써유. 무식하면 성질 머리라도 좋던지. 이도 저도 아니면 낭중에 늙어 우짤라고 그려유? 돈 많으면 세상 무서운 거 하나도 없지유? 돈만 있으면 아무 문제없을 것 같지유? 살아봐유. 세상에 돈으로다 해결 안 되는 문제가 얼마나 많은지 아서유?”

그는 두 눈 똥그랗게 뜨고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코딱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힌 것이었다.

“지도 초면에 지보다 나이 많은 양반한테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디유. 보자보자 허니께 이만저만이 아니라 참을 수가 없네유. 암만 여그가 거기 집이래두 집안에 아줌니도 있고 셋방 누님도 계시는데 이리 홀랑 벗고 있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유. 안 그려유?”

“허…….”

“오늘은 일절까지만 해야 겄네유. 오메. 내 정신 좀 봐라. 빨래 널다 와서 시간만 잡아먹었네. 해 있을 때 후딱 널어 말려야 허는디……. 글고 쥔 아자씨. 그걸 그리 내놓고 덜렁덜렁 흔들고 다니면 말이 친구 하자 그려유. 멀쩡하게 생겨서 홀딱 벗고 다니면 사람들이 정신 놓았다 그러구유. 존 구경 했시유. 낭중에 봐유.”

그는 끝까지 코딱지한테 소리 지르지 못했고, 화를 내지도 못했다. 조막만 한 손으로 젖은 팬티를 탁탁 털고는 발딱 일어서 멀어지는 코딱지를 쳐다보면서 그저 ‘허……!’ 하는 소리로만 연방 갑갑한 심정을 토로할 뿐이었다.

우주인 이십칠 년 평생에 처음으로 말문이 막히고 하늘이 깜깜해지는 날이었다.

그 날 하늘에서 팬티가 내려왔다.

“저거 뭐야.”

배 변호사는 이가는 소리까지 내면서 깔아진 본격적인 음성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저 지경이라면 정삼봉이 요절나든 우주인이 폭발하든 둘 중 하나는 수가 생길 것 같은데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염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우주인은 다분히 미친놈이지만 돈 많은 미친놈답게 머리 하나는 비상하게 돌아가는 인간이다. 이미 엎어진 판을 바락바락 소리 지르며 우긴다고 빼앗긴 칩을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것이다. 배 변호사였다면 끝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연연했을 진 판에 대해서 무서울 만큼 깔끔하게 잊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우주인이고 그게 배 변호사와 우주인의 차이점이다.

정삼봉과의 첫 번째 조우에서 우주인은 깨끗하게 패배했고, 배 변호사가 알고 있는 우주인은 그것을 다음 번 판에 대한 원동력으로 삼아 기필코 설욕할망정 엎어진 판에 미련을 두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내가 저걸 갖다 버리면 장호에 영감탱이가 지랄 발광을 하겠지?”

“뭐……. 일단은 사장님께서 오케이 하신 일이고, 그러니 결론적으로는 사장님이 앞으로 일 년간 삼봉이의 거취를 책임져야 하는 거겠지요.”

“돌려보내거나. 데리고 있거나?”

“예. 그런데 삼봉이 아버지가 애 마음 약해질까 봐 애를 보내고 이사를 했다더군요.”

“마음 약해질까 봐?”

“말만 그렇게 한 것인지 정말 이사를 한 것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알아……볼까요?”

“흥!”

우주인은 뭉그적거리며 일어나 벌거벗은 궁둥짝을 긁적거리며 걸었다. 화려한 뒤태에 붙어 있는 마른 풀잎사귀나 흙 따위의 것들도 공들여 새긴 타투로 보이는 것을 보면 저 인간은 인생이 화보다.

“자식 교육을 저따위로 시킨 인간이니 이사를 하고도 남지.”

“뭐…….”

목구멍까지 ‘삼봉이 교육이 저따위면 네 놈 가정교육은 뺨따구냐?’라는 말이 치밀어 올랐다.

지난 일주일 동안 바지런하게 일하던 정삼봉의 싹싹하고 야무지며 예의 바른 모습을 생각하면 배 변호사가 그런 옹심을 품는 것도 당연했다.

“양 여사는 뭐래.”

느릿느릿 옷을 주워 입는 꼴을 보면서 배 변호사는 지금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말을 저 새끼 면전에다 해댈 수 있다면 다시는 바카라 판에 앉지 못하게 된다 해도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에게 바카라와 속풀이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그는 아마 망설임 없이 바카라를 선택할 것이다. 내로라하는 로펌에서의 스카우트 제의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 똥만 들어 있는 부자 새끼 뒤치다꺼리하며 사는 이유는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바카라 때문이었으니까 말이다.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고 계십니다.”

“흐응?”

의외라는 듯 우주인의 표정이 묘해졌다. 상식적인 관점에서는 도무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인간이니까 저런 표정이 어떤 음흉한 속내를 말하는지 짐작할 수 없지만 배 변호사는 그저 기계적으로 양 여사의 반응을 전했다.

“애가 일을 잘합니다. 꼼꼼하고 야무지고……. 양 여사 비위도 잘 맞추고 말입니다. 그동안 집에 고용인이 올 때마다 무슨 트집을 잡아도 열 개 정도는 나열할 수 있던 분답지 않게 여사님이 아주 예뻐하시는데요?”

“설마.”

“삼봉이 밥을 챙겨 주시니까요.”

“그 할망구 망령이 났나?”

양 여사는 우주인의 집에서 음식만 하는 입주 가정부였다. 우주인의 혀를 자신의 음식으로 중독 시켜 웬만한 대기업 과장보다 많은 연봉을 받는 동시에 우주인의 집안 살림사에 관해서는 인사권까지 틀어쥐고 있는 야심만만한 여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망령 났다는 소리를 듣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것이 배 변호사의 소견이었다.

그녀는 우주인의 식사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의 식사도 챙겨 주는 법이 없었다. 이 집에서 살다시피 하는 배 변호사나 우주인의 보디가드이자 운전기사로 이 집에 함께 기거하는 차예진 씨도 그녀에게 밥을 얻어먹은 적이 없었는데 사흘도 못 버티고 쫓겨나는 다른 고용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정황을 살펴본다면 망령이 났다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나이 오십에 망령 났다는 소리를 들으면 좀 억울하지 않은가. 오십 줄 될 때까지 십몇 년 남은 배 변호사의 입장에서는 더더군다나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많은 발언이었다.

“일 년이라고?”

“예.”

“후후후후후…….”

‘저게 미쳤나?’ 배 변호사는 속옷만 걸쳐도 패션 잡지에서 걸어 나온 것과 다르지 않는 화보 인생을 바라보며 슬쩍 미간을 찡그렸다.

“코딱지. 인생의 쓴맛을 보여주마.”

“아…….”

정말로 그는 말하고 싶었다. ‘그러는 너는 인생에 쓴맛을 아냐?’라고.

사실 그렇게 말할 용기가 생긴다고 해도 저 화상은 지 놈이 만들어 놓은 설정 그대로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알게 뭐야. 그딴 거.’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후. 후. 후. 후.”

가슴을 움켜쥐고 심호흡을 하는 삼봉의 앞으로 식칼을 든 중년의 여성이 소리도 없이 지나갔다. 그녀가 지나가고 난 후에 그가 가쁜 숨을 쉬는 것이라면 이해가 갈 법한 상황이지만 헐떡이고 있는 그의 앞으로 그녀가 지나간 것이니 요상한 일이다. 저만치 가던 여인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귀신이라도 봤어?”

“아뇨.”

“금자 왔니?”

“아뇨.”

“그럼. 어디 아프니?”

그녀는 날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식칼을 손에 쥔 채 천천히 걸어 삼봉에게 다가왔다.

사정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B급 호러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라 착각해도 변명할 말이 없는 모습이었다.

“쥔 양반을 봤시유.”

“아…….”

그녀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집 주인이 좀 이상하기는 하다. 그것에 면역되지 않은 삼봉이는 충분히 놀랄 법도 하다는 생각으로 납득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원래 목적한 대로 걸음을 옮기기 전에 삼봉에게 붙들렸다.

“아줌니.”

“응?”

“저 냥반이 원래 저러는 감유?”

“뭐가?”

“암 데서나 훌렁 훌렁 벗고 자빠져 있는 거냐 이 말이어유. 오메- 지는 깜짝 놀라 여즉도 간이 벌렁벌렁하는구먼유.”

“이제 곧 여름이잖니. 원래 날 풀리면 정원에 나가 선탠 하는 게 그 양반 일이야.”

“썬탠이고 나발이고 암만 지네 집 앞마당이래두 넘에 눈이 있는 뱁이지 그래서 쓰남유? 아줌니는 암시렁도 안혀유? 셋방 누님은유. 집안에 여자가 둘이나 있는데 빤쓰까지 홀랑 벗고 그게 뭐 하는 짓인감유?”

“……?”

양 여사는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하는 얼굴로 삼봉이를 보았다.

“그 물건 작기나 허면 지가 말을 안혀유. 응! 사타구니에 시커먼 가래떡 한뭉탱이를 떡하니 올리고 자빠져서는 그게……. 애고. 지송허구먼유. 아줌니 듣기에는 좋잖은 소리지유? 지가 실수 했구먼유. 잘못했시유.”

“공짠데 뭐.”

“야?”

이번에는 삼봉이 어이없는 얼굴로 양 여사를 보았다.

“돈 내고 보라는 것도 아니고, 어디 가서 그런 물건 구경하는 일이 쉽지도 않은데 눈이 호강하는 거지 뭐.”

“아줌니 시방…….”

“예진 씨나 나나 그건 별로 신경 쓰지 않아. 너도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다. 밖에 나가는 거 아니면 옷 입는 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양반이니까. 그리고 얘.”

“아줌니…….”

“가래떡보다는 구렁이 쪽에 가깝지 않나? 가서 일봐라. 흐음……. 오늘 점심은 뭘 해 먹이나…….”

“아줌……!”

삼봉이가 암만 애타게 불러도 그녀는 이미 그와의 볼일을 끝낸 듯 보였다. 미련 없이 돌아서 식칼을 든 채 걸어가는 아름다운 중년 여성이었다.

삼봉은 자신이 이상한 나라에 온 것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내깃돈으로 아들 중 하나를 깔머슴 보내겠다고 했을 때도 이만큼 황당하지는 않았다. 요즘 세상에 머슴은 무슨 머슴이냐고 반항할 만도 하겠지만 삼봉은 머슴이라는 것에 낯설지 않은 환경에서 성장했다. 최근에야 전기가 들어온 산촌 마을 작은 부락에서는 아직도 마을의 촌장 어르신이 계신다. 그 집에는 대대로 머슴을 살았다는 강 씨 부자도 있다. 그 아들이야 공부를 잘해 서울로 유학을 갔고, 강 씨 아저씨도 머슴이라기보다는 월급 받으며 일하는 일꾼에 가깝지만 미이라같이 곱아 작아진 촌장 어르신 부친께서는 아직 강 씨 아저씨를 당신 집 머슴이라 불렀다.

길게 가는 것도 아니고 꼴랑 일 년인데 넘의 집 머슴살이면 어떠랴 싶었던 것이다.

사람 간의 신의는 지켜져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비록 내기 판에서 거래된 약속이라도 약속은 약속이다.

큰형은 맏아들이니 그리할 수 없고, 작은형 이봉이는 몸이 약해 머슴살이하기 적합하지 않으니 네가 가겠냐고 묻는 아비의 말에 선뜻 그러마 했던 것도 삼봉이 자신이었다.

“환장을 하겄네…….”

원래 삼봉을 써야 했던 서울 할아버지는 출타 중이니 머슴을 양도했다는 집에 올 때도 그러려니 했다. 기한이 정해진 노동력을 사용할 수 없으니 어느 정도의 대가를 받고 그것을 양도할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 집에 와서도 나쁠 것은 없었다.

다른 집안일은 일절 손대지 않고 단지 음식만 한다는 아주머니는 꼭 텔레비전에서 보는 부잣집 사모님처럼 생겨 좀 놀랐지만 정말로 음식 맛이 기가 막혔다. 도대체가 밖으로 나오질 않는 셋방 누님도 선녀처럼 예쁜데다 친절했다. 삼봉이를 이 집으로 데려온 변호사 양반도 안색이 좋지 않은 것만 빼면 잘난 얼굴에 똑똑한 사람처럼 보여 굉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음식 준비하는 것 빼고 다른 모든 집안 일이 삼봉의 차지였지만 나무 깎아 화전 만들고 밭 갈아 농사짓는 것보다는 훨씬 쉽다. 하루 온종일 쉴 새 없이 일하고 수중에 들어오는 돈이란 것이 근근이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인 산촌 생활보다는 백 배 나은 환경이었던 것이다.

일 년이야 내깃돈 대신 머슴살이 하는 것이라지만 양 여사의 말에 따르면 일을 잘할 경우 내년에 고용 계약이란 것을 할 수도 있단다. 일전에 일했던 다른 사람들이 받은 월급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게 만만찮은 돈이라 삼봉은 은근히 욕심이 생기던 중이었다.

삼 년만 꾹 참고 일하면 군대 가기 전에 집에 50마력짜리 트랙터를 새것으로 사줄 수도 있고 필요한 작업기도 다 달아서 산밭을 늘릴 수도 있을 것이다.

기계 빌리기가 힘들어 땅이 있어도 개간을 못 해 그저 놀리기만 하는 곳에다 작물을 심으면 집안 형편도 좀 나아질 것이고, 작은형도 다른데 신경 쓰지 않고 공부만 할 수 있다.

그래서 삼봉은 어떻게든 이 집 주인의 눈에 들어 다음해에 고용 계약이라는 것을 해야겠다 결심했다. 이깟 집안일 정도야 쉬엄쉬엄 해도 별스럽게 힘들지 않은데다 먹여 주고 재워 주니 다른데 돈 들어갈 일도 없다. 일없이 서울 나와 몸 버리고, 돈도 되지 않는 일에 청춘 바치느니 농사일이나 거들겠다 결심했던 때보다는 훨씬 나은 대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처음 만난 이 집 주인이라는 놈이 완전 골 때리는 병신 중에 상병신이었다.

살짝 돌아서 앞뒤 분간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머리 검게 태어났으면 사람 구실을 하고 살아야지 사지 육신 멀쩡한 젊은 놈이 어디 할 짓 없어서 집 마당에 홀랑 벗고 자빠져 뒹구는가 말이다. 해가 하늘 똥구멍에 솟아 있는데 일할 생각도 안 하고.

“참말로 요상한 곳이구먼…….”

그는 터덜터덜 걸어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참에 주저앉았다.

집주인도 이상하고, 집주인이 하는 행동도 요상하고, 집주인이 노는 꼬라지도 이해 불가였다.

하지만 삼봉은 자신이 앉은 계단참 목재 몰딩에 끈적끈적한 먼지 때가 끼어 있는 것을 보고는 더 심각하게 인상을 썼다.

“음마? 사람 사는 집구석에 이게 뭔 일이랴. 대체 이눔 집구석 사람들은 눈을 어디 두고 사는 겨. 드러워서 내가 볼 수가 없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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