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5)

03.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살아왔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토벌대의 가장 허드렛일을 하던 아랑이 시동으로 승급한 건 야밤의 인연으로 생긴 깜짝 이벤트 같은 일이었다.

“아랑. 준비는?”

아랑은 카일의 부름에 얼른 끓는 물을 컵에 적당히 부었다. 아침이면 기온이 낮아져 눈뜨자마자 꺼져가는 불씨를 키우고 물을 올렸던 것이었다. 기분을 좋게 해 주는 박하향 가득한 허브잎을 컵에 넣고 조심스럽게 그에게 가져다준 아랑은 지난 밤 손질해 놓은 갑옷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딱딱한 만큼 몸은 보호되겠지만, 갑옷은 입고 벗는 게 불편했다. 갑옷을 착용하는 카일의 옆에서 그가 입기 쉽도록 돕는 아랑의 얼굴엔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잠시만요. 이제 다 됐어요.”

갑옷을 다 입은 카일을 훑어본 아랑은 옆에 둔 칼집을 들어 그에게 건넸다.

“날이 궂은데, 너무 밖으로 다니지 말거라.”

“조심히 다녀오세요.”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고 막사를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아랑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적장을 무찌르러 가는 장군의 뒷모습이 이럴까? 얼른 그를 뒤쫓아 막사 밖으로 나온 아랑은 몸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에 상체를 끌어안고 팔뚝을 손으로 쓸었다. 

아직 해도 다 뜨지 않은 새벽, 겨우내 먹이를 찾아 내려와 마을에 피해를 입힐 몬스터를 처리하러 가는 토벌대가 숲으로 들어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랑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보급대 허드렛일을 하는 막내에서 라이엔부르크 영주인 카일 폰 아덴의 시동이 된 건 정말 한밤의 인연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일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카일에게 보송하게 마른 옷을 내밀었을 때 놀라던 그 표정은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이름이 뭐지?”

“아랑. 설아랑입니다.”

“보급대에 있고?”

“네.”

“그럼 오늘부터 내 시동을 하도록.”

“네. 네?”

“카일. 다른 쓸데없는 호칭 빼고 그리 불러.”

정말 간결한 대화였다. 

그러니까 그날 그렇게 먹튀한 사람은 라이엔부르크 영주라는 것이다. 거기다 소드 마스터라는데, 왜 거기 그렇게 쓰러져 있었는지, 왜 사라졌는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에게 질문할 수 없었다. 다시 만난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얼떨결에 따라가게 된 카일의 막사는 밤이슬을 맞아야 하는 보급대와는 천지 차이였다. 새벽이면 밤이슬을 맞아야 하는 노숙도 아니었고, 막사로 이루어진 넓은 공간에는 간이침대도 있었다.

지금껏 아랑은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끝없는 일에 시달렸다. 그런 그에게 새로 주어진 일은 카일이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토벌대가 완전히 떠난 것을 본 아랑은 서둘러 막사로 들어가 카일이 준 두툼한 옷을 걸쳐 입었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소매를 몇 번 걷고, 길이는 허벅지 중간을 덮었지만 그게 뭐 어떤가, 따뜻하면 되지.

“까망아. 너도 여기가 따뜻하고 안전하고 좋지?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얌전히 있어. 혹시 누가 들어오는 거 같으면 얼른 바구니에 들어가고. 알겠지? 그럼 난 가서 보급대 가서 물건 좀 받아올게.”

밤새 아랑의 침대 아래에 있는 작은 바구니 안에 들어가 있던 까망이 어느새 자신의 침대에 올라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몸을 굽혀 매끄러운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막사를 나선 아랑은 발걸음을 빨리해 보급대로 향했다. 날이 궂을 거라더니, 물기를 잔뜩 먹은 먹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지 않더라도 온종일 구름 가득한 날씨가 이어지면 평소보다 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짙은 회색의 구름이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스산한 바람이 아랑의 몸을 휘감자 발걸음을 재촉했다.

“으……. 비만 오지 마라, 제발.”

아랑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었다. 오늘은 양초만 받아올 것이 아니라, 삽자루도 하나 받아와야 할 것 같았다. 

* * *

“하. 뭘 먹어도 배가 금세 꺼지냐.”

닉은 저녁을 먹고도 출출한 배를 손으로 만지면서 막사를 벗어났다. 비가 오는 것은 아니지만, 며칠째 하늘은 습기만 잔뜩 머금고 있었다. 어둑한 날씨 때문에 토벌 진행이 느려졌고 덕분에 다들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궂은 날씨엔 체력적으로 기사들을 따라가지 못하는 마법사들은 남겨 두고 다니는 카일을 떠올린 닉의 입가가 삐뚜름해졌다. 

토벌대에 꼭 참가해 달라는 간곡한 요청에 제가 근무하는 왕실 마탑에 출장계를 내면서까지 먼 길을 날아왔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회포도 좀 풀고 지난 이야기도 하고 싶었지만, 실상은 얼굴 한번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냥 안개가 아닌 것 같은데.”

닉은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는 작게 파이어볼을 피워 보았다. 공기 중에 가득한 습기로 인해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파이어볼을 유지하는 것에 평소보다 마나가 더 들어가자 닉은 싱긋 웃으며 표정으로 마나를 거둬들였다. 

이 정도 습한 날씨면 내일도 안개가 이어질 테고, 그렇다면 마법사들뿐 아니라 기사들도 토벌에 나가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그럼 놀아야지, 암.”

자신의 막사로 들어가 술병을 품에 안고 나온 닉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스산한 바람에 후드를 눌러쓰고 콧노래를 부르며 카일의 막사에 도착한 닉은 입구에 선 채 멍하니 그 안을 둘러보았다.

일반적으로 이런 험한 곳에서 토벌대에 참여한 사람들이 쓰는 막사라 하면, 말 그대로 노숙을 면하기 위한 장소였다. 마법사나 상위 기사들에게는 간의 침대가 제공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곳은 그저 바닥에 낙엽을 잔뜩 쌓아 놓고 그 위에 모포 한 장 덮고 누울 뿐이었다.

그리고 막사조차 배급받지 못한 보급대들은 겨우 하늘만 가리는 천막을 치거나 노숙해도 밤이슬 맞는 일이 허다한 곳에 위치했다. 때문에 닉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믿을 수가 없었다.

등 뒤로 스산한 바람이 불고, 온갖 짐승과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그와 반대로 카일의 막사 안은 말도 안 되게 아늑하고 달콤하고 포근한 분위기는 자아내고 있었다.

막사 가운데 아담하게 피어 있는 작은 모닥불 위에는 작은 주전자가 고정되어 따스함과 은은한 불빛으로 안을 밝혔다. 막사 테두리엔 이름 모를 풀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고, 칙칙하고 퀴퀴한 냄새가 아닌 향긋한 풀냄새가 가득했다. 

막사 안을 방황하던 닉의 시선은 모닥불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상의를 벗은 채 편히 앉아 고개를 젖히고 있는 카일에게 멈췄다.

“카일, 움직이지 마요.”

그리고 카일의 의자 뒤로 검은 머리를 한 작은 소년이 일어나서 하는 말에 닉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카일? 영주님이라거나 마스터님도 아니고. 그냥 이름을 막 부르는 사이는 닉으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

가끔 카일의 막사를 찾는 사람들이 있기에 아랑은 하던 일을 서둘러 끝냈다. 보통은 그냥 들어오던데 오늘 들어온 사람은 계속 입구에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를 향해 다가간 아랑은 조심스럽게 두 팔을 내밀었다.

막사를 둘러보던 닉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곱게 생긴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향해 옷을 달라는 듯 두 팔을 내밀자, 홀린 듯 걸치고 있던 후드를 벗어 그에게 건넸다.

거기다 정말 시동의 말을 듣는 것인지 카일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을 막사 안으로 안내하고는 카일의 옆으로 의자를 하나 더 끌어다 놓는 행동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날씨가 스산하죠? 따뜻한 차 괜찮으세요?”

차는 좋지만, 지금 여기에 차가 어디 있다고? 그가 준비해 준 의자에 앉은 닉은 아랑이 모닥불 위에 있는 주전자를 조심스럽게 잡아 머그잔에 붓더니 그 안으로 무언가를 넣는 것까지 유심히 지켜보았다.

“피로 회복에 좋은 꽃잎을 조금 넣었어요.”

차가워진 손을 데우기 적당한 온도의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닉은 머그잔 안에 활짝 피어 있는 분홍 꽃을 보자 마치 황궁의 실내정원이라도 방문한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 안이 훈훈하긴 했지만, 날씨에 상의를 벗고 얼굴에 수건을 올리고 있는 카일을 닉은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제 눈빛을 읽은 듯 시동이 그의 등 뒤에 서자, 얼른 차를 홀짝이며 저도 모르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왜?”

시동이 카일의 얼굴을 덮고 있던 수건을 치우고 나서야 몸을 바로 한 카일의 퉁명스러운 말을 들을 수가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여기가…….”

카일의 얼굴에 이어 어깨에 걸쳐진 수건을 치운 시동이 막사를 나가고서야 닉을 자세를 고쳐 편히 앉았다.

분명 얼마 전 들렸던 카일의 막사 안은 지금 자신의 막사와 특별히 다를 게 없었다.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이라고는 막사 한쪽에 새로 생긴 작은 간이침대와 그 옆으로 작은 테이블이 하나 늘어나 있었다는 점이다.

다른 점은 막사에 매달려 있는 각종 풀과 바닥을 굴러다니던 자잘한 돌들까지 싹 정리되었고, 그 가운데 모닥불이 하나 생긴 것이었다.

“왜 왔냐고.”

“나…… 여기 살래.”

닉은 진지한 표정으로 카일을 응시했고, 돌아오는 건 냉대와 험한 말이었다.

아랑은 식은 수건들을 가지고 나와 막사 옆에 있는 통에 널었다. 늦은 밤, 빨래를 할 수 없으니 모았다가 내일 낮에 할 생각이었다.

카일의 막사를 맡게 되면서 아랑에겐 많은 여유 시간이 생겼다. 눈뜨면 나가서 해지면 돌아오는 카일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죽이기보다 부지런한 그는 많은 일을 했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깨끗하고 정리정돈을 잘하는 아랑은 공들여 막사를 청소했다. 한낮엔 지난밤 나온 빨랫감을 가지고 냇가에서 나가 빨래했고, 근처 약초도 뜯어왔다.

오후엔 보급대에서 필요한 물자를 받아오고, 저녁준비와 그날 채집해 온 약초를 손질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카일이 돌아오면 그가 씻으러 나간 사이, 보급대에서 받아온 재료로 저녁을 준비했다.

저녁 식사 후엔 자연스럽게 피곤한 그를 위한 마사지 시간이 생겨났다. 마사지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근육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는 약초를 따끈하게 우려낸 물에 수건을 적셔 카일의 어깨와 팔에 둘러주었다.

다음으로 심신 안정에 도움을 주는 약초를 우려내 수건을 적시고 그의 얼굴을 전체를 덮어주었다. 손으로 만지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운 수건이 자연스럽게 식는 그 짧은 시간은 어느새 일과 마지막을 장식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기지개를 켜고 막사 안으로 들어간 아랑은 두 쌍의 눈이 자신에게 꽂히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아……. 저 나가 있을까요?”

둘만의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한 것인가 싶어, 아랑은 손은 막사 입구에 둔 두툼한 옷으로 향했다.

“우리 시동은 이름이 어떻게 돼?”

카일의 입술이 열리고 무언가 말이 들리기도 전 새로 나타난 남자의 손에 갑작스럽게 두 손을 곱게 잡힌 아랑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방금까지 앉아있었는데, 언제 제 앞으로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돈이 좀 많아. 한 달에 1골드 줄 테니까, 내 막사로 오면 안 될까?”

“…….”

“1골드가 작나? 그럼 2골드? ……좋다! 그럼 이번 토벌 끝날 때까지만. 이것도 아닌가? 내가 라이엔부르크에 작은 집 하나 사줄게. 그리고 내가 토벌대 참여할 때만 시동해 줘.”

닉은 진심을 담아 아랑의 두 손을 꼭 잡고 애원했다. 이렇게 능력 있는 시동이라면, 여기가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수도 라이나까지 데려가 집사라도 시킬 의사가 있었다.

“저는 카일의 시동인데요.”

“알아! 알아. 그런데 내가 건 조건이 더 좋잖아? 내가 이래 봬도 왕실 마법 학회 수석 마법사야. 원하면 마법도 가르쳐주고! 혹시 뭐 배우고 싶은 거 있어? 내가 다 가르쳐줄게. 아니다! 후원자! 그래 후원자가 돼줄까?”

어느새 상의를 챙겨 입고, 막사 한쪽에 있는 책상에서 서류를 보고 있는 카일을 슬쩍 훔쳐보던 아랑은 마법사라는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휙 돌려 닉을 쳐다보았다.

마법사. 마법사. 그러니까 마법사님이 시라고요?

“마법사…….”

“그래. 내가 마법사야. 왕실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지. 이 나이에 나보다 높은 수준을 가진 사람은 없거든. 자자, 보여줄까? 이거 어때.”

마법사라는 말에 호기심을 보이는 아랑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닉은 급히 손바닥을 펼치고는 그 위로 작은 불꽃부터 만들어 보였다. 

동그란 아랑의 눈이 더 커지고, 당황스러움이 가득하던 얼굴은 어느새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이렇게 빨리 마법사를 만날 줄이야. 그것도 왕실 아카데미 출신에 왕실 마법학회에 계신 분이라면…….

닉의 손바닥에 피어난 불꽃은 작았지만, 곧 회오리처럼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돌기도 하고 길쭉하게 길어지거나 이리저리 휘었다. 그 모습을 따라 아랑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억!”

아랑의 입술이 움찔거리고, 급기야 헤…… 하고 살짝 벌어지려는 찰나, 외마디 비명과 함께 아랑의 눈을 현혹하던 불길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카일 폰 아덴!”

뒤통수를 감싼 닉은 몸을 홱 돌려 카일을 노려보았다. 저 미친 새끼가, 어떻게 사람 뒤통수에 대고……. 닉의 발 옆에는 나무 문진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일반인이 던져도 무기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인데, 소드 마스터가 던진 것의 파괴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닉이 쉴드 마법을 펼치지 않았다면, 뒤통수가 깨졌을지도 몰랐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닉, 아랑은 내 것이다.”

무덤덤한 카일의 말에 버럭 소리 지르던 닉도, 아파하는 닉의 뒤통수를 봐주려던 아랑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내 것이라고, 그러니까 탐내지도 말고, 아니군. 쳐다보지도 마.”

엄청난 말을 한 카일은 보고 있던 서류에 태연히 서명하고는 능숙하게 말아 씰 왁스로 봉인했다.

“카일?”

닉은 아픈 뒤통수를 문지르다 말고 자신의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아랑과 카일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 자신의 시동이니 주기 싫으면 주지 않을 수도 있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왠지 저 말을 들으니 순수하게 그것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카일의 두 손에 쏙 들어갈 것 같은 아랑의 허리에 시선이 멈추었다. 혼란스러운 닉만큼이나 카일의 말을 따라가지 못해 버벅거리던 아랑은 닉의 시선이 멈춘 곳이 자신이 허리임을 확인하자 재빨리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지금 마법사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생각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런 이상한 눈초리는 좀 거둬주시고…….

여자만큼 작은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 하얗고 말간 귀여운 얼굴을 한 채 급하게 두 손을 내밀어 저어대는 행동을 하는 아랑의 얼굴로 닉의 시선이 옮겨갔다.

“아닙니다!”

“아랑. 지금 저 사기꾼 마법사를 따라가겠다는 것이냐?”

외마디 외침 같은 아랑의 목소리가 좁은 막사를 채우자, 지금껏 이쪽은 바라보지도 않던 카일의 고개가 천천히 들리고 초록빛 눈동자가 아랑에게 꽂혔다.

“오! 아랑, 잘 생각해. 저놈은 무지막지한 놈이야. 싹수가 노란 영주인데다가, 현 세계에 5명밖에 없는 소드 마스터라고 기고만장한 성격파탄자거든. 아마 네가 마음에 안 들면 단칼에……아니구나. 칼 같은 것도 필요 없지. 그냥 눈빛만으로도 널 그냥 이 세상에서…….”

감정이 담기지 않은 채 빨려들 것 같은 카일의 눈동자를 마주한 아랑은 시선을 피하지도 못한 채 귓속으로 파고드는 닉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라는 단어와 자신을 죽이는 것에 칼조차도 필요 없을 거라는 말에 지난번 그에게 잡혀 멍들었던 손목을 다른 손으로 감쌌다. 

그냥 잡는 것만으로도 손목에 피멍이 들었는데, 아마 카일이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그리고 지금처럼 쳐다보는 눈빛에도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혹시 보낼 거면 아프지 않게 보내 달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아랑은 침묵을 선택했다.

“빠각.”

이상한 파열음에 아랑은 그제야 얽혔던 시선에서 벗어나 파열음이 난 곳을 향했다. 카일의 손에 올곧게 잡혀 있던 펜이 기괴한 모습으로 꺾여 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보라고! 지금…….”

“닉, 한마디만 더 해. 당장 네 목부터 꺾어 주지.”

아니, 제가 뭘 했다고. 지금 두 분이 무슨 이유로 이상한 기 싸움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전 그냥 대마법사 프레데릭 베르님을 찾으면 떠날 건데요. 그리고 냉정하게 말해 카일과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고, 노비 문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때 연못에서 “너 내 시동해라.” 이 한 마디 하신 것이 전부이지 않습니까?

“카일. 차를 좀 더 드릴까요?”

냉랭하게 얼어붙은 분위기를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아랑은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는 최대한 해맑게 웃으며 모닥불 옆으로 향했다. 사람이 자고로 몸과 마음이 따뜻하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지금 이 난리 치는 것도 다 날이 꿉꿉하고 그래서 날카로워져서 그런 것이야.

“마법사님도 한 잔 더?”

아랑은 날카로운 두 쌍의 눈동자를 몸에 달고서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소드 마스터에 공작인 카일도, 대마법사를 찾기 위해 꼭 필요한 마법사 닉도 놓칠 수가 없었다.

“아니지. 밤엔 술이지!”

일단 따뜻한 차를 권하며 분위기를 녹이려는 아랑의 수고를 아는지 닉도 품에 끌어안고 온 술을 꺼내놓았다. 술이 있으니 당연히 술판이야 벌어지는 것이고, 아랑은 얼른 몸을 움직여 보급대에서 받아온 밀가루부터 물에 개었다. 

술안주로 적당한 것이 뭐가 있을지 고민하던 그가 떠올린 건 부침개였다. 비가 오면 더 좋겠지만, 스산하고 숲 안개가 잔뜩 낀 날씨에도 어울리는 것이었다.

솔직히 지금껏 술이라고 먹어본 건 엄마가 마시던 맥주를 얻어먹은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때 엄마와 먹었던 파전이 먹고 싶어졌다.

부침개의 생명인 부추도 오징어도 없지만, 아랑은 자신의 모아놓은 약초 보따리를 과감하게 풀었다. 오징어와 제일 중요한 부추가 없지만, 나에겐 약초와 육고기가 있다고!

언젠가 로엔에게 귀한 약초 가지고 헛짓거리한다고 욕을 먹으면서 찾아낸, 부침개 재료로 가장 적합한 풀을 찾아 꺼냈다. 그렇게 어설픈 부침개가 준비되고, 이내 넓은 팬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아랑이 몇 살이지?”

닉은 자신에게 건네주는 접시를 받고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조금 떼서 입 안에 넣었다. 바로 아랑이 “뜨거워요!” 라고 외쳤지만, 이미 입 안에 들어온 음식을 뱉을 수 없기에 입 안에서 호호 불어 열감을 식혔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모닥불 앞에 쪼그리고 앉아 다된 음식을 접시로 옮기는 아랑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사람을 현혹시키는 냄새로 후각과 함께 미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태어나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 신기했다.

“스무 살요.”

닉의 몫으로 두 장, 카일의 몫으로 세 장, 자신의 몫으로 한 장을 부친 아랑은 제 것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당히 식은 음식을 오물거리고 먹던 닉의 눈동자가 커지고 그의 손은 거침없이 움직여 한 점 크게 떼어 입에 넣었다.

처음 보는 음식의 맛도 믿을 수 없었는데 스무 살이라는 아랑의 말 역시 믿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아랑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닉과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카일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나이를 물어서 대답했을 뿐인데, 아랑으로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그들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 줬는데 못 믿으면 그건 어떡한단 말인가.

“스무 살 맞아요.”

쐐기를 박듯 확고하게 한 번 더 대답한 아랑은 자신의 몫으로 구운 부침개 한 조각을 야무지게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니, 열다섯이 아니고?”

아니, 이 사람이 내가 이곳에서 와서 개고생한 4~5년을 왜 그리 퉁쳐서 날려버리시는 겁니까?

아랑은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고는 자신의 침대로 가려다 저를 향해 빈 접시를 내미는 닉을 보았다. 그거 생각보다 큰 건데 이 짧은 시간에 다 드셨다고요?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자신의 전을 본 아랑은 갈구하는 눈빛의 닉을 거절하지 못하고, 우선 자신의 몫을 그에게 내밀었다.

“하는 김에 좀 더 하지.”

“아! 불이 많으면 더 빨리하겠지? 아랑아, 한 번에 3~4개씩 하자. 내가 불 만들어 줄게.”

다시 처음부터 밀가루를 그릇에 옮기던 아랑은 등 뒤에서 들리는 카일과 닉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식은땀이 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생히 깨달았다.

“…….”

진짜 이게 말이 되냐고요, 이 사람들아.

불을 더 만들어 준다는 닉의 말에 아랑은 팬이 하나밖에 없다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야밤에 술판이 아니라 야밤에 야식 만들기 퀘스트가 자신에게 주어진 것 같았다.

이거 그냥 차원 이동만 한 것이 아니라, 혹시 이거 게임물 같은 거 아닐까? 야밤에 영주님과 마법사를 만족할만한 야식을 준비하라. 5/100, 이런 거.

그 길로 후드를 쓰고 나간 닉은 보급대에서 4개의 팬을 더 구해왔다. 그리고 반죽을 분지하는 아랑의 옆에서 카일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가 넣는 것들을 유심히 보다 간간이 “더” 라는 단어를 말했다. 그리고 그 뒤 닉은 허공에 불을 피웠고, 친절하게도 팬까지 불 위에 같이 띄워주었다.

아랑이 원하는 수준의 불로 일정하게 조절해 주는 닉 덕분에 부침개를 태우지 않고 구워낼 수 있었지만, 도대체 몇 장을 구운 것인지……. 닉과 카일의 접시에 팬케이크 쌓는 것처럼 잔뜩 부침개를 올린 아랑은 겨우 자신의 접시에 한 장만 올린 채 구석에 있는 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앞으로 이 식신들을 위해 음식을 하나 봐라. 그냥 그저 제가 먹고 싶어서, 술을 드신다기에 잘 보이려 부침개 하나 부쳤다가 호된 노동 착취를 당한 아랑이었다.

“아랑 이리 와. 스무 살 성인인데 너도 한잔해야지.”

뭐야, 그럼. 신분 차이 때문에 술을 안 준 게 아니라 어려서 안 준 거였어?

넉넉하게 부침개가 쌓인 접시를 보며 밝은 미소를 띤 닉은 자신이 마시던 잔을 홀랑 입 안으로 털어 넣고 아랑을 향해 빈 잔을 내밀자 그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그래, 원래 시골에서 일 시키면 짬짬이 새참주면서 막걸리도 같이 준다더라. 너희도 나 일 시켰으니, 이런 것쯤은 충분히 받아먹을 자격이 난 있는 것이야!

“닉. 나서지 마라.”

기쁜 마음으로 빈 잔을 향해 손을 쭉 뻗던 아랑은 귀를 파고드는 낮은 음성에 내민 손을 거두지도, 그렇다고 잔을 잡지도 못 한 채 카일을 바라보았다.

“아랑. 오늘 수고 많았으니, 그것만 먹고 어서 자거라.”

아니, 이 사람이 지금 환하게 불 다 밝혀 놓고 둘은 술을 마시면서, 나는 구석에 짜져서 잠이나 자라고? 나도 할 말이 있다고요. 그쪽 말고, 여기 대마법사님께! 내가 언제 또 이런 분을 만날 줄 알고. 지금 이럴 때 궁금한 거 묻고 들어야 한다고요.

여기 적당히 술도 있고, 부침개도 있고, 분위기 딱 좋은데! 너희가 원하는 만큼 부침개 부쳤잖아!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 아랑의 옆으로 다가간 카일의 큰 손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방금까지 이도저도 못 하고 뻣뻣하게 굳어 있던 작은 몸이 풀썩 무너져 내렸다.

짧은 순간 깊은 잠에 빠진 듯, 고른 숨소리를 내는 아랑이 바닥에 부딪히기 전 받쳐 안아 든 카일은 조심스럽게 그를 제 침대에 눕혀주었다. 이불까지 손수 덮어 찬바람이 들지 못하도록 잘 여미고서야 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뭐냐. 진짜.”

닉은 오늘 자신이 보는 카일의 모든 모습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재빨리 빈 잔에 술을 채워 벌컥벌컥 들이켰다. 

왕실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난 카일은 이 세상 무심함은 모두 다 가진 아이였다. 같은 나이에, 같은 귀족 출신이지만 기사 수업을 받는 카일과 마법 수업을 듣는 닉은 접점이 없었기에 흘러흘러 그의 소문만 들었었다.

같은 해 입학생 중 북쪽 얼음의 땅, 아덴 백작의 아들이 있는데 소탈하고 입이 무거운, 연습에 미쳐 사는 아이라는 소문이었다. 그날 숲에서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왕궁 무도회에서나 스치듯 만날 그런 사이였다.

신입생 테스트라는 호칭의 행사가 있었다. 1학년이 끝나가는 이른 여름에 열려 한 해 동안 배운 것들을 현장에서 실습하는 일이었다. 그 결과로 유급을 하거나 월반이 된다고 하는데 신입생 테스트가 생긴 이후, 지금까지 그 누구도 유급하지 않았고 월반을 한 학생도 없었다. 허울처럼 말만 붙여 놓은 테스트였다. 

다들 도시락 하나씩을 들고 근처 숲으로 들어가 하루 놀다가 돌아오면 되는 일정이었지만, 어디서나 있을 법한, 말 더럽게 안 듣는 마법 실습생 한 명이 늑대 새끼를 죽인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잘 놀고 있는 새끼 늑대를 성체가 되었을 때, 위협적인 동물이 될 것이라는 이유로 죽여 버렸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늑대무리가 미친 듯이 신입생들을 공격한 것이었다.

실제로 동물 한번 죽여본 적 없이 실습장에서 칼만 휘둘러온 예비 기사들과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마법 책만 죽어라 보고 도식만 외우던 마법 실습생들은 지능적으로 무리 사냥을 하는 늑대들을 이길 수가 없었다.

피하기에 급급해 숲으로 흩어진 채 숨어 있던 닉은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드는 늑대를 보며 입 안으로만 주문을 외웠다. 주문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맴돌았고 그런 닉에게 늑대가 달려들었다. 그 순간, 자신의 앞을 가린 이가 있었고, 그가 바로 카일이었다.

늑대를 물리친 그는 무심히 지나쳤지만, 닉은 살기 위해서라도 그의 옷을 잡고 늘어졌다. 생명의 은인이라는 단어를 뱉었다가 카일의 큰 주먹에 한 대 맞고 기절한 후 친구라는 명목으로 그의 옆에 있게 되었다.

말이 좋아 친구지, 지금도 일방적으로 닉이 붙어 있는 수준이었다. 이번에 토벌대 참여 역시 카일은 친구로서 부탁이라기보다 공문으로 협조를 요청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닉이 옆에 붙어 지낸 10년간 알아낸 것은 카일은 세상 모든 일에 무심하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훈련만 하는 학생이었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갑자기 전쟁터로 잠적을 감추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전쟁터를 떠돌이처럼 돌아다녔던 그는 자신의 영지를 정식으로 인계받은 후엔, 영지를 돌보는 것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막사를 잘 관리하는 아랑에게 자신과 함께 가자고 물은 것은 진심이었다. 이런 촌구석에서 재미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카일의 옆에서 지내는 것보다 자신과 수도에서 지내는 것이 아랑을 위해 좋을 것 같았다.

안전하고 넓은 세상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 최고가 아닐까? 거기다 처음 봤을 때, 닉은 아랑이 15살도 채 되지 않는 어린아이라 생각했기에 그런 제안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제가 제시한 조건이 파격적이었기에, 쉽게 그러겠노라 대답할 줄 알았다. 그리고 카일에겐 새로운 시동을 구해줄 생각이었다.

이런 안락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약초에 대해서 잘 아는 시동은 못 구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아랑을 감싸는 행동을 보인 카일을 보는 닉의 시선은 절로 묘하게 변했다.

“카일.”

“적당히 마셨으면 돌아가. 내일도 날이 괜찮다면 토벌에 나설 거고, 큰 이상이 없으면 이번 주 안에 토벌대 철수할 거다. 이 정도면 올 겨울은 무사히 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인간이 너무 많이 개입해서도 안 돼.”

아랑의 이불을 여며준 카일이 제 자리로 돌아와 남아 있는 술잔을 비우며 하는 말에 닉의 눈초리가 더 가늘어졌다.

“영주님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영주라면…….”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말하던 닉은 싸해진 분위기에 들고 있던 술잔을 슬쩍 내려놓았다. 문득 머리를 스치는 사실에 나른하게 앉아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우고 있는 카일의 손목을 잡았다.

“닉, 너무 많은 걸 생각하지 마. 나도 아직 모르는 일이니까.”

확실하게 말을 꺼내려던 닉은 움켜쥔 카일의 손목을 놓고 자리에 편히 앉았다. 아랑이 만들어 준, 이름도 모르는 음식을 먹느라 제대로 술도 마시지 못한 닉은 조용히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나 여기서 좀 자고 가자.”

취기가 오른 닉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아랑이 자고 있는 침대로 향했다. 좁은 간이침대에 덩치가 산만 한 카일 옆에 모로 누워 제대로 자지 못할 바에야 체구가 작은 아랑의 옆에서 편히 잘 생각이었다.

“…….”

분명 아랑의 침대로 향하던 닉은 어느 순간, 자신이 막사 밖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눈을 껌벅거렸다. 늦은 밤 차가운 바람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닉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쏟아져 나왔지만, 명백한 카일의 추방령에 그는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막사를 밝히던 모든 불이 꺼지고, 밤새 온기를 채워줄 모닥불만이 은은하게 안을 밝히자 카일은 자신의 침대에 편히 몸을 눕혔다. 온종일 숲을 누비고 다녔고, 제 손에는 짐승들의 피가 한가득 묻어났다.

아직 성체가 되지 않은 몬스터와 자식을 양육하는 짐승들을 피해 늙고 병든 개체만 찾아다니면서 죽이는 것은 꽤 피곤한 일이었다. 차라리 모두 죽여 버리는 것이 시간도 체력도 절약되는 일이지만, 개체 수를 잘못 조절함으로써 숲의 균형을 깨트렸을 때 일어나는 일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잠을 청하기 위해 감겼던 눈이 천천히 떠지고 카일의 시선이 반대편 침대에 잠든 아랑에게 머문 것도 잠시, 그는 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처음에 잘 덮어줬었는데, 그새 뒤척였는지 몸의 절반이 휑한 공기에 노출되어 있었다. 지금이야 따뜻하겠지만 새벽으로 갈수록 기온은 떨어질 테고, 피워 놓은 모닥불도 서서히 줄어 추위에 떨다 병이 날까 걱정되었다.

연못으로 가던 길, 아랑을 발견한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데리고 있던 시동은 늘 막사 안에 목욕물을 준비했기에 그가 늦은 밤 야외에서 목욕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하필 그날 시동이 다쳤고, 보급대 주변의 안전을 살필 겸 씻을 겸 나선 것이었다.

나무 둥치 아래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보급대의 허드렛일을 하는 아이가 울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 정도 눈치가 있는 아이라면 다친 시동 대신 임시 시동으로 데려갈 마음이었다.

자신을 보고 놀란 조그만 아이의 당황한 기운이 자신에게까지 온전히 느껴졌다. 당장 마을에만 가지고 가도 최소 10골드, 왕궁이 있는 수도 리아나로 가져갔을 경우 50골드는 족히 받을 수 있는 카쿤을 냉큼 먹어버리는 그 행동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아야만 했다.

열다섯쯤 됐을까? 어쩌면 그보다 더 어릴 것 같은 사내 녀석이 먹었을 때야 어떤 효능도 없을 카쿤은 중장년 귀족 남자들은 없어서 못 먹는 귀한 정력제였다. 제가 먹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 같은 아이는 구린내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처음엔 녀석도 연못으로 들어오게 해 자신의 등을 닦게 하고 그 아이도 씻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연못으로 오자마자 안절부절못하며 저를 흘깃흘깃 훔쳐보는 그 시선에 씁쓸함이 밀려왔다. 그 시선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만, 왠지 순진해 보이는 녀석을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잘 빠, 빨겠습니다!”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 같이 어린놈이 벌써 그런 걸 안단 말인가? 그래 놓고는 한다는 말이 잘 빨겠다고?

달빛에 비친 까만 머리는 반들반들 광채가 나고 하얀 얼굴에 까만 점을 박아 놓은 듯한 짙은 색의 눈동자, 그 아래 도톰하고 붉은 입술이 달싹이며 하는 요망한 말에 오히려 당황한 건 카일이었다.

아마 녀석이 자신의 옷감을 들어 보이지 않았다면, 곧장 쪼그리고 앉아 빨래하지 않았다면 한동안 관계를 가지지 않아 잠들어 있던 음심이 드러났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자신의 막사로 데리고 온 아랑은 마치 입 안의 혀처럼 약삭빠르게 행동했다. 어디 가나 똑같이 허름했던 막사가 깨끗해졌다. 산골에서 약초꾼을 했다더니, 어디서 그런 것들을 매번 주워와 막사 안에 널어놓았다. 그러고도 그 작은 엉덩이를 잠시도 붙이지 않고, 다람쥐처럼 내도록 빨빨거리고 다니는 걸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침이면 더벅한 머리를 손으로 두어 번 쓱쓱 눌러 내리고는 눈곱도 떼지 않은 채, 다 죽은 모닥불을 살려 따뜻한 음료를 내놓았다. 밤낮 동안 온 전갈들을 밤에 보고 있노라면 아랑은 한쪽에 앉아 풀을 다듬었다.

나갈 때면 쪼르르 나와 다녀오라고 손 인사도 하고, 돌아오면 피로를 풀어주겠다며 약초 냄새 가득한 수건들을 자신의 몸 여기저기에 올려놓았다. 소드 마스터가 된 이후로 아파본 적도, 다쳐본 기억도 없는 카일에게 아랑이 널어놓는 수건들은 그저 축축하고 냄새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녀석이 열심히 준비했기에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그 풀향들은 제법 기분을 편안하고 좋게 만들어주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피곤을 줄여주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는 대상은 처음이었기에 카일에게 아랑은 꽤 신기한 존재였다.

“카쿤……. 골……드. 내 돈!”

신경 써서 이불을 덮어주고 옆에 서 아랑을 내려다보던 카일은 혼자 뭐라 중얼거리다 퍽-하니 이불을 발로 걷어버리는 그 행동에 작게 혀를 찼다.

뒤척이느라 바지가 휘감겨 올라갔다. 그렇게 드러난, 자신의 팔뚝보다 가늘어 보이는 허벅지와 잠버릇에 가슴께까지 쭉 올라가 훤히 드러나 있는 근육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하얀 속살에 시선을 옮겨갔다.

“어쨌거나 스무 살이라는 거군.”

한껏 어두워진 눈빛을 한 카일은 아랑을 조심스럽게 들썩여 옷매무시를 바로 하고는 다시 이불을 덮어주었다.

잠든 아랑을 내려다보다 저도 모르게 그 참한 머리를 한번 쓸어넘기자 고운 이마가 살짝 드러났다 사라졌다.

“그만 나오시죠.”

카일은 한마디 툭 하고는 막사 한쪽에 있는 장작 두어 개를 가져와 모닥불에 적당히 올리고는 그 앞 의자에 앉았다. 옆에 있는 꼬챙이를 들고는 장작을 뒤적거려 불이 잘 붙도록 한 카일은 아랑의 침대 밑에서 무언가가 꼬물꼬물 나오는 것을 보고도 태연했다.

“알고 있었냐?”

“모르는 게 더 이상하겠죠.”

“그럼 끝까지 모른 척해 주지.”

모닥불의 연기와 불씨가 날릴까 봐 짧은 다리로 열심히 걸어 카일 옆 의자에 겨우 올라가 앉은 까망의 입에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노망난 것도 아니고, 지금 뭐합니까?”

“내가 뭐?”

카일이 불을 더 키우려 뒤적거리는 걸 본 까망은 살짝 날아올라 후욱- 크게 숨을 불어넣었다.

“아랑이는 숨기고 싶어 하던데, 좀 안 들키게 행동을 하시던가.”

“그런데 왜 너 말이 점점 짧아지지?”

까망은 아니꼬운 표정으로 카일을 노려보며 의자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마땅히 재밌는 일도 없고 그저 호기심이 일어 아랑을 따라온 게 사실이었다. 아랑은 일반인들은 두려워 근처에 가는 것은커녕 보기만 해도 기겁하는 다이어 울프를 자기 집 개처럼 다루는 것부터 해서, 약초를 찾아내는 것도 수준급이었다.

그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카쿤 씨앗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곳에 뿌려둔 것도 까망이었다. 자신을 찾아낸 것을 운이라고 한다면 제가 숨겨 놓은 카쿤까지 찾아낸 것은 운이라고만 하기엔 너무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그 꼴을 하고도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진짜 그때 확 배 갈라서 심장을 씹어 먹어 버리는 건데.”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묵뚝뚝하게 내뱉는 카일의 말에 까망은 저도 모르게 짧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감쌌다. 무시무시한 말이었지만 진짜 그럴 수도 있는 놈이었으니까.

짧은 유희를 끝내고 긴 수면에 들어가려던,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해츨링의 레어를 찾아낸 카일이었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기 위해 찾아온 것도 아니고, 그저 부모님의 죽음으로 자신의 영지가 된 라이엔부크르를 주변을 둘러보다 이상한 곳이 있어 들어왔다고 했다.

카일의 영토인 라이엔부르크는 탈레른 왕국의 북쪽에 있었다. 어디보다 높고 험하다는 알페른 산맥은 북쪽의 다른 나라로부터 안전하게 이곳을 지켜 주었지만, 그만큼이나 많은 들짐승과 몬스터들이 살고 있었다.

먹이가 풍부한 봄, 여름, 가을은 괜찮았지만 눈이 많이 내리고 각박해지는 겨울이면 먹이를 구하러 들짐승과 몬스터들이 마을을 침략하곤 했다. 그랬기에 정기적인 토벌이 이루어져야 했고, 왕국에서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다른 영지보다 세금을 덜 추징했다. 그러나 영토의 절반이 산맥으로 가로막히고. 땅까지 척박한 이곳은 늘 가난에 허덕였다.

허울만 백작이지, 몰락했다고 볼 수 있는 백작가의 외동아들인 카일은 가문을 일으키겠다는 신념으로 왕실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자신이 열심히 해서, 우수한 기사가 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믿었던 순수한 아이는 이제 없었다. 어린 나이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들로 집안이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여유가 아닌 빚만 잔뜩 있는 척박한 땅과 흉흉한 소문이 가득한 곳에서, 토벌에 나선 아버님의 사망 소식과 그 충격으로 돌아가신 어머님을 묻었을 때 카일은 겨우 15세였다.

그가 아직 성인이 아니었기에 왕국에선 라이엔부르크로 임시 관리자를 보냈다. 어린 시절 추억이 가득한 성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엉망이었고, 부모님의 부재는 그를 갉아먹었다.

그리고 비싼 수업비를 낼 수 없던 카일은 아카데미가 아닌 전장으로 향했다. 공허함을 달래기 위한 목숨을 건 전투는 그를 소드 마스터라는 높은 경지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그렇게 15살 아무것도 모르던 소년이 24살의 청년이 되고, 긴 전쟁이 끝이 보일 때쯤 라이엔부르크는 쑥대밭이 되어있었다. 임시 관리자는 없는 마을을 더 빈곤하게 만들었고, 몬스터와 짐승들을 처리할 능력이 되지 못했다. 그나마 일구었던 영지의 반 이상을 그들에게 내어주었다.

라이엔부르크가 무너지고, 다른 마을까지 위험한 상태가 되자 국왕은 급히 전쟁터에 있던 카일을 불러들였다. 소드 마스터가 된 그에게 공작이라는 쓸데없는 족쇄와 같은 작명을 내리고 폐허가 된 라이엔부르크로 보내 버렸다.

추억할 만한 것이 모두 파괴된 영지로 돌아온 카일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알페른 산맥을 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잠든 갓 태어난 해츨링의 레어를 찾은 건 천운이었고, 한창 피와 분노에 젖어 있던 카일은 거침없이 칼을 들었었다.

“그래서 내 레어 털어갔잖아. 내 돈 반이나 줬잖아! 뭐가 불만인데!”

그때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지 못하고 눈을 뜨지 못했다면, 아마도 드래곤 역사상 단명 순위 1위에 올랐을 까망은 큰 눈을 부라렸다.

“유희를 즐기는 것도 아니고, 그 꼴은 또 뭡니까. 어린애한테 붙어서 등골이나 빼먹고. 가진 것도 없는 애가 살아보겠다고 토벌대 보급하는 곳까지 따라온 거 안보입니까?”

카일은 이 상황에서도 모습을 바꾸지 않아 한 손에 쥐고 터트려도 될 것 같은 작은 드래곤 모습으로 있는 까망을 보고 혀를 찼다. 저걸 누가 200살이나 먹은 드래곤으로 알겠어. 그러니 아랑도 드래곤이라는 것도 모른 채 그냥 작고 보살펴줘야 하는 동물로 알고 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뭘 등골을 빼먹어! 내가 애를 지켜주는 거지. 나 아니었으면 얘 사기당하고 길거리에 나 앉았을지도 모르는데.”

“어쨌거나 그 꼴은 그만하고 유희를 즐길 거면 다른데 가시…….”

“피자… 먹고……싶…….”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주고받던 까망과 카일은 쩝쩝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어진 아랑의 잠꼬대에 순간 둘 다 숨을 들이켰다.

“너도 그만해. 토벌대도 곧 철수하잖아. 얘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둬.”

뭘 먹는 꿈을 꾸는지 입맛을 다시면서 뒤척거리던 아랑의 중얼거림이 작아지나 싶더니 곧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까망은 얼른 날아올라 카일의 머리 위를 한 바퀴 돌고는 침대 아래 바구니가 아닌 아랑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으……응? 아…… 까망이.”

갑자기 품으로 들어온 것에 살포시 잠이 깬 아랑이 실눈을 떠 까망을 확인하고는 품에 더 꼭 싸고 안는 모습에 카일은 눈을 부라렸다.

“메…….”

유치하기 그지없는 200살 먹은 드래곤은 분홍 혀를 쏙 내밀어 보이고는 이내 아랑이 끌어 덮는 이불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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