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더울 땐 가을, 겨울이 언제 오나 기다리지만, 한번 바뀌기 시작한 날씨는 하루하루 빠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더 추워지기 전에 토벌을 끝내야 한다는 이유로, 숲 안개가 잔뜩 낀 상황에서도 토벌을 강행하는 카일을 배웅한 아랑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러다 아침에 자신의 품에서 자고 있는 것을 보고 급히 덮어 놓은 이불 속에서 빼꼼 얼굴을 내민 까망을 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품에 끌어안았다.
“아니, 어쩜 술을 한 방울도 안 남겨 놓고 둘이 싹 다 먹어치웠냐. 거기다 부침개까지 아주 바닥을 싹싹 긁어먹었어요. 좀 남겨놨으면 우리 까망이 구워주면 되는데.”
까망을 품에 안고 어르면서 말을 하던 아랑은 길게 한숨을 쉬고, 까망을 다시 자신의 침대에 내려놓았다.
“날씨 추워졌어. 여기 들어가서 자고 있어. 난 뒷정리도 하고 오늘도 일해야지.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
간단한 마법으로 막사 청소부터 설거지며 모든 것을 다 도와줄 수 있는 까망이지만, 이번에는 아랑이 덮어주는 이불 속에 편하게 몸을 눕혔다. 그리 긴 시간을 살진 않았지만, 모르는 게 약인 경우가 더 많았으니까.
대신 설거지할 것들을 들고 나가는 아랑의 등 뒤에 은빛 반짝이는 것들을 살짝 붙였다, 이내 그의 몸으로 사라지게 했다. 한동안 피곤함도 덜하고, 추위도 덜 탈 것이었다.
“어이. 진짜 출세하는 게 딴 게 아니라, 너 같은 꼬마 놈을 보고하는 말이네. 영주님 시동은 할 만하냐?”
지난밤 카일과 닉이 다 먹어 버린 밀가루를 받으러 보급대로 온 아랑은 자신을 보고 농을 건네는 사람을 향해 살짝 머리를 숙여 보였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남을 배려하고, 자신을 조금 낮춘다면 살면서 큰 문제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
“네. 많이 배려해 주셔서 늘 감사하죠. 오늘을 밀가루 좀 넉넉히 주세요.”
“아니, 전에도 많이 받아가 놓고 또 받아가?”
“영주님 체격 아시잖아요.”
“하긴. 그렇긴 하시지. 또 뭐가 더 필요해.”
“이건 제가 챙길게요.”
필요한 물건을 하나씩 담던 아랑은 누군가의 앓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 약초 있으면 좀 나눠 주고 가. 어제 토벌 따라갔다가 빗길에 굴러서 다쳤다는구먼. 어디 찢어지고 부러진 거 같진 않은데 허리를 아예 못 써서 일어나지도 못하네.”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아랑은 갑자기 자신의 앞에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거렸다. 내가 허준 선생님도 아니고, 명의도 아니고. 그냥 할매한테 아는 것 없다고 매일 욕 처먹던 약초꾼이긴 한데요. 만병통치약 같은 건 없다고요.
허리가 아프다는 사람이 마음에 쓰여 얼른 막사에서 약초를 가져와 그 사람을 도와준 것이 이 일의 시작이었다. 시원한 파스 같은 느낌으로, 으깨서 올리고 있으면 화끈화끈하면서 시원한 작은 약초를 아픈 곳에 붙여준 게 전부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왜 거의 하루를 꼬박 누워 있었다는 사람이 바로 일어나? 아무래도 뭐, 근육통이 생각보다 좀 덜해서 일어난 것 같지만 그것을 본 아픈 사람들이 아랑에게로 몰린 것이었다.
찢어진 상처를 대충 내버려 둬 곪기 직전이라던가, 토벌대 따라 다니다 보니 넘어지고 구르고 여기저기 타박상에 자잘한 상처들이 누구에게나 있었다. 그렇게 어설픈 치료소 아닌 치료소는 아랑이 가지고 있던 약초를 거의 다 소비하고 나서야 끝났다.
온종일 여기 묶여 있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아랑은 터덜거리며 막사로 향했다. 이게 맞벌이 부부 중 아내의 애환인가? 시간만 많았다면, 좀 쉬기도 하고 약초를 따러 가거나 쌓아 놓은 약초 손질을 했을 텐데.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는 아랑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당장 저녁을 준비할 시간도 부족해, 카일이 좋아하는 고기만 거하게 구워내야 할 판이었다. 아니 그것마저 그냥 누가 해 주면 안 되나? 처음부터 사람은 길을 잘 들여야 했다.
토벌대 보급대에는 전담 요리사들도 있었고, 그들은 토벌대원들의 식사를 매끼 만들어냈다. 하지만 전문 식당도 아니고 노상에서 대량으로 만드는 음식이기에 맛은 포기하고 그저 배를 불리게 하는 용도가 전부였다.
아랑도 그 이상한 음식을 먹고 지냈었다. 하지만 카일의 막사로 오면서 따로 식품을 받을 수 있게 되자,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직접 요리하는 것이었다.
늘 일하는 엄마를 둔 탓에 아랑은 초등학생이 되기도 전부터 부엌과 친해졌다. 혼자 냉장고에서 엄마가 만들어 놓은 음식들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었고, 조금 더 컸을 때는 먹은 뒤 그릇을 깨끗이 씻어 놓기까지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돼서는 식은 음식을 데워먹거나, 맛없는 인스턴트 음식에 지쳐 직접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조금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중학생이 되자마자 요리 학원을 다녔다.
기본적인 요리 실력은 있는 데다 로엔과 살면서 식사 담당은 아랑이었기에 한국 음식이든 이곳의 이상한 음식이든 기본 이상은 한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처음엔 미심쩍어하던 카일도 아랑의 음식을 맛본 후 자연스럽게 그가 만든 음식을 찾았다.
“짜장면! 치느님! 족발! 아씨, 왜 이곳은 배달이 안 되냐고. 마을로 가면 배달음식점이나 차릴까 보다. 떼돈 벌 자신 있는데!”
막사로 향하던 아랑은 어둡다 못해 이제 무수히 많은 별들이 콕콕 박혀 있는 하늘을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배달음식 먹고 싶다.”
원치 않는 재능기부 일과에 지쳐 바닥을 보고 걷던 아랑은 카일의 커다란 발을 보고는 멈춰 섰다. 같이 지낸 지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가끔 이렇게 그를 볼 때면 거대한 체격에 기가 질렸다.
지금 눈에 보이는 발만 해도 자신의 발의 2배는 되어 보였다. 카일과 자신의 발을 동시에 보자, 마치 아빠와 아이의 발을 보는 것 같았다.
“오셨어요?”
오늘 아침에 나가서 막사에 들어온 것이라고는 약초를 가지러 들른 것이 전부였다. 막사 안에는 이전에 없던 물건이 있었다. 막사 가운데 있는 낯선 커다란 목욕통을 본 아랑의 눈동자가 어설프게 흔들렸다. 열심히 다른 잡심부름은 다 했지만, 그의 목욕시중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카일은 늘 돌아와 갑옷만 벗어놓고는 휘적거리며 나가 씻고 들어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여기서 씻으시는 건가요? 그럼, 지금부터 제가 해야 하는 일은 그 물통을 다 채우는 건가요? 그게 왜 하필 오늘인가요? 저 미친 듯이 피곤한데, 제가 거기 물을 다 채우면 내일 아침이나 될 것 같네요.
머릿속에 맴도는 무수한 말을 참으며 목욕통을 보던 아랑의 눈에 모락모락 솟아나는 뜨거운 김이 보였다. 이미 뜨거운 물이 가득하다고? 왔다 갔다 삽질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까이 다가가 뜨거운 물이 가득 찬 나무 욕조를 보는 아랑의 눈빛이 흔들렸다.
친구들과 찜질방 불가마에서 누가 오래 버티는가에 대한 내기를 할 정도로, 차가운 물보다 뜨거운 물에 둥둥 떠 있는 걸 즐겼던 아랑은 저 뜨뜻한 물이 자신에게 어떤 효과를 줄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스산한 날씨에 저런 뜨뜻한 물에 들어가면 온몸의 뼈가 노곤해지면서, 뱃속 깊은 곳까지 따끈해졌다. 그렇게 땀을 쪽 빼고 나와서 바나나 단지 우유를 하나 비우면 그게 얼마나 꿀맛이게요.
“아랑?”
생각의 흐름을 생각지 않고 따라가던 아랑은 카일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 언제 거기 들어가셨나요? 제가 길게 누워 둥둥 떠 있어도 될 것 같이 큰 목욕통이 어느새 꽉 찼군요.
욕조에 들어가 앉은 카일을 본 아랑은 반쯤 차 있던 물이 2/3이상 올라온 것을 확인했다. 그 뒤 꽉 찬 목욕통에 걸려 있는 수건을 보고 그의 등 쪽으로 돌아서 갔다.
민주주의 세상이 얼마나 좋은지는 이곳에 오면서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신분제가 무엇이며, 귀족이 뭐냐! 만약 그 계급으로 태어났다면 불만 없이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았겠지만 피지배계층인 자신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넌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난 등이나 밀라는 거지?
겨우 욕조에 들어앉아 뜨거운 물로 세수를 하고 허니블론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하찮은 일에도 카일의 성난 등 근육과 팔 근육들에 시선이 닿았다. 참 훌륭한 근육들이 쓸데없이 자기 주장하는 걸 지켜보다 문득 자신의 허벅지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저 팔뚝이 자신의 허벅지보다 굵어 보이는 건 착각일까? 이런 나에게 저 태평양 같은 등을 닦으라고? 그래도 까라면 까야지.
“뭐지?”
목욕통에 걸쳐진 다른 천들보다 조금 거친 천을 집어든 아랑은 말없이 오른손에 천을 대충 둘둘 감고 주먹을 쥐어보다 카일의 말에 눈을 끔벅거렸다.
뭐긴요. 이거 당연한 거 아닌가요? 영주님이 지금 목욕을 하시겠다는데, 등이라도 밀어드려야지요. 제가 해야 하는 일 중에 이런 게 들어가 있더구먼요. 이러니 잔말 말고 그 등이나 대세요. 후딱 밀어드리고 또 저녁 준비해야지요.
“쯧. 내가 언제 목욕 시중 들라고 했어? 허튼 생각하지 말고, 저녁은?”
오른손에 수건을 감은 채 카일이 목욕을 하면 당연히 제가 시중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아랑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하며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딱 국 끓이기 좋은 불이네. 아까 채소를 잔뜩 받아왔으니, 고기 넣은 야채수프나 진하게 끓이고, 받아온 빵에 먹으면 될 거 같구나. 그런데 예쁘고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불이 자꾸 흐리게만 보였다. 자신도 뜨거운 물에 잘 씻을 수 있는데, 남이 해 준 밥 진짜 맛있게 먹을 수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해 주던 된장찌개에 자반 고등어구이가 눈앞에 떠오르고, 로엔이 나무 식기에 대충 담아 툭 던져주던 멀건 양송이 수프가 아른거렸다. 그냥 누가 자신을 위해 해 준 음식이 그리워서,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대로 하던 그 순간이 생각난 것이었다.
“…….”
“……도. 욕……잘하……데.”
아랑은 계속 눈이 흐려 팔을 들어 소매에 얼굴을 비볐다. 한 번을 닦아도 시야가 깨끗해지지 않자 이번엔 양손으로 번갈아 비볐지만, 계속 눈앞이 흐려져 아예 눈을 질끈 감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랑?”
“……도…… 욕……좋아…….”
카일은 갑자기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려는지 목욕 수건을 손에 감는 아랑에게 저녁 식사에 관해 물었을 뿐이었다. 그 순간 아랑의 말간 얼굴에 슬픔이 드리웠다. 붉고 도톰한 입술을 삐죽거리고, 사슴처럼 크고 동그란 눈이 깜박일 때마다 후드득거리며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당황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삐죽거리던 입술을 달싹거리고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코끝과 귀 끝이 빨개져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이는 아랑의 행동에 카일은 저도 모르게 허겁지겁 목욕통에서 나와 옆에 있는 수건을 대충 허리에 감았다.
“아랑.”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차라리 숲 한가운데 거친 상위 포식자들에게 둘러싸이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냥 대충 다 후려갈겨 죽여 버리면 될 일인데. 조그만 놈이 예상치 못한 행동은 카일을 얼어붙게 했다.
“나도 뜨거운 물에 목욕 잘하고! 나도 남이 해 준 밥 좋아한다고요!”
“크큽.”
커다란 손이 아랑의 좁고 여린 어깨도 잡지 못해 허공을 방황하는 사이, 갑자기 얼굴을 든 아랑이 외친 말에 아랑의 침대 아래에서 기묘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
요즘 들어 뭐든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아랑은 아랫입술 안쪽을 물어 잘근거리며 불안한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로엔이나 보급대를 거친 사람들의 말대로 자신을 내친다거나 두들겨 팬다거나 쫓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이 따뜻한 물이 주는 온기는 불편한 마음에도 이곳에 들어앉아 있게 만들었다.
눈 질끈 감고 속에 있는 말은 저도 모르게 버럭 외친 후, 자신의 침대에서 나는 까망의 소리에 아랑은 떡하니 벌어지는 입을 두 손으로 얼른 가리고 옆에 서 있는 카일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자신이 저지른 일이 하나도 아니고 최소 두 개인데,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으니 까망이라도 살려달라고 무릎이라도 꿇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내가 하면 되지.”
덤덤하게 말을 꺼낸 카일이 그 뒤에 행한 일은 옷도 벗지 않은 아랑을 달랑 들어 목욕통에 넣어버린 것이었다.
“에?”
놀라 제대로 된 말도 아니고, 이도저도 안 된 의성어를 뱉은 아랑은 카일이 태연하게 보급대에서 받아온 식료품이 있는 곳으로 가 두툼한 고기를 꺼내는 걸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은 뜨거운 목욕통에 들어앉아 목욕을 즐기고, 카일은 허리에 수건 한 장 두른 채 요리를 한다고?
긴 꼬챙이에 고기를 능숙하게 꿰고 모닥불 위에 타지 않게 걸어 올리는 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아니 영주님에 소드 마스터라면서 요리도 할 줄 아는 건가?
“네가 한 것보다는 맛이 없을 테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 할 거다.”
일단 분위기를 봐서는 까망의 존재를 카일이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것에 안도하는 것도 잠시 가시방석 같은 불편한 상황에 아랑은 몸을 일으켰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뜨거운 물이 다 식을 때까지 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목욕통에서 나가려 난간을 잡은 아랑은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이곳 사람들의 평균 신장에 맞춰 만들어진 물건들은 아랑의 기준으로 조금씩 다 크고 높았다.
목욕통에서 물이 넘치지 않는 게 중요한 건 알지만, 이런 토벌대에 오면서도 이리 크고 높은 목욕통을 챙겨야만 했을까? 거의 자신의 허리까지 올라오는 높이에 여길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냥 넘기에도 좀 높다 싶었는데 젖은 옷이 무겁게 몸에 척척 달라붙기까지 했다. 목욕통 난간을 잡고 물 먹어 바짓단이 무겁게 척척 감긴 다리를 높게 들어 걸치는 아랑의 입에서 욕이 맴돌았다.
“카일. 거기 앉아 계세요. 제가 할게요.”
“…….”
어떻게든 목욕통에서 나가려고 버티던 아랑의 팔이 후들거렸다. 오늘 낮 동안 사람들을 위해 약초를 갈고, 부시고, 주무르고 난리는 치는 바람에 뭉쳐 있었던 것이었다. 젠장, 무슨 이런 엿 같은 상황이.
고기 네 점을 꼬챙이에 꿰어 불에 올리고 돌아선 카일은 심각한 표정으로 아랑을 보았다. 흠뻑 젖은 옷이 달라붙어 드러난, 마른 몸에 비해 통통한 엉덩이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한쪽 다리를 높게 들어 목욕통에 걸쳐 놓느라 더 도드라진 작은 엉덩이와 얄팍하게 빠진 다리를 보는 카일의 눈빛이 조금 어둡게 가라앉았다.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나오고 싶었는지, 허우적거리며 노력하던 아랑이 저를 올려다보며 하는 말에 카일은 그 길로 막사를 나가버렸다.
“왜! 왜! 왜 나가는데! 내가 도와달라는 게, 그게 그렇게 싫었냐!”
한두 번 물에서 나가는 걸 시도하던 아랑은 그저 자신을 통에서 꺼내 달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겨우 그거 부탁했다고, 정색하고 나가 버리는 카일의 뒷모습을 보며 한국말로 버럭 소리쳤다. 그리고는 씩씩거리며 달라붙은 옷은 하나씩 패대기치듯 벗어 던졌다.
“젠장, 처음부터 벗고 나가면 됐을 것을. 혼자 삽질했네.”
옷을 홀딱 벗은 아랑은 무사히 목욕통을 빠져나올 수 있었고, 새 옷부터 찾아 입었다. 이후카일이 기본 간조차 하지 않고 걸어 놓은 고기에 적당히 간을 하고, 옆에 앉아 빙글빙글 돌리며 고기를 익혔다.
“다음부터는 잘 준비하겠습니다.”
잘 익은 고기를 꼬치에서 빼,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던 아랑은 그제야 들어오는 카일을 보고는 살짝 머리를 숙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가 표정이 많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사를 나가기 전 딱딱하게 굳은 경멸하는 듯한 표정은 잊히지 않았다. 그렇기에 툭 튀어나와 있는 아랑의 입술도 좀처럼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기에 누가 제멋대로 목욕통에 저를 집어넣으래. 거기다 내가 언제 요리하랬어? 그냥 불만을 조금 말한 거지. 나도 따끈한 물 좋아한다고 말한 것뿐이잖아.
“아랑, 어디 출신이지?”
넉넉한 고기 옆으로 방금 버무린 야채샐러드를 올린 접시를 받은 카일이 저를 보지 않고 하는 질문에 아랑은 과장되게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바로 했다.
“여기서 반대쪽 로카 마을입니다.”
“로카라면, 알페른 산맥 반대쪽 말하는 건가? 오는 데 시간이 제법 많이 걸렸겠군.”
네네, 상식적으로 1달은 걸리는 거리지만 3박 4일 만에 온 건 비밀입니다요. 아랑은 고기 한 점을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은?”
“로엔 할머니와 저 단둘이요. 최근에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이곳으로 오게 됐습니다.”
갑자기 시작된 호구조사에 아랑은 나름 성실하게 대답하며, 모닥불 옆에 둔 꼬챙이를 집어 안에 넣어둔 감자를 뒤적거렸다.
저녁 식사 후, 토벌대 주위를 한 바퀴 도는 것이 카일의 일정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시간은 까망의 저녁 시간이기도 했다. 오늘은 이것저것 할 시간이 없었으니, 까망에게 미안해 구운 감자를 줄 생각이었다.
“그럼 이곳은 연고가 없는 건가? 토벌대는 왜?”
“정착자금 마련하려고요.”
대놓고 대마법사를 만나기 위한 모험 중이라는 말을 하면 비웃음을 살 것 같기에, 아랑은 대충 적당한 말을 찾아 둘러댔다. 이제 토벌대에서 남은 목표는 마법사 닉을 찾아가서 만나는 것이었다.
마법사님과 인연이 없었을 때는 무사히 돌아가서 마탑을 찾아가는 것이 목표였다. 닉의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랑의 기준으로는 닉과 어느 정도 안면을 튼 사이였다. 거기다 먹는 걸 좋아하는 것 같으니, 맛있는 걸 만들어서 대접하면서 잘 말하면 정보를 줄 것도 같았다.
입에 넣고 있던 고기를 다 먹은 아랑은 남은 고기 한 점을 냉큼 먹었다. 오늘 밤엔 까망에게 구운 감자를 주고, 카일이 자리를 비울 동안 마법사들이 머무는 곳에 다녀올 계획이었다.
그러기에 일부러 샐러드도 조금 남겨 놨다. 일단 샐러드부터 갖다줘 보고 내켜 하지 않으면 날 잡고 부침개를 구울 예정이었다.
“어.”
갑자기 저에게 왜 이러십니까? 자신의 몫을 다 먹었기에 일어나려던 아랑은 자신의 접시에 고기를 옮겨주는 카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님 먹으라고 준 고기를 왜 다시 주시는 건가요?
“뭐든 잘 먹어야지.”
갑자기 쓸데없는 망상이 떠오른 아랑은 혼자 피식 웃으면서 카일이 건네준 고기를 먹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장난으로 하던 말이 있었다. 친구 간의 우정이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고기 한 점이다. 고기는 사랑이다! 그런데 방금 그 사랑을 카일이 자신에게 준 것이었다. 카일 나 사랑함?
아랑은 샐샐 웃으며 고기를 먹다 자신의 머리 위에 무심한 손길로 툭 올려 쓰다듬고는 휘- 나가 버린 카일을 보고는 얼른 모닥불에 넣어둔 감자를 굴려서 꺼냈다.
“까망아. 밥 먹자. 거기 숨어있느라 힘들었지?”
고기가 든 접시를 옆에 내려놓고, 뜨거운 감자를 들어 후후 불며 이손 저손 옮기며 껍질을 벗겼다. 뜨거움을 참고 있던 아랑은 어느새 접시 옆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고기를 쩝쩝거리며 먹는 까망을 보고는 열심히 껍질을 벗기던 감자를 옆 그릇에 툭 던져 버렸다.
그래, 이딴 감자보다 고기가 맛있겠지. 그런데 까망아. 너 그거 아니? 감자 십자로 배 쪽 갈라서 거기에 소금 간 쬐금 하고 생크림이랑 치즈 올려서 녹이면 예술이다. 네가 그걸 안 먹어봐서 지금 고기에 목숨 거는 거야. 인마. 나중에 그거 너 안 줄 거야.
* * *
카일은 뒷짐을 쥔 채, 저녁배급으로 분주한 토벌대 주위를 느리게 걸었다. 자신을 보고 여기저기서 말을 걸거나 인사를 해 왔지만, 카일은 묵묵히 발걸음이 가는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자신이 영지로 돌아오고 대대적인 토벌을 시작하면서, 가난에 마을을 떠났던 영주민들도 서서히 돌아오고 경기도 좋아지고 있지만 아직 이곳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열악했다.
토벌대에서 가지고 오는 몬스터의 부산물로 인해 급속도로 경제가 발전하고 시장이 활성화되어 겉으로 보이기엔 활기 넘치는 곳으로 보일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 영지 곳곳을 돌아보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엉망진창이었다.
처음엔 그냥 얼굴 하얗고 밤톨만 한 새까만 머리통을 가진 작은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제 입 하나 건사하거나 가족 부양을 위해 험한 이곳까지 떠밀려온 아이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대부분 보급대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기사나 마법사의 시동이 되어 따라온 것이었다.
아랑도 그런 아이 중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그를 생각할수록 이상한 것들이 늘어났다.
다람쥐처럼 빨빨거리고 다니는, 비실비실하고 살짝만 건들여도 톡 부러질 것 같은 것이 다 큰 어른이라고 했다. 이곳 출신도 아니고, 알페른 산맥을 가운데 두고 갈려져 있는 루틴 후작의 영지 중 하나인 루카 마을에서 넘어왔다고 했다. 어떻게 왔냐는 말에 말갛게 웃으며 ‘고생이 심했어요.’라고 얼버무렸다.
자신보다 의심이 많은 마법사 닉은 손수 마법까지 써가며 아랑의 신분증을 확인했지만,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거기다 늘 알 수 없는 이상하고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말간 얼굴도, 손끝도, 자신도 모르게 하루에 두어 번은 쓰다듬는 머리카락은 늘 깨끗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혼자 무언가를 먹고는 팔딱팔딱 뛰면서 물을 먹고 몸을 배배 틀었다. 자신도 모르는 낯선 약초들을 캐와 소중하게 다루는 모습까지 이상했다. 그렇다고 첩자라고 생각하기에는 세상 무해하고 밝게 웃던 그 얼굴이 떠오르자 카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웃는 그 얼굴이 떠오름과 동시에 아래쪽으로 피가 몰리는 듯 했다. 이건 토벌대부터 해서 늘 나돌아 다닌다고 즐기지 못해 쌓여서 그런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그 놈이 성인이라는 말을 들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 문득 한쪽에서 실랑이 중인 남성 둘이 보였다.
짧으면 몇 주, 길면 두 달도 이어지는 토벌에 거친 놈들을 다루는 것엔 몇 가지 방법이 있었다. 늘 풍족하게 먹이는 것과 여자들보다는 덜 까다롭고 보급대부터 다양한 활용이 가능한 남창들을 동행하는 것이었다.
한참을 투덕거리다 거래가 성립된 듯 사이좋게 막사로 들어가는 걸 본 카일의 얼굴이 금세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물에 젖어 휘적거리고 두 쪽으로 예쁘게 갈라진 채 살집이 통통한 엉덩이가 떠오르자 얼른 머리를 가로저었다.
가만히 제자리에 선 채 코와 귀 끝이 발개져서 그 큰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까지 떠오르자 카일은 혀를 찼다. 남자를 안는 건 취향이 아니었건만, 어쩌면……. 어쩌면이라는 생각을 하는 카일의 시선이 멀리 떨어진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때마침 막사를 걷고 나오는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서 파닥거리고 날고 있는 것 하나…….
“메…….”
자신의 시선을 느꼈는지, 아랑이 늘 까망이라고 부르는 드래곤이 저를 보고는 혀를 쏙 내밀어 보이자 카일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미쳤어?’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닌 갑자기 머리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카일은 미간을 찌푸리고서야 손에 힘을 풀었다. 칼을 안 들지 않은 주먹에 힘이 맺혀 일렁이고 있었다.
홀린 것 같은 기분과 함께 허탈감에 젖어 들자 카일은 큰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토벌대 기간을 연장하기엔 자신과 아랑이 다른 쪽으로 위험했다. 하루만 더, 내일 하루만 더 토벌을 다녀온 후 마을로 귀환명령을 내려야 할 것 같았다.
“하-. 살다 보니 진짜 별일이군.”
혼자 중얼거리며 찬바람을 맞던 카일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자 굳어 있던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 * *
“까망아. 너 조용히 해야 해. 그냥 안에 있으라니까 왜 따라 나와서는.”
아랑은 조심스럽게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하며, 자신의 옆에 바짝 붙어 날고 있는 까망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았지만, 곳곳에 켜 놓은 횃불이 길을 밝혀 주었다. 은은한 달빛과 별빛까지 사방을 비추기에 까망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까 걱정되었다.
그나마 머리 위쪽으로 날고 있어, 굳이 위를 보지 않으면 들키지 않겠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었다.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며, 아랑은 들고 있는 샐러드를 내려다보았다. 일단 샐러드를 내밀면서 닉의 환심을 사고 프레데릭 베르에 대해 하나씩 찬찬히 물어볼 생각이었다.
“아니, 이거면 됐지. 뭘 더 받으려고 해?”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걸걸한 목소리에 아랑의 발걸음이 멈췄다.
“진짜 양심도 없네. 이걸로 될 것 같아? 네 놈 덩치는 생각 안 하냐고! 지난번에 너 받았다가 3일을 쉬었는데, 3일 쉰 것까지 다 쳐주든지. 아니면 곱게 꺼져.”
거친 남자의 목소리에 이어 짜증이 가득 섞인 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춰선 아랑은 굳은 듯 목도 움직이지 않고, 눈동자만 도록도록 굴리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하필 이 타이밍에 저렇게 실랑이하는 사람들을 만날 건 또 뭐야.
“또 왜 그래? 너도 좋았잖아. 같이 즐겨놓고. 좋다, 이거야. 내 50쿠퍼 더 올려준다.”
“겨우 50쿠퍼? 웃기…….”
합의가 된 것인지, 둘의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자 아랑은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늦은 밤이니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아직 이곳의 이런 상황이 그에게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마법사님은 어디서 찾지?”
작은 목소리로 까망에게 말하며 주위를 걸어가던 아랑의 눈이 동그랗게 번쩍 떠졌다. 달밤에 하얗게 드러난 누군가의 엉덩이를 보게 될 줄이야. 거기다 그 뒤에 서 있는 남자의 시커먼 맨다리까지.
“딸-꾹.”
아니, 여기 막사 많은데, 아니면 하다못해 풀숲에 들어가셔도 되잖아요. 왜 이렇게 둥근 달 아래 막사 옆에서 굳이 추워지는 야외에서 왜, 왜…….
너무 당황스러운 장면을 보아 튀어나온 딸꾹질 소리에 열심히 둘만의 일을 하던 두 사람의 시선이 아랑을 향했다.
“죄, 죄송합니다.”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그대로 뒤돌아, 걸음아 나 살려라 뛰어가는 그의 눈에는 뭣도 보이지 않았다. 무조건 앞만 보고 뛰는 아랑의 귀 끝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으악!”
한참을 무작정 뛰던 아랑의 몸이 하늘로 붕 날아올랐다 옆으로 보기 좋게 나뒹굴었다. 그와 함께 들고 있던 샐러드도 같이 허공을 날았고, 시간차를 두고 엎어져 있는 아랑의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
흉하게 바닥에 누워 있는 아랑은 자신의 앞에서 빙빙 날아다니는 어떤 것을 보았다. 멀리 보이는 까만색은 밤하늘이고 거기 촘촘히 박혀 반짝이는 것은 별이고, 코앞에 까만 물체는 까망이구나.
심하게 나뒹굴었지만, 다행히 머리를 찧지 않았음에 감사한 아랑은 천천히 몸을 추슬러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몸에 더덕더덕 붙어 있던 각종 채소 잎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꼴로는 마법사님 못 뵙겠지?”
비틀거리며 일어난 아랑의 어깨가 한없이 축 처졌고, 그는 터덜거리는 발걸음을 이끌어 자신이 묵는 숙소로 향했다.
“아, 쪽팔려. 무술이라도 배우면 좀 괜찮나?”
보기 흉하게 바닥을 나뒹군 것을 본 사람이 없는 것을 위안 삼으며 걷는 아랑의 입에선 자조적인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거기서 그러고 있는 사람을 만난 것도 최악이지만, 뭔 큰 죄를 지었다고 도망쳤을까? 거기다 뭘 밟고 넘어졌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부실한 제 하체를 탓하는 그의 머릿속에 아주 튼튼하던 카일의 다리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가 자신처럼 볼썽사납게 발라당 넘어져 나뒹구는 건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막사로 돌아온 아랑은 거침없이 바지를 훌렁 벗어 내렸다. 돌아오는 길에 여기저기 아픈 것을 봐서 제법 많이 다쳤을 거라는 건 예상했던 일이었다.
얇고 거친 천 바지 덕분에 왼쪽 허벅지 옆과 뒤쪽이 보기 흉하게 쓸렸고 무릎이 찢어져 피가 나고 있었다. 거기다 발목도 삐었는지, 걷는 것도 불편하더니 상당히 부어있었다.
“쯧. 왼쪽이 아주 아작 났구만.”
아랑은 발목에 바지를 걸친 채 일어나서 펭귄 걸음으로 약초를 정리해 둔 테이블로 걸어갔다. 하필 오늘 다친 사람들 치료해 준다고 이것저것 있는 대로 다 끌어다 썼더니 남아 있는 것이 몇 개 없었다.
이거라도 조금 남아 있는 게 어디야. 소독과 항염 성분이 있는 약초는 늘 넉넉히 만들어 놨기에, 바짝 마른 것들을 곱게 갈아 물에 개어 바르기만 하면 되었다.
집중해서 약초들을 살펴본 아랑은, 로엔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미 똥구멍만큼 발라도 진통에 효과가 있는 약초를 넣었다.
찢어진 무릎에도 약을 발라야 하니까. 아! 이거 바르면 오늘 저녁엔 바지 입지 말고 자야 하나? 이제 밤에 춥던데……. 홀랑 벗고 자면 추우니까, 깨끗한 옷이라도 하나 찢어서 붕대처럼 둘둘 감고 자야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곱게 간 약초에 물을 조금 넣고 개어 끈적하게 만들었다. 손으로 살짝 찍어 농도를 확인한 아랑은 우선적으로 조금 찢어진 무릎에 조심스럽게 약을 발랐다. 다음은 허벅지 쪽인데, 이게 허벅지 옆쪽과 뒤쪽에 상처가 나다 보니 잘 보이지 않았다.
“설아랑!”
검지에 약을 찍어든 채 허리를 비틀어 허벅지 뒤쪽을 보려던 몸이 멈췄다. 그냥 부르는 것도 아니고 평소와 다르게 서늘한 느낌이 강한 카일의 목소리가 아랑을 놀라게 한 것이었다.
벌써 산책 끝났어? 너 아까 나 꺼내주지도 않고 짜증내면서 확 나갔잖아. 그런데 지금 내가 이거 약 발라 달라고 하면 화낼 거니? 그래도 이제까지 우리 밥은 얼굴보고 맛있게 먹었잖아.
아랑은 마침 나타난 카일을 보며 반가운 마음과 함께 서운한 마음이 들어 선뜻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 그냥 대충 고개만 숙여 밖을 다녀온 그에게 인사를 했다.
“어디서 다친 거지?”
단걸음에 자신의 앞으로 휙 다가와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춰 앉는 카일의 행동에 놀란 아랑은 다가오는 그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약초 테이블 앞에 서 있던 아랑이 갈 수 있는 곳은 없었고, 고개만 돌려 자신의 뒤에 있는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
카일은 눈앞에 보이는 허벅지 상처에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서 나뒹군 거지? 뒤로 넘어진 건가? 아니면 옆으로? 아랑이 어떻게 다쳤을지 쉽사리 떠올리지 못한 그의 시선이 상처를 따라 움직였다.
뽀얗고 가는 허벅지에 쓸린 붉은 상처, 그리고 겨우 엉덩이 아래 정도까지 내려오는 상의는 아슬아슬하게 중요 부위를 겨우 가리고 있었다.
“괜, 괜찮습니다!”
카일이 그리 크게 숨을 쉬는 건 아니지만, 허벅지 위쪽 그러니까 조금 다르게 말하면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 숨결이 느껴졌다. 그제야 자신의 꼴을 확인한 아랑은 급히 몸을 돌려 카일을 마주 보려 했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은 바지를 홀랑 내리고, 뒷모습을 그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약.”
아이고, 이게 일이 꼬이려니까. 몸을 돌려 테이블과 그의 사이를 벗어나려 하던 아랑은 다치지 않은 오른쪽 허벅지를 잡으며 하는 그의 말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다친 상처를 치료하는 것에 생각이 팔려, 밖으로 나갔던 그가 돌아올 거라는 건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건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상황을 보고 있는데 왜 서로 다른 말을 주고받는 건지. 카일은 허둥거리는 아랑을 재촉하지 않고 테이블에 놓인 작은 종지를 집어 들었다. 짙은 녹색의 약이 아랑의 무릎에 발린 것과 같은 것을 확인한 카일은 더 이상 아랑에게 답을 듣지 않고 그것을 손에 찍어 허벅지 상처에 슬쩍 문질렀다.
‘움찔.’
뒤돌아 서 있는 아랑의 쓸린 상처에 약을 바르는 카일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작게 움찔거리는 그 행동에도 혹시나 아팠나 싶어, 살짝 상처에서 손을 뗀 카일은 조금 전보다 더 조심하며 약을 발랐다.
모든 것을 포기한 아랑은 아랫입술에 피가 통하지 않도록 세게 질끈 깨물고는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었다. 상처에 약을 바르는 것일 뿐인데, 문제는 이게 아픈 것이 아니라, 묘하게 간질거리는 것과 함께 카일의 옅은 숨소리가 이상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차라리 치덕치덕 대충 바르고 말지.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길은 엉덩이 바로 아래쪽부터 해서 타인이 손이 닿아본 적 없는 허벅지 뒤쪽까지 건들었다. 그 상황을 직접 볼 수 없음에도 온몸이 감각이 이상한 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좀 전에 하얗게 엉덩이를 까고 있던 남자와 그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떠올랐다.
‘젠장, 동해물과 백두산이…….’
두 눈까지 질끈 감은 아랑은 차마 그만하라는 말도 못 하고, 속으로 신성한 애국가를 불렀다. 간질간질 따라붙던 손길이 멀어지자 후다닥 테이블을 잡은 손을 놓고 발목에 걸린 바지를 잡아 올리려 했다.
“가만있어.”
얼른 옷을 올려 입을 생각이던 아랑은 이어 들린 목소리와 함께 ‘지익’ 무언가 찢기는 소리에 동작을 멈췄다.
“네? 아니. 약 다 발랐으니…….”
“상처 감아야 할 거 아니야.”
분명 멀어졌던 누군가의 인기척이 가까워지는 걸 알면서도 아랑은 차마 뒤돌아볼 수는 없었다.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와 부스럭거리는 소리만이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볼 수 없으니 상황 파악을 위해 청각을 곤두세우던 아랑은 허벅지 사이로 슥- 들어오는 손길에 급히 숨을 들이쉬었다. 이게 이럴 상황이 아닌데, 허벅지 안쪽 깊은 곳까지 파고든 손은 무심하게 허벅지에 천을 감았다.
슬쩍 빠져나간 손이 다시 사이로 들어오고, 나가고. 붕대를 감기 위한 행동이지만 이미 아랑에게 치외 법권 지역이 되어 버린 아랫도리엔 어느새 불끈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존나…… 이거 미친. 내가…… 설아랑, 죽자. 죽어.’
붕대가 완전히 감기고 카일의 손이 완전히 떠날 때까지 아랑은 윗도리 앞쪽을 꾹 잡아 최대한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차마 그를 볼 수 없던 아랑은 허공에 꾸벅 인사를 하고 후다닥 바지를 치켜 올려 허리끈을 잘 조여서 묶었다.
치욕도 이런 치욕이……. 아니 이건 치욕이 아니었다. 그저 좋은 마음으로 자신의 상처를 봐주는 사람 앞에서 좆을 세웠으니, 제가 카일을 능욕한 게 되는 것일까?
여자의 손길도 아니고 남자의 손길에 뇌가 다 녹아버린 듯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듯한 처연한 표정으로 아랑은 어깨를 축 내린 채 자신의 침대로 가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지금 당장 모닥불도 살펴야 하는 등 해야 할 일이 있지만 일단 지금은 현자타임이 먼저였다. 벽을 본 채 이불을 뒤집어쓴 아랑은 카일이 막사를 나가는 소리에 슬쩍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카일이 완전히 나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발로 차 날려버렸다. 설마 눈치채진 않았겠지? 얼른 바지 끈을 풀고 슬쩍 내려서 허벅지를 살펴보았다. 부드러운 천을 찢어 만든 붕대가 감겨 있는 곳을 확인한 아랑은 바지를 끌어 올렸다.
기사들이 이런 것도 배우나? 자신보다 더 꼼꼼하게 잘 감싸 놓은 것에 깊은 한숨이 나왔다.
마을로 돌아간다면, 무엇보다 제일 먼저 참하고 고운 아기자기한 아가씨부터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스무 살이 되도록 연애는커녕 여자 손 한번 제대로 못 잡고 산에 틀어박혀 있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그럼 그럼, 이게 다 산골에 처박혀 살아서 그런 거야.
이불을 다시 뒤집어쓰고 애써 자기 위안을 하는 아랑의 꼭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둥근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제일 먼저 이를 닦…….
눈을 꼭 감은 채 따뜻한 이불 속에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던 아랑의 눈이 번쩍 떠졌다. 지난밤 자신은 말 그대로 이불킥을 하다 잠이 든 것이었다. 잠들기 전에도 생각한 것이지만, 카일은 자신의 신체에 일어났던 어마어마하고 말도 안 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편안하게 붕대까지 감아주고 밖으로 나간 것이지. 만약 그가 눈치챘다면? 아닌가, 눈치챘으니까 일부러 자리를 피해준 것인가?
머리끝까지 덮어쓴 이불 안에서 엄지 손끝을 꾹꾹 깨물던 아랑은 작게 한숨을 폭 쉬었다. 어느 쪽이든 카일을 피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가 알든 모르든 자신이 어색하게 굴면 그의 시선을 더 끌 것 같아 정면 돌파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과감히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 아랑은 인기척이 나는 쪽으로 꾸벅 인사를 하고는 후다닥 모닥불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최대한 그를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옆에 있는 꼬챙이로 쌓여 있는 장작을 들쑤셨다.
“으아!”
활활 타오르는 장작 사이로 공기가 들어가자 화르륵 올라오는 불길에 놀란 아랑은 벌떡 일어나려다 되레 균형을 잃고는 바닥에 발라당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조심해야지.”
거북이도 아니고 아침부터 이게 또 무슨 추태야. 아랑은 발라당 드러누운 채 막사 천장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언제 다가온 것인지 자신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가볍게 일으켜 세우는 카일의 행동에도 아랑은 멍하니 그의 손에 저를 온전히 내맡겼다.
“감, 감사합니다.”
“이제 막사 관리 일에 그리 힘쓸 필요 없으니 며칠 동안 원하는 약초나 뜯으러 다니는 게 좋을 거다. 토벌대는 3일 뒤에 철수할 거니까.”
아랑이 늦잠을 자는 동안 나갈 준비를 마친 카일이 삐죽삐죽 제멋대로 뻗쳐 있는 아랑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막사를 나갈 때까지도 아랑은 그가 세워준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 * *
3일 뒤에 철수한다는 말이 맞는지 토벌대가 나간 뒤, 보급대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아랑은 곧장 망태기를 둘러메고 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은돌을 불렀다. 부르자마자 달려온 은돌을 타고 약초가 많은 곳에 온 아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국의 가을 하늘처럼 이곳도 가을 하늘이 참으로 푸르고 맑았다. 찬기가 스며든 바람이 시원하게 몸을 스치고 머리카락이 가볍게 날렸지만, 무거운 아랑의 표정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내가 쪽팔려서. 은돌아, 어떻게 생각해? 너도 같이 고추 달린 놈이니 내 마음 이해되지? 어? 너도 이쁜 암컷 보면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좆이 빨딱 빨딱 서냐고.”
하늘을 보고 다가오는 가을을 느낄 새도 없이 채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약초를 캐는 아랑의 입에서 하소연이 흘러나왔다.
로카 마을 뒷산이었다면, 은돌을 돌려보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토벌대가 돌아다니면서 정리해야 할 만큼 위험한 지역이었기에 은돌은 아랑의 옆자리에 편하게 엎드려 있었다. 그런 은돌을 향해 아랑의 입에서 푸념이 쏟아져 나왔다.
“이게 내가 절대로 어! 절대로 카일한테 좆 세운 게 아니라고. 이게 다 굶어서 그래. 그런 거라고.”
작은 호미로 땅을 콕콕 찍으며 약초 근처를 살살 파헤치던 아랑은 들고 있던 호미를 냅다 땅에 꽂아버렸다.
이게 생각할수록 왜 이렇게 기분이 묘한 것일까? 그냥 실수로 치부해 버리면 되는 것인데,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카일의 뜨거운 손이 허벅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던 것이 반복되었다. 새초롬해진 아랑의 눈꼬리가 입을 쩍 벌리고 하품하는 은돌을 향했다.
“너 뭐냐. 지금 내가 이리 심각한데 하품이나 찍찍하고 있어?”
“흐업.”
늘어지게 하품을 시작하던 찰나, 아랑의 매서운 눈길은 받은 은돌은 급하게 벌린 입을 닫느라 묘한 소리를 내며 코를 킁킁거렸다. 차라리 눈치 받으면서 늘어지게 하품할 것을 이도저도 못한 감각에 은돌은 앞발을 들어 코를 문질렀다.
“너 안 그래도 요즘 수상해. 연애 하냐? 어? 네 주인은 외로움에 몸부림치는데, 혼자 연애해?”
열심히 코를 문지르던 은돌은 얼른 몸을 바로 하고 앉아 슬쩍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참, 하늘 좋네. 뭉게구름이 몽실몽실한데 우리 예쁜이 같은……. 큼, 연애를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우리 숲의 주인님께서 내주신 땅에 예쁜이가 살고 있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청춘이 만나면 다 그렇고 그런 게 하늘의 뜻이고…….
하늘을 보고 있던 은돌의 커다란 눈동자가 스르륵 굴러내려 밑으로 향해 아랑은 훔쳐보려다 매서운 눈을 마주하고는 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야, 발 치워. 왜 여기 발이 있어? 약초 다 뭉갤 거냐?”
누가 봐도 딴 척하는 것이 분명한 은돌의 행태에 아랑은 바닥에 내팽개친 호미를 들어 자신의 머리보다 커 보이는 그의 앞발을 쿡 내리찍었다.
아랑이 끝이 닳아 반질반질한 호미로 내리찧어도 그 잘난 털에는 조금의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은돌은 은근슬쩍 앞발을 뒤로 슥 밀어 자리를 내어주었다. 제가 아니면 아랑의 투정을 받아줄 이가 없다는 걸 알기에 은돌은 묵묵히 아랑이 약초를 다 캘 때까지 하늘만 바라보았다.
“쯧. 사는 재미가 없네. 재미가 없어. 비싼 약초도 안 보이고. 아, 은돌아. 토벌대 3일 뒤에 철수해서 나 한동안 너 보러 못 올지도 몰라.”
대충 근처에 보이는 약초들을 죄다 쓸어 담은 아랑은 무릎을 짚고 일어나며 앓는 소리를 한번 내었다. 계속 머릿속에 반복되는 상황에 막사에 붙어있기 싫어서 뛰쳐나왔지만, 아직 발목도 시큰거렸고 몸은 여기저기 쑤셨다.
그냥 막사에서 쉴 걸 그랬나? 하지만 은돌에게 제대로 인사도 해야 했다. 아랑은 몸을 일으켜 은돌이 보고 있는 하늘을 같이 보았다. 구름 이쁘고 좋네.
그러나 아랑의 생각과 다르게 은돌은 구름을 보며 헤-하고 입을 벌렸다. 푸르른 하늘에 떠있는 몽실몽실한 저기 구름 딱 우리 예쁜이 닮았네.
사람의 왕래가 없는 깊은 산속이기에 많이 돌아다니지 않았지만, 망태기가 금세 묵직해졌다.
“컹.”
망태기를 어깨에 걸치고 은돌에게 다가간 아랑은 두 팔을 넓게 벌려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곤 푹신한 털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한동안 바빠서 못 볼 테니 이렇게라도 꼭 안아줘야지.
“그래. 너라도 연애 실컷 해라. 나도 마을만 가면 말이야, 어? 이 외모에, 이 다정다감함에 집안일 잘하지, 나 돈도 많아. 네가 준 마석도 있고.”
중얼거리듯 말하던 아랑은 은돌이 그가 탈 수 있도록 몸을 낮추자 얼른 등에 올라탔다. 그러고 보니 마법사님을 못 만났네. 은돌을 편히 탄 채, 산을 내려가던 아랑의 입 안이 텁텁해졌다. 적당히 먹을 걸로 때울 수 있었는데. 하필 그 미친놈들이 보는 바람에…….
“만약에 대마법사님이 저기 알페론 바다 너머 서쪽 대륙에 있으면 넌 어떡하지? 배에서 널 태워줄까?”
은돌의 등에 엎드린 채 혼잣말을 하던 아랑은 벌떡 일어나 앉아 그의 등을 마구 두드렸다.
“넌 막 조그맣게 변하고 그런 거 못해? 까망이처럼 귀엽게 막, 어?”
은돌은 조심해서 숲을 헤치고 걸으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숲의 주인님께 부탁하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우리 예쁜이는 어쩌고? 혼자 다녀오세요.
“에효, 돈이나 벌자. 돈을 벌어야 대마법사님이든 누구든 찾아다니지. 일단 약초부터 잘 다듬어서 마을에서 조그만 약초 가게 하나 차릴까? 약초도 팔고 뭐 가끔 치료도 해 주고 돈도 벌고. 이야. 돈 굴러 들어오는 소리가 그냥 들린다.”
모처럼 산에서 은돌과 뒹굴거리고 약초를 캔 아랑은 해가 다 지고서야 보급대 근처에 다다랐다. 아랑은 은돌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돈 벌 생각에 좋아진 기분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일단 오늘 따온 약초들을 잘 손질해서 토벌대 사람들부터 치료해 줄까? 저렴하게 1회에 1쿠퍼. 아, 좋다. 나 너무 착한 사람이야. 앞으로 벌어질 일을 모른 아랑은 그저 즐겁기만 했다.
“간단히 약초만 바르는 거면 1쿠퍼. 붕대 감고 약초 많이 들면 2쿠퍼. 좋다, 좋아. 이야~ 내가 또 이 세계에서 의술을 펼치는고만. 뭐 약초 쓰고 그러는 건 비슷하니까 내가 허준, 아니지 허아랑이다!”
묵직한 망태기를 이쪽 어깨, 저쪽 어깨로 옮기며 보급대 사이로 들어가 막사로 가던 아랑은 어수선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토벌대가 돌아오고 저녁 시간이 겹치면 전체적으로 잔치 분위기처럼 왁자지껄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속에 불안감이 깃들여 있는 것 같았다.
“…….”
아랑이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자신의 막사로 들어서던 순간, 그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망태기가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
입은 분명히 벌렸는데, 말이 안 나온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앞에 펼쳐진 상황에 놀란 아랑은 큰 눈을 깜박이며 막사 안을 둘러보았다. 자신에게 치욕감을 안겨 주었던 목욕통 옆으로 상의를 모두 벗은 채 간이 의자에 걸터앉아있는 카일이 보였다. 그리고 근처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불긋한 천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마법사님.”
차마 카일에게 말을 걸지 못한 아랑은 옆에서 수선 떨고 있는 닉을 보고 중얼거리듯 불렀다.
“어. 아랑이 왔어? 카일이 나갔다가 좀 다쳤어. 토벌대에 치유사를 동행하자고 내 누누이 말했는데 말을 안 들으니 이 꼴이지. 지금 당장 돌아가던지. 치유사 데리고 오는 시간에 우리가 돌아가는 게 더 빠르겠어.”
자신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는 카일의 뒤에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빠르게 말하는 닉의 옆으로 다가간 아랑은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피를 닦은 것이 분명한 천 뭉치를 봤을 때부터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저 살짝 굽히고 앉아 있는데도 두드러진 근육보다 대각선으로 등을 가르고 있는 상처가 먼저 보였다. 흉하게 벌어져 보이지 말아야 할 속살을 드러내게 하는 세 줄기의 긴 상처가 그곳에 있었다.
“이게……. 어, 이게.”
아프겠다, 어떻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아랑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후다닥 뛰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망태기부터 바닥에 뒤집어 안의 내용물을 탈탈 쏟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약초를 다 쓰는 게 아니었는데, 그냥 잘 가지고 있었어야 했다.
넘어져서 다친 상처가 뭐 중요하다고. 그냥 두면 자연히 낫는 것들인데…….
태어나서 처음 보는 엄청난 상처에 손끝이 파리하게 떨렸지만, 어지럽게 바닥을 나뒹구는 약초 뭉치들 사이에서 필요한 것들을 찾아낸 아랑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떡 벌어진 상처는 기워야 할 것 같지만 깨끗한 바늘도 실도 없는 이곳에서 아랑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혈 효과와 항염 효과가 뛰어난 약초를 짓이겨 섞는 것뿐이었다. 바짝 말렸다가 쓰는 게 좋지만,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카일. 이거 많이 따갑고 쓰릴 거예요.”
종지 한가득 원하는 약초를 배합한 아랑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나뭇가지나 이런 것에 찢어졌을 때 특효인 약이었다. 하지만 처음 약을 바른 붕대를 붙이고 약초 액이 스며드는 그동안의 고통은 엄청났다.
그랬기에 아랑은 늘 효과가 큰 약초를 배합하기보다 덜 아프고 가벼운 다른 것들로 만들어 써 왔다. 하지만 지금 카일에겐 가장 효과가 좋은 것이 필요했다.
“뭔데? 약초만 캐서 파는 게 아니라 이런 것도 할 줄 아는 거야?”
아랑은 옆에서 말을 거는 닉을 향해 흐리게 웃어 보이고는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상처 부위에 약초를 올렸다. 카일은 여전히 작은 의자에 앉은 채 아무 신음도 내지 않고 있었지만, 파르르 떨리고 요동치는 등 근육만큼은 그의 고통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
“마법사님. 거기 제 침대 밑에 보면 하얀 천이 있거든요. 그것 좀 길게 찢어주세요. 붕대로 써야 할 것 같아요.”
어떻게든 그에게 자극이 가지 않게 조심히 하려 했지만, 약이 스며들면서 생기는 고통까지는 해소해 줄 수 없었다. 아랑은 서둘러 남은 상처에 약을 올리며 옆에서 호들갑을 떨고 있는 닉에게 일거리를 주었다.
마법사라면서 치유마법 이런 것도 모르고 뭘 한 거야? 아니면 처음 토벌대에서 들었던 것처럼 워프? 그거 순간이동 하는 거 그런 거 몰라? 내가 책에서 보면 그런 거 쉽게 하던데. 너 마법사 맞아? 이렇게 다쳤을 때는 그런 것으로 이동해서 마을에 빨리 데려가면 좋잖아. 아픈 사람을 왜 이렇게 방치하고.
다친 카일을 앞에 두고 옆에 있는 닉을 향해 속으로 원망을 쏟아 내던 아랑은 깊게 심호흡하는 카일의 숨소리에 작게 머리를 털었다. 쓸데없는 생각할 시간에 그의 상처를 더 잘 돌봐야 했다. 아랑은 서둘러 닉이 찢어 놓은 긴 천들을 빠르게 매듭짓기 시작했다.
로엔은 이렇게 살려는 걸 미리 알았던 것일까? 약초꾼으로 살기 싫다고, 넓은 세상에서 멋진 일을 할 거라는 자신의 등을 때려가면서 약초에 대해서 가르치고, 사람들을 치료하는 법을 알려준 로엔이 문득 떠올랐다.
‘미련한 놈아. 네 놈이 돈이 있어. 빽이 있어. 능력이 있어. 세상 피죽도 하나 못 먹어 먹은 것처럼 비리비리해가지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있어야 살 수 있는 겨. 이거 이거 얼매나 좋아. 네 놈이 다쳐도 써먹고, 다른 놈이 다쳐도 써먹는 게 이게 좋은 거지. 무슨 헛짓거리 하려고. 대가리에 똥만 찬 놈처럼 도망가? 싸게 싸게 이리 안 와?’
“이제 붕대 감을게요.”
아랑은 천이 이어진 걸 한번 확인하고는 살짝 카일의 어깨에 천의 끝을 대면서 작게 말했다. 카일의 머리가 느리게 끄덕였고, 곧 붕대를 감을 공감을 만들기 위해 그가 양팔을 옆으로 벌려 주었다.
그의 상처를 자극하지 않으려 조심조심 뒤에서 그를 끌어안던 아랑은 최대한 숨을 들이마셨다. 카일의 체격이 큰 건 알고 있었지만, 그의 상체는 자신이 두 팔로 끌어안기 벅찼던 것이었다.
아랑의 치료를 받던 카일은 좀 전의 사고를 떠올렸다.
정말 상처가 날 상황이 아니었는데, 이런 상처를 얻게 된 것은 아랑 때문이었다.
밤새 눈만 감으면 달덩이처럼 떠오르는 아랑의 탱글탱글해 보이던 엉덩이와 쭉 뻗은 하얗고 가는 허벅지 때문에 잠을 설쳤던 것이었다. 옆에서 도롱도롱 낮게 코까지 골면서 깊은 잠에 빠진 아랑은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저도 남자라고 자신의 손길에 앞을 세웠던 그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소드 마스터가 그냥 된 것도 아니고. 몇 날 며칠을 잠도 못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강행되던 전쟁터에서도 잘만 지냈던 카일이었다.
겨우 하룻밤 잠을 설친 건 그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이번 사고는 방심하고 갑옷을 입고 가지 않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것은 마지막으로 토벌대가 정리해 놓은 지역을 돌아보며 점검하던 차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필 마법사들이 있는 쪽으로 짐승들이 몰릴 줄이야. 있었던 상황에 비해 이 정도 상처는 굉장히 양호한 것이었다. 뼈가 부러지거나 내상을 입은 것도 아니고, 몬스터의 발톱에 좀 깊게 패여 등이 찢어졌을 뿐이다.
치유사가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흉터조차 남기지 않고 바로 나을 수 있을 정도의 상처였다. 토벌대에겐 퇴각 명령을 내리고, 내일 날이 밝자마자 옆에서 잔소리하는 닉과 함께 먼저 마을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랑은 막사로 들어오자마자 자신을 보고 세상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기분 좋은 듯 늘 살짝 올라가 있던 아랑의 입꼬리가 아래로 축 처지는 순간, 카일의 심장도 같이 아래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
발소리조차 죽이고 조심스럽게 다가온 아랑이 등 뒤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곧 자신의 앞에 주저앉아 허겁지겁 약초를 헤집고 짓이기는 아랑의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보였다.
그리 큰 상처가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아랑의 주의대로 예상치 못한 따가움과 홧홧함에 헛바람을 들이켜야 했다. 이거, 상처 났을 때보다 치료한다는 것이 더 아프면 어쩌자는 건지…….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은 작은 손이 꼬물꼬물 앞으로 와 자신의 가슴 앞에서 천을 옮기며 붕대를 감는 그 행동에 카일의 입꼬리가 절로 위로 올라갔다. 혹시나 제가 아플까 잔뜩 몸에 날을 세운 채 조심하는 것까지 온전히 느껴지자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냥 편하게 붕대 감아.”
서툴게 붕대를 감으려다 그의 등을 제가 누를까 봐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던 아랑의 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끼고는 피식 웃었다.
“많이 아프죠. 이거 진짜 뜨겁고 막 따갑고 그렇거든요.”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가득 묻어나는 아랑의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뭐 좀 따갑고 뜨뜻하면 어떤가, 조그만 녀석이 저를 걱정하며 이리 친절히 대해주는데. 붕대를 거의 다 감았는지 배꼽 아래 꼬물거리는 손을 본 카일은 작게 헛기침을 하고 허리를 바로 폈다.
“이제 다 됐어요.”
아랑은 붕대 끝을 처리하려 밑에 감아 놓은 붕대 안으로 끝을 밀어 넣었다. 단단하고 따뜻한 카일의 복부가 손바닥에 온전히 닿았다.
급한 대로 상처에 약도 붙이고, 엉성하지만 나름 정성 들여 붕대를 감은 아랑은 자신을 멀뚱히 보고 있는 카일과 닉의 시선에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긁적거렸다. 처음부터 별말하지 않고 태연했던 그들에 비해 자신이 너무 호들갑을 떨며 나선 것 같았다.
“아! 저녁은 드셨어요?”
닉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를 들은 아랑이 소리 나게 손뼉을 치고는 눈을 반짝였다.
카일은 자신의 그릇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닉과 아랑의 그릇을 보았다. 멀건 죽 같은 자신의 그릇과 다르게 그들의 그릇엔 기름기 가득한 고기가 올려져 있었다. 상처를 치료할 때도 꿈쩍하지 않던 그의 초록빛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염증에는 고기 안 좋아요.”
아랑은 자신의 그릇에 멈춰 있는 카일의 시선에 고기를 한 점 집어 입 안에 쏙 밀어 넣었다. 기본적으로 고기가 몸에 좋긴 하지만 그의 상처를 봤을 때는 속을 가볍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금은 멀쩡해 보이지만 그 정도 상처라면 오늘 밤에 열이 오를 것이었다.
“염증에 고기가 안 좋대.”
아랑의 단호한 말에 숟가락으로 멀건 죽을 뜨던 카일은 옆에서 그 말을 쪽같이 따라 하며 깐족거리는 닉의 발을 지그시 밟아버렸다.
“…….”
갑자기 발끝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닉의 입술이 떡하니 벌어졌다. 그는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카일을 쏘아보았다.
“저 마법사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닉과 카일 사이에 어떤 일이 오갔는지 모르는 아랑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닉을 쳐다보았다.
“흐흠-. 뭐가 궁금한데?”
아랑의 질문과 함께 발에 가해지던 고통이 사라지자, 닉은 아픈 발을 끌어 카일에게서 멀어지며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대마법사 프레데릭 베르? 혹시 그런 분 아세요?”
“베르 프레데릭 대마법사님?”
아랑은 닉의 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켈룩.”
뜬금없이 다른 곳에서 이상한 기침 소리가 났지만, 아랑은 신경 쓰지 않은 채 닉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대마법사님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런데 실제로 본 사람은 몇 없을 거야. 떠돌아다니시는 게 취미셔. 그런데 그분은 왜?”
“그럼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 모르세요?”
“그건 바람도 모를걸? 알려진 건…….”
“왜 찾는 거지?”
아랑은 닉과 대화를 하다, 불쑥 끼어든 카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만나서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제 할머니의 유언도 있고……. 못 만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그분을 만나려는 노력은 해 봐야죠.”
“여기서 말해 봐.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면 궁금해서라도 나타날지 모르니까. 꽤 특이한 성격이거든.”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는 미끄덩거리는 느낌의 죽을 순식간에 마셔 버린 카일은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지는 머그잔을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느글거리는 것이 시원한 물이나 한잔 마셨으면 좋겠는데……. 미지근한 녹색의 물을 보는 카일의 눈꼬리가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
“아니에요. 만나게 되면 그때요. 카일, 이거 다 드셔야 해요. 밤에 열 오를지도 모르니까 해열과 진통완화에 좋은 거거든요. 그런데 카일은 대마법사님 아세요?”
슬쩍 머그잔을 내려놓으려던 카일은 아랑의 성실한 설명에 싫다는 말도 못 하고 느글거리는 죽에 이어 쌉쌀한 약초 우린 물을 마셔야만 했다.
“같이 전쟁터를 좀 돌아다니긴 했는데, 소식 못 들은 지 좀 됐지.”
처음엔 닉에게 물어봤던 아랑의 질문을 온전히 받게 된 카일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아! 맞네. 작년엔 여기 토벌대에 동행해 주셨잖아. 올해는 안 오신대?”
주섬주섬 다 먹은 그릇을 치우던 아랑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어 카일을 바라보았다.
작년에 오셨는데 올해는요? 올해는요? 올해는 안 오셔요? 네? 그런데 지금 토벌 끝난 거 아닌가요? 그럼 안 오시는 거예요? 작년에 토벌 동행까지 해 주셨다면, 진짜 친목이 있는 것 같네요. 그럼 여기 계신 마법사 닉보다 카일에게 정보가 더 많은 건가요?
“그 이상한 성격을 누가 맞춘다고. 오란다고 오고 가란다고 갈 사람이 아니다.”
당장이라도 빛이 쏘아 나올 것처럼 반짝반짝 눈에 빛을 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랑의 눈길에 카일은 길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그의 말에 아랑이 눈에 띄게 실망했다.
아랑에게 귀가 있었다면, 아마 아래로 힘없이 축 처졌을 것 같았다. 입술만 조금 삐죽 내민 채 치우는 아랑의 거친 손길에 빈 그릇들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 나 여기 오기 전에 마탑에서 들었는데, 지금 서쪽 대륙에서 본 사람이 있다고 했어.”
아랑은 포갠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은 바다 건너 서쪽 대륙에 계신다는 거네. 그럼 마을로 돌아가는 대로 있는 마석 다 처분하고, 마을의 은행에 넣어둔 돈도 모두 찾고 서쪽 대륙으로 가야 하나. 그래, 내 주제에 연애는 무슨. 이런 놈들이 지척에 널렸는데, 여자들이 날 봐주기나 하겠어?
문득 아랑은 설거지하러 막사를 나가면서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있는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큰 격에 남성다움이 줄줄 흐르는 소드 마스터, 육감적인 냉미남 카일과 마른 듯하지만 카일에게 밀리지 않는 외모에 마탑의 수석 마법사인, 따듯하게 말까지 잘해 주는 온미남 닉.
어머니 왜 날 이리 낳으셨나요? 아닙니다. 왜 하필 이 세계 사람들 체격과 키가 상향 평준화인가요? 하향 평준화면 내 세상이 됐을 것을…….
쪼그리고 앉아 거칠게 설거지를 하던 아랑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간간이 있는 구름과 둥그런 달 두 개를 올려 보다 갑자기 코가 간지러워진 아랑은 한쪽 팔을 들고 팔뚝에 마구 코를 문질렀다.
“아씨.”
이거 손가락으로 벅벅 긁어야 시원한 건데, 젖은 손이라 거친 옷에 마구 문질러댄 코끝이 빨개졌다.
“카일”
설거지를 끝내고 돌아간 아랑은 엎드려 있는 카일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으며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 짧은 시간 잠이든 것인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그의 등 위로 살랑살랑 부채질을 했다. 그가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라고 해도 다친 상처는 어쩔 수 없었다.
열이 날 만큼 나고, 아플 만큼 아파야 낫는 것이었다. 등을 다친 관계로 엎드려 잠든 카일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들리자 아랑은 분주히 움직였다. 한국이었으면 이런 상처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를 다치게 할만 한 들짐승이나 몬스터 자체가 없으니까.
혹시나 다쳤다고 해도 병원 가서 치료받으면 큰 고생을 하지 않고도 흉터 없이 잘 나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이런 원시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는 사실에 아랑은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소드 마스터면 뭐하고 마법으로 불을 몇 개씩 만들면 뭐하냐고. 사람이 이렇게 고생하는데.
식은땀을 흘리는 카일의 이마를 마른 수건으로 닦은 아랑은 그를 깨우려 했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자 그의 침대 옆에 서서 엎드린 그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카일. 잠깐 일어나서 나 좀 안아 봐요.”
열이 날 때면 자신의 몸을 미지근한 물을 적신 수건으로 닦아주던 엄마와 로엔을 떠올렸다. 밤새 물을 적신 수건과 마른 수건으로 몸을 번갈아 닦아 열이 떨어지도록 도와줬던 것이었다.
그것도 환자가 의식이 있으면 요구하는 대로 자세를 바꿔 주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간병인이 직접 환자를 움직여야 했다.
엄마와 로엔이 어떻게 했더라. 엄마도 로엔도 쉽게 자신을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굴렸던 것이 떠올랐다. 좁은 간이침대에서 카일을 굴릴 능력도 힘도 없는 아랑은 그를 다독거리며 엎드려있는 그의 한쪽 팔을 어깨에 둘렀다. 굴릴 수 없으니 앉혀서 닦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흐아.”
일단 강제로 상체를 좀 들게 하면 잠에서 깨지 않을까? 아랑의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부들부들 떨면서 하얀 얼굴이 용쓴다고 붉어질 때쯤 카일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카일, 제발 좀 일어나 앉아요. 내가 도와줄게요.”
얼핏 깬 것인지 느리지만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여 주는 카일 덕분에 침대에 걸터앉게 한 아랑은 그가 탈진이라도 일으킬까 봐 물부터 마시게 했다.
“정신이 좀 들어요?”
“……아랑.”
카일의 입에서 웅얼거리는 대답을 들은 아랑은 물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천천히 닦아주었다.
“재밌네. 이런 거 안 해도 괜찮으니 가서 자.”
힘없이 눈을 감은 채 간이침대에 걸터앉은 카일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얌전히 계세요. 이래야 열이 내려요.”
카일의 만류에도 아랑은 그의 얼굴에 이어 목과 어깨를 닦고, 드러난 팔로 수건을 옮겼다.
“설아랑.”
카일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랑의 이름을 불렀다. 이 정도 상처는 밤새 열이 오르겠지만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졌다. 보통의 사람들보다 상처가 잘 나지 않기도 하지만, 상처가 생겨도 더 빨리 나았다.
다만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는 과정에서 보통 사람들보다 더한 고열이 발생했다. 그냥 두면 되는 일인데……. 앉아 있는 자신이 힘들까 봐 눕힐 수도 없고 엎드리게 할 수도 없으니 그 작은 머리로 생각한 것이 이것인가?
침대에 걸터앉은 자신의 다리 사이로 들어와 저를 안고 잠이 든 아랑이었다. 왜 굳이 이런 수고를 하는 것인지. 자신은 그저 아랑은 고용한 고용인일 뿐이었다.
대충한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제 집인 것처럼 항상 청결하게 막사를 관리하고, 부족한 도구로도 풍족한 음식을 차려 내는 아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카일이 아랑에게 거는 기대치는 그저 사람이 살 수 있을 정도의 관리였는데, 늘 그의 기대치 그 이상을 해내는 것이었다.
괜찮다는 말에도 식은땀을 흘리는 자신을 위해 물수건과 마른 수건을 번갈아 몸을 닦아대더니, 결국은 잠을 못 이기고 서서 잠들었다. 몇 번 더 이름을 불렀지만 아랑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신을 안고 깊은 잠에 빠졌고, 카일은 그런 그를 살짝 끌어안았다.
멍청하긴. 엎드리지도 바로 눕지도 못하면 옆으로 눕게 하면 되잖아.
아랑을 끌어안고 모로 누운 카일은 자신의 팔을 베고 도롱도롱 숨소리를 내는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반질반질 윤이 날 것 같은 검은 머리카락과 늘 산속이며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도 볕에 그을린 흔적 없이 주근깨도 없는 뽀얀 피부. 반짝거리며 열심히 주위를 살피기 바쁜 큰 눈 아래에 자리 잡은 눈꺼풀을 보던 카일은 살짝 입김을 내보내 보았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사르륵 흔들리자 주먹 쥔 아랑의 손이 올라와 눈을 비볐고, 카일은 얼른 입김을 내보내던 걸 멈추었다. 이번 토벌대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꽤 재밌는 아이 하나를 주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