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희림이 고개를 젓자 핸들을 잡은 그의 고심은 더욱 깊어졌다. 자신이 아는 그녀라면 ‘쳐다본 적 없거든!’ 하고 잔뜩 숨을 부풀렸을 텐데, 희림은 보란 듯 그의 가까이로 턱을 괴었다.
“아니면 내가 뭐 잘못했어?”
“응?”
“어젯밤에 너한테 별로 만족을,”
“그런 거 아니거든!”
“…….”
이제 좀 한희림 같아졌네.
붉은 신호 앞에 차를 멈춘 그가 쿡, 익숙한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은 왜 이런 게 이렇게나 재미가 있는지, 스스로도 어이가 없지만 이런 건 차처럼 멈추기도 힘들다.
“뭐 아니라면 됐고.”
“흥.”
하지만 오늘의 희림은 어딘가 특별했다. 뾰로통하게 돌아서는 대신 어딘가 의미심장하게 자신을 훑었다.
“너도 내가 뭐 안 묻고 잘못 안 해도 쳐다보면서.”
“…….”
“매일매일 책상에 두고.”
장난기 가득한 그녀의 음성에 인하가 눈썹 앞머리를 찌푸렸다. 어쩐지 뭔가 있긴 있다 싶더라니 그거였나. 하지만 연유를 알고도 그의 눈가는 쉬이 풀리지 않았다.
“내 책상에 있던 거 봤어?”
“응.”
“그게 다야?”
“어?”
그럼 뭐가 또 있냐는 희림의 순진무구한 눈동자에 그가 다시금 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안도하는 듯한 인하의 기색에 그녀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뭐야. 내가 바라던 건 이런 게 아닌데.
굉장한 비밀을 들킨 것처럼 부끄러워한다거나 못내 겸연쩍은 웃음을 짓는다거나, 좀 더 귀여운 반응을 기대했던 그녀로서는 실망이 가득했다.
“그,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뭘?”
“내 사진 보고 있었으면서. 그런 거면 좀 더…….”
“내가 네 사진 보는데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데?”
“…….”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다. 차라리 놀리려는 거면 발끈하기라도 할 텐데, 인하는 지극히 당당하며 담담했다.
“남의 여자도 아니고, 내가 내 여자친구 사진 좀 보는 게 무슨 잘못이라고.”
“……어어.”
“더한 것도 봤는데.”
무심하게 인하가 덧붙인 말에 내내 그의 곁에서 싱글거렸던 희림은 뒤늦게 창가에 바짝 붙었다. 혼자 들떠 잠시 잊고 말았지만 강인하는 맹수였다. 그것도 어제 자신을 자근자근 뼈째로 씹어 삼켰던.
“……왜? 뭐가 잘못됐어?”
“아냐, 아무것도.”
뻔뻔한 놈 같으니라고.
그 와중에도 생존 본능을 따라 소심하게 중얼거린 희림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할머니의 병원이 가까워지는데도 눈가는 울상으로 축 처져버렸다.
내가 그거 하나 믿고 있었는데.
강인하를 꼼짝도 못 하게, 약점처럼 쥐고 흔들고 싶었던 계획은 박살이 났다. 그 약점으로 뭘 해보려던 건 아니지만 적어도 같이 밤을 보낸 어색함 정도는 지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설마, 어색해서 그런 거야?”
“…….”
저놈은 어디서 뭘 하며 살다 온 거야!
심지어 남의 마음까지 멋대로 읽고 마는 그 때문에 희림의 가슴이 눈에 띄게 오르내렸다. 인하는 충분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핸들에 기대어 그녀를 가늠해보았다.
“그런 거면 미리 말하지. 다 알려줬을 텐데.”
“뭐, 뭘?”
“내가 너랑 어색할 땐 무슨 생각을 하는지.”
“…….”
그런 게 있었다고?
일단 안 듣겠다 무조건 버티려던 희림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런 좋은 게 있었으면 진작 말을 해줬어야지, 주인의 의지를 벗어난 어깨가 줏대 없이 다시 그의 쪽으로 기울어졌다.
“한희림, 난 네가 삼 초만 말이 없어도…….”
“응.”
“키스하는 생각을 해.”
“…….”
“그럼 최소한 어색하지는 않을 테니까.”
귀에 닿을 듯 말 듯 숨겨둔 비책을 알려주는 그의 음성이 은밀했다. 물론 그 후로 온몸이 뻐근해지는 부작용이 생기긴 하지만 적어도 어색해지는 것을 푸는 데는 이만한 방법이 또 없다.
“궁금하면 시험해보든가.”
“…….”
미쳤네. 미쳤나 봐.
희림의 벙긋거리는 입술이 마구 흔들렸다. 어쩜 저런 인간이 다 있냐며 뒤늦게 그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그사이 차는 멈췄고, 그의 두 손은 자유로워졌다.
삼 초가 지난 것은 물론이고.
◇ ◆ ◇
“아이구, 우리 생명의 은인이 또 오셨네. 우리 고을 선비가 또 왔어!”
“네, 할머님.”
오늘도 인하는 서글서글하게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반쯤 정신이 나간 희림이 최대한 입술이 가려보려 고개를 돌린 것과 달리 그는 병실에 들어설 때부터 어깨가 쭉 벌어졌다.
“식사는 잘하셨어요?”
“말이라구. 이제는 지겨워서 오래 못 있겄어. 없던 병도 다시 나겄지 뭐여.”
“그럼 안 되죠.”
“그러게 말이여. 내가 얼릉 집으루 가서…….”
우리 생명의 은인에게 밥도 차려주고 술상도 차려주고 신붓감도 구해주겠다는, 은혜 갚은 까치가 되고야 말겠다는 할머니의 장래희망은 갈수록 거창해졌다. 그렇게 멋대로 손가락까지 걸어버린 할머니가 이른 잠에 들고서야 인하는 드디어 허리를 펼 수 있었다.
“후우우.”
“허리 아프지?”
“아니. 이건 어제 너랑…….”
“야아!”
결국 후다닥 내려온 희림이 그의 입을 틀어막고서야 시한폭탄은 진압되었다. 어쩜 그러냐며 인하에게 찌릿대는 눈짓을 보냈지만 그조차도 오래가지 못했다. 하나둘, 이제는 자신도 모르게 세기 시작한 숫자가…….
“이거나 마셔, 얼른.”
“…….”
그나마 삼 초가 지나기 전에 정신을 차린 희림이 재빨리 그에게 물잔을 내밀었다. 할머니가 깨지 않게 조심하는 그녀의 움직임에 인하도 남은 장난기를 거두었다.
이제 꼭 키스만이 그들의 어색함을 가져가는 것은 아니다. 가볍게 코를 고는 할머니를 보며 이불을 덮어주던 희림은 뭐가 우스운지 금세 생글거렸다.
“우리 할머니 되게 신기하지? 말하다가 그냥 자버리고.”
“난 네가 더 신기한데.”
“……내가?”
“그냥. 싫은 티 하나 없이 이러고 있다는 게.”
인하에게 세상 모든 즐거운 일이 희림이듯, 신기한 것도 그녀뿐이다. 여고생 희림의 양팔에는 늘 쌍둥이들이 매달려 있었다.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온갖 잡다한 일을 도맡았으며 지금은 할머니까지 도맡아 보살피는 중이다. 그게 바로 한희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 번씩은 궁금할 수밖에 없다.
“힘들지 않아?”
“강인하 네가 할 말은 아니지.”
희림이 가볍게 찡그리며 웃었다. 등굣길마다 제 속을 긁어대던 그가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이 우스우면서도 한 번쯤 제 마음을 되짚어보는 기분도 나쁘지는 않았다.
“음……. 지겹지. 힘들고. 솔직히 나도 할머니랑 여기서 둘이 뭐 하는 건가 싶긴 해.”
“그런데?”
“음, 이유가 있어야 하나. 그냥 우리 할머니니까 그런 건데.”
그녀가 아무래도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자 인하의 시선이 더욱 깊어졌다. 역시나 한희림다운 대답이지만 그로서는 더욱 이해할 수가 없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적인 희생이나 사랑 같은 것은, 그야말로 먼 세상 이야기라 상상조차 쉽지가 않았다.
굳이 해야 할 이유도 없고.
“어쨌든 인하 너도 언젠가는 그냥 알게 될걸.”
“그래?”
네 말대로 그리 쉬우면 좋겠다고, 인하는 무의미한 웃음으로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그녀의 말은 모르겠을지언정 제게는 늘 이 정도면 충분했다. 조금 놀라던 희림도 할머니 앞이라 그런지 억지로 손을 빼어내진 않았다. 그저 그를 바라만 보다 무슨 생각이 떠오른 것처럼 조용히 소리를 낮추었다.
“있잖아. 비밀인데 이제 우리 집 재산이 다 내 거야. 전부 내가 하기로 해서 그래.”
“아아.”
인하가 이제야 확실히 이해가 간다는 듯 보다 진실된 반응을 보였다. 새침한 웃음을 깨문 그녀가 침대 위로 턱을 받쳤다.
“너도 기억하지? 우리 아빠 동네에서 제일 유명한 효자였던 거.”
“……음.”
“절대로 안온마을 안 떠나고 평생 할머니 모시고 살기로 했는데, 할머니 혼자 두고는 읍내도 함부로 안 나가던 사람이었잖아. 엄마랑 쌍둥이들이랑 그만큼 조르고 이사 가쟤도 안 나가던 사람이 왜 전부 다 정리해서 서울로 갔는지 알아?”
“…….”
“나 때문에.”
희림의 속삭임이 어느 때보다 비밀스러워졌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이 말을 하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듯싶었다.
“고3 때, 내가 꼭 서울로 대학 가고 싶다고 엉엉 울었거든. 그때는 서울에 꼭 가야 할 것만 같아서. 아니면 죽을 거 같아서.”
“……한희림.”
“우리 아빠가 나 때문에 효자 그만뒀으니까 나라도 대신 해야지.”
“…….”
“원래 내리사랑이라니까. 내가 아무리 한다고 해도 우리 할머니랑 우리 아빠가 나한테 해주는 것만큼은 안 될걸.”
물론 재산은 다 내 거지만.